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이루어진다   (사43:14∼21)

꿈은 이미 이루어졌거나 현실에 다가왔을 때 이미 꿈이 아닙니다. 꿈은 과거에 있거나 현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신의 미래입니다.우리가 어떤 꿈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됩니다.꿈은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가정이나 국가나 교회에도 있어야 하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얼마 전 한 일간지는 우리 사회의 모습에 대한 여론 조사 결과를 실었는데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삶의 질이라는 세 가지 분야에 대해 실시한 이 조사에서 우리 사회가 살기 좋지 않다고 응답한 사람들이 74퍼센트였고, 기회가 된다면 다른 나라로 이민 가서 살고 싶은 생각이 있다는 사람도 43퍼센트에 이르렀습니다. 희망이 없다는 것, 그것은 곧 꿈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꿈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직접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고 마음으로 확신했습니다.

그래도 잘 했다

48년 전 참패를 설욕하지 못하고 3-4위 전에서 터키에 무릎을 꿇었지만 목표를 훨씬 초과 달성한 한국축구의 4강 진입은 분명 한국이 세계축구의 변방에서 중심부로 진입했음을 알린 큰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 선수들 참 잘했습니다.

네덜란드 가수 더블디(D)는‘우리들의 꿈(Our Dream)’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되고 싶어요?/하늘을 향해 팔을 뻗어 하늘을 만지고 싶어요/눈을 감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내가 이제까지 찾던 것을 찾았어요/그리고 나의 꿈속에서/꿈을 가지고 살아요?/이 황홀함 속에서 나의 손을 잡아요”

월드컵 열기가 고조되면서 더블디는 히딩크 감독과 한국 축구팀을 위해 급히 이 곡을 만들어 헌정한 바 있습니다.월드컵 시작 전,1승 혹은 16강은‘하늘을 만지는’것처럼 아득해 보이던 꿈이었습니다.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충고가 많았던 것도 그만큼‘눈을 감으면 할 수 있을’정도로 어려운 목표였기 때문입니다.그런데 결과는 노래에서처럼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그것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몇 배를 초과 달성했습니다.4강 전에서 우리 응원단이‘꿈은 이루어진다’는 카드섹션을 펼친 것도 그 뜻이 아닐까요? 기적의 원동력은 ‘우리들의 꿈’이었다고.

꿈은 이루어진다

서너 살이나 됐을까. 얼굴에 태극 문양을 그린 응원단 차림의 두 어린이가 뚫어지게 한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월드컵 준결승전 다음날인 26일 자 신문1 면 사진입니다. 상암동 서울월드컵 경기장에서 벌어진 한국과 독일 경기 관람에 열중한 어린이들을 찍은 것이었습니다. 신문 지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이 사진 밑에는 “꿈은 계속된다”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고, 사진설명 제목은“내일은 우리가…”였습니다.

이탈리아전서 'AGAIN 1966', 스페인전서는 'PRIDE OF ASIA', 독일전서 '꿈은 ★ 이루어진다'라는 대형 카드섹션으로 매 경기 기발하고 정곡을 찌르는 응원의 주제의식를 보여온 응원단은 그동안 최선을 다해 4강의 신화를 창조한 태극전사들에 대한 보답의 카드섹션을 펼쳤던 것입니다.

동북아 질서의 재편에 대한 기대가 무너진 데서 온 아쉬움과 교차된 뿌듯함은 우리 선수들과 응원단이 안겨 주었습니다. 한국 선수와 응원단은 너무나 순수하고 평화스러웠습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은 지난 5월 “한국 선수들의 강한 열정과 순수함이 나를 들뜨게 한다. 이들은 월드컵을 단순히 돈벌이로 여기는 유럽 선수들과는 크게 다르다.”고 말한 바 있는데, 6월 한달 내내 우리 선수들은 온 국민과 세계인에게 히딩크의 그 발언을 감동적으로 확인시켜 주었고 이날 준결승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두가 붉은 옷을 입고 응원하는 모습을 먼발치나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본 사람들에겐 그 거대한 에너지 분출과 일사불란함이 섬뜩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붉은 물결 속에 들어가 보면 평화로운 열정에 ‘생애 최고의 감동’(미국 칼럼니스트 토머스 플레이트)을 맛보게 됩니다.

