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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와 까마귀 (창 8:6~12,마 10:16)
오늘은 해방기념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36년의 일제 강압에서 우리 민족에게 해방의 기쁨과 자유를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36년의 일제 강점 기간보다 더 긴 해방 62주년을 맞이했지만 아직도 일제 강점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사는 국민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맛보며, 완전 통일을 맞아 참 해방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나아가서 영육의 해방을 누리는 지혜로운 민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비둘기는 체육대회나 평화대회 시에 곧잘 볼 수 있습니다. 비둘기를 날려 자유, 해방, 평화를 상징합니다. 비둘기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날려 보내도 다시 돌아옵니다. 비둘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자유와 평화를 느끼게 됩니다. 비둘기의 이미지는 늘 좋은 편입니다.
노아가 만든 방주에는 온갖 종류의 짐승들과 새들이 다 탔을 것입니다. 노아는 비가 멈추자 많은 새들 가운데 까마귀와 비둘기를 밖으로 날려 보냈습니다. 먼저 까마귀를 내 보냈는데 물이 채 마르지 않았는데 까마귀는 밖으로 가더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냅니다. 물이 아직도 땅에 있으므로 비둘기는 돌아왔습니다. 노아는 7일 후에 다시 비둘기를 내 보냅니다. 비둘기는 입에 감람나무 잎을 물고 왔습니다. 노아는 땅에 물이 줄어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비둘기를 내놓았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땅이 마르자 비둘기는 자기의 갈 길을 간 것입니다.
비둘기는 비둘기과에 속하는 새의 총칭입니다. 지구상에는 약 300종의 비둘기과 조류가 있다고 합니다. 비둘기는 평지와 산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텃새입니다. ‘구구’하는 소리를 내며 웁니다. 비둘기가 우는 소리는 비올 때에 그 소리가 유난히 구슬프게 들립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이건 저의 생각입니다만 노아의 방주에 비가 아직 개이지 않음을 알려주는 소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이 찬 땅을 보고 비둘기도 슬퍼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던 비둘기가 요즘은 흔해서 천덕꾸러기입니다. 어떤 인터넷 글에는 비둘기가 너무 많고 귀찮아 아예 죽이려고 독약을 놓았다고도 합니다. 이렇게 천대받게 된 것입니다.
까마귀는 우리말로 ‘가막이’라고도 씁니다. 까마귀 ‘오’(烏)자는 새 ‘조’(鳥)자와 가장 비슷한 한자입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옛 중국에서도 노아홍수를 알았다고 합니다. 배 ‘선’(船)자는 배(舟)에 여덟(八) 입(口) 즉 사람이 탔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아 홍수에 비해 볼 때 까마귀는 새 중에서 가장 모자란 새라는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방주에 다시 돌아오지 못한 어리석은 새입니다. 까마귀는 전 세계에 약 100종 가까이 있다고 합니다. 밭이나 마을 부근에서 곡식낟알, 곤충류, 거미류, 작은 동물 그리고 동물의 사체 등을 먹으며, 식물성 먹이도 많이 먹는 편입니다.
우리 옛 말에 보면 까마귀에 대한 속설이 있습니다. 까마귀는 신령스러운 새로 앞일을 예언하는 능력이 있다고 인식하였습니다. 반면에 까마귀의 울음소리는 불길한 조짐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까마귀는 신령스러운 능력과 죽음이나 질병을 암시하는 불길함의 상징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비둘기를 돌아갈 줄 아는 새, 주인을 아는 새로 묘사합니다. 주인이나 자기 자리로 돌아갈 줄 아는 것은 평화이며 자유입니다. 아기가 엄마 품을 떠나서 자유가 없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자유가 없습니다. 새가 공기를 떠나서 자유가 없습니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자유이며 평안입니다.
까마귀는 자기 맘대로 돌아다니는 새입니다. 이런 마음이 자유 같지만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부모의 품을 떠나 가출한 청소년이 자유롭습니까? 밤새 경찰차를 피해 대학로를 누비는 폭주족이 자유롭습니까? 부대를 벗어나 탈영한 군인이 자유롭습니까? 돌아올 줄 모르는 자는 자유도 모릅니다. 돌아갈 곳을 아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송합니다.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이 찬송에는 자유와 평안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것에 대한 비유는 하나같이 파티로 끝납니다. 잔치가 벌어집니다. 세 비유는 똑같이 “즐거워하다”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돌아오는 것은 그 자체가 즐거움입니다. 돌아오면 잔치를 베풉니다. 돌아오면 아버지가 기뻐하실 일입니다. 이 여름에 동물들을 비교하면서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을 얻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까마귀가 아니라 비둘기 같은 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까마귀는 물이 찬 세상을 방황하는 새입니다.
