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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사도행전 5:12~16)
구약시대에 그림자는 시간을 가리키는데 사용하였습니다. 또 그림자는 재앙과, 재난을 피하는 장소를 말하기도 했고, 우리 인생이 짧고 빠르게 지난다는 것을 비유할 때 그림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림자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많은 병자들이 베드로의 그림자를 접할 때 병든 몸이 나음을 입는 신비로운 역사가 베드로의 그림자를 통하여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신비로운 역사를 일으킨 그림자에 대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림자라는 것은 본체가 아니고 본체에서 파생된 하나의 부산물입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없기에 무게도 없습니다. 우리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실체가 없기에 그림자는 무가치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런 값어치 없는 그림자 통해서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은 다양한데, 오늘 본문에서는 보잘 것 없는 그림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서 인류를 구원하는 귀한 사역을 행하셨는데 아브라함이 젊고 총명할 때 귀한 도구로 쓰신 것이 아니라 이미 정년이 지난 나이 75세에 불러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출애굽 단시 홍해 바다가 육지같이 갈라지게 하실 때 하나님이 사용한 도구는 바로 모세의 손에 든 마른 지팡이였습니다. 정말로 보잘 것 없는 지팡이, 그림자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지팡이를 사용하셔서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다가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만나서 그 소경을 고쳐주셨는데 무엇을 가지고 고쳐줍니까? 침과 진흙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침과 진흙은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열두 해 혈우병 걸린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그의 병이 깨끗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실체가 아닌 옷자락, 바로 예수님의 그림자를 만진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나타나는 중요한 포인트는 본체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많은 역사들이 본체가 아닌 그림자와 같이 보잘 것 없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섬기는 자를 들어 쓰십니다. 자기가 1인자라고 머리를 드는 자들은 하나님이 절대로 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섬기는 자를 들어서 쓰십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왜 들어 쓰셨습니까? 여호수아가 모세를 잘 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엘리사를 들어 쓰셨습니까? 엘리사가 엘리야를 잘 섬겼기 때문에 엘리사를 들어 쓰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디모데를 들어 쓰셨습니까? 디모데가 바울 사도를 잘 섬겼기 때문에 디모데를 쓰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누구를 들어 쓰시느냐? 섬기는 자를 들어 쓰십니다. 섬기는 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섬기는 자가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내가 섬김을 받겠다고 머리 세우는 사람은 절대로 교회에서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겸손하게 교회를 섬기고, 교회를 섬기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들어 쓰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그림자가 사람을 치료한다는 생각을 꿈에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그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열심히 날마다 섬겼습니다. 날마다 섬기는 생활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베드로의 그림자가 사람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어떤 목표를 두고서 그 목표대로 살아야 되겠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보다는 우리가 날마다의 삶을 통해서 열심히 바르게 하나님을 섬길 때 그 삶의 여파로 나타나는 일들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오늘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나를 산 제물로 바치는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를 축복해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 단지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고 바른 예배를 드리겠다는 이 목적 하나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삶을 반영하는 그림자가 항상 우리를 따라다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의 삶의 모습을 반영된 그림자를 우리는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냄새, 혹은 삶의 그림자가 과연 베드로의 그림자처럼 사람을 살리는 그림자냐! 사람을 죽이는 그림자냐!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오늘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정말로 우리 한신교회를 위하는 것이냐! 한신교회를 깨뜨리는 것이냐!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살면서 나의 말하는 것, 나의 행동하는 것, 나의 삶이 정말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인가를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의 신앙은 어떤 자리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신앙이었습니다. 탄압과 핍박에도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세속화된 신앙을 갖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분명하고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항상 우리에게 엄습하는 것이 있는데, 세상적인 논리를 교회에 적용 시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논리는 교회에서 적용될 수는 있지만 우리는 세상적인 논리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가야 됩니다. 교회가 항상 세상적인 논리로 나가면 교회는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세상의 논리와는 때로 어긋날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나아갈 때 바로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한신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섬기는 자로서, 그림자로서, 제2인자로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특별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게 목적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예배를 드릴 때 나타나는 향기와 그림자가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로 만드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한 신앙을 가진 자만이 그림자를 낼 수 있고 세상과 타협하는 자는 절대로 그림자를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바르게 서서 분명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위대한 한신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강용규 목사 설교 중에서
