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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소망 (요한복음 14:1~4)
성경은 세상 사는 사람을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2:11). 해가 저물어 가는 석양에 괴나리봇짐을 등에 지고 무거운 발길을 옮겨놓는 나그네의 마음은 사랑스러운 가족이 기다리는 아늑한 집을 연상하게 될 것입니다. 영국의 작곡가 헨리 비숍(Bishop Henry Rowley)의 노래 ‘즐거운 우리 집’(Home Sweet Home)이 세계인의 애창곡이 되는 것도 사랑스러운 가족이나 집이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지만 그 마음 바닥에 깔려 있는 소망은 ‘아름다운 집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의 제약 없이 오래도록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는데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평범하고 일반적인 마음의 그림을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만이 누릴 수 있는 특수한 소망으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곧 최고의 소망인 것입니다.
1. 천당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가 세상나라의 왕권을 가지고 오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심지어 그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아 권력을 행사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습니다(마 20:21). 그럴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에 예비 된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1) 안정성이 없는 세상
세상에는 완전한 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은 여러 가지 형태의 좀과 동녹과 도둑에 의하여 훼손당합니다(마 6:19). 또 전쟁이나 재난이나 질병 같은 것이 있기 때문에 안전할 수 없습니다(마 7:24-27).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런 집이라도 하나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며칠 전 신문에는 세계에서 제일 비싸고 좋은 집이 하나 복덕방을 통해서 소개되었습니다. 미국 LA서부 베버리 힐스에 있는 대저택으로써 이 집은 침실 29개와 수영장 3개에 영화관까지 갖추고 있어서 우리 돈 1,520억 원을 호가하는데 벌써부터 돈 많은 몇 사람이 군침을 삼킨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한순간에 다 지나가기 때문입니다(요1서 2:15-17).
2) 평안을 갈망하는 사람들
집은 사람들에게 아늑하고 평안한 행복의 공간으로 생각되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죄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에는 구조적으로 평안이 없습니다. 오늘날처럼 여러 가지 공해와 재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몸도 마음도 지쳐있어서 안식을 줄만한 집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에는 사람들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교통과 생활여건이 좋은 곳을 선택하여 집을 장만하려 했지만 거기에도 문제가 따랐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조용하고 공해가 없는 곳을 선호하는 경향이 되었습니다.
요즈음 아랍에미리트연합 두바이의 ‘엑소모스’라는 잠수함 제작사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부호들로부터 자가용 잠수함 주문이 쇄도한다고 합니다. 한 척당 가격이 우리 돈으로 110억에서 735억 원이 호가하는 잠수함을 구입하여 바다 밑으로 내려가 즐기며 산다는 것입니다. 인공위성을 타고 지구 밖으로 나가 살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이 세상에 사는 것이 불안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3) 하늘의 집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천당(天堂)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입니다. 본문 말씀 2절에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의 집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집이 안전하고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거기 살게 되는 사람의 신분도 확실합니다. 계시록 21:1-4에 보면 그 집의 정경을 마치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의 아름다움에 비유하였습니다. 또 그 집에는 슬퍼하거나 눈물 흘릴 일이 없고 죽음도 없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집에는 속되거나 가증하거나 거짓된 것은 들어가지 못하고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계 21:27).
2. 영생입니다.
사람이 살아 가는 데는 의식주(衣食住)문제가 일차적인 과제로 인식되지만 그것은 삶을 편리하게 하는 수단일 뿐 그 전부는 아닙니다. 곧 좋은 집에서 잘 먹고 편하게 산다 하더라도 그것이 언제까지나 끝없이 지속될 수는 없습니다. 잠시 잠깐 지나가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오래 살고 싶은 소망을 가집니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1) 사람의 생명
성경은 인간 생명의 실존 문제를 가장 정확하게 나타내 줍니다.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연원(淵源)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창 2:7). 또한 그 생명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시간에 따라 소멸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전 3:1). 그뿐 아니라 생명이 머물러 있는 그 시간이 언제 인지 모르기 때문에 살아있는 시간에도 살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불안하고 허망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2:22에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하였습니다. 신약의 야고보는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였습니다(약 4:14). 구약의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고 하였습니다(시 90:10).
2) 영생의 도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은 좀 더 오래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진시황제(秦始皇帝)가 도처에 사람들을 보내서 불사약(不死藥)을 구해다 먹었다는 말이 전해 오는 것도 죽지 않고 살아보자는 욕망의 표현입니다. 지금은 의학이 발달함에 따라 옛날에 비하여 평균수명이 길어졌지만 그렇다고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된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죽음의 권세아래 있는 인간에게 영생의 소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곧 생명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주시고 이를 믿어서 영생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요 3:16). 요한복음 17:3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곧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3) 천당과 영생
고대 원시 사회에서부터 사람들은 영혼불멸(靈魂不滅)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도서 3:21에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불멸하는 영혼이 어떤 상태로 지내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 보면 세상에서 호화롭게 살았던 부자는 죽은 다음 음부에서 고통을 겪게 되고,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처지에 있었던 거지 나사로는 죽은 다음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낙원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습니다(눅 16:19-25). 사람들은 죽음 다음의 세계에서 어떤 상황이 될지 몰라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경우 천당의 복락을 보장 받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확신과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잠시 살고 끝나더라도 영원히 사는 천당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곳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최상의 환경을 갖춘 좋은 집에서 살더라도 누구와 함께 사느냐에 따라 행복의 지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곧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살지 못하고 사이가 나쁜 사람과 함께 오래도록 머물게 된다면 오히려 지옥 같은 고통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하늘의 집 천당에서 꿈에도 그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토록 살게 되는 소망이 있습니다.
