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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전령 (행 9:32-43)
어느새 추수 때가 되었습니다. 최근에 농촌 들녘을 한번 바라본 적이 있습니까?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농부들의 표정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비록 햇볕에 그을렸어도 환한 웃음을 띤 얼굴이 있는 반면 깊게 패인 주름 골에 근심이 가득 담긴 표정들도 있습니다. 저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들녘에 꼭 나가보곤 합니다. 그 이유는 농부들의 수고와 그 추수의 축복이 얼마만한 것인가를 무언으로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싶기 때문입니다.
웃음이 있는 자들의 들녘은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잘 익은 나락들이 깊게 고개를 숙이고 있고 바람이 불어 허수아비가 흔들릴 때마다 온 들녘이 황금 물결에 춤을 춥니다. 그 들을 바라보는 농부의 얼굴! 뉘라서 그 기쁨을 짐작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근심이 있는 농부들의 논은 그렇지 못합니다. 제가 지난주간에도 들녘을 나가보았습니다. 수해를 견디지 못한 많은 벼들이 다 누워버렸습니다. 다리에 마비가 온 듯 다 쓰러져버린 겁니다. 그리고 손 쓸 사이도 없이 까맣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퍼내도 퍼내도 쏟아지는 비로 인해 질퍽한 논에서 썩어 가는 곡식들, 모두가 농부들의 한숨이요 눈물입니다. 그러나 아무 관계가 없는 관중인 저에게도 그 썩어 들어가는 논은, 그 벼들은 슬픔이었습니다. 누렇게 익어 가는 벼와 까맣게 썩어 가는 벼!
우리 인생에도 추수의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들녘을 바라보는 두 가지의 표정들! 수많은 관중들이 우리 인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농부 대신 하나님이 바라보시는가 하면 주위의 성도들과 사람들이 우리 인생을 바라봅니다. 어떤 인생은 누렇게 익어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삶이 있는 반면, 어떤 인생은 검게 썩어버려 뭇 사람들에게 근심을 안겨주는 삶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이 가을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봄직한 질문인 것 같습니다. 나는 과연 어떤 인생인가!
1년 농사는 다시 지어도 되지만 우리 인생은 그럴 수 없습니다. 당신의 인생의 농사는 어떠하십니까? 여러분의 가족들과 여러분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오늘 이 시간에, 이 가을에, 1999년도에, 1900년대의 마지막 가을을 맞으며 여러분을 바라보시는 그 표정들이 어떠할까요?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왜 택하셨는지 그 목적을 망설이지 않고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어렵지 않아요. 복잡하지도 않아요. 너무나 단순하고 뚜렷합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부르셨는가?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전령으로 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단 한 사람도 그만의 목적, 그만의 축복을 위해서 부르신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나의 아집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그에게 복 주시기 위해 불렀다고 성경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며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창세기 12장 1절부터 3절에 가장 중요한 구절은 하나님의 이 선포이십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너를 모든 민족의 축복의 근원으로 삼겠노라. 너로 말미암아 세상 만민이 축복을 받게 할거야. 내가 너를 축복의 통로자로 만들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너를 불렀노라!"
하나님은 동일한 명령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거룩한 나라로 삼겠다. 내가 너희를 거룩한 제사장의 나라로 삼겠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기들만 축복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선민이요,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은 이방인이라고 하여 얼마나 그들을 무시했는지 모릅니다. 이방인을 향한 축복의 통로와 축복의 전달자가 되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만의 축복을 좋아하며 하나님의 관계, 위만 쳐다보고 살았을 때 그들은 진노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거지요. 히틀러에게 600만을 희생당하고 나라도 없이 2000년 간 이 세상 가운데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또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과감히 이러한 명칭을 붙이십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여러분! 당신이 제사장이십니다. 우리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백성을 위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주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해 주는 사람입니다. 축복의 통로요 축복의 전령자들입니다. 누가요? 우리가요! 당신이요!
우리가 이 중요한 사명,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 목적을 어떻게 잘 전달할 수 있을까요? 감당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축복을 어떻게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아니면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거기에 대해서 몇 가지 중요한 말씀들을 우리에게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정말 축복의 전달자, 축복의 전령이 되면 어떤 특징들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가? 오늘 베드로의 삶을 통해서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축복의 전령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의 삶의 특징은 영혼을 찾아 나서는 모습이 보입니다.
1. 영혼을 찾아 나서는 모습이 보인다
영혼을 찾아 나섭니다. 요사이를 한마디로 얘기하면 인구는 자꾸 늘어나는데,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시대 같습니다. 사람을 아주 싫어해요. 옛날에 논다고 하면 연상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개하고 놉니까? 옛날 어른들은 지금 사람들이 애견 기르는 것 보면 이해가 안 가죠. 그들은 사람하고 놀았습니다. 저도 어릴 때 노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학교 갔다오면 책보를 빙빙 돌려서 골인을 시키고는 쏜살같이 나가서 언제까지 놉니까? 밥 먹을 때는 옵니까? 안 옵니다. 동네 엄마들이 저녁때가 되면 온 동네로 다 부릅니다. "누구야~ 누구야~" 온 동네를 돌며 메아리쳐 부르면 어두컴컴해서 그제야 들어와 밥을 먹지요. 먹고는 코피가 터지죠. 하도 놀아서... 자다가 막 놀라 다리에 쥐가 나서 일어나 보기도 하고요. 요사이는 이렇게 놀지 않죠. 과거에 우리는 논다고 하면 사람을 연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사람하고 안 놀려고 합니다. 혼자 놀아요. 혼자 충분히 놀 수 있는 세상이에요. 비디오, 영화, 컴퓨터 앞에서 게임을 하며 놉니다. 컴퓨터 게임을 열심히 하는 아이들에게 가보세요. 같이 놀자고 하면 이 아이들은 오히려 싫어해요. 게임방에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제가 우리 아이들을 PC 게임방에 보내봤어요. 1시간 후에 찾으러 갔더니 그 어두컴컴한 방에 아이들이 꽉 찼어요. 그런데 그 많은 아이들이 서로 시선 한번 주지 않습니다. 오직 컴퓨터에만 눈길을 줍니다. 앞으로 세상은 점점 더 이렇게 될 겁니다. 사람을 싫어하는 시대입니다.
