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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성과 정복과 섬김. (창 1: 26-31)
이제는 좀 나아진 것 같아 보이기는 합니다만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와 어리석음 중에 하나는 지방색입니다. 지방에 대한 편견입니다. 전보다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어느 지방이나 다 좋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와 같은 아주 보편적인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느 지방 사람은 다 좋고, 어느 지방 사람은 다 나쁘다는 편견은 참 바보스러운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지방색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는 함께 일하지 않겠다는 나름대로의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보스러운 사람이기 때문에 얻을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어리석음은 다만 지방색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빈부(貧富)와 대소(大小)에도 나타납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빈부와 대소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아주 심합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나라에서는 부(富)와 대(大)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부자와 대형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비뚤어지고 성숙하지 못한 가치관과 철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소득 2만 불 가까운 나라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 중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외국의 학자가 한 말이 기억납니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미스터리가 둘 있는데 하나는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가 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남한이 자본주의 국가가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돈과 사업에 밝은 사람들로 여겨집니다. 중국 화상(華商)은 유대인과 함께 세계가 알아주는 장사꾼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돈에 밝고 능한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가 된 것이 미스터리라는 말은 참으로 이해가 됩니다.
우리 남한의 정서는 사회주의인 것 같습니다. 아마 세계적으로 보아도 우리 남한 사람들만큼 사회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민족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싸우면, 그 싸움에 직접적인 이해가 걸린 사람은 물론 부자편을 들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다수는 무조건 다 가난한 사람 편을 듭니다. 약자 편을 듭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싸움에 자신의 이권이 달려있으면 부자와 강한 사람 편을 듭니다. 그래야 부스러기라도 얻어먹을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번 이랜드 사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랜드 사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랜드가 비정규직에 대하여 좀더 고민하고 아파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회사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말할는지 모르나 국민들의 정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국민들의 정서에 대하여 둔했다고 하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이랜드의 실수입니다. 큰 실수 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우리나라 사회가 이랜드 사태를 다루는 입장과 태도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공정한 재판을 하려면 검사와 변호사가 있어야만 합니다. 비정규직 입장에 대해서는 검사와 변호사가 있어야 하고, 이랜드 입장에서도 검사와 변호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비정규직에는 검사가 없고 이랜드쪽에는 변호사가 없습니다. 그러면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아직 우리나라의 의식수준이 국민소득보다 높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이랜드 사태를 안타깝게 지켜보면서 일종의 또 다른 지방색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보편적인 정서로 보아서 긍정적이지 못한 중요한 단어들이 나옵니다. 그것은 ‘번성’과 ‘충만’과 ‘정복’입니다. 그와 같은 단어들은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는 참 이중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의 번성과 충만과 정복은 좋아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번성과 충만과 정복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번성과 충만과 정복을 부정적으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방법으로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는 것에 대한 비판은 있지만 번성과 충만과 정복에 대하여 근본적인 비판과 부정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와 같은 개념들을 긍정적으로 다루고 있으면 오늘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그와 같은 것들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축복하시면서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타락하기 전 아담과 하와는 하나였습니다. 타락 전 아담이 하와를 보고 한 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한 고백은 인간이 한 말 중에 가장 아름다운 말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후 아담과 하나는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이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하였느냐 하나님의 질책성 질문에 아담은 이렇게 답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저 여자 때문입니다.’
창세기 11장에서 노아의 후손들이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께 범죄하기 이전에 온 인류는 같은 말을 하면서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께 범죄 한 후 저들의 언어는 혼잡해 졌습니다. 함께 살 수 없었습니다. 온 지면으로 흩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타락하기 전의 번성과 충만과 정복과 타락한 후의 번성과 충만과 정복은 아주 다른 개념이 되었습니다. 타락 전의 번성과 충만과 정복이 공동체적인 개념이었다면 타락한 후의 번성과 충만과 정복은 개인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개념이 공동체적인 것에서 개인적인 것으로 변질되면서 번성과 충만과 정복의 그림자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개인적인 한 쪽의 번성은 다른 한 쪽의 쇠퇴라는 그림자를 가져오게 하였고, 개인적인 한 쪽의 충만은 다른 한 쪽의 부족과 결여라는 그림자를 가져오게 하였고, 개인적인 한 쪽의 정복은 다른 한 쪽의 점령과 착취라는 그림자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야망과 그것을 이루려고 하는 과정에서 약한 자들을 착취하고 약탈하고 발로 짓 밟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방법과 과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번성과 충만과 정복 자체와 전체를 부정해 버리는 우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일종의 지방색과 같은 미숙함과 어리석음이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번성함은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번성하기를 원하십니다. 충만은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충만한 삶을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정복도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머리가 되는 것을 좋아하시지 세상의 꼬리가 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으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낮아짐을 가르치시고 말씀하시지만 우리가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낮아짐은 자세에 대한 말씀이지 실력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세를 낮추라는 것이지 실력을 낮추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상한 갈대 되는 것과 꺼져 가는 등불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크고 단단한 나무가 되기를 원하시며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횃불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낮아짐과 겸손을 오해하여 자세가 아닌 실력을 낮추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나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번성과 충만과 정복을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최선을 다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번성과 충만과 정복은 다 좋아하지만 그것을 위하여 지불해야만 하는 대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힘들기 때문입니다.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높아지지 말고 낮아지라고 말씀하시니까 그냥 귀가 번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실력이 아닌 자세라는 것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덜썩 실력의 낮아짐을 붙잡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겸손이라고 합리화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번성과 충만을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을 믿음 없는 사람처럼, 교만하고 이기적인 사람인 것처럼 매도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식과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자기를 합리화하고 함부로 남을 정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어리석음을 벗어나 악한 것입니다. 건강한 세상과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암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번성과 충만과 정복이 하나님의 축복이기는 하지만 그 축복이 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이고 미신적인 복은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은 그것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복은 복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습니다. 복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도구가 됩니다. 성경은 우리를 축복하실 때 ‘너 잘 먹고 잘 살아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로 인하여 나라와 민족이 복을 얻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의 번성은 목적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번성은 다른 연약자의 번성을 돕는 좋은 도구입니다. 그것은 충만도 마찬가지이고 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충만함으로 다른 모든 부족한 것들이 채워집니다. 우리의 정복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착취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정복의 의미와 목적은 착취와 지배이지만 기독교의 정복의 의미는 나눔과 섬김입니다.
