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일렀느냐   (창 3:9~12, 계3:17~18)

지난 주일 운동하는 시간에 어느 집사님의 아들이 테니스장에 나타났습니다. 이리저리 혼자서 놀다가 갑자기 아빠를 부릅니다. 운동하던 아빠가 “저리가, 다쳐”라고 하자 아들은 “아빠, 그림자가 자꾸 따라다녀”라는 것입니다. 테니스장 라이트에 자신의 그림자가 자꾸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이 귀찮았던 모양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습니다. 인생의 검은 그림자도 누구에게나 다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인성에 들어 있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때로는 그 그림자가 자신의 일부인 것을 알고 당혹해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부인하기에 급급합니다. 흔히 말하는 ‘검은 그림자’입니다. 늘 자신을 따라다니는 자신의 약점입니다. 그림자가 따라다닌다고 봅니까? 나는 그림자를 밟고 다닙니다. 이것은 자신이 이해하기 나름입니다. 약점이 따라다니게 하지 말고, 약점을 지배하세요.
  우리 모두에게는 약점과 강점이 있습니다. 약점은 자신이 약점으로 생각할 때 비로소 약점이 됩니다. 자신이 약점으로 생각하기 전까지는 결코 약점이 아닙니다. 약점은 얼마든지 강점일 수 있고, 강점이 약점일 수 있습니다. 삼손은 강한 것이 치명적 약점이었습니다. 바울은 약한 것이 강점이었습니다.
  여러분, ‘아킬레스건’이란 말을 아시지요? 그리스 신화에 아킬레우스라는 신에게서 유래되었습니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는 아킬레우스가 갓난아기일 때에 스틱스 강에 가서 그의 몸을 물에 담급니다. 그 때 아기의 발목을 빼놓고 온 몸을 담갔습니다. 그는 장성하게 되어 몸 전체가 괴력을 발휘하지만 발목 부분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에 나가 큰 공훈을 세웁니다. 그러나 트로이 전쟁에 나가서 발뒤꿈치에 화살을 맞고 전사하게 됩니다. ‘아킬레스건’이란 자신의 치명적 결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진짜 결함은 아킬레스건이 아니라 그의 성격적 결함입니다. 그를 죽게 한 원인으로는 배신, 탐욕, 적의, 변절, 무소신, 경직성, 불성실, 복수심, 거만 등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약점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약점을 강점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약점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약점은 하나님께 의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약점은 거만하지 않게 우리를 막아줍니다. 약점은 겸손함을 잃지 않게 하여줍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자아를 제어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강점에 약점을 덧붙이십니다. 약점은 하나님보다 앞서 나가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모세는 말을 잘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보다 앞서 가는 것을 방지하시려고 말을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라는 병 때문에 세 번이나 기도하였습니다. 건강을 나쁘게 하신 것은 하나님보다 앞서가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보려고 했지만 키가 작아 뽕나무 위에 올라갔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키가 작은 것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집에 예수님을 모실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2:10에는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니라”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약한 때가 곧 강한 때입니다. 내가 강하다고 할 때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때입니다.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모든 하나님의 거인들은 약한 사람들이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거인으로 사용하십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크게 사용하시기 위해 강점을 약점으로 바꾸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허벅지를 쳐서 환도뼈(골반뼈)를 탈골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강점을 약점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날 이후 야곱은 절룩거리며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만일 복 받고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기꺼이 평생 동안 절룩거리며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고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아담에게 “누가 너의 벌거벗었음을 네게 일렀느냐?”라고 하십니다. “일렀느냐”라는 말은 ‘반대편에 서다’, ‘죄악을 고발하다’의 뜻입니다. “누가 너의 벗은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더냐?”라는 뜻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벗었음을 고발합니다. 우리의 약점을, 열등의식을 고발하는 마귀의 소리를 물리치기를 바랍니다.

