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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시42:11,눅18:1~5)
아프가니스탄에 발생한 한국 청년들의 탈레반에 의한 피랍 소식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끝나지 않은 피랍자들의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서 친히 얼굴을 향하시고 속히 모든 피랍자들이 무사히 돌아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인솔자이었던 배형규 목사님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을 잊었습니다. 웃으면서 떠난 남편, 아버지, 아들을 죽음으로 맞는 가족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청년들을 이끌고 전쟁의 포화 속에서 아프고 시달린 그들에게 봉사하러 간 청년들에게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세간의 비난이 더욱 아프게 느껴집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라”고 해서 들어갔는데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배목사님과 팀들에게 아프가니스탄은 땅 끝입니다. 가장 가기 힘든 곳이 땅 끝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누구도 가기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땅 끝에 간 것입니다. 땅 끝까지 가라고 하셨는데 땅 끝에서 이런 변을 당했습니다. 선교에 힘쓰다 낙심이 될까 두렵습니다. 샘물교회 박은조 목사님과 한민족복지재단 김형석 회장에게 다 전화로 위로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의외로 차분하고 힘을 잃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잘 견디고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배형규 목사님은 제주 영락교회 출신의 젊은 목회자 입니다. 사랑과 열정이 넘치는 목사님이었다고 합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출신으로 얼굴이 익은 것으로 봐서 저의 강의도 들은 학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주 영락교회의 김정서 목사님도 이메일로 위로와 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아버지가 그 교회의 장로님이시며, 어머니가 권사님인 좋은 신앙의 가정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 가까이는 이런 일이 없는 줄 알고 살아갑니다.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낙심과 불안은 항상 우리 곁에 있는 마수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낙심할만한 때, 불안할만한 때에 낙심하지 않고 불안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런 당당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인간의 낙심과 불안이란 이런 것들입니다. 작은 멸치가 바닷물이 말라 헤엄치지 못할까봐 쩔쩔 맵니다. 작은 고추잠자리가 하늘이 좁아 날 곳이 없을까봐 당황합니다. 작은 개미가 땅이 좁아 집을 지을 장소가 모자랄까봐 안절부절합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인간의 불안입니다.
인간의 염려와 걱정을 잘 보세요. 인간의 걱정 40%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걱정 가운데 30%는 과거의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염려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12%는 건강과 관련된 불필요한 것들입니다. 10%는 중요치 않은 사소한 것입니다. 8%만이 실제의 일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8% 중 절반만이 변화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일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96%는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염려란 무의미하고 불경스런 것입니다. 인간의 낙심과 불안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낙심, 염려, 걱정 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입니다.
시편 42편은 “고라 자손의 시”입니다. 다윗이 음악가의 가문이 된 고라 자손을 시켜 부른 노래입니다. 5절과 11절과 43:5을 보세요. 똑같이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가”라고 합니다. 같은 말의 반복은 인간의 낙심과 불안은 마치 인간의 삶의 일부분처럼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산상보훈에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인간은 늘 염려하기에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는 염려할 수밖에 없는 생존의 필수내용들입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염려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이 빛 가운데 네게 일러주신 말씀을 어두움 속에서 의심하지 말라”(Never doubt in the dark what God told you in the light)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낙심, 불안, 염려, 걱정 이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께 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밀려오는 낙심과 불안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찬송하는 이 아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낙심하며 불안한 이유는 하나님께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42:11 상반절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하나님께 소망이 없기에 낙심하며 불안합니다. 하나님만이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만이 낙심과 불안을 없이 하십니다.
“어찌하여 낙심하며”란 말은 “마흐 티슈토하히”라는 히브리말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어찌하여 네가 숙이느냐”라는 뜻입니다. 슬픔의 무게 때문에 깊은 곳으로 가라앉은, 심히 우울하고 슬픈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풀이 죽은 상태입니다. “고개 숙인 남자”란 말이 있습니다. 마치 “고개 숙인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불안하여”란 말의 뜻은 소리를 내며 솟아오르거나 가라앉는 바다의 파도를 묘사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시편 46:3에는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라고 합니다. 이것이 성경적 불안이란 말의 뜻입니다.
원문에서 보면 “낙심”이 왜 나쁩니까? 고개를 숙이지 말고 고개 들어 주를 바라보아야 하는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주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마치 죄 지은 자 같습니다. 죄 지은 자들을 보면 한 결 같이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가리고, 어깨가 쳐져 있습니다. 승리자를 보세요. 칭찬받을 자를 보세요. 고개를 숙이는 법이 없습니다. 고개를 바짝 쳐들고 있습니다.