1) 그리스도가 삶의 목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나그네와 행인 같은 세상을 살아가더라도 목적 있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마치 구약시대 애굽을 탈출해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직 약속의 땅 가나안을 목표로 하고 40년간 그 고달픈 광야 생활을 이겨 낸 것처럼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믿음의 생활을 경주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인생의 목표가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3:12에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한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의 어떤 유혹이나 시험이 와도 요동하지 않고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바른 길을 가게 됩니다. 히브리서 12:2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였습니다.
2) 사랑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가장 큰 조건은 사랑입니다. 참으로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있을 때 어떤 환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기쁘고 행복하게 하여 줍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가지는 사랑 속에는 어느 것도 완전한 것이 없습니다. 시간과 환경의 제약을 받습니다. 또 상황에 따라서 바뀌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가장 완전하고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아가페(α?απη)라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사랑의 진수를 일러 주고 있습니다(요1서 4:10). 성도는 이 사랑의 맛을 아는 자이기 때문에 항상 이 사랑을 동경하며 그리워합니다. 마치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애를 태우다가 병이 난 것처럼(아 5:8). 예수님의 사랑에 목말라 하며 그 사랑이 이루어 질 날을 소망하는 자들입니다.
3) 임마누엘의 행복을 누립니다.
여리고 성에 사는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신 후 너무나 행복에 겨워 마냥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는 여리고 세관의 세리장이요 재산이 많은 부자였지만 마음에 갈등을 가졌고 고민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뜻밖에 예수님이 자기 집을 방문하시고 그의 이름을 불러 주실 때 충격적인 행복에 사로잡히게 되고 완전히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눅 19:1-9). 예수님과 더불어 임마누엘의 삶을 사는 사람은 삭막한 세상에서도 항상 그리스도 사랑의 체온을 느끼며 최상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고후 5:14).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은 행복을 보장해 주시려고 하늘나라 아버지 집을 준비해 두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누릴 영원한 사랑, 영원한 행복을 소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출처/손상률 목사 설교 중에서
성경은 세상 사는 사람을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2:11). 해가 저물어 가는 석양에 괴나리봇짐을 등에 지고 무거운 발길을 옮겨놓는 나그네의 마음은 사랑스러운 가족이 기다리는 아늑한 집을 연상하게 될 것입니다. 영국의 작곡가 헨리 비숍(Bishop Henry Rowley)의 노래 ‘즐거운 우리 집’(Home Sweet Home)이 세계인의 애창곡이 되는 것도 사랑스러운 가족이나 집이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지만 그 마음 바닥에 깔려 있는 소망은 ‘아름다운 집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의 제약 없이 오래도록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는데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평범하고 일반적인 마음의 그림을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만이 누릴 수 있는 특수한 소망으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곧 최고의 소망인 것입니다.
1. 천당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가 세상나라의 왕권을 가지고 오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심지어 그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아 권력을 행사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습니다(마 20:21). 그럴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에 예비 된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1) 안정성이 없는 세상
세상에는 완전한 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은 여러 가지 형태의 좀과 동녹과 도둑에 의하여 훼손당합니다(마 6:19). 또 전쟁이나 재난이나 질병 같은 것이 있기 때문에 안전할 수 없습니다(마 7:24-27).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런 집이라도 하나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며칠 전 신문에는 세계에서 제일 비싸고 좋은 집이 하나 복덕방을 통해서 소개되었습니다. 미국 LA서부 베버리 힐스에 있는 대저택으로써 이 집은 침실 29개와 수영장 3개에 영화관까지 갖추고 있어서 우리 돈 1,520억 원을 호가하는데 벌써부터 돈 많은 몇 사람이 군침을 삼킨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한순간에 다 지나가기 때문입니다(요1서 2:15-17).
2) 평안을 갈망하는 사람들
집은 사람들에게 아늑하고 평안한 행복의 공간으로 생각되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죄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에는 구조적으로 평안이 없습니다. 오늘날처럼 여러 가지 공해와 재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몸도 마음도 지쳐있어서 안식을 줄만한 집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에는 사람들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교통과 생활여건이 좋은 곳을 선택하여 집을 장만하려 했지만 거기에도 문제가 따랐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조용하고 공해가 없는 곳을 선호하는 경향이 되었습니다.