사람을 만나봐야 상처만 받습니다. 사람하고 사귀어봐야 부담만 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쏟을 사랑을 동물에게 쏟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집에서 개를 키우는 거죠. 제가 애견 키우는 것을 아주 반대하는 사람은 아닌데, 사람들이 지나쳐요. 그러나 너무 지나치면 안 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사람에게 향한 사랑을 동물에게 주는 거예요. 왜? 동물은 한번도 배신하지 않잖아요. 언제든지 주인이 오면 꼬리를 치거든요. 그런데 여자들은 꼬리를 치나요? 기분 좋으면 치고 조금 기분이 안 좋으면 쳐다보지도 않고 "흥!"하고 코방귀나 뀝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하루는 한 성도에게 급한 전화가 왔어요. 난리가 났대요. 왜 그런가 하고 가보니까 8년 된 개가 병이 들었어요. 병원에 갔습니다. 가축의사가 하는 얘기가 신장이 상하여 이식수술을 해야 하는데, 지금 당장 3500불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애가 이식수술 하자는 거예요. 엄마는 돈이 없죠. "목사님, 어떡하면 좋습니까?" 제가 불러서 약 30분간 달랬어요. 하나님이 동물을 왜 창조하셨고, 우리가 동물을 어디까지 사랑해야 되는지를 설명했어요. 마지막에는 사람도 신장이 없어 죽어 가는 사람이 많은데, 병원에 가보면 돈 3500불 없어 죽어 가는 사람이 많은데... 이 말을 듣고 애가 포기했어요.
그런데 포기하고 문제가 끝나는 게 아닙니다. "이 개를 죽여야 하는데 죽이고 나서 어떻게 할 겁니까?" "뭘 어떡합니까?" 했더니 장례를 해야 된답니다. 가장 비싼 장례가 7000불, 가장 싼 게 600불, 미국에 가보면 동네에 무덤이 다 있습니다. 인조 꽃이 꽂힌 너무 멋있는 무덤이 있어요. 저는 그때서야 그것이 개 무덤인줄 알았어요. 미국 가서 인조 꽃이 꽂힌 무덤이 있으면 개 무덤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거기 모시는데 7000불입니다. 죽여서 화장하는데는 600불입니다. 그래서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내가 목사인데 집례하죠."라고 가축의사에게 말하고는 그 집 뒤뜰에다가 한 푼 안들이고 묻어버렸습니다. 참 재미있는 나라예요. 그러나 그 물결이 우리에게도 오고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나쁜 게 아닙니다. 저는 그 이면에 숨겨진 사람들의 고독을 봅니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되어 가는가? 우리는 사람을 싫어하는 시대에 살고 있어요. 이러한 영향이 교회에도 들어왔습니다. 성도들이 사람을 찾아 나서지 않아요. 영혼을 찾아 나서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옵니다. 그런데 어떤 신앙생활을 하는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만 갖기를 원하는 거예요.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기는 원하나 사람을 만나기는 싫어합니다. 그래서 어떤 신자들이 증가하고 있는가? 시계추와 같은 신자들이 늘어납니다. 교회에 왔다가 갔다가 혼자 신앙생활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부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당신을 왜 부르셨는지 아십니까? 혼자 신앙생활 하라고요? 혼자 구원받고 혼자 축복 받으라고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왜 이 땅에 교회를 만드셨는가? 단 하나의 목적인데,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을 부여해 주신 겁니다. 나 혼자의 신앙생활이 아니고 내 남편과 내 아내와 내 자녀와 내 부모의 영적 생활에 대해서 그 책임을 우리에게 묻기 원하시는 겁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깨달은 사람, 하나님의 축복의 전령자의 사명을 감당하고 누른 곡식과 같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삶의 특징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한 가지 놀라운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을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읽은 이 말씀 속에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에 있다가 놀라운 소식을 들었어요. 빌립이 사마리아에 갔더니 거기에 믿는 무리가 많이 생겼다는 거예요. 그들에게 상관없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들을 심방해 보아야 했어요. 그래서 사마리아로 심방을 내려갔습니다. 예루살렘에 많은 성도와 맡은 사역이 있었기 때문에 바삐 돌아와야 되는데 돌아오다가 그는 어떤 소문을 들었어요. 사마리아와 유대 경계에 룻다라는 작은 도시가 있는데, 그곳에도 믿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거예요. 이대로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차가 있는 시대가 아니었지만 그들은 발걸음을 룻다로 돌립니다. 그리고 룻다에 있는 형제들을 찾아갔다고 얘기합니다. 32절을 보세요.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여기에 중요한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사방으로'와 '성도들에게도'입니다. 그냥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 간 것이 아닙니다. 갈 필요가 없었는데,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어요. 찾아간 겁니다.
성령에 감동함을 받은 사람들은 한 가지 분명한 특징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사람을 찾아간다고 하는 겁니다. 사도행전은 심방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책이에요. 사도들이 사람들을 찾아 나선 책이 사도행전입니다. 1차 전도여행이 그렇고, 2차 전도여행이 그렇고, 3차 전도여행이 그렇습니다. 신약성경의 대부분이 편지라는 것을 잘 아시지요. 왜 편지를 썼습니까? 사람을 찾아다니기 위해. 그들을 만나 격려하고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의 신앙 성숙을 돕기 위해 찾아 나선 흔적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늘 사람을 만나셨어요. 혼자 조용히 밤에 일어나시고 새벽 미명에 나가 기도하셨지만, 낮에 사람들이 깨어 있을 때는 단 한번도 쉬지 않으시고 사람들을 찾아다니셨습니다. 만나시고 상담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되게 사는가를 알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멀리 갈 것 없이 지난 한 해 동안 여러분이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살펴보십시오. 참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한 가정을 염려해서 그 집을 방문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정말 그 사람이 걱정되어서 기도하는 가운데 데이트를 신청해 본 적이 있나요? "성도님, 다음주 목요일에 만납시다!"라며 식사를 한번 대접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지금 파악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아무리 2,30년 신앙생활을 했고, 나와 하나님의 관계는 분명하며, 여러분 신앙에 자부심을 가진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사람을 찾아 나서지 않았다고 하면 여러분은 버림받은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이 영안교회 수많은 성도들 가운데 과연 진정으로 누구에게 관심을 가져 보셨습니까?