“불안”이 왜 죄가 됩니까? 바닷물이 뛰놀고, 산이 흔들려 불안합니까? 예수님께서 “잔잔하라” 한 마디에 잔잔하게 되는데 불안합니까? 산이 흔들립니까, 내 마음이 흔들립니까?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라고 찬송하면서도 흔들립니까? 낙심도 불안도 다 부질없는 죄의 생각입니다.
안전(security)이라는 말은 ‘걱정 없는’이란 의미의 라틴어 ‘세쿠루스(securus)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걱정이 없어야 안전한 것입니다. 아무리 위태하더라도 걱정이 없으면 안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안전해도 걱정이 태산이면 안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독일어의 ‘근심’이란 단어는 ‘질식시키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어로는 ‘마음을 분리시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심은 목에 매인 올가미와 같습니다. 마음을 산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심이나 불안은 두 가지 모두가 기쁨과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소망과 전혀 배치되는 말입니다.
“근심이란 하나님께서 마침표를 찍은 곳에 또 다시 물음표를 찍는 것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근심은 불안을 만드는 공장입니다. 근심이란 습관이 한번 자리를 잡으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시간만 낭비하게 됩니다. 사단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앗아가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근심입니다.
현대 랍비인 마빈 토케이어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어떤 남편이 돈을 갚아야 할 날이 다가오자 안절부절 하면서 잠을 못자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참 멍청하네요. 내일 당신이 돈을 못 갚으면 걱정스러워 잠을 못 잘 사람은 바로 돈을 받아야 할 사람이잖아요”. 이 말을 들은 남편은 마음 가라앉히고 잠을 잤다고 합니다. 여러분, 절대 오해하지 마세요. 빚진 돈이 있어도 갚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갚기는 하되 너무 걱정하여 잠을 못자는 경우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울과 다윗 두 사람을 보세요. 쫓겨 다니는 다윗이 아니라 쫓아다니는 사울이 더 불안해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편안합니다. 정말 “내 마음 평안해”입니다. 우리 찬송에도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이 몸에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예수님께 소망을 두면 낙심도 불안도 없어집니다. 소망은 진통제입니다. 진정제입니다. 낙심과 불안이 사라집니다. 우리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세상엣의 모든 낙심과 불안을 날려버리고 사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42:11 하반절입니다.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의 도우심 의지하세요. 낙심과 불안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변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어떤 때에도 의지할 만한 합니다.
하나님은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121:1-2에는 말씀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낙심하여 고개를 숙이지 말고 눈을 드세요. 우리의 도움이 여호와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면 거기에 도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도우미이십니다. 변치 않는 돕는 배필이십니다. 성경은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합니다. 보혜사란 ‘파라클레토스’란 단어인데 이 말은 여러 뜻이 있지만 가장 강한 뜻은 도우시는 이(helper)입니다. 우리 곁에 도우미가 빽빽하게 몰려 있습니다. 천군천사가 우리의 도우미입니다. 불 칼, 화염검을 가지고 둘러서 있습니다. 그런데도 낙심하렵니까? 이런 도우미가 있는데 낙심한다면 대단히 약한 것이 아니라 대단한 강심장입니다.
낙심이 뭔가를 잘 보세요. 하나님보다 자신을 의지할 때에 낙심이 됩니다. 자신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낙심할 수가 없습니다. 프랑소와 페넬롱은 “낙담은 겸손의 열매가 아니라 교만의 열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절대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대 낙심하지 못합니다.
시편 84:12에는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의지하지 못하는 것은 복이 없는 것입니다. 의지하지 못하는 자가 낙심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시인 오던은 현대 사회를 ‘불안의 시대’(The Age of Anxiety)라고 일컬었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불안한 일이 널려 있습니까? 도무지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없는 듯이 보입니다. 신경안정제가 엄청난 매상을 올립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언제나 초조합니다. 잠언 3:5에는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낙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면 불안에 빠집니다.
