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사도행전 1:4)

<本文>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1:4)

<序言>  
  예수님은 사도(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떠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4절).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보혜사(保惠師) 성령(聖靈)을 가리킵니다 (요14:16, 15:26, 16:7). '보혜사'의 한문 표기 保惠師는 '은혜를 보증해 주거나 보전해줄 스승'이라는 의미입니다. 헬라어는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s)로서 곁에서(παρα) 돕기 위해 부름받은 자(κλητοs)라는 의미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돕는 자를 의미하는 Helper (NASB), 상담자를 의미하는 Counselor (RSV, NIV), 위로자를 의미하는 Conferter (KJV)로 번역했습니다. 이 성령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나는 오순절에 임한 보혜사 성령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예수님의 탄생,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 성령의 강림, 종말, 예수님의 재림, 최후심판 등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계획에 속한 사건입니다. 그런 구속 역사의 일련의 흐름 속에서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을 통해 성령의 강한 권능으로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계획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 사명을 감당하게 하려고 (마28:20, 행1:8)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4절).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이전에도 제자들이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경험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을 이루기 전에는 성령이 성취되지 않은 복음 진리로 역사해서 복음 효과가 강력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 구속을 이룬 다음에는 완성된 진리로 역사하므로 강력한 효과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령의 권능을 받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안 계신 곳이 없지만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복음전도와 교회확장을 위해 역사할 성령은 예루살렘 임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눅24:46-49) 예루살렘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本論>

     1. 성전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솔로몬왕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웠습니다 (대하3:1). 예루살렘에는 중앙 성전이 있었기 때문에 제사가 있는 곳입니다. 구약시대에 언약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도 이 곳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린 모리아산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창22:2,14). 성전이 의미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는 성전 예배를 사모합니다 (요4:19-20).

   주일날... 사오정이 늦잠을 잤습니다. 서둘러 예배를 보러 가면서.. "하나님... 늦지 않게 해주세요... 늦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교회에 겨우 도착.. 하지만 계단을 오르면서 그만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사오정 왈.. "하나님.. 그렇다고 미실 필요는 없잖아요..? 했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는데 교회 뒤쪽에 앉은 두 명의 10대 학생이 계속 키득 거리며 떠들어 주위 사람들의 눈총을 받고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목사님이 설교를 중단하고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거기 두 사람은 설교를 전혀 듣지 않고 있군요" 학생들은 이내 조용해졌고 설교도 계속되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목사님이 교인들과 인사하는데 10명도 넘는 성도들이 목사님께 설교 시간에 졸아서 죄송하다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설교가 유명하기로 소문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너무 설교가 긴 나머지 성도님들이 주무시는 일이 허다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소문이 다른 교회에도 들렸고 이 사실이 궁금한 나머지 설교를 들으러 모 교회 김 집사님께서 이 교회를 방문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설교를 단 15분 안에 끝내시는 겁니다. 목사님 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어제 4시간에 걸쳐 설교를 자필로 쓰면서 준비를 했는데 저희집 강아지가 아침에 그만 그 설교원본을 가지고 도망가 버렸지 뭡니까!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씀을 마치시고 단상을 내려 오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김집사님께서 급히 목사님을 따라가 다급한 목소리로 목사님! 목사님! 왜 그러십니까? 모 교회 김 집사님 왈 "목사님 죄송하지만 한 달만 저희 교회에 그 개를 빌려 주실순 없나요?"라고 했다고..  우리는 너무나 예배의 사모함이 없습니다.

  시편137:1-5절에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고 했습니다.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유다 백성들이 얼마나 예루살렘 성전을 사모했든지 바벨론 여러 강가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수금을 타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사람들이 노래를 청하므로 부르지 않기 위해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돌아가 성전에서 예배하며 수금으로 찬양을 해야 할 텐데 돌아갈 수 없는 형편을 생각하며 앉아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수금타는 재주는 잊을지라도 예루살렘을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잊거나 예루살렘보다 다른 것을 더 즐거워 하면 입이 입천장에 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편84:1-5,10에는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했습니다. 기자의 성전 사모하는 마음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성전의 집을 짓고 사는 참새나 제비를 부러워 하고 성전의 문지기를 부러워 하고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고 성전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도 좋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광경을 보고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2. 말씀을 떠나지 말라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구약시대 때부터 예루살렘을 여호와의 말씀이 나올 곳으로 예언되었습니다 (사2:3, 미4:2). 예루살렘은 언약적, 구원사적으로 진리의 중심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을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고 깨달은 말씀 특히 자신에게 감동되는 말씀은 아무리 자신에게 손해가 되고 죽을 위험이 닥쳐도 세워 가야 합니다.

  다니엘3:17-18에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고 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바벨론에 사로 잡혀 가 있는 동안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이 시날 평지에 금신상을 만들어 놓고 모두 잘하게 했을 때 하지 않았습니다. 절하지 않는 자는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집어 넣어 죽인다는 협박을 받고도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다가 풀무불에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건져 주실 것을 바라보았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절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많은 말씀 중에 시대적으로 교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지키기를 원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순교적 정신으로 세우고 지켜 가야 합니다.  

     3. 사명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제자들에게 사명이 부여된 곳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한 다음 성령을 보내 주시기로 약속한 곳입니다 (본문). 그래서 복음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하고 성령의 권능을 받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사역과 위치와 직분을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카를 힐티는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책에서 행복의 원천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는 날이다”라고.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22세 때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온 세계가 무너진다 해도 내가 꽉 붙들고 놓을 수 없는 이념, 내가 그것을 위해서 살고 그것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사명을 나는 찾아야 한다”

  에스더4:14-16에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에스더가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회답하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고 했습니다. 바사(페르시아)에 사로 잡혀가 있는 자들이 아말렉 족속의 후예 하만의 궤계로 모두 하루 아침에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 백성의 구원을 위해 에스더와 모르드개와 백성들이 제각기 해야 할 일들이 있었습니다. 에스더는 왕후가 되었으므로 죽을 각오를 하고 아하수에로왕에게 나아가 하만의 궤계를 알려야 했습니다. 모르드개는 수산 궁에 있는 있는 백성들을 모아야 했고 수산궁의 백성들은 금식3일 동안 금식을 하며 에스더를 위해 기도해야만 했습니다. 바울의 정신처럼 사명을 위해서 생명 내 놓아야 합니다 (행20:23-24).

<結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있는 비전을 떠나지 않는 것은 당시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기가 쉽지 않았던 것처럼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환난과 고난이 와도 그 곳을 떠나지 않아야 성령의 권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2:11-12"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빌립보서3:10-11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출처/차용철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