7절에 말씀합니다. “까마귀를 내 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아직도 땅에 물이 있었지만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고 물 위에서 방황하였습니다. 까마귀는 분명히 방주로 돌아오지 않아 죽었을 것입니다. 물이 찬 땅에 먹을 것이 있습니까? 발붙일 땅이 있습니까? 까마귀는 그런데도 안 돌아왔습니다.
캐나다 맥길 대학의 팀이 연구 발표한 바에 의하면 가장 머리 좋은 새가 까마귀와 어치라고 합니다. 앵무새는 예상외에 가장 멍청한 새라고 합니다. 가장 머리 좋은 새와 가장 머리 나쁜 새의 차이는 별 것 아닌 것 같습니다. 머리가 좋다는 까마귀가 방주에서 나가서 방주로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자기 머리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구원의 방주로 돌아오지 않고 방황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아주 잘 사는 것 같지만 죽은 것입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 건강한 사람, 얼굴이 예쁜 사람, 지나치게 배경이 좋은 사람, 이런 사람이 세상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인간의 죄성은 예나 지금이나 계속되고 있습니다. 애굽은 세상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미 애굽을 떠났지만 다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자들은 결국 멸망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지만 세상의 즐거움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요한일서 2:15에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세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세상 향락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토마스 머턴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마음은 까마귀와도 같습니다. 까마귀는 쇠붙이가 둥지에 얼마나 불편하든 관계없이 번쩍거리기만 하면 무엇이나 다 주워옵니다”. 눈에 보기 좋은 것을 가집니다. 귀에 듣기 좋은 것만을 듣습니다. 피부에 즐거움을 주는 것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취합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 빠져 사는 까마귀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탕자란 말의 어원은 ‘제멋대로’(wayward)란 뜻입니다. 원래는 과도하거나 넘쳐흐른다는 의미의 어근에서 유래했습니다. 탕자란 돈의 씀씀이가 헤픈 사람을 가리키며, 재능이 남아도는 작가를 뜻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다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도 세상으로 향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10-11 상반절에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섬기고 바울과 함께 있다가 다시 세상으로 날아가 버린 까마귀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열왕기하 4장에는 엘리사가 과부의 기름병을 채워주는 기적을 베풉니다. 엘리사는 먼저 그릇을 다 빌려오게 한 다음 방의 문을 닫은 후에 그릇에 기름을 채우라고 합니다. 세상으로 향했던 마음을 닫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열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까마귀와 같은 마음은 기적을 일으킬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6:6에는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합니다. 세상으로 향하던 문을 닫아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모든 의존하던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만 의존하면 얻습니다. 빈 그릇들이 은혜로 가득 채워집니다.
그런데 왜 채우지 못합니까?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존하고 바라보므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닫으세요. 그리고 하늘을 향하는 문만 열어놓으세요. 그러면 성령의 기름으로 찹니다. 까마귀의 습성을 버리면 은혜는 쏟아지는 것입니다.
둘째, 비둘기는 물이 찬 세상에서 방주로 돌아오는 새입니다.
9절에 말씀합니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아직도 방주 밖에는 물이 있습니다.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방주 밖이 불안정하면 얼른 돌아와야 합니다. 돌아올 줄 아는 것은 지혜입니다. 아닌 곳을 가다가 돌아올 줄 아는 것은 지혜입니다. 바른 곳이야 돌아서지 말아야지만 세상으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휴가는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돌아올 줄 알아야 합니다. 선교나 봉사도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 억류되어 있는 우리 청년들이 속히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에 인질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돌아올 줄 알아야 합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이지만 아주 재미있게 봤습니다.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가 비극입니다. 아픔입니다. 돌아오는 자체가 희망입니다. 영광이며 기쁨입니다. 저도 휴가기간에 성지를 탐사하러 갔습니다. 갈 때도 가서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기쁨은 더 큽니다.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떠난 사람 모두가 돌아오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실제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돌아오는 것을 감사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요즘에는 속담도 요즘 세상살이로 패러디합니다. “가는 말이 좋아야 오는 말이 좋다”는 속담은 “가는 말이 거칠어야 오는 말이 곱다”고 패러디합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가지 많은 나무가 더 비싸다”로 패러디합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를 “꼬리가 길면 목도리에 좋다”로 패러디합니다. “아는 길도 물어서 가라”는 “아는 길도 물어 가면 시간 낭비다”로 패러디합니다.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아니 간만 못하니라”는 “가다가 중지 곧 하면 간 만큼 유익이다”로 패러디합니다. 