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교훈으로 양육합시다   (딤전4:6)

4, 5세 가량 된 여자아이가 엄마와 함께 기차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자아이는 무례하고 불손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한 부인의 손에서 신문을 빼앗기도 하고 한 신사의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 안경을 만지작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엄마는 어떠한 주의도 주지 않았습니다. 여자아이가 조금 전에 신문을 빼앗았던 부인의 목 근처를 툭 건드렸을 때에도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야단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아이의 행동에 당황한 부인이 아이의 엄마에게 아이를 꾸짖어 주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젊은 엄마가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쳤습니다. "아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난 권위의식 있는 부모가 아니에요. 내 아이를 권위적으로 기르지는 않을 거란 말이에요! 우리 아이를 그냥 내버려두세요." 바로 그때 대략 열아홉 내지는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의 엄마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그 청년은 갑자기 아이 엄마의 얼굴에 침을 '탁' 뱉고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청년의 무례하고 우악스러운 행동에 대해 몹시 분개하며 입에 거품을 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버릇없는 놈 같으니! 내참 기가 막혀서, 너 같은 놈은 당장 고발해서 감옥에 처넣어야 해! 내가 지금 당장 차장과 경찰을 불러 너를 끌어낼 테다. 두고 보자." 그러나 청년은 아이엄마의 흥분한 협박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픽' 웃기만 했습니다. 그것을 본 아이의 엄마는 더 화가 나서 심한 욕설을 퍼부어 댔습니다. 청년은 점점 더 크게 웃으며 빈정거리는 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인, 도대체 뭘 원하십니까? 왜 나에게 소리 지르는 거예요? 나도 역시 권위적인 교육을 받지 않아 내 멋대로 하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그 아이의 엄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디럭스바이블)

바울 사도께서 디모데에게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서 해야 할일을 가르치면서 먼저 바른 진리로 다른 사람과 자신을 양육하라고 합니다.

'양육을 받으리라'(엔트레포메노스)는 '기르다'(엔트레포)에서 나온 말입니다. 문법적으로는 현재 수동태 분사형 입니다. 수동태의 사용은 선한 일군은 스스로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일하심에 의하여 양육을 받게 될 것을 보여 줍니다. 동사의 시제는 현재임은 동작의 발생시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작의 형태를 나타냅니다. 현재 분사형이 사용된 것은 동작이 지금 발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작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좋은 일군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말씀과 선한 교훈으로 끊임없이 쉬지 말고 계속해서 양육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깨우치며 양육합시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서 제시한 교훈들입니다. 바울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에 머물게 했는데, 그 이유는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을 경계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가장 신뢰할 만한 자였기에 바울이 자신을 대신하여 교회를 돌볼 것을 명하였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교훈을 전하는 자들은 신화와 족보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교회에 변론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교훈들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실천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교훈들은 오히려 교회의 분란을 조장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교훈이 아닌 것입니다. 거짓 교훈을 말하는 자들은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선생이 되기 위해 자신도 확실히 깨닫지도 못하는 내용으로 사람들을 가르쳐 미혹합니다. 이단자들의 거짓 교훈을 탄핵하고 경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른 교훈으로 성도들을 깨우쳐야 한다고 합니다.

'깨우치다'(휘포티데메노스)는 '아래에 놓다'(휘포티데미)에서 유래한 말로 깨우치다 이상의의 의미를 가진 말로 그대로 방치하면 거짓 교훈에 휩쓸리고 말 지체들을 올바른 교훈으로 가르치고 양육해야 한다는 뜻이 함께 합니다(옥스퍼드 원어 성경대전)

깨우치다는 말은 어떤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충고나 권고 제의 등을 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디딤돌에 비유됩니다. 성도들에게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교훈을 디딤돌처럼 성도들의 발아래 둠으로 스스로 딛고 거짓 교훈들을 넘어 가도록 만든 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세계적인 물리학자입니다. 하지만 그는 에디슨과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는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수학을 싫어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세계적인 수학자요 물리학자가 된 것은 지혜로운 그의 삼촌 덕분이었습니다. 그의 삼촌은 아인슈타인에게 강압적으로 수학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수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탐정 소설의 기법을 도입하였습니다.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물었습니다. “얘 여기 우리가 구하려고 하는 답을 엑스(X) 라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이 엑스를 찾는 탐정이 되는 거다. 그리고 그 단서들은 문제를 자세히 보면 나와 있어. 그러니 문제를 자세히 읽어 보렴. 자 이제 단서가 보이지 그럼 엑스를 추적해 보렴” 이후 아인슈타인은 수학에 흥미를 갖게되고 비약적인 진보를 보여 우리가 잘 아는대로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된 것입니다.(옥스퍼드 원어 성경대전)

