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낡은 틀로부터 해방   (벧전 1:13~19)

모든 종교에서 기본적으로 다루는 가장 중요한 주제가 구원의 문제입니다.
구원의 문제는 인간이면 누구나 갖게 되는 궁극적인 생의 문제인 동시에 종교에서 다루는 근본적인 주제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도 역시 구원의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신구약성서의 중심 주제가 바로 ‘구원’입니다. 신구약성서에 중심주제가 되어 있는 구원의 뜻은 근본적으로는 하나이지만, 역사, 문화, 정치적 상황에 따라 구원의 의미가 각각 다르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신약성서 베드로전서에서 강조 되고 있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재에 이르는 해방 입니다. 그 해방은 “무지의 삶에서(벧전1:14) 길 잃음에서(2:25), 그리고 어두움(2:9)에서 구출입니다.”

그리고 오늘 설교의 중심 주제인 벧전1:18에서는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헛된 행실”로부터 해방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헛된 행실에서 해방시키셨다”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된 것이니라”(18-19)


하인리히 슐리어(Heinrich Schlier)는 이 구절을 “여러분의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거짓된 삶으로부터”라고 옮기면서, 그리스도께서 어디에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셨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슐리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헛되고 공허한 삶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허한(Mataios)은 ‘무’無를 뜻합니다. “그것은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아주 비현실적이고, 거짓된, 어리석은 삶을 뜻합니다.”

우리들의 삶에는 우리들이 물려받았거나, 만들어낸 존재하지 않는 거짓된 환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를 두렵게, 약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어리석은 신념의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고, 돈키호테와 같은 영웅으로 연기하게 하기도 합니다.


인류역사에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시대 사람들은 실재와는 거리가 먼 공허한 삶에 그들의 삶을 소진시켜 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시대의 로마 사람들의

공허한 삶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며”(롬1:26-27)
공허한 삶의 특징은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썩어지지 아니하는 것을 썩어질 것과 바꾸며, 순리대로 쓸 것을 역리로 쓰고, 정욕에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허한 삶은 여러 형태의 거짓된 이념, 신앙으로 만들어져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파멸시킵니다. 이념적으로 가깝게는 나치즘, 공산주의, 주체사상 같은 것들을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근래에 우리나라에서만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교 집단, 이단들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미혹케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짓되고, 허구적인 것들은 과거의 시대에서 그 거짓이 분명히 드러나고, 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멸되지 않고 계속해서 계승되어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의 계승 방법은 문화적인 형태, 문서, 또는 인간내면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잠재의식을 통해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러한 거짓된 것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가져다 줄 은혜를 온전히 바라야한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사도 베드로는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사욕, 즉 공허한 삶의 방식을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내적 자유를 누리며 세상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서, 주위 사람들의 잘못된 삶의 틀과 환상들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상들과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틀로 자신의 삶을 형성해 갑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자유롭게 산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조상이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무의식의 틀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은 제외하고라도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객관화시켜서 바라볼 때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낡은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을 그대로 물려받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시대는 바뀌지만 우리의 삶의 방식은 꼭 같은 궤도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사색당쟁은 시대의 변천과 함께 그 표현만 다를 뿐이지 21세기에 들어와서는 극단의 대립적인 편 가르기 싸움으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요즈음 와서는 이것이 보혁구도로 바뀌어 서로 대립의 양상을 표면화해가고 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뿌리 깊은 무속신앙의 틀이 조상대대로 물려 내려오면서, 고등종교의 형식만 갖추었지 그 신앙내용은 무속신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틀에서 전해지는 기독교 복음 역시 무속신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공허한 것들, 즉 허세, 체면, 극단의 이기주의, 한탕주의, 조급, 불성실, 업적주의는 우리들의 의식에 너무 깊이 배어 있으면서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는 우리를 이러한 낡은 삶의 틀에서 해방시켜 주신다고 했습니다.

한편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잘못된 삶의 틀이 표면적으로는 두드러지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한 사람의 생애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매우 절대적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주인공은 제가 실제로 접해온 사람은 아닙니다.