존 웨슬레와 함께 영국교회의 부흥운동을 주도하던 휫필드 목사님이 낙심하고 좌절할 때에 힘을 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헌팅턴여사였습니다. 한번은 휫필드목사님이 절망적인 어조로 “저는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 헌팅턴여사는 “잃은 것에 대하여 감사하십시오”라고 합니다. “왜 그런 것에 감사해야 합니까?” 그 때 여사는 “주님은 잃은 자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혹시 무엇인가를 잃었습니까? 잃은 것 때문에 낙심하지 마세요. 잃은 것을 구원하러 오시는 예수님 때문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으려고 31번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고 32번째 성공하였습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하나의 발명품을 만들기 위하여 수 없이 많은 실패를 하였지만 그는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안 되는 방법을 그 만큼 많이 터득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의 성공의 비결입니다.
최근에 최고의 인기 있는 신부감은 학교 교사라고 합니다. 최고의 신부감 1위는 예쁜 교사, 2위는 보통 교사, 3위는 못생긴 교사라고 합니다. 그만큼 교사들이 인기가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세요. 고시에는 사법고시, 외무고시, 행정고시 등만 있는 줄 알았지요? 요즘에는 장신고시라고 있습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에 입학하려면 보통 3수는 해야 합니다. 제가 입학할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은 입학 자체가 아주 힘이 들어요. 그리고 교사고시가 있습니다. 교사임용고시가 또 그렇게 힘들다고 합니다. 많은 교사들이 7전8기, 4수, 5수 해야 합격한다고 합니다. 낙심하지 않고 성공을 지향해야 고시에 합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절대로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무엘상 25장에는 나발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나발은 완고하고 행실이 악했습니다.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예뻤습니다. 대개 총명한 사람은 예쁘지 않고, 예쁜 사람은 총명하지 않은데 아비가일은 다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부하를 위해 나발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나발은 거절합니다. “다윗이 누구며 이새의 아들이 누구길래?” 후에 다윗이 왕이 됩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만나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나발이 잔치를 할 때에 포도주를 취하게 마십니다. 그리고 37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에서 깬 후에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말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나발이 놀라서 낙담했습니다. 낙담은 몸이 돌같이 되게 하는 죽게 하는 병입니다.
줄리아 가타는 조바심, 낙담, 절망을 ‘정오의 악마’(noonday demons)로 표현했습니다. 노련한 여행자도 이 마수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낙담, 낙심, 낙망이라는 악마를 벗어나십시오. 한나절이 지나면 낙심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한나절에 좌절하면 되겠습니까? 좌절하고 넘어질 때마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아십니까? “넘어질 때마다 뭔가 주워 일어난다면 괜찮습니다”. 무얼 주워야 할까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얻어 일어나십시오. 그러면 넘어지는 것도 은혜이고 낙심은 사라집니다.
코리 텐 붐 여사는 네덜란드 자신의 집에 유대인을 숨겨준 죄목으로 나치 수용소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가족들이 함께 수용소에 있는 동안 아버지, 언니가 다 세상을 떠나고 여사만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여사는 그 후에 지구를 돌며 전도를 하였습니다. 구소련에는 성경을 가지고 입국하다 발각되어 고생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여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이 세상을 보면 우리는 절망할 것이다. 만일 우리 내부를 들여다보면 낙담할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안식할 수 있다. 당신이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면 차표를 가지고 뛰어내릴 것이 아니라 조용히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면 터널을 통과하게 되고 낙심과 불안은 물러가게 됩니다.
결론
오늘 말씀 가운데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씀을 보세요. 개역성경에는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얼굴을 드러내시고 나타나셔서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숨어서 리모트 콘트롤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얼굴을 보이시고 도와주십니다.
5절에는 “그 얼굴의 도우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보이면 우리는 안심합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면 우리는 살지 못합니다. 아기들에게는 엄마 얼굴이 최고입니다. 잘 놀다가도 엄마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고 울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에게 그렇습니다. 보이면 안심이지만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고 낙심합니다.
낙심과 불안 가운데서도 힘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힘 있는 아버지가 곁에 있으면 이깁니다. 자기 아들이 맞았다고 깡패를 동원하여 때려주는 아버지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보다 더 든든한 아버지이십니다.
낙심과 불안이 마음을 덥고 있습니까? 고개를 드세요. 고개를 들면 하나님의 얼굴이 보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는 고통 가운데서 위로 고개를 드니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낙심, 불안, 고통, 염려, 걱정은 다 내가 해결하려는 교만 때문에 생겨난 것들입니다. 곁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이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우리 삶의 낙심과 불안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나타나심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 사람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성희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