첫째, 죄는 네거티브의 성격을 가지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벗은 상태는 최상의 상태입니다. 사랑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죄는 벌거벗음을 비정상으로 만들고, 부끄러움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죄는 정상을 비정상으로 보게 합니다. 당연한 것을 이상한 것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아담의 죄란 부정적 사고로 가득 차게 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은 다음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님이 짝지어 내게 주신”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와에 대하여 “여자가 나에게 먹으라고 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정말 먹지 말라고 하더냐?”라고 의심하였습니다. 선악과에 대하여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게 보였습니다.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였습니다. 죄는 네거티브 사고입니다.
  사람들의 자기 경시는 그 자체가 범죄입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열등감 그 자체가 죄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긍정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존감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과거를 가지고 트집을 잡습니다. 그것이 그가 가진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에게는 미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과거 없는 성자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
  부정적인 사고는 결코 바른 말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안돼요!”, “못해요!”, “싫어요!” 이런 말은 절대로 사람의 삶을 바르게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욥의 아내를 보세요. 병들고 고통당하는 남편에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으라”고 합니다. 이런 아내는 뼈가 썩음 같게 할 것입니다. 부정적인 아내는 부정적인 삶을 만들어냅니다.
  부정적 말을 긍정적인 말로 바꾸지 않으면 부정적인 마음 자세를 긍정적인 마음 자세로 결코 바꿀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데스 바네아에서 12지파의 대표를 가나안땅을 정탐하러 보냈습니다.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 열 사람은 민수기 13:33에는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이미 졌습니다. 이들의 부정적 사고는 이미 하나님의 관심에서 벗어났습니다. 메뚜기라는 별명을 가진 유재석은 MC로서 가장 탁월한 재질이 있다고 최고의 MC라고 합니다. 그는 원래 비호감 내지 무호감이라고 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가장 뛰어난 사회자가 된 것입니다. 누구나 자존감을 상실한 사람은 죄를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부정적인 사람 한 명이 다른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공동체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공동체의 확신을 무너뜨리며 공동체의 생산성을 현저히 감소시킵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공동체의 공공의 적입니다.
  애들러는 “인간의 가장 놀라운 특성 가운데 하나 네거티브(negative) 포지티브(positive)로 바꾸는 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실은 내가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할 때에 하나님은 능히 하십니다.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확신에 차서 말합니다. 신앙의 힘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나폴레옹은 5피트 2인치의 작은 키를 가진 코르시카 섬의 시골 출신입니다. 그런데 그는 “나는 환경을 만드는 사람이다”라고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이 젊은 영웅은 죽을 때조차도 “유럽 대륙을 진격하라”라는 말을 남기고 잠들었습니다. 자신의 키와 자신의 출신은 자신의 약점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새 와이셔츠를 하나 입었습니다. 그런데 흰 와이셔츠에 단추는 검은 단추였습니다. 이전 시대에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흰 와이셔츠에는 흰 단추를 달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흰 것과 검은 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시대입니다. 호감과 비호감이 동시에 인기를 얻는 시대입니다. 양극을 다 포용할 수 있는 보자기 같은 시대입니다. 모든 인간형과 외모를 다 포용하는 시대입니다. 이제 당당히 자신에 대한 네거티브가 아니라 자신감을 갖고 살기를 바랍니다.