어느 분의 간증문을 보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집이 시골이라 야간자율학습 때문에 학교근처에서 자취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나같이 집이 먼 친구들이 여럿 되었습니다. 학교주위엔 과수원들이 많았습니다. 사과, 복숭아 등등.. 학교 가는 길옆의 복숭아 과수원을 우리들은 매일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밤 12시 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오던 어느 날, 복숭아 서리를 하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자취생들 모두 동의한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우린 곧 작전(?)에 들어갔습니다. 투입조, 감시조 작전은 새벽 2시가 넘어서야 무사히 완료되었습니다. 자취방에 모여 작전에서 얻은 복숭아를 모두들 숨을 죽이며 먹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등교 길, 어김없이 어젯밤 작전을 수행했던 그 복숭아 과수원을 지나가는데, 주인아저씨가 비를 맞으시며 복숭아를 따고 계셨습니다. 설마 들켰을까 하면서도 우리들은 우산으로 얼굴가리고 지나쳤습니다. 근데 비상사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복숭아를 따고 계시던 주인아저씨가 갑자기 "학생들!" 하고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요즘엔 설이하면 밭 전체를 변상해 한다는 생각도 들고, 학교에서 징계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짧은 시간인데도 나의 뇌리를 스쳐갔습니다. 눈앞이 막막했다. 우린 태연한척, 살며시 아저씨를 보았습니다. 아저씨를 똑바로 볼 순 없었습니다. "이리들 와봐!" 초긴장 상태, 머리가 삐쭉삐쭉 섰습니다. 하지만 아저씨의 말은 예외였습니다. "학생들 공부하는데 힘들지, 저기 내가 따 논 복숭아들 몇 개씩 집어들 가." 난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남의 물건에 손을 대본적이 없습니다. 복숭아 과수원 아저씨 그때 저의 죄(?)를 사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제 인생, 깨달음의 복숭아를 정말 잊지 못한답니다.'(인터넷 정보클럽)

믿음의 말씀으로 양육합시다.

'선한 교훈'은 거짓 교훈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교훈들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말씀'은 기독교 진리의 참된 복음의 말씀입니다.

복음만이 참 평안을 줍니다.

어떤 인텔리 부인이 자기 남편의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어 좋은 주택을 짓고 고급 가구들을 들여다 놓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최고급으로 취하여 보았습니다. 그것을 할 때까지는 즐거웠으나 그것을 다한 후에는 할 일이 없었고 공연한 생각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다가 내가 병들면 어떻게 하나, 이제 밤이나 낮이나 이런 생각으로 인하여 노이로제에 걸렸습니다. 이제 짜증이 났습니다. 밥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잠을 잘 수도 없었습니다. 정말 병이 났습니다. 자기도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는 점점 쇠약해져 갔습니다. 그때에 이웃 친구로부터 예수님을 믿으라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교회에 나왔습니다. 설교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정말 그는 이제 죽어도 좋다는 믿음이 들었습니다. 그는 이미 병이 낫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제 올바른 인생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는 인간을 찾은 것입니다. 그는 지금 교회의 충성된 일꾼이 되었습니다.(인터넷 정보클럽)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곳입니다. 세상 학문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양육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르치는 일에 많은 비중을 두어야 합니다. 정말 교회에서 가르쳐야 할 것은 복음이 중심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 5:39)라고 합니다.