축복의 전령자는 사람을 찾아 나섭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어 서로 서로를 찾아 나서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찾아 나섭시다. 만납시다. 그 집을 방문합시다. 그리고 그들을 격려합시다.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김해에도! 해운대 신도시에도! 저 다대포에도! 창원에까지라도!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2. 사람들의 문제를 도와주고 해결한다
참 성령에 붙들린 사람들이 있으면 교회에 문제 가진 사람들이 많이 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문제를 가지고 와서 해결함을 받습니다. 오늘 여기에는 두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룻다에 갔어요. 안 가도 될 곳에 믿는 사람들이 생겼다고 해서 궁금하여 갔더니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애니아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전신불수가 되어서 8년 동안 상에 누워있었어요. 이 상은 밥상이 아니고 침상입니다. 침상에 8년 동안 누워있었어요. 34절을 보세요.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할렐루야! 8년을 누워있었는데 베드로가 가서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그랬더니 애니아가 곧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욥바(요나가 도망가던 항구) 성도들이 이 소문을 들었어요. "야, 8년 된 중풍병자를 베드로 사도가 일으켜 주었대!" 그러니까 사람들을 급파했어요. 갔더니 거기에 다비다라고 하는 한 여제자가 있었어요. 이 사람은 평소에 얼마나 선행을 많이 행했던지, 특별히 가난한 과부들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녀가 굉장한 부자라고 생각하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부한 가운데 도와준 것 같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그 암시를 받을 수 있는 곳이 39절입니다.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도르가는 다비다의 별명이죠. 함께 있을 때에 뭐한 속옷이요? 지은 속옷입니다. 사 온 속옷이요? 아닙니다. 돈 있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옷을 지어주겠습니까? 사서 주죠. 오늘 이 도르가, 다비다라고 하는 여제자는 자기의 가난한 가운데서도 어려운 과부들을 위해 밤새도록 바느질을 해서 그들을 도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사람이 갑자기 죽었어요. 제자들이 베드로를 청했습니다. 베드로는 거기에도 또 내려갑니다. 모든 과부들이 다락에서 너무나 슬퍼하며 울고 있는데, 베드로가 그들을 다 내어보냅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한 후에 한마디로 얘기합니다. 40절에 "다비다야, 일어나라!" 그랬더니 그가 살아났어요.
에이, 뭐 잠시 심장이 멎었다가 기절했나보다 하겠지만 아닙니다. 오늘 본문 37절을 보니 다비다가 죽고 나서 그 시체를 씻어다가 다락에 뉘어놓았어요. 장례 지내려고 씻어놓은 뻐덕뻐덕한 시체를 베드로가 "일어나라!" 했더니 그대로 일어난 것입니다.
"나도 남을 도우려니 안 되겠다 뭐 도울 능력이 있어야지. 오늘부터는 기도원에 가야 되겠다." 사상에도 경상도 할렐루야기도원이 생겼더군요. 하루는 우리 교회에 나온 지 꽤 되신 분 가운데 연세가 많은 한 분이 거기를 가야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교회를 옮겨야 되겠다고요. "거기는 기도원이지 교회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했더니 그래도 가야 되겠답니다. 왜 가느냐고 했더니 "제가 거기 가야 병이 나을 것 같습니다."라고 얘기하셨습니다. 그분이 간다는데 어떡합니까? 제가 늘 강조하지만 우리 교회는 앞문도 열려있지만 뒷문도 열어놓은 교회가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한마디했습니다. "가서 더 심해지시거든 영안교회로 오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왜 병이 낫지 않는가? 믿음이 부족해서이다. 기도원 가서 안수했는데 병이 안 나아요. 이 때 원장이 뭐라고 합니까? 믿음이 부족하구먼. 더 바쳐야지. 더 기도해야지. 안수 받았는데 병이 안 나아요. 왜 안 낫습니까? 아직도 능력이, 밧데리가 덜 찬 거야. 그들은 40일 금식기도하고 성령을 받아야 된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성경해석 때문에 자기의 신앙을 괴롭히는지 모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 시대에 특별한 일을 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 시대에 기적을 일으키셨고,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기적을 일으키셨고, 사도 시대에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 목적이 있었어요. 모든 시대, 어떤 사람들에게 항상 병 고치는 은사를 강하게 내려주신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사도 시대에 병 고치는 것을 살펴보세요. 오늘날의 병 고침과 얼마나 틀립니까? 오늘날은 내가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부흥회에 가서 막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안수를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한번에 받아서 안 나아요. 안수를 약간 받으니까 조금 소화가 돼요. 다음에 또 받으니까 더 소화가 돼요. 그 다음 뒤통수를 서너 차례 맞고 나니까 조금 더 나아요. 그 다음에는 손가락으로 찌르고 눈을 누르고 반쯤 죽여놔요. 낫네~. 그러나 돌아가면 또 도져요.
사도 베드로가 이렇게 했습니까? 아닙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했더니 즉시 고쳐졌어요. 8년 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라!" 했더니 즉시 일어났어요.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가? 이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사도들이 전파하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입증할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증빙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사도들에게 놀라운 능력을 주셨음을 성경은 얘기합니다. 오늘날은 이미 성경이 다 완성되었어요. 그럼 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가? 아니요, 일어납니다. 오늘날도 죽은 자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오늘날 어떤 한 사람에게 특정 사도 시대와 같은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집하니까 무리가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쇼로 보이려니 거짓말을 하게 되고 천사가 보인다고 하며 안수를 하고 자빠지고 별별 일을 다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한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도 베드로에게 특별한 권능을 주셔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어떻게 축복의 전령자가 될 수 있는가? 여기에 오늘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은 우리에게 그들의 문제를 돕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내게 능력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기도로 도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중보기도의 중요성입니다. 물질이 없는 자에게 내가 비록 가진 것이 적지만 오늘 이 다비다와 같이 나의 가진 일부를 그들을 위해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 교회는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만 세웠습니다. 예배당만 세웠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고아들이 길거리에 방황합니다. 오늘 한국 교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아원을 세워야 합니다. 양로원을 세워야 합니다. 사회복지사업을 해야 합니다. 그들의 필요를 누가 채워줄 것인가? 우리가 해야 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또 입으로만 하고 행동으로 하지 않는 자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이 없는 자에게 가서 "아이구, 배고픈데 좀 드시죠!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예수님은 인내심도 강하지요. 저 같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놈아!" 했을 것 같은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추워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옷을 입으시죠!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너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갖다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에 이러한 운동이 계속 확산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지금도 수많은 성도들이 서로간에 돕고 있는 것을 잘 압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들은 넉넉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사업이 잘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또 적은 돈으로가 아니에요. 추석에도 몇 몇 가정들을 위해 뭉치 돈으로 도와주었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 있어야 합니다. 필요를 도와야 합니다. 물질적인 필요를 도와야 할 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필요도 도와야 합니다. 이 세상에 문제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제가 목회를 하면 할수록 느껴지는 것이 "저 가정은 괜찮겠지."하고 가까이 가보면 고민거리가 있어요. 고통이 있고 문제가 다 있더라고요.