준결승전이 끝나고 경기장 밖에서는 진기한 풍경이 벌어졌습니다. 독일 응원복을 입은 한 독일인이 작은 나팔로 ‘대∼한민국’을 선창하고 붉은 옷차림의 한국인과 외국인들이 이를 따라 목청껏 연호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노약자와 어린이는 들어갈 수도 없을 만큼 축구 팬의 난동이 극심하다는 공포의 유럽 축구장에서 주최국이 패배했을 때 상상이나 할 수 있는 모습인가요?

물론 한국의 놀라운 승리를‘음모론’으로 깎아 내리는 외국 언론도 없지 않습니다. 인종차별의 냄새가 나는 그런 주장이 2006년 독일 월드컵 대회에선 더 이상 발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월드컵 역시 여느 대회와 마찬가지로 숱한 감동과 좌절, 희비를 함께 쏟아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개최국인 우리 한국은 단연 감동의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라운드에서, 스탠드에서, 심지어는 거리에서까지 세계인들을 감동시켰습니다. 불안하기까지 했던 우리 축구실력은 16강 꿈을 넘어, 8강, 4강까지 이르렀습니다. 뭐니뭐니해도 한국축구의 월드컵 4강은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가 거둔 최대의 성과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줬습니다. 우리도 놀랐지만 세계가 경악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한국축구의 월드컵 4강 진출이 아니라 그동안 남미와 유럽으로 양분됐던 세계축구의 판도에 변화를 일으킨 것으로 그동안 '공좀 찬다고 ' 거들먹거렸던 이른바 축구강국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다, 축구의 제3세계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입니다. 이런 선수들의 선전은 전 국민을 하나로 묶는 이른바 사상 초유의 '길거리 응원'을 탄생시켰습니다. 월드컵 사상 초유의 700만 길거리 응원단이 지구촌을 월드컵 열기에 휩싸이게 했습니다. 프랑스가 지난 98년 월드컵을 치르고 난 뒤 국민통합을 이룬 것을 가장 큰 성과로 꼽았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그것에 비하면 우린 4700만 국민이 단 한사람의 이탈도 없는 완벽한 일체감 조성에 성공했습니다.

요즘처럼 다양화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 같은 '만장일치'는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광화문, 시청 앞 광장은 물론 전국 방방곡곡을 '붉은 물결'로 뒤덮으며 하나된 코리아의 모습은 국제사회에 준 메시지도 큽니다. 외신들은 우리의 이런 모습을 선수들이 이룬 월드컵 4강 신화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코리아의 붉은 물결은 비단 한반도에 국한된 게 아니었습니다. 베트남, 태국, 필리핀, 중국에까지 파급됐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이란 우리의 구호는 코리아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 국민들이 보여준 성숙된 시민의식은 아시아를 넘어 지구촌을 하나로 묶는데 성공했고 지역과 화폐통합으로 정체성 상실위기에 놓였던 유럽사람들에겐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번 월드컵 기간처럼 태극기가 아름답게 보이고, 애국가가 우렁차게 울려 퍼진 적이 없었습니다. 수백만 거리응원단이 운집한 곳에서도 단 한 건의 사건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응원이 끝난 그곳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휴지 한 장 남지 않은 일상의 도심거리로 환원됐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우린 숱한 화제를 뿌리며 세계의 중심에 위치했었습니다. 결코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가 일으킨 '붉은 물결'이 우리 선수들의 선전에 편승된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무시하고, 깔보고, 정도를 벗어난 국제질서 앞에서는 언제든지 이보다 더한 물결을 일으킬 수 있다는 코리아의 힘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국민모두 성공적인 월드컵을 위해 노심초사했던 지난 수년간의 긴장을 풀고 '축제의 밤'을 즐기며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합니다.

