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하시는 하나님  (창20:1-18)

한 젊은이가 밝은 가로등 밑에서 뭔가를 부지런히 찾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노인이 물었지요. “젊은이 무얼 그렇게 열심히 찾는가?” “네. 지갑을 잃어 버렸어요.” “이렇게 밝은 가로등 밑에서 지갑 하나를 못 찾아?” “사실 지갑은 저 어두운 구석에서 잃어버렸거든요.” “그러면 거기서 찾아야지 왜 여기서 찾고 있어.” “거기는 너무 어두워 밝은데서 찾으려고요.”

어리석은 사람이지요. 이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실수 할 때가 있고 위기에 직면할 때도 있습니다. 신앙의 추락을 경험할 때가 있는가 하면 상심의 쓴맛을 맛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할 때 어디 가면 회복되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의 자리에 오지 않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펼쳐 영적인 힘과 지혜를 얻으려하지 않고 허우적거리며 세상적 해결책만 찾으려 합니다. 그러다 더 깊은 상처, 더 큰 위기, 더 큰 아픔을 겪는 어리석음을 범할 뿐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아야 할 곳에서 찾지 않고 엉뚱한 곳에서 찾으려 하는 어리석은 젊은이와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은혜 받은 자리를 떠났을 때 어떤 위기가 닥쳐오는가 그리고 그 위기는 우리에게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가 하는 것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입니다.

창세기는 모두 50장으로 된 책으로 그중 12장부터 25장까지 무려 열 네장을 아브라함이야기로 할애를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아브라함의 나이를 알려주는 구절이 몇 곳 있습니다. 12장 4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에 그의 나이 75세였습니다. 16장 마지막 절에 보면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이란 아들을 얻었을 때에 86세였습니다. 그리고 한 절을 넘어가 17장 1절에 그의 나이 99세 때에 전능하신 “엘 샤다이” 하나님이 찾아와 약속의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단 한절 사이에 무려 13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쭉 아브라함의 나이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가 21장 4절에 이삭이라는 아들을 얻을 때에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7-21장, 무려 5장이 1년이라는 시간 안에 일어난 사건들이었다 하는 것을 말해줍니다. 열 네장 가운데 다섯장이 1년내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 아브라함의 인생여정 신앙의 길이 굉장히 급박한 흐름을 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 급박한 흐름 가운데 오늘 본문 20장이 서 있습니다.

20장의 문을 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말씀 중 “거기”가 어디일까요? 바로 앞장인 19장에 보면 롯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을 뿐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18장을 찾아야 겠지요? 18장에서 아브라함은 마므레 땅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거기”는 바로 마므레 땅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자리, 하나님을 경험했던 자리, 하나님과 아름다운 교제와 친목을 나누었던 복된 자리, 그곳을 떠났다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돔 고모라가 멸망당하는 것을 목격하며 아브라함은 낙심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므레 땅에 살고 있는 여러 부족들과 갈등이 있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사업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아브라함은 그곳을 떠납니다. 그리고 이방 땅 그랄에 와서 거류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실패의 시작이었습니다.

II.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

이 실패가 불러온 사건이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그에게 약속의 땅을 줍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인생길을 가다, 신앙의 여정을 걷다가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말씀을 붙들고 놀라운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 말씀의 땅, 은혜의 땅에도 기근은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기근이 찾아오는 바로 그때 그 땅을 떠나고, 말씀을 떠나고, 예배의 자리 떠나면 그것은 곧 중대한 실수를 범하고 실패의 자리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기근이 들자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갑니다. 거기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 하다가 큰 봉변을 경험한다는 얘기가 1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20장에 그는 동일한 실수, 동일한 실패, 동일한 봉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마므레를 떠나 그랄 땅으로 갔을 때에 이 무서운 실패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영국의 작가 키폴링이란 사람은 말했습니다. “바보는 불에 덴 손가락을 다시 불속에 집어넣어 본다.”

우리도 그런 바보가 될 수 있습니다. 실수를 반복하고, 실패의 자리에 넘어지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아브라함, 곧 나 자신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24년 전 아브라함은 동일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후 24년이란 세월 동안. 많은 영적인 경험을 했습니다. 인생의 연륜도 쌓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실수를 범하고 있는 아브라함입니다. 신앙의 연륜과 인생의 연조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도 실수합니다. 허다한 시련을 겪으며 많은 경험을 했던 사람도 또 다시 실패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멸망을 지켜보고서도 그 불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이 어리석은 인생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때 하나님께서 실수하는 아브라함을 어떻게 했습니까? 버리셨나요? 폐기처분 하셨나요? 아니요. 친히 찾아오셔서 아브라함을 회복시키고 치료하시고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실수하는 인간?치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III. 치료하시는 하나님