세상은 번성과 충만과 정복이 개인적인 야망과 목적인 사람들에 의하여 점점 더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파괴되어지고 있습니다.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번성과 충만과 정복을 죄악시하고 포기하게 되면 세상은 발전하고 좋아질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역시 또 피폐해지고 가난해 질 겁니다. 저는 번성과 충만과 정복이 개인적인 야망이 아닌 소명인 사람들이 나타나야만 이 세상이 복을 받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1982년 1월 19일로 기억합니다. 그날 조선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었습니다. 그 내용은 나면서부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하여 사재틀 털어 직업훈련소를 운영하는 분이 있는데 운영비가 모자라서 세 들어 있는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다음 날인 1월 21일자 조선일보에 정말 기가 막힌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40대 주부 한 사람이 수표 5장에 190만원을 들고 신문사를 찾아와 그것으로 저들의 집세로 물어주고 연탄이라도 사서 겨울 내내 불을 피워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쯤 이야기이니까 당시 돈 190만원은 적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누구인가 신분을 묻는 기자에게 끝까지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를 거부한 그 주부는 쪽지에 글 하나를 신문사에 전해 주었고 신문에는 그 쪽지에 담긴 글이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제 빨래를 하고 있는데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둘째 아들이 신문을 들고 와서 ‘엄마, 엄마 우리가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이 생겼어요.’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신문 기사를 읽고 그 엄마도 저들을 도와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 이유를 그는 그 쪽지에다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 둘이 있는데 둘 다 다 전교에서 일등과 이등을 다투는 수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아들을 둘 씩이나 주신 것은 자랑하거나 뽐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저와 같이 태어나면서부터 어렵게 된 사람들을 돕고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있는 돈 중 큰 아들의 대학입학 준비금을 제외한 모든 돈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나님이 지금은 이만한 심부름 밖에는 시키시지 않으시지만 다음에는 더 큰 심부름을 시키시리라 믿습니다.”
25년도 지난 일이지만 저는 그날 그 신문을 읽으면서 받았던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해 11월 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같은 조선일보에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이 쉐타를 입고 활짝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은 것이 실렸습니다. 그리고 사진 밑에는 ‘아줌마 고마워요’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니, 지난 일월 수표 190만원을 들고 왔던 그 부인이 일년 내내 손으로 짠 쉐타라며 고아원에 보내달라는 부탁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면서 그 때도 또 쪽지에 글 하나를 전해주고 갔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이들이 즐겨 읽는 동화 중에 백조왕자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마녀의 저주를 받아 왕자가 백조가 되는데 엘리사라고 하는 여동생 공주가 가시 풀로 6년 동안 쉐타를 짜서 던져 주었더니 마법이 풀려 다시 왕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백조왕자를 이야기를 하면서 그 부인은 쪽지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면서부터 몸과 마음이 함께 추운 아이들의 마음을 따뜻이 녹여 줄 수만 있다면 6년이 아니라 60년이라도 이 쉐타를 짜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주 HM 뱅크라는 것을 만들어 오픈하였습니다. HM은 Happy Mission의 약자로 봉사와 섬김을 저축하는 은행입니다. 여러분들의 봉사와 섬김을 통장에 돈을 저축하듯 통장에 기록해 주는 것입니다. 현금카드처럼 카드를 발행하여 여러분이 봉사하실 때마다 그것을 기록하여 드리는 것이고, 카드에는 세 종류의 카드가 있는데 믿음카드, 소망카드, 사랑카드가 그것입니다. 비행기 마일리지 카드에도 급수가 있듯이 봉사카드도 급수가 있어서 점점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비행기를 많이 타는 편입니다. 그래서 마일리지 카드 급수(?)가 높은 편입니다. 대한항공 마일리지 카드는 프레미엄 카드입니다. 50만 마일 이상이 되어야만 발행받는 카드입니다. 아시아나 항공 카드는 다이어몬드입니다. 그것도 제법 대우를 받는 카드입니다.
저는 이제부터 우리 교회가 운영하는 HM 뱅크의 봉사카드를 사랑카드로 하기 위하여 저부터 앞장서서 최선을 다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저와 함께, 아니 저보다 앞장 서서 봉사와 섬김의 삶에 도전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달라지고 여러분의 인생이 달라지고,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공부해서 남 주냐?’며 공부하고, ‘돈 벌어서 남 주냐?’며 돈을 벌고, ‘출세해서 남 주냐?’며 출세하지만, 우리들은,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들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공부해서 남 주자’, ‘돈 벌어서 남 주자’, ‘출세해서 남 주자’며 공부하고 돈 벌고 출세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그렇게 세상을 축복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의 근원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번성과 충만과 정복의 목적은 섬김입니다. 세상을 축복함입니다. 그와 같은 높으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출처/김동호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