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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녀 (롬8:12-17)
1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넘어가서 16절 말씀을 보십시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람인 우리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신분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작고를 하셨지만 우리나라 대법관 가운데 김홍섭판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인품이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겸손했고 또 삶도 청빈했습니다. 그의 믿음도 독실했습니다. 그는 시간이 있으면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들을 돌아보면서 말씀으로 위로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사도 법관이었습니다.
한 번은 그가 시외버스를 타고서 강원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탄 버스가 검문소 앞에서 멈추었습니다. 순경이 올라와서 버스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검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순경은 아무래도 그의 행색이 조금 수상하게 여겨졌는지 그의 앞에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엇하는 사람이오?"
그는 사실대로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대법원 판사입니다."
그러자 순경은 그가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화를 벌컥 내며 신경질적으로 말했습니다.
"당신 지금 누구를 놀리는거요? 무슨 판사가 시외버스를 타고 다니오? 어디 신분증 한 번 내봐요!"
그는 자기 안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어 순경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공손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판사를 판사라고 하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순경이 그의 신분증을 보니까 대법원 판사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거의 기절할 뻔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 자리에 대통령의 아들이 타고 있다가 똑같은 일을 당했다면 그 순경이 어떠한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사시나무 떨 듯 부들부들 떨다가 깜짝 놀라서 넘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탔습니다. 순경이 우리 앞에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예, 저는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순경은 어떠한 반응을 보일 것 같습니까?
"쳇! 예수쟁이구먼."
아마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시시한 듯이 우리를 쳐다보지는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과연 시시한 분이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시시한 삶을 살아가니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마치 시시한 분이신 것처럼 평가절하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습니다. 어떤 거지아이가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 한 분이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보고서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머니는 그 아이를 이끌고 가까운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따뜻한 국밥을 한 그릇 시켜주었습니다. 아이는 정신없이 국밥을 퍼먹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있다가 그는 조금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들어 아주머니를 쳐다보았습니다.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계면쩍은 듯이 아주머니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하나님과 친척이시지요?"
아주머니는 그 소리를 듣고 빙긋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나는 하나님의 친척이 아니야. 하나님의 딸이란다!"
그 소리를 듣고서 거지아이는 자기 짐작이 맞았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시 그랬군요. 제가 생각했던 것이 맞았군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로 그와 같은 말을 들을 수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모습이 그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바르게 처신할 때,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일깨워주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너무나도 감동이 되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차라리 황금문자로 기록되었으면 더 나을 뻔하였다! 너무나도 위로가 넘치고 큰 소리로 찬양할 만하다!"
오늘 우리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신분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이제부터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좀 더 바르게 처신함으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속에서 중요한 세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12∼14절 말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먼저 12절 말씀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우리가 다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빚진 자입니다. 누구에게 빚을 졌습니까?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우리는 더 이상 육신에게 빚진 자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육신의 빚을 갚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빚을 다 탕감받았습니다.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육신의 빚진 자처럼 육신의 인도함을 받고 육신대로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하나님께 빚진 자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신에 빚져서 육신의 인도함을 받는 자의 삶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의 삶은 무엇이 다릅니까?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 곧 세상 사람들은 육신에 빚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육신의 인도함에 따라서 육신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반드시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육신에 빚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육신대로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몸의 행실을 죽입니다. 물론 내 힘, 내 의지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그 일을 해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일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5:29∼3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저 육신대로 살아갑니다. 결국은 지옥의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 던지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몸의 행실을 죽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몸의 행실을 죽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거부하면서 육신대로 살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령께서 근심하실 것입니다. 탄식하실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였던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모두 19명의 자녀를 키웠습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러나 수산나는 그들을 하나같이 신앙적으로 훌륭하게 잘 길렀습니다. 한 번은 수산나가 자기 아이들에게 사과를 하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바구니에 넣어 높은 선반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요한 웨슬리는 더 먹고 싶은 욕심에 의자를 놓고서 어머니 몰래 선반 위에 있는 사과를 꺼내어 훔쳐먹었습니다. 나중에 수산나가 그 사실을 알고서는 요한 웨슬리를 불러다가 따끔하게 혼내었습니다. 그에게 얼마나 매질을 했는지 그의 맞은 자리에서 피가 흐를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요한 웨슬리는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그때 내가 어머님께로부터 실컷 매를 맞고 혼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지 않으면 성령께서는 탄식하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세상 사람들은 육신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대통령이 어디를 갈 때면 경호원들이 그의 주변을 호위해 줍니다. 대통령차가 갈 때는 앞뒤로 경찰차가 호위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갈 때는 누가 우리의 걸음을 인도해 줍니까? 경찰차가 대수입니까? 경호원들이 문제입니까? 천사들이 우리를 호위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천사장이 우리를 인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 인도해 준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친히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셨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 복지를 향해 나아갈 때는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창세 전에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이미 예정하시고 선택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유월절 어린양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우리가 인생길 걸어가는 동안에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셔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로까지 안전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니 누가 감히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보살피심을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럴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반드시 우리를 영원한 가나안 복지까지 안전하고도 무사히 인도하고야 마십니다.
