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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믿음을 셈하라 (고후 13:5)
여러분의 믿음은 무게가 얼마나 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그 깊이와 길이와 무게가 얼마나 될 것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문제를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 무게가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모든 것을 재고 측량하고 무게를 달아볼 수 있는 장치들이 있습니다. 몸에 열이 나면 온도계를 사용하면 얼마나 심각한 열인지를 금방알 수 있습니다. 키가 얼마인지, 음주운전자의 음주량이 얼마인지, 자동차가 달릴 때 속도가 얼마인지 계측기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X-Ray로 몸속의 상태도 자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지구둘레의 길이도, 땅속의 깊이도, 바다의 깊이도, 태양열도, 빛의 속도도 잴 수 있습니다. 세상엔 무엇이나 재고 세고 달아볼 수 있는 기계들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은 재보고 달아볼 수가 없습니다. 자로 잴 수도 없고 저울로 달아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겉모습만 보고 믿음이 좋다 안 좋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모두가 믿음이 좋은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이 되니까 그는 넘어졌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께 찾아왔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중생도 모르느냐고 핀잔만 듣고 돌아간 사람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결정적인 순간에 나서서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해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겉에서 보고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자로 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의 믿음을 한번 재어 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믿음이 얼마나 깊은지를 재어보고 무게를 달아보고 믿음의 강도를 측정해 보고 우리의 신앙내용을 재어보았으면 합니다. 믿음을 측량하고 재는데 는 몇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이 기준에 여러분의 믿음을 한번 달아보고 재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는 “예수를 깊이 알고 믿는 일”입니다.
성경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너의 안에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합니다. 이 예수를 내안에 계신 줄 믿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예수를 알고 믿는 믿음이 내게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데 는 문제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회교도 유대교도 천주교도 통일교도 하나님을 믿는 일에 이의가 없습니다. 모두 똑같은 신앙으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문제가 나오면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종교들 간에도 이 예수 때문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일에 우선 몇 가지 신비한 내용을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아들 됨, 나의 구주됨, 동정녀탄생,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 재림 등입니다. 한결같이 이성적으로 믿기 어려운 조건들이고 영적인 도움이 없이는 믿기가 불가능한 일들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믿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부모의 은혜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보다 높다고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알기는 뭘 압니까. 그것은 아는 차원을 고백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자식들이 부모의 심정을 아주 깊이 알 때가옵니다. 그것이 언제인가 하면 애 낳아서 길러본 후입니다. 그것도 낳은 자식으로부터 지지리 속을 썩어보아야 실감나게 알게 됩니다. 그때 흘리는 눈물이 진짜 부모의 마음을 깊이 아는 고백의 눈물입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경시대회에서 1등한 것은 지식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고백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학자 칼 융이 “오늘 신앙인들은 너무 추상적으로 예수를 믿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는 하는데 기적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가 나를 구원하시고 나의 구세주 됨을 지식으로만 알뿐 체험되고 고백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어거스틴이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천국에 갔습니다. 천국의 입구에서 그는 천사로부터 너는 누구냐 하고 제지를 받습니다. 나는 어거스틴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천사가 자세히 보더니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네 머릿속에는 키케로의 철학만 가득 들어있다.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하고 호통 치며 내려가라고 하더라고 합니다. 놀라서 눈을 떠 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믿음이 좋은 줄로 알았습니다. 예수의 진실한 제자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충격이 컸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철저하게 회개하고 그 다음부터 예수에 대한 지식으로 마음을 채우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성자가 됩니다.
고백은 이런 것입니다. 찬송가 405장을 작사한 존 뉴턴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사다가 팔아먹는 노예선 선장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 아들 뉴턴도 커서 아버지와 함께 노예를 타고 다니며 노예들을 팔아먹던 사람입니다. 뉴턴이 아무 죄의식 없이 노예들을 팔아먹던 중 어느 날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읽게 됩니다. 그 책 속에서 그는 예수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경건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신앙과 믿음을 알게 되고 헌신의 삶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뉴턴은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합니다. 그리고 새 생명을 얻을 후에 쓴 가사가 405장 찬송 어메이징 그레이스입니다. 그는 죽은 후 묘비에 스스로 작사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존 뉴턴 그는 한때 방탕에 빠진 노예상인이었으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살다 갔노라“. 이것이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 고백 속에 가슴에 와 닿는 감동이 있고 살아있는 체험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오늘 신앙인들은 지식은 있는데 이 고백이 없습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를 나의 구주임을 가슴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믿음입니다.
두 번째는 “고난의 과정을 믿음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평소 믿음을 보고 그대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학생이 공부 잘하는 것은 가방이 무겁고 도시락을 두 개씩 싸가지고 다니며 밤샘 공부한다고 모두 공부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부 잘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 모습만 보고 그것으로 실력이 있다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학생이 공부를 잘하는지를 알려면 시험을 거쳐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시험을 주어보니까 그 믿음이 금방 측정되었습니다. 실력 있는 기업인가는 평소에는 잘 알 수 없었지만 IMF를 당해보니까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성격이 평소에는 좋을 수가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그 사람의 성격이나 인격을 알 수가 없습니다. 손해보는 일을 당하던지 불이익을 당해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 평안할 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그 믿음을 좋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려움을 당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때 물러나는 사람이 있고 더 다가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은 시련기를 맞아보아야 측정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믿음을 잘 표현한 사람은 요셉일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 애급에서 종살이를 합니다. 누명쓰고 옥살이하며 10년 세월을 하염없이 고뇌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다 그는 어느 날 애급의 총리가 됩니다. 형들이 그 앞에 나타났습니다. 순간 요셉의 눈에서 불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요셉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팔았다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당신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당신들을 통해서 나를 먼저 이곳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잘 성숙한 깊은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신앙인에게는 이 해석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삶에서 이런 해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내 믿음을 재보고 달아보고 평가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다가 만나게 되는 고난이나 실패나 어려움의 순간은 우리의 신앙을 측정 받는 아주 중요한 시점입니다. 그 순간이 바로 신앙의 무게가 측정되는 순간입니다.