요즘 사람들의 특징은 돌아가지 않고, 돌이키지 않고, 돌아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돌아설 줄 알고, 돌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자신의 본래의 곳으로 돌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실향민은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입니다. 고향을 잃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영적 실향민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돌아갈 고향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윈’은 아랍 전역에 두루 퍼져 사는 유목민의 한 부족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유목민을 베드윈이라고 보편적으로 부릅니다. 이들은 유목민으로 들에서 천막생활을 합니다. 이번에도 성지에 가서 유대광야의 한 베드윈의 천막에 들어가 차도 마시고 한참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은 두 명의 부인을 데리고 있었고 슬하에 여덟 아들과 여섯 딸을 두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베드윈의 가장은 가정에서는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편의 천막에는 부인은 오지도 못합니다. 아들들만 옵니다. 이들은 양을 치고, 털을 깎아 팔고, 우유나 치즈를 만들어 팔아 돈을 법니다. 요즘에는 베드윈들도 이리저리 이주를 못하게 하여 한 곳에서 거의 살고 있었습니다. 원래 그들의 천막은 염소 털로 자는데 염소 털은 물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원채 무겁고 비싸서 요즘은 커피자루와 같은 천으로 만든 천막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노마드’란 유목민이란 뜻입니다. 현대에 이리저리 정착하지 않고 돌아다니며 사는 사람들을 ‘네오 노마드’라고 합니다. 새로운 유목민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다 유목민 같아서 필요하면 세상에 살다가 얼른 천막을 걷고 돌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1:14에는 “본향을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란 말씀이 있습니다. 16절에는 “저희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귀소성(Backing Home Instinct)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귀소본능은 동물이 자기의 서식처나 둥지로 돌아오는 성질과 능력을 말합니다. 자신의 집이나 산란장소로 돌아가려는 본능을 말합니다. 철새나 꿀벌이나 연어나 비둘기 등이 귀소본능이 가장 발달한 동물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사람들도 본향으로 돌아가려는 귀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민족은 귀소성이 유난히 발달한 민족합니다.
이집트에는 비둘기를 먹습니다. 길을 지나가 보면 하얗게 생긴 뿔 모양의 비둘기 양식장이 있습니다. 이 속에서 비둘기를 키워서 자라게 되면 판다고 합니다. 비둘기는 밖에 나가서 먹이를 먹고 돌아다니지만 다시 돌아옵니다. 비둘기의 귀소성을 이용한 양식법입니다.
시편 90:3에는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돌아가는 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이번에도 여러 호텔에 들었습니다. 나그네가 호텔 방에 들게 되면 숙박계에 여럿을 씁니다. 첫째는 어디서 왔습니까? 출신지를 씁니다. 둘째는 지금 무엇 하러 여기에 왔습니까? 용무를 씁니다. 셋째는 내일은 어디로 갈 것입니까? 행선지를 씁니다. 여러분의 다음 행선지는 어디입니까? 자신의 행선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비행기를 타려면 도착지(destination)를 알아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에는 멀리 갔던 아들이 돌아옵니다. 돌아온 아들의 돌아오는 목적이 별로 선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돌아온 그 자체를 아버지는 기뻐하십니다. 돌아옴은 그 자체로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잘못을 범했어도 돌아올 줄 알아야 합니다. 아예 포기하고 안 돌아온다면 그것은 그 나쁜 것입니다.
빌레몬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바울이 자기를 만나 그리스도인이 된 오네시모라는 종을 자신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편지입니다. 오네시모가 골로새로 돌아오는 사건에서 주의를 끄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는 스스로 안락함을 뒤로 하였습니다. 둘째는 그를 격려해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셋째는 오네시모는 섬기기 위해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돌아가는 그 자체만으로도 오네시모는 훌륭한 사람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0:16에는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합니다. 비둘기가 돌아온 것은 순결하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땅이나 더러운 물 위에 앉을 수 없습니다. 순결한 마음이 돌아오게 합니다. 순결한 마음이 방주를 찾습니다. 마음이 순결한 자는 구원의 집에, 하나님의 집에 늘 마음이 있습니다.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는 새입니다. 왜 평화가 있습니까? 본래의 자리, 가야할 자리로 돌아오면 평화가 있습니다. 돌아오면 마음의 평화를 얻습니다.
결론
다윗의 위대성은 죄에 머물지 않고 돌아온 것입니다. 바울의 위대성은 율법을 고집하지 않고 은혜로 돌아온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위대성은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한스 큉은 “목사가 교회를 향해 파송된 성직자라면 평신도는 세상을 향해 파송 받은 성직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파송 받은 사람이지, 세상에 젖어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을 향해 파송 받아 일하지만 항상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도의 자세입니다.
우리 가운데 까마귀처럼 세상을 향한 머리는 좋지만 돌아올 줄 모르는 어리석은 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비둘기처럼 세상에서 돌아올 줄 알아 순결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사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성희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