안셀름 그륀의 책에서 발췌한 하나의 실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마음의 고향을 체험해 본 적이 없던 한 여성이 수녀가 되었습니다. 그 여성은 어린시절 어머니로부터 항상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딸은 어머니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늘 주의를 기우려야 했습니다. 그 여성은 어린아이시절부터 자신의 느낌에 따르기보다는, 어머니가 흥분하지 않고, 화를 폭발시키지 않으며, 잘 지내도록 하는데, 자신의 온 힘을 써야 했습니다.

그는 성장하여 수녀가 되어 수녀원에 들어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녀원에 들어와서 그의 생애에서 처음 마음의 고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동체를 위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힘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그러나 함께 있는 젊은 수녀들이 공동체에 대해 무엇인가 만족스러워하지 못하고, 비판적인 반응을 보일 때 그는 너무 과잉적인 반응으로 그들에 대해 분개하고 공동체를 위해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그 때 마다 젊은 수녀들은 그에게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과잉 반응을 보이느냐고 반문하곤 했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화를 덜 내게 하기 위해서 항상 모든 것을 바르게 하며, 어머니의 비위에 맞추어 살려고 노력 하면서, 그는 자신의 삶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마음의 고향도 상실 하였습니다.

이제 그녀는 수녀원에서 자신이 체험하지 못했던 마음의 고향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동료 수녀가 자신의 고향인 수녀원을 비판하거나, 못마땅해 하면 그는 모처럼 찾은 자신의 고향을 상실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초조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반응은 매우 격하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 수녀는 나중에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그 헛된 소행을 통찰하고 떼어 놓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동료 수녀들이 수녀원에 대해 비판적일 때 마다 지나치게 방어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수녀원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고향을 상실하는데 대한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상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낡은 틀로 인해 우리는 자신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헛되고 공허한 삶의 양식에 따라 정해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러한 수많은 부정적인 삶의 틀은 여지없이 자기 파괴적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를 적대시하고 우리에게서 내적 자유를 앗아가며 노예화 시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로 인해 항상 같은 함정에 빠집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삶의 척도로 삼고 있는 것이 얼마나 공허하고 헛된 것인지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공허하고 자기 파괴적인 틀에서 우리가 어떻게 빠져 나오느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첫 번째 걸음은 이 틀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틀과 하나님의 뜻을 혼동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틀입니다.”
이를 고통스럽게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그 틀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식하는 것은 최소한 우리에게 어느 정도 그러한 것들로부터 거리감을 갖게 합니다.
두 번째 걸음은 그러한 틀을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내 삶 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틀을 어느 날 갑자기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러한 틀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남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고자 하는 나의 삶에 방해물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틀과 화해하는 것은 그것을 묵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거리를 둘 수 있습니다.


우리자신 안에 그러한 틀을 발견할 때 놀라거나 적대시 하지 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를 받아 드리는 것입니다.

‘아, 네가 나의 안에 있었구나. 나는 이제부터 너를 따라 살지 않을 거야. 이제부터는 네가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아.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진정한 나의 삶을 따라 살아 갈 거야!’ 하고 여유를 갖고 대하면 그러한 틀에서 점진적으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틀을 적대시하고 싸우면 그러한 틀은 더욱 강력하게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틀에 대해 여유 있게 온화하게 대하면 그러한 틀이 떠오르기는 해도 우리를 지배하지는 않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틀에 따라 우리의 삶을 결정해 가지 않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조상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낡은 삶의 틀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러한 틀을 발견 하게 되고, 그러한 틀과 화해 가운데서 거리감을 두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진정한 나 자신의 삶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새로운 삶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낡은 틀에서 해방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낡은 틀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새로운 삶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낡은 틀은 새것을 새것이 되게 하지 못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가정은 자녀들에게 삶의 낡은 틀을 형성시켜주는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워 가시는 구속받은 공동체가 되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 부모들이 낡은 틀에서 구원받아 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은 가정에서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배워가야 합니다.

부모들이 의도적으로 자녀들에게 낡은 틀을 형성시켜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구속받지 못한 삶, 성인 어린아이로 살아가는 삶의 형태가 자녀들에 낡은 틀을 형성시켜 갑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그 틀로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어 갑니다. 그리고 그 틀을 자기도 모르게 절대적인 것으로 간직해 갑니다.  

출처/임영수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