8년 된 중풍병을 앓는 사람처럼 부부간의 관계로 고민하는 사람, 형제간에 갈등을 가진 사람, 자식 문제로 속썩이는 사람, 영이 죽어있는 사람 ... 우리가 도와야 할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들에게 나름의 필요가 있단 말입니다. 누가 이것을 채워줄 것인가?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명령하십니다. "네가 하라!" "그래, 나의 축복을 전달하는 전령으로 삼기 위해 내가 너를 불렀지 않니?" "아, 목사님 저는 아직 믿음이 없는데요. 가진 것도 없는데요. 사업 조금만 더 하고 헌금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구제하고 헌금하는 거 못 봤어요. 지금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하시자 말자,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 말자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일어서야 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 도움을 받기 전에 여러분이 도와야 할 자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지난 한 해 단 한 사람에게라도 당신이 어떤 사람의 필요를 채워보신 적이 있나요? 제일 불행한 부부는 이런 부부간입니다. 아내가 늘 찾아와서 얘기합니다. 남편에 대해서 너무나 요구가 많아요. 또 남편을 만나봅니다. 아내에 대한 요구가 더 많아요. 그래서 묻습니다. "당신이 상대방에게 해준 것은 무엇입니까?" "많지요." "혹시 한번 써 볼 수 있겠습니까?" 제가 몇 몇 남편에게 묻고 종이와 팬을 줍니다. 많다고 해서 가득 쓸 줄 알았는데 그들은 점을 찍다가 한숨을 내쉬며 "목사님, 없네요!"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부름 받은 줄로 믿습니다.
축복의 전령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은 특징이 있는데 사람과 영혼을 찾아 나섭니다. 두 번째로 그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도와주고 해결합니다. 마지막 중요한 특징이 세 번째 나타나는데, 그것은 그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합니다.
3.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한다
35절과 42절을 보세요.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그들이 심방하고 도와준 결과가 무엇인가? 주께로 돌아왔다는 겁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미국 사람들이 두 가지 방법으로 한국에 선교를 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우리 한국 사람들을 많이 도왔는지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미국 사람들이 보는 한국 사람들은 지금 여러분들이 보는 저 아프리카 미개 토인들과 다를 바가 아무 것도 없었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재래식 화장실, 조그만 집, 제가 지난주간에도 시골의 한 초가집을 봤어요. 50년 된 집이라는데, 방과 부엌이 얼마나 작은지 현대인의 장롱은 그 반도 못 들어갑니다. 거기에 다섯 식구가 잤대요. 이불 한 채를 덮고요. 우리가 그렇게 살았어요.
하물며 100년 전에는 어떠했습니까? 백의민족이라고요! 우리끼리 솔직히 얘기합시다. 물감이 없었잖아요. 물들일 게 있어야 옷을 화려하게 해 입지요? 그래서 하얀 거를 입었어요. 그런데 미국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얼마나 많은 돈을 주었습니까? 수많은 대학을 세웠어요. 연세대학, 이화여대, 부산 이사벨 여고, 그리고 수많은 병원을 지었습니다. 세브란스 병원, 침례병원, 한국에 있는 굵직굵직한 대학과 병원 가운데 미국 사람들이 지어주지 않은 것이 몇 개나 됩니까? 중요한 것은 뭡니까? 당시에는 좋았어요. 그러나 오늘날 과연 그 기관들을 통해서 주님의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까? 연세대학교에 가서 그 학교에 등록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이 있을까요? 아니요. 침례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점점 적어져 가는 추세입니다. 설립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모든 것들이 돌아갈 뿐입니다. 처음에 그들은 그렇게 설립하지 않았어요. 왜 도와주었는가? 자신들의 도움의 손길을 통해서 믿지 않던 영혼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날 전도가 되지 않는 이유는 돈만 입혀주고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기관들이 그렇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두 극단에 치우쳐 있는데, 복음적인 교회는 사회사업을 아예 하지 않습니다. 고아원도 하지 않고 양로원도 돕지 않아요. 또 한 부류의 교파는 그저 가서 돕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거지들을 돕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전하지 않아요. 둘 다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 둘 다를 강조합니다.
베드로가 먼저 가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었어요. 고통 당하는 8년 된 환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던져줍니다. 욥바에 사는 가정교회에 가장 슬펐던 사건의 주인공 다비다를 일으켜 줍니다. 그 결과 주님께로 많은 영혼들이 돌아왔다고 증거 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10년, 20년을 믿었음에도 당신 때문에 한 영혼도 주님 앞에 돌아온 자가 없다면, 그렇게 많은 좋은 일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하나님께로 한 영혼도 인도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축복의 전달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불교에서도 할 수 있고 사회에서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벌써 들녘의 곡식은 점점 익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농부인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바라보고 계신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혹시 검게 썩어버린 곡식을 바라보는 농부의 얼굴은 아닐까요? 황금물결 춤추는 누런 곡식을 바라보는 기쁜 미소를 띄우실까요?
오늘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며 한 가지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베드로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원래 이런 축복의 전달자가 아니었어요. 그 당시에 가장 천대받던 어부 출신이었기에 학교도 별로 다니지 못했어요. 그래서 베드로는 이 편지를 쓸 때에 대필자를 구해서 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장은 사도 바울의 문장보다 떨어집니다. 또 그는 성격이 참으로 모가 났습니다. 얼마나 급하고 얼마나 덤벙댔던지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동안 실수란 실수는 혼자 다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급기야 수제자라는 신분을 가지고 그렇게 사랑하던 주님,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사도행전 9장에서 베드로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변화입니다. 과거에 여러분의 성격이, 집안이 좋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예수 믿고 나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조상 가운데 수많은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도 여러분을 통해서 이제 더 이상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저주가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이 전달되게 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이 가을에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실 때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이 여러분을 바라볼 때도 흐뭇한 기쁨의 표정을 지음으로 여러분의 가정, 나아가 만방에 하나님을 전달하는 축복의 전령이 됩시다.
