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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여 응답하소서! (열왕기상 18:36~40)
오늘 사람들이 강단에서 선포되고 있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습니까? 아니 좀 더 범위를 확대해서 오늘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는 것 같습니까? “예!”라고 자신있게 대답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교회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설득력 있게 들려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더 나아가 복음의 능력을 분명히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또 아름다운가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분명히 보여 줄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봉독한 열왕기상 18장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악한 임금 아합과 선지자 엘리야의 대결을 소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총애를 받던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이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 한 사람과 더불어 갈멜 산 위에서 대결한 과정을 아주 상세하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갈멜 산 위에서 있었던 그 사건을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시려는 하나님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는 기사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건이 진행됨에 따라서 조금씩 변하는 백성들의 태도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18장 21절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엘리야가 모든 백성들에게 가까이 나아가 물었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그 말을 듣고 백성들이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백성이 말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영적으로 타락한 시대 사람들은 묻는 말에 대답조차 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신뢰를 잃어버린 교회가 외치는 소리를 듣기는 들어도 바르게 응답하지 못합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모든 것이 다 내 탓이요 우리의 탓입니다. 교회가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포기할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교회가 할 일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도무지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역의 출발점이라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엘리야가 합리적인 말로 백성들을 설득했습니다.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합리적인 그의 제안을 듣고 비로소 백성들이 반응했습니다.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이해할 수 있고 설득력 있는 말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는 신을 참 하나님으로 인정하자는 엘리야의 제안은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지 않습니까? 때문에 교회가 세상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이 필요합니다. 그 접촉점이 문화 행사, 사회 봉사 어떤 것이든지 좋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먼저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친 듯이 그들의 신에게 부르짖었지만 아무 소리도 없었습니다.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들이 제단에 불이 내리도록 간절히 기도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엘리야가 나섰습니다. 그가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게로 가까이 오라.” 그러자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백성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뭔가 특별한 고백이나 결단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여호와께서 정말 불을 내리실 것인가 하는 것을 보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증거를 원합니다. 실질적인 변화를 보고 싶어 합니다.
엘리야는 그들과 함께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다시 쌓았습니다. 그리고 제단 주위에 도랑을 만들었습니다. 그 제단 위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제물과 나무 위에 물을 붓고 주위 도랑에 물이 가득 차도록 부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늘에서 불이 내렸습니다.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까지 다 핥았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백성들이 엎드려서 고백했습니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 그들의 삶의 현장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오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체험한 데서 멈추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신앙은 분명히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신앙 고백이 결코 거짓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바로 이 점에서 충분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무엇을 지시했습니까?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그 말을 듣자 백성들은 즉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곧 잡은지라!” 백성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동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행동하는 사람이 비로소 제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의 마지막 부분 “곧 잡은지라!”는 말씀은 제자란 과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를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이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된 삶에 뒤따르는 행동입니다. 해석이 중요하지만 해석만 가지고서는 완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체험도 중요하지만 체험만 가지고서는 결코 완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한 후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은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갈멜 산 위에서 있었던 하나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지만 그 사건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와 반응을 살펴보면 한 사람이 참 제자가 될 때까지 거쳐야 하는 단계를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전혀 반응하지 않는 단계에서부터 마침내 하나님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단계까지입니다. “가서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명령이 바로 이것입니다. 제자를 만드는 일에는 나름대로 단계가 필요합니다. 단계별 훈련을 통해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는 결코 단번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부단히 자라며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제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비로소 “가서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비로소 “사람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주님의 말씀을 이루어 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체험한 사람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라도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과연 어느 단계에 있는 것 같습니까? 우리 교회가 아직도 부족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바로 선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또한 사람들과의 멀어진 거리를 좁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결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 옛날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제단을 다시 쌓았던 것처럼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아야 합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위해서 쌓았던 제단을 허물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제단을 새롭게 쌓아야 합니다. 예배가 다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모두 함께 하나님을 깊이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그 하나님을 담대하게 증거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기쁜 소식을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오늘 우리가 일해야 합니다. 추수할 곡식이 정말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먼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관심을 갖고 구원의 기쁜 소식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가 먼저 바로 서야 합니다.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는 심정으로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가 회복되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 옛날 엘리야의 기도를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기도도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깊이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르게 회복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그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목사 설교 중에서
