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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명령 (요21:15-23)
톨스토이는 세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째, 일생 중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둘째,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셋째,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그리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자기관리에 엄격했다고 합니다. 그는 깊은 명상을 통해 예지로 빛나는 시를 썼습니다. 그에게는 따르던 다섯 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그에게 “어떤 사람이 인생의 승리자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지.” 그러자 한 제자가 다시 “ 자기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타고르는 다섯 명의 제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주시한 후,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가 제자들에게 한 가지씩 질문했습니다. 첫째, 오늘 어떻게 지냈는가? 둘째, 오늘 어디에 갔었는가? 셋째, 오늘 어떤 사람을 만났는가? 넷째, 오늘 무엇을 하였는가? 다섯째, 오늘 무엇을 잊어버렸는가? 그런 후 타고르는 제자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매일 이 다섯 가지를 질문하라. 이것이 자기를 이기게 하고 인생을 살리게 하는 질문이다.”라고 하였답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후 베드로를 비롯한 7명의 제자가 갈릴리로 낙향하였습니다. 유월절을 중심하여 주님이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살아나시는 과정에 열두 명의 제자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복잡한 심정을 달랠 겸 아마도 베드로의 고향인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고기가 잡히지 않아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 없었는데 바닷가에 주님이 찾아오신 겁니다. 주님을 알아 본 제자들이 육지로 올라오자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워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신 후 아침식사까지 모두 마쳤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에게 주님이 질문을 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21:15)에 묻습니다. 원문에는 “Simon son of John, do you truly love me more than these”(요321:15)라고 하였습니다. “이것들 보다”란 의미입니다. 물론 구어에서는 these를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두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시몬이 대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요21:16) 주님은 “내 양을 치라”(요21:16)고 하십니다. 주님은 동일하게 세 번 째 질문을 던집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베드로는 세 번을 동일하게 질문하자 마음속으로 근심이 되어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때 주님은 “ 내 양을 먹이라”(요21:17)고 하였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수일 전 주님이 산헤드린 뜰에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을 때 멀찍이 서서 불을 쬐며 재판 받으시는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에 비하면 그래도 대단한 용기입니다. 재판 받는 현장에 다른 제자들은 얼씬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때 어떤 사람들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예수의 제자라고 지목하자 거의 반사적으로 자신은 예수님과 관계도 없으며 모르는 사람이라고 잡아떼었습니다. 계속되는 주변 사람들의 질문에 베드로는 주님을 저주하고 욕하면서까지 모른 다고 부인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닭이 울었고 베드로는 순간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13:38, 눅22:34)는 말씀이 생각나 밖에 나가 통곡하며 회개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오늘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을 만나고 나니 쑥스럽고 죄송하고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주께서 그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물으시니 당황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시종일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명령은 우리들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1) 주님을 사랑하라.(요21:15,16,17)
세 번 연거푸 물으신 이 질문 속에는 주님께서 “주님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우리 주님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대상입니다. 아니 믿음이란 곧 주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신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니 너는 마음을 다 하고 뜻을 다 하고 성품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신11:13-14)고 하였습니다.
신약에서도 주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6-40)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13:34-35)고 하였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여러 차례 강조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신앙은 관계라고 한 것입니다. 구원은 내가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라기보다 우리 주님과의 관계에서 얻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모두 다 마귀의 자녀들이었는데 예수를 믿고 난 후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의 아들, 딸로 입양을 하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신뢰, 신용, 신의, 의리, 모두 다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보다 더 확실한 신뢰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 된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해야 할 이유는 너무 많습니다. 그 가운데 요한의 말씀을 들어보세요.“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 하였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0-11)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부모님 이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남편이나 아내 이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내 아들 딸 보다 더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가까운 친구나 형제 보다 더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소유들(제물, 집, 자동차, 명예, 권세, 사회적 신분)들 보다 더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10:37-38)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폴란드의 소설가 쌩키비치의 소설인 (쿼바디스)의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을 당한 이후로 네로 황제는 더욱더 잔인한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을 학살합니다. 그때 기독교인이던 '기리아'가 수많은 시민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무시 무시한 들소들이 들어있는 원형극장 안으로 들여 보내집니다. 그러나 당시 노예였던 '우르서스'가 원형극장 안으로 뛰어 들어가, 들소의 머리와 뿔을 비틀어서 가까스로 '기리아'를 구출해 나옵니다. 이처럼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온 '기리아'와 '우르서스'는 지하 교회에 숨어 있던 베드로를 찾아가서 한시 바삐 죽음의 도시인 로마를 탈출할 것을 종용합니다. 성도들의 요구에 의해 베드로가 로마를 빠져 나와 캄파니아 들을 향해 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환한 한 줄기의 빛이 그를 향해서 다가옵니다. 그 빛이 그리스도임을 안 베드로는 땅에 엎드린 채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쿠오바디스 도미네” 그러자 빛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의 양을 버렸으니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지 않겠느냐?"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곧장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주님의 예언 그대로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주님을 위해 순교했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요21:18-19)입니다.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죽음으로서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를 보여드렸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여 드리겠습니까? 우리 모두 스스로 대답해 볼 수 있기 바랍니다.
(2) 양들을 사랑하라.(요21:15,16,17)
“내 어린 양을 먹이라.”“내 양을 치라.”“내 양을 먹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어린양은 연령적으로 어린아이들도 포함되지만 영적으로 약하고 신앙적으로 약하여 스스로 방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사실 기독교 초기 공동체의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연약한 어린아이들과 같았습니다. 교회 수장인 베드로는 초대교회 공동체를 주님을 대신하여 끌고 갈 책임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초대 교회를 잘 끌고 갔으며 양들을 잘 보살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기독교가 있게 한 대 사도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의 양이란 다름 아닌 교회공동체 입니다. 우리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여기서 교회라 함은 바로 수주중앙공동체를 칭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도 수주중앙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① 격려와 칭찬이 있어야 합니다.