출처/박정근목사 설교 중에서
어느새 추수 때가 되었습니다. 최근에 농촌 들녘을 한번 바라본 적이 있습니까?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농부들의 표정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비록 햇볕에 그을렸어도 환한 웃음을 띤 얼굴이 있는 반면 깊게 패인 주름 골에 근심이 가득 담긴 표정들도 있습니다. 저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들녘에 꼭 나가보곤 합니다. 그 이유는 농부들의 수고와 그 추수의 축복이 얼마만한 것인가를 무언으로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싶기 때문입니다.
웃음이 있는 자들의 들녘은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잘 익은 나락들이 깊게 고개를 숙이고 있고 바람이 불어 허수아비가 흔들릴 때마다 온 들녘이 황금 물결에 춤을 춥니다. 그 들을 바라보는 농부의 얼굴! 뉘라서 그 기쁨을 짐작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근심이 있는 농부들의 논은 그렇지 못합니다. 제가 지난주간에도 들녘을 나가보았습니다. 수해를 견디지 못한 많은 벼들이 다 누워버렸습니다. 다리에 마비가 온 듯 다 쓰러져버린 겁니다. 그리고 손 쓸 사이도 없이 까맣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퍼내도 퍼내도 쏟아지는 비로 인해 질퍽한 논에서 썩어 가는 곡식들, 모두가 농부들의 한숨이요 눈물입니다. 그러나 아무 관계가 없는 관중인 저에게도 그 썩어 들어가는 논은, 그 벼들은 슬픔이었습니다. 누렇게 익어 가는 벼와 까맣게 썩어 가는 벼!
우리 인생에도 추수의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들녘을 바라보는 두 가지의 표정들! 수많은 관중들이 우리 인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농부 대신 하나님이 바라보시는가 하면 주위의 성도들과 사람들이 우리 인생을 바라봅니다. 어떤 인생은 누렇게 익어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삶이 있는 반면, 어떤 인생은 검게 썩어버려 뭇 사람들에게 근심을 안겨주는 삶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이 가을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봄직한 질문인 것 같습니다. 나는 과연 어떤 인생인가!
1년 농사는 다시 지어도 되지만 우리 인생은 그럴 수 없습니다. 당신의 인생의 농사는 어떠하십니까? 여러분의 가족들과 여러분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오늘 이 시간에, 이 가을에, 1999년도에, 1900년대의 마지막 가을을 맞으며 여러분을 바라보시는 그 표정들이 어떠할까요?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왜 택하셨는지 그 목적을 망설이지 않고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어렵지 않아요. 복잡하지도 않아요. 너무나 단순하고 뚜렷합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부르셨는가?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전령으로 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단 한 사람도 그만의 목적, 그만의 축복을 위해서 부르신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나의 아집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그에게 복 주시기 위해 불렀다고 성경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며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창세기 12장 1절부터 3절에 가장 중요한 구절은 하나님의 이 선포이십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너를 모든 민족의 축복의 근원으로 삼겠노라. 너로 말미암아 세상 만민이 축복을 받게 할거야. 내가 너를 축복의 통로자로 만들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너를 불렀노라!"
하나님은 동일한 명령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거룩한 나라로 삼겠다. 내가 너희를 거룩한 제사장의 나라로 삼겠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기들만 축복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선민이요,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은 이방인이라고 하여 얼마나 그들을 무시했는지 모릅니다. 이방인을 향한 축복의 통로와 축복의 전달자가 되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만의 축복을 좋아하며 하나님의 관계, 위만 쳐다보고 살았을 때 그들은 진노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거지요. 히틀러에게 600만을 희생당하고 나라도 없이 2000년 간 이 세상 가운데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또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과감히 이러한 명칭을 붙이십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여러분! 당신이 제사장이십니다. 우리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백성을 위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주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해 주는 사람입니다. 축복의 통로요 축복의 전령자들입니다. 누가요? 우리가요! 당신이요!
우리가 이 중요한 사명,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 목적을 어떻게 잘 전달할 수 있을까요? 감당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축복을 어떻게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아니면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거기에 대해서 몇 가지 중요한 말씀들을 우리에게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정말 축복의 전달자, 축복의 전령이 되면 어떤 특징들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가? 오늘 베드로의 삶을 통해서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축복의 전령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의 삶의 특징은 영혼을 찾아 나서는 모습이 보입니다.
1. 영혼을 찾아 나서는 모습이 보인다
영혼을 찾아 나섭니다. 요사이를 한마디로 얘기하면 인구는 자꾸 늘어나는데,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시대 같습니다. 사람을 아주 싫어해요. 옛날에 논다고 하면 연상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개하고 놉니까? 옛날 어른들은 지금 사람들이 애견 기르는 것 보면 이해가 안 가죠. 그들은 사람하고 놀았습니다. 저도 어릴 때 노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학교 갔다오면 책보를 빙빙 돌려서 골인을 시키고는 쏜살같이 나가서 언제까지 놉니까? 밥 먹을 때는 옵니까? 안 옵니다. 동네 엄마들이 저녁때가 되면 온 동네로 다 부릅니다. "누구야~ 누구야~" 온 동네를 돌며 메아리쳐 부르면 어두컴컴해서 그제야 들어와 밥을 먹지요. 먹고는 코피가 터지죠. 하도 놀아서... 자다가 막 놀라 다리에 쥐가 나서 일어나 보기도 하고요. 요사이는 이렇게 놀지 않죠. 과거에 우리는 논다고 하면 사람을 연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사람하고 안 놀려고 합니다. 혼자 놀아요. 혼자 충분히 놀 수 있는 세상이에요. 비디오, 영화, 컴퓨터 앞에서 게임을 하며 놉니다. 컴퓨터 게임을 열심히 하는 아이들에게 가보세요. 같이 놀자고 하면 이 아이들은 오히려 싫어해요. 게임방에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제가 우리 아이들을 PC 게임방에 보내봤어요. 1시간 후에 찾으러 갔더니 그 어두컴컴한 방에 아이들이 꽉 찼어요. 그런데 그 많은 아이들이 서로 시선 한번 주지 않습니다. 오직 컴퓨터에만 눈길을 줍니다. 앞으로 세상은 점점 더 이렇게 될 겁니다. 사람을 싫어하는 시대입니다.