인간은 수시로 실수를 반복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폐기처분하시거나 혹은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일으켜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인생은 날마다 넘어짐을 경험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찾아오십니다. 인생은 날마다 상처를 경험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친히 찾아오셔서 우리를 치료해 주십니다. 동일한 실수를 범해도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젊은 아브라함의 실수도 하나님은 용서하셨습니다. 늙은 아브라함의 실패도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괜찮은 그랄 왕 아비멜렉이 나옵니다. 이방인 통치자 아비멜렉은 히브리 족장 아브라함보다 선하게 등장합니다. 그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을 가지 왕으로 묘사됩니다.(5절) 하나님께서도 그가 “온전한 마음”을 가진 왕으로 인정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6절). 오히려 택함을 받은 아브라함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편에 서서 아비멜렉에게 경고를 발하고 실패한 아브라함을 회복시키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윤리적인 안경을 쓰고 들여다 보면 본문이 던지는 메시지를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구약학자들은 오늘 본문을 보면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 누구의 성품이 더 좋으냐 하는 윤리적 잣대를 들고 접근하면 아무 영적인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구속사적인 안목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구원하시고, 그들을 어떻게 보호하시고 어떻게 온전한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시는가 하는 안목으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구약 성경학자 폰 라드(von Rad)는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언제나 역사 속에 간섭하시고 개입하신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인생의 청사진, 역사의 경륜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든지 역사의 현장에 간섭하시고 개입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오늘 본문이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구약학자인 베스트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많은 약점과 허물과 실수를 저지름에도 불구하고 한 번 구원하시기로한 당신의 백성은 반드시 구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실수하는 아브라함을 치료하시기 위하여, 실패한 아브라함을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어떻게 간섭하시는가 하는 이야기가 3절부터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 밤에” 부정관사가 쓰인 ‘어느날 밤’이 아니라 정관사가 쓰인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 밤에” - 정확하고 신속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의 아픔의 현장에 간섭하고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필요로 할 때가 있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려야 할 때가 있지요.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괴로워할 때가 있지요. 하나님 날 좀 도와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어야 할 때가 있지요. 아무도 나를 도와줄 이 없는 인생의 절박한 상황 속에 빠져들 때가 있지요. 하나님이 나를 떠나셨을까? 하나님이 나를 잊어버리신 것은 아닐까? 의심하며 외로워할 때가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신속하게 찾아오실 것입니다. 정확한 때에 가장 적절한 때에 내게 찾아오셔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사라를 범하면 네가 죽는다” 무서운 경고를 발하고 계십니다. 내 자녀 건드리면 너 죽어. 내 백성 해치면 너 죽어. 내 종들 건드리면 너 죽어.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 정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까닭없이 편애하시는 하나님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을 편들고 아브라함을 꾸중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수를 반복하고 약점 많고 허물 많은 아브라함 편에 서서 아비멜렉을 꾸중하십니다. 편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기 자녀들이 아파할 때 하나님이 함께 아파하십니다. 자기 자녀들이 인생 살아가다 당황한 상황에 부딪힐 때에 아버지도 당황하시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울 때에 어머니가 먼저 우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당황할 때 하나님께서 더 당황해 하시며 아브라함의 편에 서시고 사라를 돌보고 계십니다. 편애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시지요. 사라와 아브라함과 한 가족임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때 아비멜렉이 항변합니다. 제가 잘못한 것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누이라 했고 사라도 자기 오라버니라고 했습니다. 내 땅에 들어온 아브라함의 가족을 후대하고 저들을 귀인으로 영접했을 뿐입니다. 우리 부족의 관습에 따라 우리에게 찾아온 사람들과 혼인관계를 통하여 동맹을 맺으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그런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하십니까?

그런 아비멜렉에 대해 6절은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보십시요. 사라를 범하는 것은 내게 범죄하는 것이니라. 사라의 위기는 하나님의 위기였습니다. 사라의 아픔은 하나님의 아픔이었습니다. 지금 사라는 임신하여 그 몸 속에는 이삭이 자라고 있습니다. 이삭은 약속의 씨입니다. 말씀의 씨앗입니다. 그 이삭의 혈통을 타고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시게 될 것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할머니 사라를 통해 이삭이 태어나듯 처녀 마리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를 이 땅에 보내실 것이기 때문에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행여나 그 약속의 씨앗이 부정케 될까봐 하나님께서 신속하게 간섭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라의 아픔은 내 아픔이야. 사라의 상처는 나의 상처야. 사라를 범하는 것은 나를 범하는 것이며 내게 범죄한 것이니라.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아비멜렉은 어떻게 살아날 수 있을 것인가? 7절은 아비멜렉이 살 수 있는 길을 보여 줍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봉변을 당하고도 실수를 반복하는 아브라함을 바라보면서, 초라하고 못난 성품, 변화될 줄 모르는 인격,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아브라함을 바라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만약 내가 하나님이었다고 한다면 화를 내도 크게 냈을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웃긴다. 당장 믿음의 조상 끝이야! 복의 근원? 복의 근원 다 메말라 비틀어진 후에 복의 근원 해! 너하고 나하고 이제 끝장이다. 너한테 질렸다. 포기한다. 그랬을 텐데 하나님께서 전혀 그렇게 말씀하시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품에 안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약점 때문에 우리의 실수 때문에 실패 때문에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선지자라” 신구약 성경에 선지자란 이름을 얻은 첫 번째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복의 근원도 모자라서 믿음의 조상도 모자라서 그는 선지자는 복된 일컬음을 듣게 됩니다. 연약한 아브라함이 너를 위하여 기도하고 그의 기도로 네가 살아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저는 목사가 되었다는 것과 이렇게 귀한 성도님들 앞에서 날마다 말씀을 증거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자다가도 깜짝깜짝 놀랄만큼 감격해 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이 못난 종을 당신의 종으로 삼으시고 말씀의 사역자로 삼아주신 것을 감사하여 눈물을 쏟습니다. 부족한 종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그 비전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기도할때마다 울 때가 여러 번 있습니다. 감격스러워서 웁니다. 고마워서 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다 교회를 떠나고 난 후, 하루 일과를 마치면서 기도하다 보면 나의 못난 모습, 못난 성품과 인격 때문에 스스로 절망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교인들에게 거룩을 설교하지만 내 속에 무서운 유혹이 있는 것을 나는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마다 그런 내 모습이 부끄러워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 수가 없을 때가 얼마나 자주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어쩌면 좋습니까? 쩔쩔 맬 때가 여러번 있지요. 그때마다 하나님은 나를 한 번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나를 꾸중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너는 그래도 내 종이야. 너는 아직도 나의 소중한 종이야. 나의 소중한 성도야 나의 아들이야. 나의 소중한 목사야 하시며 항상 나를 그렇게 후대해 주셨습니다.