뉴욕타임스는“한국은 결승에 나가지 못했으나 세계에 자신들의 정신을 과시했다.”고 썼습니다. 우리는 월드컵 우승보다 더 값진 것을 얻었습니다. 붉은 응원단의 준결승전 카드섹션대로 “꿈★은 이루어진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했습니다. 또 우리가 얼마나 아름답게 꿈을 이루는가를 전 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꿈을 이루었고 앞으로도 이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가 본 이상 중 일부입니다. 이사야서 1장 1절을 보십시오.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1:1)

이상이 무엇입니까? 이상은 구약성경 여러 곳에 환상, 또는 꿈, 계시 등의 표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요즈음은 흔히 비전이란 말로 많이 사용합니다. 이상은 독특한 한 가지 특성을 갖습니다. 그것은 초자연적 계시라는 점입니다. 초자연적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에 의해서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보고 싶어서 이상을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은 단순한 인간의 꿈이나 계획과는 다른 것입니다. 또한 계시라고 하는 것은 이상은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상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의 계획, 심정, 뜻을 전달하십니다.

그럼 이사야가 본 이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 하나님의 계획을 본 것입니다. 그 이상의 기록이 이사야서 전체의 내용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이사야가 본 이상은 어떤 것입니까? 왜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이상을 보이셨습니까? 언제 그 이상을 보이셨습니까?

시대적 상황

먼저 그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사야는 유다의 제 10대 왕이었던 웃시야로부터 13대 왕인 히스기야에 이르기까지 활동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이사야는 당시 국제정세를 관통하던 대 정치가요 시대의 정황을 누구보다도 잘 읽고 있던 선견자였습니다. 당시의 세계와 역사를 내다보는 안목은 주전 8세기경 이사야 만큼 높고 깊고 넓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수리아, 앗수르, 바벨론, 애굽, 블레셋, 암몬, 모압, 에돔 등 변화무상한 세계의 역사무대를 관통했던 사람이 이사야입니다.

이사야의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는 구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이 이름은 이사야서의 중심 사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본서의 초두에 이 왕들의 이름을 열거한 것으로 우리는 그 시대적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왕들의 이름을 열거한 이유는 성경이 당시의 시대적 정황을 알려주려는 의도적 표현입니다. 이 왕들은 어떤 왕들이었습니까?

웃시야는 하나님의 제사장들을 우습게 여기고 그들의 충고를 거부하고 교만하게 살았던 대표적인 왕입니다. 그는 결국 문둥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요담은 웃시야의 아들로써 아비로부터 내려오던 백성들의 도덕적인 타락과 영적인 타락을 막지 못했던 무능한 왕이었습니다. 아하스 역시 여호와 중심이 아닌 우상숭배에 빠진 자였고 하나님을 의존하기보다는 앗수르를 의존하여 정치하던 정치적 사대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유대의 역대 왕들 중에 가장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도 그의 통치 말기에 교만의 유혹을 떨치지 못했던 왕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하나님에 대한 신권을 무시했고 자신들의 욕구에 대한 이기적 인권을 강조했던 시대였습니다. 그 결과로 이들의 신앙은 변질되었고 삶은 방종으로 흐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너지던 시대였습니다.


이상을 보이시는 하나님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에게 한 이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사야가 본 이상은 무엇이었습니까?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이것이 이상을 주신 목적이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도덕적 방종과 영적 타락에 허덕거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보여 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환상을 가지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환상을 따라 방종과 타락의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을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백성들이 무너져 갈 때, 그 절망과 어두움의 땅 한 가운데서 당신의 택하신 선지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하늘의 환상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기약할 수 없게 된 그들의 안타까운 형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활동을 계속하셨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은 타락하였고 하나님을 향해 배반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붙드시고 그를 통해 그 민족 공동체의 장래를 말씀해 주시며 그 백성들로 하여금 새로운 환상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오늘, 이사야가 살던 시대와 문화는 달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다루시는 방법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이상으로 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방종의 자리에서 새로운 역사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 이사야의 시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보십시오. 이사야가 살던 그 시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땅은 죄와 타락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땅히 자신들의 인생의 나아갈 바를 알지 못한 채 타락과 방종의 몸부림으로 인생을 허비합니다.

성도들의 영적 삶은 어떻습니까? 형식은 있으나 하나님께로 온전히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고 살아가는 허(虛)한 신앙생활이 만연하지 않습니까? 교회에는 나와도 영적 사모함은 없고, 하나님을 향해 예배는 드리되 냉랭함이 감돌지 않습니까? 예배도 참석하고 헌금도 드리고 봉사도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동기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나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분히 습관적이고 맹목적이지 않습니까?