구약시대에 그림자는 시간을 가리키는데 사용하였습니다. 또 그림자는 재앙과, 재난을 피하는 장소를 말하기도 했고, 우리 인생이 짧고 빠르게 지난다는 것을 비유할 때 그림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림자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많은 병자들이 베드로의 그림자를 접할 때 병든 몸이 나음을 입는 신비로운 역사가 베드로의 그림자를 통하여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신비로운 역사를 일으킨 그림자에 대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림자라는 것은 본체가 아니고 본체에서 파생된 하나의 부산물입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없기에 무게도 없습니다. 우리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실체가 없기에 그림자는 무가치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런 값어치 없는 그림자 통해서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은 다양한데, 오늘 본문에서는 보잘 것 없는 그림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서 인류를 구원하는 귀한 사역을 행하셨는데 아브라함이 젊고 총명할 때 귀한 도구로 쓰신 것이 아니라 이미 정년이 지난 나이 75세에 불러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출애굽 단시 홍해 바다가 육지같이 갈라지게 하실 때 하나님이 사용한 도구는 바로 모세의 손에 든 마른 지팡이였습니다. 정말로 보잘 것 없는 지팡이, 그림자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지팡이를 사용하셔서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다가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만나서 그 소경을 고쳐주셨는데 무엇을 가지고 고쳐줍니까? 침과 진흙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침과 진흙은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열두 해 혈우병 걸린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그의 병이 깨끗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실체가 아닌 옷자락, 바로 예수님의 그림자를 만진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나타나는 중요한 포인트는 본체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많은 역사들이 본체가 아닌 그림자와 같이 보잘 것 없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섬기는 자를 들어 쓰십니다. 자기가 1인자라고 머리를 드는 자들은 하나님이 절대로 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섬기는 자를 들어서 쓰십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왜 들어 쓰셨습니까? 여호수아가 모세를 잘 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엘리사를 들어 쓰셨습니까? 엘리사가 엘리야를 잘 섬겼기 때문에 엘리사를 들어 쓰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디모데를 들어 쓰셨습니까? 디모데가 바울 사도를 잘 섬겼기 때문에 디모데를 쓰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누구를 들어 쓰시느냐? 섬기는 자를 들어 쓰십니다. 섬기는 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섬기는 자가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내가 섬김을 받겠다고 머리 세우는 사람은 절대로 교회에서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겸손하게 교회를 섬기고, 교회를 섬기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들어 쓰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그림자가 사람을 치료한다는 생각을 꿈에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그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열심히 날마다 섬겼습니다. 날마다 섬기는 생활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베드로의 그림자가 사람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어떤 목표를 두고서 그 목표대로 살아야 되겠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보다는 우리가 날마다의 삶을 통해서 열심히 바르게 하나님을 섬길 때 그 삶의 여파로 나타나는 일들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오늘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나를 산 제물로 바치는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를 축복해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 단지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고 바른 예배를 드리겠다는 이 목적 하나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삶을 반영하는 그림자가 항상 우리를 따라다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의 삶의 모습을 반영된 그림자를 우리는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냄새, 혹은 삶의 그림자가 과연 베드로의 그림자처럼 사람을 살리는 그림자냐! 사람을 죽이는 그림자냐!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오늘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정말로 우리 한신교회를 위하는 것이냐! 한신교회를 깨뜨리는 것이냐!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살면서 나의 말하는 것, 나의 행동하는 것, 나의 삶이 정말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인가를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의 신앙은 어떤 자리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신앙이었습니다. 탄압과 핍박에도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세속화된 신앙을 갖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분명하고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항상 우리에게 엄습하는 것이 있는데, 세상적인 논리를 교회에 적용 시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논리는 교회에서 적용될 수는 있지만 우리는 세상적인 논리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가야 됩니다. 교회가 항상 세상적인 논리로 나가면 교회는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세상의 논리와는 때로 어긋날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나아갈 때 바로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한신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섬기는 자로서, 그림자로서, 제2인자로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특별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게 목적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예배를 드릴 때 나타나는 향기와 그림자가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로 만드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한 신앙을 가진 자만이 그림자를 낼 수 있고 세상과 타협하는 자는 절대로 그림자를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바르게 서서 분명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위대한 한신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강용규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