인생 살다보면 나는 왜 이 모양밖에 되지 않을까? 내가 집사인데 성도인데 하나님의 자녀인데 권사인데 장로인데 목사인데 내가 왜 이것 밖에 되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이 내게 실망하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고사하고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볼 때 못내 못마땅해서 쩔쩔매야 될 때가 있지요.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을 때가 얼마나 여러 번 있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번도 여러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아직도 너는 내 아들이다 말씀하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는 소중한 이 교회를 짊어지고 나갈 일꾼 집사야. 너는 이 교회의 어머니 권사야 기둥 같은 장로이고 목사아니냐. 너는 의인이야하고 인정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신에게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실망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라.” 그로인해 네가 살 것이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비멜렉이 와서 당신은 왜 내게 거짓말을 해서 내가 이렇게 곤혹을 치루게 합니까? 우리 집과 우리 나라가 큰일 날 뻔하지 않았습니까? 왜 그랬습니까 하고 묻자 아브라함이 사나이 대장부답게 고개를 푹 숙이고 손을 내밀면서 용서하시오 내가 이밖에 안됩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면 좋을텐데 오히려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첫 번째 이 나라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내가 죽을까 두려워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다니 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아브라함 자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지. 자기가 사람을 무서워하고 환경을 무서워하고 문제를 무서워해서 거짓말을 한 것 아닙니까?
둘째, 정말 내 아내는 내 이복 누이였습니다. 여동생과 결혼한 것이기에 여동생이라 한 것 뿐입니다. 그러니 거짓말은 아닙니다. 얼마나 궁색한 변명입니까?

세 번째,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순례자로서 이 나라 저 나라 이 땅 저 땅을 다니다 보면 많은 위기를 맞게 될 텐데 제 아내와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다른 나라에 가면 언제나 누이 행세를 하십시오.”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제 아내에게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러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 얼마나 큰 문제들이 야기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 복 덩어리들이 잘못 살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잘못 판단하면 주변의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습니다. 복 덩어리들,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잘못 살면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가 위기에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잘못된 판단으로 말미암아 성숙되지 못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어떤 위기가 찾아왔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씨앗이 큰 상처를 입을 뻔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송두리째 날아갈 뻔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줄 뻔 했습니다. 아비멜렉에게 큰 손상을 입힐 뻔 했습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교회는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가 바로 서면 민족이 바로 섭니다. 교회가 깨끗해지면 나라가 깨끗해집니다. 세상 사람들이 잘못하고 정치인들이 잘못하고 기업인들이 잘못 살아서 나라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잘못 섰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살았기 때문에 이 민족이 언제나 위기에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어떻게 사는가? 당신이 어떻게 기도하는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치유하십니다. 우리의 약점과 허물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이 민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한국교회 폐기처분 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실수를 덮어주실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로 하나님께서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실수하는 인간, 실수하는 공동체, 교회를 치료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늘 치료해 주셨습니다.


IV. 축복하는 아브라함

치료받은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을까요? 오늘 본문은 해피엔딩으로 그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결론이 17-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다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치료받은 아브라함이 이제는 다른 사람을 치료하기 시작합니다. 나 때문에 상처받은 아비멜렉을 기도로 치료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가 회복되어졌습니다. 이웃을 축복할 수 있는 축복의 권세가 회복되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 선지자의 직분을 멋있게 감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매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치료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회복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치료하시면 나도 내 자식, 내 가정, 내 교회, 내 민족 치료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오늘 만나시기 바랍니다.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여전히 인정해 주시는 그분의 손에 붙들려 담대히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이 민족이 이 사회가 여러분의 가정이 여러분의 이웃들이 회복되고 일어나고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출처/류영모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