거기에다 교회마저도 방황합니다. 교회는 분명 목적이 있는 공동체입니다. 시간이 되면 모이고, 절기가 되면 예물을 드리고, 단순하고 반복적인 종교적 활동을 진행하는 것만으로 교회의 기능을 다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이상에 사로잡혀 그 이상을 따라 움직이는 이상 공동체, 비전을 따라가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오늘 교회와 성도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이상을 보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과 함께 방황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잠들 수 없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결코 신랑이 오시는 시간에 자고 있던 미련한 다섯 처녀일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잠든 교회가 세상을 깨울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잠든 성도가 다른 사람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잠든 지도자가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상의 체험이 필요합니다. 이 시대를 뛰어넘는 새로운 여호와의 이상, 새로운 환상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시대를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능력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 휩싸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속에서 느껴지는 영적 무감각과 고통스러운 영적 수면상태, 그 진원지가 무엇일까요? 오늘날 교회의 무능력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이 무능함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왜 교회들이 아름답지 못한 모습들을 보이게 될까요? 이상의 부재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체험의 빈약함과 영적 빈곤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어둡고 험악한 세상에서 진실된 그리스도인들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가진 직분으로는 안됩니다. 회의로도 안됩니다. 교회 생활의 경험으로도 안됩니다.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보는 특별한 영적인 체험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생명을 잃어 가는 교회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시대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이상입니다.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right)의 말을 가슴에 담아 보십시오. "불은 자극을 받거나 밝혀지면 그렇지 않을 때 보다 열을 더 많이 낸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람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자극을 받으면 가슴에 더 큰 불꽃을 일으킨다"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이상이 보여질 때 우리의 가슴은 뜨거워 질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불붙는 삶이 될 것입니다.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18, 19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 어두움과 목적을 망각한 방종의 자리에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새로운 일을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새로운 일을 그들 가운데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그 새로운 일이란 무엇입니까? 광야에 길을 내는 것이고 사막에 강을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사야 시대로부터 200년 후에 이루어질 바벨론에서의 해방을 예언한 역사적이고 여자적(如字的)인 예언입니다만 이것은 신약시대에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로운 복음운동과 축복의 삶을 예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실 축복은 사막에 강을 내심과 같고 광야에 길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축복은 우리의 환경과 상황을 초월하여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일을 나타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마시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이 이상을 보게되기를 소원합니다. 새로운 환상을 보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 축복의 환상을 보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들의 꿈

한국이 월드컵 4강 신화를 만들면서 세계 축구사를 새로 쓰게 됐다고 야단입니다.축구의‘변방국’으로 선진 축구에 주눅들어 있던 우리가 이처럼 짐짓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되다니.이런‘기적' 을 만들어 낸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요? 히딩크 감독의 지도력.선수들의 뼈를 깎는 노력.축구협회의 헌신적인 물심양면의 지원.이 모든 게 어우러진 결과임은 분명합니다.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바로 우리 국민 모두의 꿈, 염원이라 해도 좋고 비원이라 해도 좋을, 한결 같은 꿈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습니다.월드컵이 마무리되면서 넘치는 열기를 향후 국가적 자산으로 삼자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물론‘축구는 축구, 축제는 축제일 뿐’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한바탕 신명나게 즐기면 그만인 것을 ‘국가와 민족’운운하며 시쳇말로‘오버하지 말자' 는 것입니다.

하지만 월드컵을 치르면서 확인한 우리의 동질감, 충만한 에너지 그리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엄청난 수확입니다.축제의 밤이 끝나면 당장은 달라진 것 없는 불쾌한 현실을 마주해야 할 것입니다.그러나 정치도 경제도 질서의식도 세계 4강 대열에 오르기 원한다면 그런 꿈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무작정 헐뜯고 지역주의에 기대는 정치에 레드카드를 내밀어야 합니다.응원에서 보여준 질서의식을 몸에 배게 하고 불신 갈등 대립을 떨쳐 버리고 신뢰와 화합의 분위기를 만드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더블디의 노래는 이렇게 끝납니다.“나는 알아요.우리, 당신과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왜냐하면 우리는 꿈을 가지고 사니까요”

월드컵 4강에 오르기까지 한국팀의 승리에는 전 국민의 열광적인 응원이 큰 몫을 했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순수하게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 우리 대표팀을 성원하고있는 국민들로서는 이보다 큰 경사가 없습니다.