오늘 사람들이 강단에서 선포되고 있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습니까? 아니 좀 더 범위를 확대해서 오늘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는 것 같습니까? “예!”라고 자신있게 대답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교회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설득력 있게 들려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더 나아가 복음의 능력을 분명히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또 아름다운가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분명히 보여 줄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봉독한 열왕기상 18장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악한 임금 아합과 선지자 엘리야의 대결을 소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총애를 받던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이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 한 사람과 더불어 갈멜 산 위에서 대결한 과정을 아주 상세하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갈멜 산 위에서 있었던 그 사건을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시려는 하나님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는 기사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건이 진행됨에 따라서 조금씩 변하는 백성들의 태도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18장 21절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엘리야가 모든 백성들에게 가까이 나아가 물었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그 말을 듣고 백성들이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백성이 말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영적으로 타락한 시대 사람들은 묻는 말에 대답조차 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신뢰를 잃어버린 교회가 외치는 소리를 듣기는 들어도 바르게 응답하지 못합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모든 것이 다 내 탓이요 우리의 탓입니다. 교회가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포기할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교회가 할 일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도무지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역의 출발점이라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엘리야가 합리적인 말로 백성들을 설득했습니다.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합리적인 그의 제안을 듣고 비로소 백성들이 반응했습니다.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이해할 수 있고 설득력 있는 말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는 신을 참 하나님으로 인정하자는 엘리야의 제안은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지 않습니까? 때문에 교회가 세상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이 필요합니다. 그 접촉점이 문화 행사, 사회 봉사 어떤 것이든지 좋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먼저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친 듯이 그들의 신에게 부르짖었지만 아무 소리도 없었습니다.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들이 제단에 불이 내리도록 간절히 기도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엘리야가 나섰습니다. 그가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게로 가까이 오라.” 그러자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백성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뭔가 특별한 고백이나 결단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여호와께서 정말 불을 내리실 것인가 하는 것을 보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증거를 원합니다. 실질적인 변화를 보고 싶어 합니다.
엘리야는 그들과 함께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다시 쌓았습니다. 그리고 제단 주위에 도랑을 만들었습니다. 그 제단 위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제물과 나무 위에 물을 붓고 주위 도랑에 물이 가득 차도록 부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늘에서 불이 내렸습니다.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까지 다 핥았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백성들이 엎드려서 고백했습니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 그들의 삶의 현장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오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체험한 데서 멈추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신앙은 분명히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신앙 고백이 결코 거짓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바로 이 점에서 충분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무엇을 지시했습니까?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그 말을 듣자 백성들은 즉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곧 잡은지라!” 백성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동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행동하는 사람이 비로소 제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의 마지막 부분 “곧 잡은지라!”는 말씀은 제자란 과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를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이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된 삶에 뒤따르는 행동입니다. 해석이 중요하지만 해석만 가지고서는 완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체험도 중요하지만 체험만 가지고서는 결코 완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한 후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은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갈멜 산 위에서 있었던 하나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지만 그 사건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와 반응을 살펴보면 한 사람이 참 제자가 될 때까지 거쳐야 하는 단계를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전혀 반응하지 않는 단계에서부터 마침내 하나님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단계까지입니다. “가서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명령이 바로 이것입니다. 제자를 만드는 일에는 나름대로 단계가 필요합니다. 단계별 훈련을 통해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는 결코 단번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부단히 자라며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제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비로소 “가서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비로소 “사람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주님의 말씀을 이루어 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체험한 사람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라도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과연 어느 단계에 있는 것 같습니까? 우리 교회가 아직도 부족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바로 선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또한 사람들과의 멀어진 거리를 좁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결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 옛날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제단을 다시 쌓았던 것처럼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아야 합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위해서 쌓았던 제단을 허물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제단을 새롭게 쌓아야 합니다. 예배가 다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모두 함께 하나님을 깊이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그 하나님을 담대하게 증거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기쁜 소식을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오늘 우리가 일해야 합니다. 추수할 곡식이 정말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먼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관심을 갖고 구원의 기쁜 소식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가 먼저 바로 서야 합니다.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는 심정으로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가 회복되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 옛날 엘리야의 기도를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기도도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깊이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르게 회복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그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