사람을 만나봐야 상처만 받습니다. 사람하고 사귀어봐야 부담만 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쏟을 사랑을 동물에게 쏟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집에서 개를 키우는 거죠. 제가 애견 키우는 것을 아주 반대하는 사람은 아닌데, 사람들이 지나쳐요. 그러나 너무 지나치면 안 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사람에게 향한 사랑을 동물에게 주는 거예요. 왜? 동물은 한번도 배신하지 않잖아요. 언제든지 주인이 오면 꼬리를 치거든요. 그런데 여자들은 꼬리를 치나요? 기분 좋으면 치고 조금 기분이 안 좋으면 쳐다보지도 않고 "흥!"하고 코방귀나 뀝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하루는 한 성도에게 급한 전화가 왔어요. 난리가 났대요. 왜 그런가 하고 가보니까 8년 된 개가 병이 들었어요. 병원에 갔습니다. 가축의사가 하는 얘기가 신장이 상하여 이식수술을 해야 하는데, 지금 당장 3500불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애가 이식수술 하자는 거예요. 엄마는 돈이 없죠. "목사님, 어떡하면 좋습니까?" 제가 불러서 약 30분간 달랬어요. 하나님이 동물을 왜 창조하셨고, 우리가 동물을 어디까지 사랑해야 되는지를 설명했어요. 마지막에는 사람도 신장이 없어 죽어 가는 사람이 많은데, 병원에 가보면 돈 3500불 없어 죽어 가는 사람이 많은데... 이 말을 듣고 애가 포기했어요.
그런데 포기하고 문제가 끝나는 게 아닙니다. "이 개를 죽여야 하는데 죽이고 나서 어떻게 할 겁니까?" "뭘 어떡합니까?" 했더니 장례를 해야 된답니다. 가장 비싼 장례가 7000불, 가장 싼 게 600불, 미국에 가보면 동네에 무덤이 다 있습니다. 인조 꽃이 꽂힌 너무 멋있는 무덤이 있어요. 저는 그때서야 그것이 개 무덤인줄 알았어요. 미국 가서 인조 꽃이 꽂힌 무덤이 있으면 개 무덤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거기 모시는데 7000불입니다. 죽여서 화장하는데는 600불입니다. 그래서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내가 목사인데 집례하죠."라고 가축의사에게 말하고는 그 집 뒤뜰에다가 한 푼 안들이고 묻어버렸습니다. 참 재미있는 나라예요. 그러나 그 물결이 우리에게도 오고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나쁜 게 아닙니다. 저는 그 이면에 숨겨진 사람들의 고독을 봅니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되어 가는가? 우리는 사람을 싫어하는 시대에 살고 있어요. 이러한 영향이 교회에도 들어왔습니다. 성도들이 사람을 찾아 나서지 않아요. 영혼을 찾아 나서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옵니다. 그런데 어떤 신앙생활을 하는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만 갖기를 원하는 거예요.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기는 원하나 사람을 만나기는 싫어합니다. 그래서 어떤 신자들이 증가하고 있는가? 시계추와 같은 신자들이 늘어납니다. 교회에 왔다가 갔다가 혼자 신앙생활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부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당신을 왜 부르셨는지 아십니까? 혼자 신앙생활 하라고요? 혼자 구원받고 혼자 축복 받으라고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왜 이 땅에 교회를 만드셨는가? 단 하나의 목적인데,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을 부여해 주신 겁니다. 나 혼자의 신앙생활이 아니고 내 남편과 내 아내와 내 자녀와 내 부모의 영적 생활에 대해서 그 책임을 우리에게 묻기 원하시는 겁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깨달은 사람, 하나님의 축복의 전령자의 사명을 감당하고 누른 곡식과 같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삶의 특징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한 가지 놀라운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을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읽은 이 말씀 속에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에 있다가 놀라운 소식을 들었어요. 빌립이 사마리아에 갔더니 거기에 믿는 무리가 많이 생겼다는 거예요. 그들에게 상관없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들을 심방해 보아야 했어요. 그래서 사마리아로 심방을 내려갔습니다. 예루살렘에 많은 성도와 맡은 사역이 있었기 때문에 바삐 돌아와야 되는데 돌아오다가 그는 어떤 소문을 들었어요. 사마리아와 유대 경계에 룻다라는 작은 도시가 있는데, 그곳에도 믿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거예요. 이대로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차가 있는 시대가 아니었지만 그들은 발걸음을 룻다로 돌립니다. 그리고 룻다에 있는 형제들을 찾아갔다고 얘기합니다. 32절을 보세요.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여기에 중요한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사방으로'와 '성도들에게도'입니다. 그냥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 간 것이 아닙니다. 갈 필요가 없었는데,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어요. 찾아간 겁니다.
성령에 감동함을 받은 사람들은 한 가지 분명한 특징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사람을 찾아간다고 하는 겁니다. 사도행전은 심방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책이에요. 사도들이 사람들을 찾아 나선 책이 사도행전입니다. 1차 전도여행이 그렇고, 2차 전도여행이 그렇고, 3차 전도여행이 그렇습니다. 신약성경의 대부분이 편지라는 것을 잘 아시지요. 왜 편지를 썼습니까? 사람을 찾아다니기 위해. 그들을 만나 격려하고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의 신앙 성숙을 돕기 위해 찾아 나선 흔적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늘 사람을 만나셨어요. 혼자 조용히 밤에 일어나시고 새벽 미명에 나가 기도하셨지만, 낮에 사람들이 깨어 있을 때는 단 한번도 쉬지 않으시고 사람들을 찾아다니셨습니다. 만나시고 상담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되게 사는가를 알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멀리 갈 것 없이 지난 한 해 동안 여러분이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살펴보십시오. 참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한 가정을 염려해서 그 집을 방문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정말 그 사람이 걱정되어서 기도하는 가운데 데이트를 신청해 본 적이 있나요? "성도님, 다음주 목요일에 만납시다!"라며 식사를 한번 대접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지금 파악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아무리 2,30년 신앙생활을 했고, 나와 하나님의 관계는 분명하며, 여러분 신앙에 자부심을 가진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사람을 찾아 나서지 않았다고 하면 여러분은 버림받은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이 영안교회 수많은 성도들 가운데 과연 진정으로 누구에게 관심을 가져 보셨습니까?