복음만이 영원한 천국의 기업을 누리게 합니다.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으라는 엘리사의 명령에 수리아의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이 노한 것은 그 명령이 너무 단순하여 어리석게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 보혈에 죄를 씻는다는 복음도 예나 지금의 안다는 사람들 중에는 어리석게 보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전하는 자가 적고 또 전할지라도 시대의 인심에 영합하도록 개조하거나 재 진술하여서 전하려는 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복음은 헬라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모든 신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당시에 교회의 수는 적었고, 외관상 미약한 세력이었지만 그 후 도처에서 나타났으니 유대인의 제도의식, 헬라인의 학술, 로마인의 법률 앞에서인들 부끄러운 것이 없었습니다. 복음은 그 단순성으로서 그 위대함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그의 학교 교문 위에 쓰기를 "기하학에 재능이 있는 자들만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다" 라고 하였으나 예수는 가라사대 "어린아이 같은 자라야 능히 천국에 들어온다" 라고 하였습니다.(인터넷 정보클럽)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되심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부 하나님이 곧 우리의 아버지 되심과 보혜사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가르치며 양육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많이 가르친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다면 아무 것도 가르치지 못한 것이 되고 잘못 양육한 것입니다.
2차대전 때 프랑스의 한 병사가 가슴에 총탄이 박혀서 그것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의사에게 하는 말이 '조금 더 깊이 째 보십시오. 내 가슴속 깊이 조국이 들어 있습니다.'라고 했답니다.
가슴 깊은 곳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가슴속에 예수님이 깊이 새겨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오직 예수뿐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보여 주는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야 합니다.
딤후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하였습니다.
지금 무엇으로 가르치느냐에 따라 장래가 결정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하고, 디모데와 같이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도록 해야 합니다. 디모데가 훌륭한 신앙인이 된 것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할 시작할 때부터 성경을 가르쳐 양육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요절 암송이 중요합니다. 요절 암송을 해야 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에 새기도록 암송을 시켜 놓으면 세상을 살아갈 때에 그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선한 행실로 양육합시다.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네가 좇은'(파레콜루데카스)은 '옆에서 바싹 따르다', '어떤 일에 열중하다'라는 의미이나 주로 친밀하게 뒤따르다 라는 강조적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합니다.
선한교훈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매우 친근하게 여기며 따라 왔던 것입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딤후 1:5)고 한 말씀대로 디모데가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할머니를 통해서 받아 온 가르침에 합당한 선한 삶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을 훈련시키며 가르쳐 양육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도록 말씀대로 살도록 가르쳐 양육해야 합니다. 생활의 훈련을 가르쳐 양육해야 합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처음에 길을 어떻게 들였느냐에 따라 살게 됩니다.
옛날 어느 농촌에 가난한 농부 아버지와 아들이 살았는데 평생소원이 자기소를 갖고 농사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꿈이 이루어져 송아지 한 마리를 샀습니다. 송아지는 자라 중소가 되었고 봄이 되어 소를 길들이기 위해 부자가 밭으로 갔습니다. 아버지는 소를 이끌고 아들은 쟁기를 잡았습니다. 아들이 쟁기를 잡고 "아버지 갑시다"하고 나아갔습니다. 왼쪽으로 너무 간다 싶으면 "아버지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너무 간다 싶으면 "아버지 왼쪽으로"하며 힘들게 밭을 갈았습니다. 한 해의 농사는 아버지가 이끌고 억지로 농사를 지었는데 다음해 소는 큰 소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혼자서 잘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밭으로 갔습니다. 쟁기를 지워 "이랴!"하니 소가 꼼짝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랴! 이놈의 소야"하며 매질을 하여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한 아들이 "아버지 갑시다"하니 그제야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소를 몰며 밭을 갈 때에 "아버지 갑시다" 아버지 오른쪽" 아버지 왼쪽으로" "아버지 서이소"하며 밭을 갈았다고 합니다(딤후 3:14).

선행이 모두에게 유익이 됩니다.
시골에 살고 있는 한 농부가 하루는 동네 대장간에 삽과 호미를 보수하려고 가지고 갔습니다. 다음 날 맡긴 것을 찾으러 갔더니 대장간에서 둘 모두 새 것처럼 고쳐놓았습니다. 농부가 너무 감사해 즐거운 마음으로 돈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날은 대장간 주인이 돈을 안 받겠다고 했습니다. “별 것 아니니 오늘은 서비스로 그냥 가져가십시오.” 그 농부는 잘 수리해주었는데 그냥 갈 수는 없다고 수리비를 내려고 고집했습니다. 그랬더니 대장간 주인이 말했습니다. “보시오. 제가 기독교인 것을 잘 알지 않소! 가끔 한번씩 내 영혼을 위해 선한 일을 조금은 하게 놓아두시오” 간단한 말이지만 놀라운 설교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를 위해, 또 이웃들을 위해 종종 선을 베풂으로서 우리 영혼을 즐겁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웃을 위해 대가없는 작은 선을 행하면 내 영혼에 이롭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에게 선대하는 자들을 위해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처럼 하느니라?”(눅 6:33).

선행이 다함께 승리하는 길입니다.
미국의 수도가 워싱턴으로 결정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당시 워싱턴은 도로포장이 되지 않아 비가 오면 도시가 온통 진흙탕으로 변했습니다. 도로는 널빤지를 깔아놓아 겨우 한 사람이 지나다닐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평소 라이벌 의식이 강했던 두 하원의원이 좁은 길에서 마주쳤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직설적인 란돌프 의원은 팔짱을 낀 채 버티고 서서 그레이 의원을 향해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나는 악당이나 위선자에게는 길을 비켜주지 않는 답니다.” 그러자 예의바른 그레이 의원이 정중하게 인사한 후 말했습니다. “나는 악당에게는 언제나 길을 비켜준답니다.” 그는 구두를 벗고 흙탕물로 내려서서 란돌프가 지나가도록 배려했습니다. 그 순간 란돌프의 얼굴이 상기되고 말았습니다.

악으로 악을 이기면 승자와 패자로 나뉩니다. 그러나 선으로 악을 이기면 모두 승자가 됩니다. 예수님이 인류에게 가르쳐주신 승리의 열쇠는 사랑입니다.

교육하고 선교하며 봉사하는 교회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교회가 되되 선한 교훈으로 양육하고 양육받기 위하여 깨우치며 믿음의 말씀으로 선한 행실로 양육합시다.
출처/강성찬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