둘째로,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15절 말씀을 보십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우리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습니다. 종은 상전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합니다. "혹시라도 잘못해서 벌받지 않을까?" 그러한 심령의 무서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습니다.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어린 아이가 아버지를 보면 무서워합니까? "아빠!"라고 부르며 반가워서 쫓아가 아버지의 품에 안깁니다. 우리의 심령도 하나님을 향해서 열린 마음, 사랑의 마음, 친근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우리의 모든 속사정을 하나님 아버지께 아룁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무거운 짐 나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와서 "아버지!"라고 부르짖으면서 우리의 모든 속사정을 아룁니다. 그러면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들으시고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 자녀인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에게 힘주시며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십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을 가리켜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막14:36입니다.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도 역시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으면서 언제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바"라는 말은 아람어입니다. 아버지를 좀 더 친근하게 부르는 말입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아빠," 영어식으로 하면 "papa, dad"와 비슷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양자라고 하니까 친아들과는 달리 차별대우를 받을 것 같고, 천대를 받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컨대 모세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모세는 애굽 왕 바로의 딸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애굽 왕실에 들어가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또 에스더도 생각해 봅니다. 그의 부모가 죽었습니다. 친척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데려다가 자기의 친딸처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잘 양육했습니다.
제가 문제를 하나 내봅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사울 왕의 손자였습니다. 요나단의 아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움을 할 때 사울 왕도 죽었고, 또 요나단도 죽었습니다. 사울 왕에 속한 남자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두 발 다 절뚝발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쟁터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살아남았습니다. 나중에 다윗은 블레셋을 무찌르고 나라를 평정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자기의 사랑했던 친구 요나단과의 우정을 생각하면서 요나단의 아들을 자기 아들처럼 사랑하고 아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에게 속했던 모든 밭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식사할 때면 언제나 그를 불러 자기 식탁에서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요나단의 절뚝발이 아들, 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므비보셋입니다.
이와 같이 일단 양자로 입적이 되면 친아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을 기록할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로마 사회에서는 아버지에게 절대적인 권한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아내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들을 낳던지 딸을 낳던지 상관없이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갖다 버려야 합니다. 그 대신 아버지는 주변에 있는 아이들 가운데서 자신이 원하는 아이를 양자로 입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가문에 속한 모든 권한은 양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의 황제 네로도 양자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의붓아버지 클라우디우스황제가 죽었습니다. 클라우디우스가 죽고 난 뒤에 양자였던 네로가 로마제국의 5대 황제로 등극했습니다. 그만큼 양자라고 하면 막강한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인정받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양자는 오히려 친아들보다도 더 긍지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를 인정하시고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기꺼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늘 문을 여시고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힘을 주십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입니다.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그 당시에는 양자가 되면 막대한 권한이 양자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양자를 삼을 때는 반드시 증인을 세우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누가 증거해 주십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의 증인이 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천사들이 증인이 됩니까? 우리 주변의 이웃들이 증인이 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관공서에 가서 중요한 서류를 받을 때나 또 은행에 가서 현찰을 찾을 때 신분증을 제시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신분이 확인되면 아무리 중요한 서류라도, 아무리 많은 현금이라도 그냥 내줍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16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인함. 쾅!" 성령께서 도장을 찍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엄청난 것이 오게 될 것입니다. 1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여기서 후사는 "상속자," 곧 유업을 이어받을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후사입니까?
"곧 하나님의 후사요."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것을 이어받게 될 후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대기업의 회장자리를 이어받게 될 후사는 얼마나 대단합니까? 또 한 나라의 왕위를 이어받게 될 후사는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라의 모든 것을 이어받을 후사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엄청납니까? 우리 인간이 들을 수 있는 말 중에서 최고로 감격적인 말씀입니다. 무한대의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서 17절 중반부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으로 이어받을 상속자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리는 모든 영광을 우리도 다함께 똑같이 충만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아버지가 죽으면 그 유업을 자녀들이 나누어 갖습니다. 그래서 자녀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돌아오는 몫은 적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것이 무한합니다. 모든 것이 충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후사인 우리는 예수님이 누리시는 모든 영광을 빠짐없이 충만하게 무한대로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인간이 들을 수 있는 말 가운데 이보다 더 감격스러운 말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터져 오르는 감격을 억누를 길이 없어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차라리 황금문자로 기록하였으면 더 좋을 뻔하였다! 너무나도 위로가 넘치고 큰 소리로 찬양할 만하다!"
이 말씀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셋째 하늘인 낙원으로 이끌려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말로 가히 이를 수 없는 아름다운 말도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성경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움에 압도를 당해서 그곳의 광경을 도무지 인간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듯 엄청나고 놀라운 영광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후사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세 무궁토록 누리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너무나도 엄청난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17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장차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받게 될 엄청나고 놀라운 영광을 생각한다면, 이 땅에서 주와 더불어 받는 잠시 잠깐 동안의 고난은 얼마든지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육신에 속한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리고 일평생 동안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면서 주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나중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며 순교했던 것입니다. 롬8:18의 말씀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누릴 영광스러움을 생각한다면 잠시 잠깐의 이 땅에서 예수님을 위해 당하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십자가를 우리가 기쁨으로 지고, 주를 위해서 더욱더 헌신하며 충성하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모두의 걸음을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까지 안전하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모든 어려운 사정을 아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입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의 모든 것을 유업으로 이어받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듯이 우리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군 천사들의 섬김을 받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세 무궁토록 왕노릇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육신에 이끌려서 육신대로 살지 말고,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신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깨닫고, 더욱더 예수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충성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박상훈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