둘째, 사탄은 네거티브 전략을 사용합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네거티브 전략을 씁니다. 사탄이 사람에게 가장 쓰기 좋은 전략은 네거티브 전략입니다. 누구나 네거티브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작다고 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가 너를 작다고 하더냐?”, “누가 너는 못한다고 하더냐?”라고 합니다.
  “벌거벗은 것을 누가 나쁜 것이라고 하더냐?”고 하나님은 물으십니다. 하나님이 괜찮다고 하는데, 이게 정상인데 사탄은 이것을 나쁜 것이라고 합니다. 마귀는 자연스럽고, 정상인 것을 가지고 흠을 잡고, 나쁜 것이라고, 비난거리를 만듭니다.
  하나님이 예쁘다고 하는데 누가 너를 밉다고 하더냐? 마귀는 밉다고 합니다. 마귀는 빨리 눈도 고치고, 코도 높이고, 턱도 깎아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크다고 하는데 누가 너를 작다고 하더냐? 마귀는 작다고 합니다. 그 키로 무엇을 하겠느냐고 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네거티브 전략입니다.
  저의 어머니의 친구 권사님이 어릴 때부터 친구셨는데 아주 키가 크고 예쁜 분이십니다. 우리 어머니는 키가 작고 스스로 아무 못 생겼다는데 제가 볼 때는 아주 아담하십니다. 저를 낳아주신 것을 보면 괜찮으신 데도 키에 대한 열등의식이 항상 있습니다. 그런데 키가 크신 저의 어머니의 친구는 반면에 키가 크니까 발이 커서 발이 못 생겼다고 늘 열등의식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누가 발을 그렇게 유심히 쳐다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발 때문에 늘 불만입니다.
  지난 번 고려항공을 타고 평양에 갈 때입니다. 저와 같이 가던 젊은 집사님이 비행기 안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습니다. 아이스크림이 어디에서 났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고려항공 스튜어디스가 줬다는 것입니다. 제가 북한 스튜어디스에게 왜 저 사람은 주고 나는 안 주느냐고 했더니 “제게 곱다고 했단 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좀처럼 안주는 아이스크림을 예쁘다고 하니 준 것입니다. 여성에게 예쁘다고 하면 북한에서도 통합니다. 격려와 칭찬은 세계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통합니다.
  마귀는 열등감과 불평하게 하는 전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 마귀의 전략에 말려들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도 마귀의 전략에 넘어간 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 갈멜산의 결투에서 이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자신에 대한 네거티브 사고가 생겼습니다. 그는 열왕기상 19:4에서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내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라고 합니다. “낫다”란 말은 ‘토브’라는 말로서 선하다 혹은 좋다는 뜻입니다. ‘나는 못난 사람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구약의 선지자의 대표자입니다. 성경에서 ‘모세와 엘리야’라고 하면 구약을 지칭합니다. 선자자의 대표자인 엘리야도 자신이 작아 보입니다. 마귀의 네거티브 작전에 말려들어 시험을 당하면 이렇게 됩니다.
  사울이 망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윗과의 비교의식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돌아온 다윗을 환영하면서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사울은 자신이 작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에게 질투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불신하고, 점쟁이에게 의존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의식 때문에 열등감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이런 수순으로 인생을 망칩니다.
  로마서 8:33 하반절에서 34절 상반절에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죄 없다고 하시는데, 이미 용서하셨는데 마귀는 계속 과거의 죄를 끄집어내어 나를 괴롭힙니다. 아직도 죄가 남아 있다고 옥죕니다.
  또 대선 시즌을 맞이했나 봅니다. 대선주자의 도덕성 문제를 끄집어냅니다. 과거의 경력에 흠집을 내려고 합니다. 이미 수차례 검증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또 네거티브 전략으로 자신이 덕을 볼까 하여 변하지 않는 수법을 동원합니다. 정책 없는 네거티브 전략이 얼마나 사회와 국가를 어렵게 하는지 아시지요?
  타인의 약점만 건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타인의 장애를 자신의 이익으로 삼고 타인의 약점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습니다. 장애인에게 장애로 트집 잡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공부하지 못한 사람에게 가방 끈 얘기를 하는 것은 비겁한 일입니다. 약점만 건드리는 것은 비굴한 일입니다. 나아가서 이런 일은 마귀의 노릇입니다.
  로마서 15:1에는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나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지 맙시다. 하나님이 주신 타인의 잠재력을 제한하지 맙시다.
  자녀들 망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계속 야단치세요. “너는 안돼, 그럴 줄 알았어”, “옆집 아무개 좀 닮아라, 너하고는 상대가 안돼”, “너는 이미 싹이 노랗다”라고 자주 얘기하세요. 그러면 아이들이 금방 망쳐집니다. 마귀가 도와주기 때문에 힘들이지 않고 망쳐질 수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본의 작가 엔도 슈샤꾸의 ‘나를 사랑하는 법’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이 들면서 나는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나약함의 대처 방법을 아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 방법은 바로 남들 앞에서 강해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내가 가지고 있는 약점을 인정하고 가능한 한 유리하게 바꿔 보자고 생각한 뒤에야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약점은 약점으로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나 자신을 보이는 것입니다. 찬송가 가사에도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라고 합니다. 내 모습 이대로가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을 배려는 하되, 다른 사람의 눈치는 보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은 배려는 안 하면서 눈치는 엄청나게 봅니다. 스스로 가슴을 활짝 열고 외치세요. “나는 왕자다”, “나는 공주다”, “하나님 나를 사랑한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이런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열등의식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이것은 자신도 모르게 마귀의 일에 동조하는 결과가 됩니다.

결론

  존 템플턴의 ‘열정’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무시무시하고 큰 괴물에게 쫓기는 꿈을 꾸었습니다. 괴물은 괴성을 지르며 따라옵니다. 여인은 계곡으로 도망하다가 막다른 곳에 다다르게 됩니다. 마침내 괴물이 코앞에까지 왔습니다. 여인은 괴물에게 말합니다. “야, 괴물아 도대체 나한테 뭘 어쩌려는 거야”. 괴물이 대답합니다. “그건 너한테 달렸지. 이건 네가 꾸는 꿈이니까”. 괴물은 내가 만들고 다닙니다.
  자신 대해 좋은 느낌을 갖는 사람만이 좋은 결과를 이룹니다. 마귀의 네거티브 전략에 말려들지 않도록 항상 조심합시다. 우리는 스스로 자아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약점을 보지 말고 하나님만 보아야 합니다. 마귀에게 기웃거리거나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왕이시지만 종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왕자와 공주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왕자, 공주로 당당하게, 하나님의 포저티브 전략을 믿으며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시시각각으로 들려오는 사탄의 네거티브 소리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성희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