세 번째는 “형제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형제를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형제는 그리스도안에 들어와 있는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안에 들어와 있는 모든 사람은 주안에서 형제 된 사람들입니다. 그 형제들을 뜨겁게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믿음이 있는가 재어볼 수 있는 척도입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이렇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해 보셨습니까. 믿음이 무엇인가 하면 형제를 사랑하는 힘을 제공하는 원동력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형제사랑에 남다른 은사를 발휘하게 됩니다.
여러분, 누구를 사랑해 보셨습니까. 누군가를 사랑해서 그를 위해서 물질을 나누고 수고해 보고 헌신해 보셨습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누구를 위해서 수고하고 희생하고 나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지금 주일을 지키고 헌금을 하고 수고하는 것은 그 밑바탕에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 14:23절을 보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를 사랑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듭남의 표적입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모습입니다. 신앙의 표징입니다. 또 사랑은 관심입니다. 영혼에 대한 관심, 하나님 자녀 되게 하려는 관심, 구원의 관심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전도도 불가능합니다. 전도는 영혼사랑의 결과이고 열매입니다.
여러분 이 사랑이 문제입니다. 요즘 결혼을 많이 하는데 결혼해서 얼마 살지 못하는 부부들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사랑입니다. 결혼의 요소 가운데 3할은 사랑이고 7할은 용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 전에는 눈을 크게 뜨고 상대를 보고 일단 결혼한 후에는 눈을 반쯤만 열고 보라고 했습니다. 결혼하고 나서도 눈을 크게 뜨면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모두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모두 보게 되면 보이는 흠들 때문에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에릭 프롬은 사랑을 미성숙한 사랑과 성숙한 사랑이 있다고 했습니다. 미성숙한 사랑은 “나는 너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너는 내게 필요하니까”라고 정의 했고 성숙한 사랑은 “너는 내게 필요해 왜냐하면 너를 사랑하니까”라고 정의 했습니다. 그래서 진실한 사랑은 자발적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거기 강요가 없고 억지가 아니고 권총 들고 위협해서 얻어낸 사랑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또 사랑은 말로 하는 사랑이 아닌 일대일로 베푸는 직선적인 사랑이고 교만, 지식, 자존심, 체면을 버리고 진실이 내포된 사랑이고 불이익이 와도 셈하지 않는 희생이 포함된 사랑이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는 힘이 있습니까.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힘은 믿음이 준 것입니다. 그 믿음의 힘은 내가 주안에 있을 때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게 믿음이 있나 없나를 측정하려고 하면 내가 누군가를 지금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예수 안에 있지 않으면 이런 일은 흉내도 낼 수 없습니다.
네 번째 요소는 “세상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참 기쁜 소식입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소년이 열심히 노력해서 후에 성공했습니다. 얼마나 대견한 일입니까. 또 인간만세라는 프로를 보십시오. 눈물겨운 환경에서 포기하지 않고 버티고 일어나 끝내는 성공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 박수를 쳐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성공이고승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기 어려운 이 세상에서 그렇게 승리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흐뭇한 일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공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성공하면 우선 첫째 되는 것을 연상합니다. 화려한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현대인들이 피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성공했으면서도 성공한 줄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성공은 지극히 내면적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누리는 승리는 우리들이 주님과 함께 하고, 함께 일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 그것이 승리의 삶입니다. 우리들이 육신의 힘을 이기고, 자기중심을 극복할 때, 또 우리들이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주고 나누고 도움 주는 삶을 살아갈 때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것이 이 세상을 이기는 삶이고 승리하는 모습입니다. 거기에 잔잔한 감동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잔잔한 감동을 주며 살아간다면 그 삶은 성공한 삶입니다. 승리한 삶입니다. 향기 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그런 승리하는 삶을 살려면 우선 내 자신을 부정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면 모두를 위해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 삶을 아무나 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그것이 힘든 일인데도 그런 삶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힘써서 일 등하는 것만 알아줍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자신을 부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기희생도 있어야 합니다. 그 삶이 성숙한 삶이고 신앙적으로 성숙한 삶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우선 기도부터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의 기도 속에는 화려하고 일등하게 해 달라는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자기부정에서 나올 수 있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문을 한번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로 인하여 나의 연약함을 깨닫습니다. 가끔 나를 고독의 수렁으로 던져 주심도 감사합니다. 그로 인하여 나는 그곳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 되게 틀어주심도 감사합니다. 그로 나의 교만함을 발견합니다. 아들딸과 부모가 짐처럼 무겁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로 인하여 삶에 보람을 느낍니다. 먹고 사는데 힘겹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그로 인하여 눈물로 먹는 빵의 의미를 이해합니다. 나로 불의와 허위가 가득한 시대에 태어나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그로 하나님의 의를 보게 됩니다. 땀과 고생의 잔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로 인하여 주님의 사랑을 더욱 분명히 깨닫습니다. 또 나에게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이것이 믿음의 기도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믿음이 있습니까. 그러면 나에게 이런 믿음을 주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오늘 이 시대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은 모든 것의 배경입니다. 빽입니다. 힘입니다. 뜻입니다. 의미입니다. 우리의 생존의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이 믿음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인하라 너희 안에 예수께서 계신 것을 모르느냐 모르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출처/이정익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