요즈음 아랍에미리트연합 두바이의 ‘엑소모스’라는 잠수함 제작사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부호들로부터 자가용 잠수함 주문이 쇄도한다고 합니다. 한 척당 가격이 우리 돈으로 110억에서 735억 원이 호가하는 잠수함을 구입하여 바다 밑으로 내려가 즐기며 산다는 것입니다. 인공위성을 타고 지구 밖으로 나가 살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이 세상에 사는 것이 불안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3) 하늘의 집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천당(天堂)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입니다. 본문 말씀 2절에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의 집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집이 안전하고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거기 살게 되는 사람의 신분도 확실합니다. 계시록 21:1-4에 보면 그 집의 정경을 마치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의 아름다움에 비유하였습니다. 또 그 집에는 슬퍼하거나 눈물 흘릴 일이 없고 죽음도 없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집에는 속되거나 가증하거나 거짓된 것은 들어가지 못하고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계 21:27).
2. 영생입니다.
사람이 살아 가는 데는 의식주(衣食住)문제가 일차적인 과제로 인식되지만 그것은 삶을 편리하게 하는 수단일 뿐 그 전부는 아닙니다. 곧 좋은 집에서 잘 먹고 편하게 산다 하더라도 그것이 언제까지나 끝없이 지속될 수는 없습니다. 잠시 잠깐 지나가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오래 살고 싶은 소망을 가집니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1) 사람의 생명
성경은 인간 생명의 실존 문제를 가장 정확하게 나타내 줍니다.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연원(淵源)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창 2:7). 또한 그 생명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시간에 따라 소멸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전 3:1). 그뿐 아니라 생명이 머물러 있는 그 시간이 언제 인지 모르기 때문에 살아있는 시간에도 살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불안하고 허망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2:22에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하였습니다. 신약의 야고보는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였습니다(약 4:14). 구약의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고 하였습니다(시 90:10).
2) 영생의 도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은 좀 더 오래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진시황제(秦始皇帝)가 도처에 사람들을 보내서 불사약(不死藥)을 구해다 먹었다는 말이 전해 오는 것도 죽지 않고 살아보자는 욕망의 표현입니다. 지금은 의학이 발달함에 따라 옛날에 비하여 평균수명이 길어졌지만 그렇다고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된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죽음의 권세아래 있는 인간에게 영생의 소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곧 생명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주시고 이를 믿어서 영생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요 3:16). 요한복음 17:3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곧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3) 천당과 영생
고대 원시 사회에서부터 사람들은 영혼불멸(靈魂不滅)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도서 3:21에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불멸하는 영혼이 어떤 상태로 지내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 보면 세상에서 호화롭게 살았던 부자는 죽은 다음 음부에서 고통을 겪게 되고,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처지에 있었던 거지 나사로는 죽은 다음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낙원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습니다(눅 16:19-25). 사람들은 죽음 다음의 세계에서 어떤 상황이 될지 몰라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경우 천당의 복락을 보장 받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확신과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잠시 살고 끝나더라도 영원히 사는 천당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곳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최상의 환경을 갖춘 좋은 집에서 살더라도 누구와 함께 사느냐에 따라 행복의 지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곧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살지 못하고 사이가 나쁜 사람과 함께 오래도록 머물게 된다면 오히려 지옥 같은 고통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하늘의 집 천당에서 꿈에도 그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토록 살게 되는 소망이 있습니다.
1) 그리스도가 삶의 목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나그네와 행인 같은 세상을 살아가더라도 목적 있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마치 구약시대 애굽을 탈출해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직 약속의 땅 가나안을 목표로 하고 40년간 그 고달픈 광야 생활을 이겨 낸 것처럼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믿음의 생활을 경주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인생의 목표가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3:12에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한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의 어떤 유혹이나 시험이 와도 요동하지 않고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바른 길을 가게 됩니다. 히브리서 12:2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였습니다.
2) 사랑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가장 큰 조건은 사랑입니다. 참으로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있을 때 어떤 환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기쁘고 행복하게 하여 줍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가지는 사랑 속에는 어느 것도 완전한 것이 없습니다. 시간과 환경의 제약을 받습니다. 또 상황에 따라서 바뀌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가장 완전하고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아가페(α?απη)라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사랑의 진수를 일러 주고 있습니다(요1서 4:10). 성도는 이 사랑의 맛을 아는 자이기 때문에 항상 이 사랑을 동경하며 그리워합니다. 마치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애를 태우다가 병이 난 것처럼(아 5:8). 예수님의 사랑에 목말라 하며 그 사랑이 이루어 질 날을 소망하는 자들입니다.
3) 임마누엘의 행복을 누립니다.
여리고 성에 사는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신 후 너무나 행복에 겨워 마냥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는 여리고 세관의 세리장이요 재산이 많은 부자였지만 마음에 갈등을 가졌고 고민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뜻밖에 예수님이 자기 집을 방문하시고 그의 이름을 불러 주실 때 충격적인 행복에 사로잡히게 되고 완전히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눅 19:1-9). 예수님과 더불어 임마누엘의 삶을 사는 사람은 삭막한 세상에서도 항상 그리스도 사랑의 체온을 느끼며 최상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고후 5:14).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은 행복을 보장해 주시려고 하늘나라 아버지 집을 준비해 두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누릴 영원한 사랑, 영원한 행복을 소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출처/손상률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