그런 만큼 국민들도 이제는 좀더 멀리 보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월드컵 대회의 가장 큰 수확이랄 수 있는 국민적 결집과 그로부터 분출된 에너지와 활력을 국가적 도약의 원동력으로 발전시키는 방법을 모색하는 한편 한국의 대외 이미지를 한층 더 높일 수 있는 노력도 요구됩니다.

마음의 노래를 회복하자

어떤 사람이 대학을 졸업하고 증권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몇 개월을 근무하고 나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하는 것과 같다. 나는 더 이상 전쟁터에서 전사가 될 수 없다"라는 말을 하고는 그 직장을 그만 두었습니다. 이 사람은 지상의 글을 통하여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느끼는 시대적인 불행은 사람들이 더 이상 꿈을 꾸지 않고 자신들의 미래를 상상하지 않는 것이다. 이 꿈이 없어지기 때문에 오늘 이 세상에 사람이 없어지고 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어떤 사람은 승리했다고 두 손을 들고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패배했다고 절망의 한숨을 쉬고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이 없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과연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할 수가 있지만, 앞에서 그 사람의 말처럼 사람들이 더 이상 꿈을 꾸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일을 향한 비젼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없는 노래를 악보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머리에 담겨 있지 않는 시상이나 이야기를 시나 소설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지 않습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마음의 노래를 잃어버렸습니다. 머리 속에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다 망각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꿈은 내일을 살아가는 양식과 같은 것이며, 꿈은 호흡을 원활하게 해주는 산소와 같은 것이며, 꿈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 주는 육교와 같은 역할을 해 주기 때문에 우리는 한시도 꿈을 가지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꿈과 희망이 없는 인간은 피곤하고 곤고한 인생을 살뿐입니다. 그러나 꿈을 가진 사람들은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꿈은 정착의 상태에서 떠나서 미래를 향해 전진해 나가도록 합니다. 꿈은 안락한 평화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의 운명을 개척하며 미래를 향해 전진해 나가도록 합니다. 꿈은 곧 미래에 대한 희망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 희망이 없으면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우리가 한시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 곧 희망인 것입니다.

평범한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외적인 환경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가슴속에 있는 꿈이 평범한 인간을 위대한 사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범과 비범의 차이는 꿈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새로운 꿈을 품고 인생을 살아가면 인생의 새 장이 열릴 것이고 꿈이 없이 살아가면 그 사람은 똑같은 삶을 반복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인생은 꿈을 먹고사는 소망을 가진 존재입니다. 꿈은 창조주가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꿈의 사람은 미래를 보고 살므로 현실에 묶이지 않을 뿐 아니라 과거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제 꿈이 없으면 꿈을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희망이 없으면 희망을 빚어야 할 것입니다. 꿈이 없는 민족과 개인은 멸망하고 맙니다. 꿈이 없는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합한 선교의 역사를 이루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 꿈을 잉태하고 만들어서 자신의 운명에 도전하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참된 꿈을 꾸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새 세계를 꿈꾸는 것처럼 값있는 삶이 어디 있을까요? 그런데 크리스챤의 꿈에도 거품이 끼어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꿈을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을 경우입니다. 날마다 새로움을 지향하면서 아픈 자기 성찰과 자기 부정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삶을 창조해 나가는 노력이 없다면 그것은 거품의 꿈이 될 것입니다.

선교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2002년 월드컵 대회를 이 땅에 열리게 하시고 16강 8강 4강까지 이루게 하신 것은 우리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우리 민족을 향한 시대적인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인 줄 믿습니다. 축구공 하나가 이 땅에 대한민국을 연호하게 하고 4800만을 하나로 묶고 수백만의 응원단이 우리나라를 붉은 옷으로 뒤덮게 하는 것을 보면서 언젠가 이 땅과 세계의 열방이 축구를 통하여 방방곡곡에서 복음의 열기를 뒤덮는 날을 소망해 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 안에서 마음 속에 간절히 열망하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출처/서정호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