축복의 전령자는 사람을 찾아 나섭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어 서로 서로를 찾아 나서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찾아 나섭시다. 만납시다. 그 집을 방문합시다. 그리고 그들을 격려합시다.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김해에도! 해운대 신도시에도! 저 다대포에도! 창원에까지라도!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2. 사람들의 문제를 도와주고 해결한다
참 성령에 붙들린 사람들이 있으면 교회에 문제 가진 사람들이 많이 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문제를 가지고 와서 해결함을 받습니다. 오늘 여기에는 두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룻다에 갔어요. 안 가도 될 곳에 믿는 사람들이 생겼다고 해서 궁금하여 갔더니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애니아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전신불수가 되어서 8년 동안 상에 누워있었어요. 이 상은 밥상이 아니고 침상입니다. 침상에 8년 동안 누워있었어요. 34절을 보세요.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할렐루야! 8년을 누워있었는데 베드로가 가서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그랬더니 애니아가 곧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욥바(요나가 도망가던 항구) 성도들이 이 소문을 들었어요. "야, 8년 된 중풍병자를 베드로 사도가 일으켜 주었대!" 그러니까 사람들을 급파했어요. 갔더니 거기에 다비다라고 하는 한 여제자가 있었어요. 이 사람은 평소에 얼마나 선행을 많이 행했던지, 특별히 가난한 과부들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녀가 굉장한 부자라고 생각하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부한 가운데 도와준 것 같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그 암시를 받을 수 있는 곳이 39절입니다.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도르가는 다비다의 별명이죠. 함께 있을 때에 뭐한 속옷이요? 지은 속옷입니다. 사 온 속옷이요? 아닙니다. 돈 있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옷을 지어주겠습니까? 사서 주죠. 오늘 이 도르가, 다비다라고 하는 여제자는 자기의 가난한 가운데서도 어려운 과부들을 위해 밤새도록 바느질을 해서 그들을 도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사람이 갑자기 죽었어요. 제자들이 베드로를 청했습니다. 베드로는 거기에도 또 내려갑니다. 모든 과부들이 다락에서 너무나 슬퍼하며 울고 있는데, 베드로가 그들을 다 내어보냅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한 후에 한마디로 얘기합니다. 40절에 "다비다야, 일어나라!" 그랬더니 그가 살아났어요.
에이, 뭐 잠시 심장이 멎었다가 기절했나보다 하겠지만 아닙니다. 오늘 본문 37절을 보니 다비다가 죽고 나서 그 시체를 씻어다가 다락에 뉘어놓았어요. 장례 지내려고 씻어놓은 뻐덕뻐덕한 시체를 베드로가 "일어나라!" 했더니 그대로 일어난 것입니다.
"나도 남을 도우려니 안 되겠다 뭐 도울 능력이 있어야지. 오늘부터는 기도원에 가야 되겠다." 사상에도 경상도 할렐루야기도원이 생겼더군요. 하루는 우리 교회에 나온 지 꽤 되신 분 가운데 연세가 많은 한 분이 거기를 가야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교회를 옮겨야 되겠다고요. "거기는 기도원이지 교회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했더니 그래도 가야 되겠답니다. 왜 가느냐고 했더니 "제가 거기 가야 병이 나을 것 같습니다."라고 얘기하셨습니다. 그분이 간다는데 어떡합니까? 제가 늘 강조하지만 우리 교회는 앞문도 열려있지만 뒷문도 열어놓은 교회가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한마디했습니다. "가서 더 심해지시거든 영안교회로 오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왜 병이 낫지 않는가? 믿음이 부족해서이다. 기도원 가서 안수했는데 병이 안 나아요. 이 때 원장이 뭐라고 합니까? 믿음이 부족하구먼. 더 바쳐야지. 더 기도해야지. 안수 받았는데 병이 안 나아요. 왜 안 낫습니까? 아직도 능력이, 밧데리가 덜 찬 거야. 그들은 40일 금식기도하고 성령을 받아야 된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성경해석 때문에 자기의 신앙을 괴롭히는지 모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 시대에 특별한 일을 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 시대에 기적을 일으키셨고,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기적을 일으키셨고, 사도 시대에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 목적이 있었어요. 모든 시대, 어떤 사람들에게 항상 병 고치는 은사를 강하게 내려주신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사도 시대에 병 고치는 것을 살펴보세요. 오늘날의 병 고침과 얼마나 틀립니까? 오늘날은 내가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부흥회에 가서 막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안수를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한번에 받아서 안 나아요. 안수를 약간 받으니까 조금 소화가 돼요. 다음에 또 받으니까 더 소화가 돼요. 그 다음 뒤통수를 서너 차례 맞고 나니까 조금 더 나아요. 그 다음에는 손가락으로 찌르고 눈을 누르고 반쯤 죽여놔요. 낫네~. 그러나 돌아가면 또 도져요.
사도 베드로가 이렇게 했습니까? 아닙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했더니 즉시 고쳐졌어요. 8년 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라!" 했더니 즉시 일어났어요.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가? 이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사도들이 전파하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입증할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증빙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사도들에게 놀라운 능력을 주셨음을 성경은 얘기합니다. 오늘날은 이미 성경이 다 완성되었어요. 그럼 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가? 아니요, 일어납니다. 오늘날도 죽은 자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오늘날 어떤 한 사람에게 특정 사도 시대와 같은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집하니까 무리가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쇼로 보이려니 거짓말을 하게 되고 천사가 보인다고 하며 안수를 하고 자빠지고 별별 일을 다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한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도 베드로에게 특별한 권능을 주셔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어떻게 축복의 전령자가 될 수 있는가? 여기에 오늘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은 우리에게 그들의 문제를 돕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내게 능력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기도로 도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중보기도의 중요성입니다. 물질이 없는 자에게 내가 비록 가진 것이 적지만 오늘 이 다비다와 같이 나의 가진 일부를 그들을 위해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 교회는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만 세웠습니다. 예배당만 세웠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고아들이 길거리에 방황합니다. 오늘 한국 교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아원을 세워야 합니다. 양로원을 세워야 합니다. 사회복지사업을 해야 합니다. 그들의 필요를 누가 채워줄 것인가? 우리가 해야 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또 입으로만 하고 행동으로 하지 않는 자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이 없는 자에게 가서 "아이구, 배고픈데 좀 드시죠!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예수님은 인내심도 강하지요. 저 같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놈아!" 했을 것 같은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추워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옷을 입으시죠!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너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갖다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에 이러한 운동이 계속 확산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지금도 수많은 성도들이 서로간에 돕고 있는 것을 잘 압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들은 넉넉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사업이 잘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또 적은 돈으로가 아니에요. 추석에도 몇 몇 가정들을 위해 뭉치 돈으로 도와주었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 있어야 합니다. 필요를 도와야 합니다. 물질적인 필요를 도와야 할 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필요도 도와야 합니다. 이 세상에 문제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제가 목회를 하면 할수록 느껴지는 것이 "저 가정은 괜찮겠지."하고 가까이 가보면 고민거리가 있어요. 고통이 있고 문제가 다 있더라고요.