칭찬은 최고의 선물이며 또한 비용이 들지 않으면서 최고의 효과를 내는 양약입니다. 참 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겐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우리교회는 만날 때 마다 서로를 칭찬 하는 일에 인색함이 없기 바랍니다.
빌리 그레이엄. 그는 20세기가 낳은 세계적 부흥사입니다. 그도 어려서 동네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골칫덩이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저 아이는 커서 뭐가 되겠는가?”하고 머리를 흔들었답니다. 그렇지만 그의 할머니만은 달랐습니다. 개구쟁이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는 말을 잘하고 사람 끄는 재주가 있어. 개성만 살리면 크게 될거야!” 그 말 한마디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세계적 부흥사가 된 것입니다. 칭찬은 칭찬 하는 사람을 좋아하게 하고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힘이 있습니다.
② 서로 겸손해야 합니다.
현대는 개성 시대이며 누구한테 지지 않으려고 하는 시대입니다. 사실 각자를 객체적으로 볼 때 현대인들은 모두 다 훌륭합니다. 배울 만큼 배우고 알만큼 알고 가질 만큼 가졌고 누구한테 꿀릴 것 없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모두 다 똑똑합니다. 말 한마디 말 잘못했다가는 큰일 나는 세상입니다.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따지고 들면 나이 들었다는 권위 하나로만 짓누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매사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학문을 위하여 모인 곳이 아닙니다. 이익을 위하여 모인 곳도 아닙니다. 친교의 수단은 있지만 그것만이 교회 공동체의 목적은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사람들의 공동체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을 이렇게 주장하였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망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멍에는 쉽고 내 집은 가벼움이라”(마11:29)성도를 사랑하는 표현은 바로 겸손에 있습니다.
③ 공동체 정신의 함양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이 있어야 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동족애 혹은 민족애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상은 민족공동체 사상입니다. 우리가 한 교회를 섬기면서 교회공동체정신이 깊어야 합니다. 우리는 한 배를 타고 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언제나 해야 합니다. 모래알은 낱낱이 흩어지지만 모래에 시멘트가 섞이면 벽돌이 되고 불록이 됩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뭉쳐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주 안에서 하나로 단단하게 뭉칠 수 있기 바랍니다. 기도로 뭉칩시다. 봉사로 뭉칩시다. 성도의 교제로 뭉칩시다. 성령 안에 하나로 뭉치는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엡4:3-5)
④ 영혼 구원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최고의 덕목은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 입니다. 어린 양을 먹이고 주님의 양을 돌보고 주님의 양을 먹이는 행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구원받을 하나님의 양들을 찾아가 그들을 주님의 목장인 교회로 데려와 이곳에서 푸른 풀과 시원한 물을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우리에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분이라고 비유하였습니다.(눅15:1-7) 주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요10:11)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10:15)거 하였습니다. 주님은 온갖 관심사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우리 안에 양들이 우리들이라면 주님의 우리 밖의 양들은 불신자들입니다. 그들을 전도하여 하나님 앞에 구원받게 하는 일은 주님의 양을 제일 사랑하는 일입니다. 6월 24일은 우리 모두 한 영혼을 구원하도록 합시다.
(3) 주님을 따르라.(요21:19)
“이 말씀을 하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따르고 백성이 왕을 따르고 제자가 스승을 따르고 양이 목자를 따르듯 우리는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십자가를 지라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 눅14:27, 마16:24, 마10:38)고 하였습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의 길은 십자가를 지는 길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사도들과 그 시대 성도들이 수 없이 많은 피를 흘리고 목숨을 빼앗겼습니다. 적어도 콘스탄틴이 주후 33년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기 까지는 피의 역사였습니다. 그 후 중세교회를 가쳐 1517년 종교 개혁시대에 와서 또 다시 주님의 참 제자들은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리며 목숨을 잃으며 주님을 따랐습니다. 어느 민족 어느 문화권이든 기독교가 처음 들어가 뿌리를 내릴 때는 수많은 희생자를 냈습니다. 우리 한국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선교의 역사는 피로 쓰는 역사입니다.
한 교회가 그 지역에 개척되어 뿌리를 내리기 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땀과 그리고 피가 섞여 세워져 갑니다. 우리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도 있느니라.”(요12:24)고 하였습니다. 오늘까지 마음과 뜻을 합하여 함께 주님을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며 주님의 뒤를 함께 따라가는 여러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우리는 주님의 교회에 동역 자들이요 함께 군사 된 사람들입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눅9:62)고 하였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기드온이 모집한 군사 32,000명 중에 31,700명은 돌려보내고 끝까지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300명을 데리고 미디안 군사 120,000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길은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피- 없이 못 가는 길 /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 복락 얻으려면 이길 만은 걸어야해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
십자가에 고개턱이 제아무리 어려워도 /주님 가신 길이오니 내가 어찌 못 가오랴 /주님 제자 베드로는 거꾸로도 갔사오니 /고생이라 못 가오며 죽음이라 못 가오랴. 아 멘. 주기철 목사님이 지어 부르며 일제 하에서 순교하시며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의 제자 베드로는 결국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의 사형장에서 단두대에 목이 잘리며 주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다른 말은 충성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충성을 다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를 졌기 때문이다. 그 은혜를 보답하는 것은 내가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충성하는 것입니다. 물론 충성이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됩니다. 그렇기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기 바랍니다.
결론입니다,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의 양(교회)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끝까지 따라 가야 합니다. 아멘,
출처/박인걸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