8년 된 중풍병을 앓는 사람처럼 부부간의 관계로 고민하는 사람, 형제간에 갈등을 가진 사람, 자식 문제로 속썩이는 사람, 영이 죽어있는 사람 ... 우리가 도와야 할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들에게 나름의 필요가 있단 말입니다. 누가 이것을 채워줄 것인가?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명령하십니다. "네가 하라!" "그래, 나의 축복을 전달하는 전령으로 삼기 위해 내가 너를 불렀지 않니?" "아, 목사님 저는 아직 믿음이 없는데요. 가진 것도 없는데요. 사업 조금만 더 하고 헌금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구제하고 헌금하는 거 못 봤어요. 지금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하시자 말자,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 말자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일어서야 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 도움을 받기 전에 여러분이 도와야 할 자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지난 한 해 단 한 사람에게라도 당신이 어떤 사람의 필요를 채워보신 적이 있나요? 제일 불행한 부부는 이런 부부간입니다. 아내가 늘 찾아와서 얘기합니다. 남편에 대해서 너무나 요구가 많아요. 또 남편을 만나봅니다. 아내에 대한 요구가 더 많아요. 그래서 묻습니다. "당신이 상대방에게 해준 것은 무엇입니까?" "많지요." "혹시 한번 써 볼 수 있겠습니까?" 제가 몇 몇 남편에게 묻고 종이와 팬을 줍니다. 많다고 해서 가득 쓸 줄 알았는데 그들은 점을 찍다가 한숨을 내쉬며 "목사님, 없네요!"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부름 받은 줄로 믿습니다.
축복의 전령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은 특징이 있는데 사람과 영혼을 찾아 나섭니다. 두 번째로 그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도와주고 해결합니다. 마지막 중요한 특징이 세 번째 나타나는데, 그것은 그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합니다.
3.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한다
35절과 42절을 보세요.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그들이 심방하고 도와준 결과가 무엇인가? 주께로 돌아왔다는 겁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미국 사람들이 두 가지 방법으로 한국에 선교를 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우리 한국 사람들을 많이 도왔는지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미국 사람들이 보는 한국 사람들은 지금 여러분들이 보는 저 아프리카 미개 토인들과 다를 바가 아무 것도 없었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재래식 화장실, 조그만 집, 제가 지난주간에도 시골의 한 초가집을 봤어요. 50년 된 집이라는데, 방과 부엌이 얼마나 작은지 현대인의 장롱은 그 반도 못 들어갑니다. 거기에 다섯 식구가 잤대요. 이불 한 채를 덮고요. 우리가 그렇게 살았어요.
하물며 100년 전에는 어떠했습니까? 백의민족이라고요! 우리끼리 솔직히 얘기합시다. 물감이 없었잖아요. 물들일 게 있어야 옷을 화려하게 해 입지요? 그래서 하얀 거를 입었어요. 그런데 미국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얼마나 많은 돈을 주었습니까? 수많은 대학을 세웠어요. 연세대학, 이화여대, 부산 이사벨 여고, 그리고 수많은 병원을 지었습니다. 세브란스 병원, 침례병원, 한국에 있는 굵직굵직한 대학과 병원 가운데 미국 사람들이 지어주지 않은 것이 몇 개나 됩니까? 중요한 것은 뭡니까? 당시에는 좋았어요. 그러나 오늘날 과연 그 기관들을 통해서 주님의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까? 연세대학교에 가서 그 학교에 등록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이 있을까요? 아니요. 침례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점점 적어져 가는 추세입니다. 설립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모든 것들이 돌아갈 뿐입니다. 처음에 그들은 그렇게 설립하지 않았어요. 왜 도와주었는가? 자신들의 도움의 손길을 통해서 믿지 않던 영혼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날 전도가 되지 않는 이유는 돈만 입혀주고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기관들이 그렇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두 극단에 치우쳐 있는데, 복음적인 교회는 사회사업을 아예 하지 않습니다. 고아원도 하지 않고 양로원도 돕지 않아요. 또 한 부류의 교파는 그저 가서 돕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거지들을 돕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전하지 않아요. 둘 다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 둘 다를 강조합니다.
베드로가 먼저 가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었어요. 고통 당하는 8년 된 환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던져줍니다. 욥바에 사는 가정교회에 가장 슬펐던 사건의 주인공 다비다를 일으켜 줍니다. 그 결과 주님께로 많은 영혼들이 돌아왔다고 증거 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10년, 20년을 믿었음에도 당신 때문에 한 영혼도 주님 앞에 돌아온 자가 없다면, 그렇게 많은 좋은 일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하나님께로 한 영혼도 인도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축복의 전달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불교에서도 할 수 있고 사회에서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벌써 들녘의 곡식은 점점 익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농부인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바라보고 계신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혹시 검게 썩어버린 곡식을 바라보는 농부의 얼굴은 아닐까요? 황금물결 춤추는 누런 곡식을 바라보는 기쁜 미소를 띄우실까요?
오늘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며 한 가지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베드로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원래 이런 축복의 전달자가 아니었어요. 그 당시에 가장 천대받던 어부 출신이었기에 학교도 별로 다니지 못했어요. 그래서 베드로는 이 편지를 쓸 때에 대필자를 구해서 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장은 사도 바울의 문장보다 떨어집니다. 또 그는 성격이 참으로 모가 났습니다. 얼마나 급하고 얼마나 덤벙댔던지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동안 실수란 실수는 혼자 다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급기야 수제자라는 신분을 가지고 그렇게 사랑하던 주님,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사도행전 9장에서 베드로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변화입니다. 과거에 여러분의 성격이, 집안이 좋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예수 믿고 나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조상 가운데 수많은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도 여러분을 통해서 이제 더 이상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저주가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이 전달되게 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이 가을에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실 때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이 여러분을 바라볼 때도 흐뭇한 기쁨의 표정을 지음으로 여러분의 가정, 나아가 만방에 하나님을 전달하는 축복의 전령이 됩시다.
출처/박정근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