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도덕성을 깨우자   (시51:10~13, 골3:5~8)

어느 목사가 산을 오르다가 미끄러져 낭떠러지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떨어지다가 간신히 소나무 가지 하나를 잡았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위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위에 누구 없어요? 살려주세요”. 위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 아들아”. “누구세요?” “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 살려주시면 충성을 다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나무 가지를 놓아라”. “이 가지를 놓으라구요? 가지를 놓으면 죽습니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믿음대로 된다”. 그 목사는 한참 생각하더니 다시 소리를 지릅니다. “그 위에 다른 분 누구 안 계세요?”
  우리 교회의 과제가 무엇입니까? 신앙과 실천의 괴리입니다. 잘 믿는 사람은 많은데 믿는 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믿으라고 하지만 정작 자신은 믿지 못합니다. 우리 사회의 과제가 무엇입니까? 지식과 실천의 괴리입니다. 지식은 팽창하고 있고 많이 알고 있지만 아는 대로 사는 사람이 적습니다. 우리사회 최고의 지성이라고 말하는 교수 사회에서 논문 표절은 관행이라는 말로 얼버무립니다. 전직 교수가 자신의 판결에 불만을 품고 판사에게 석궁을 쏘아 테러한 사건도 발생합니다. 이런 모든 최근 우리 주변의 사건들이 지식과 실천이 별개라는 증거입니다.
  디모데후서 3:14에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배우는 대로 행하라, 확신하는 대로 행하라는 뜻입니다. 도덕성이란 지식과 신앙이 실천될 때에 나타나는 심성입니다. 도덕성의 문제는 결국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지난 주간 제가 가까이 지나는 어느 목사님의 사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비교적 젊은 50대 초반의 사모님인데 1년 4개월 동안 투병하시다가 돌아가셔서 참 마음이 아픕니다. 빈소에 가서 제가 목사님께 물어봤습니다. 사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대화하고 무슨 얘길 하더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운명하기 전에 오랫동안 곁에서 간호 잘 해줘서 고맙다고 하고, 사랑한다고 하더랍니다. 암으로 투병하면서 한국에서 유명한 암 전문의를 만난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의사선생님이 암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치료는 가족이라고 하더랍니다. 아무리 좋은 건강식을 먹어도 아무리 좋은 청정지역에 가도 가족이 없으면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환자 혼자서 청정 지역에 있어도 필요 없습니다. 환자 혼자 있으면서 건강식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가족이 제일 좋은 약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건강식을 너무 좋아합니다.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운동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좋다는 것은 뭐든 다 먹는다고 합니다. 운동은 하지 않고 먹어서 건강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잘못입니다.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많이 배웁니까? 우리나라의 지식수준은 굉장히 높습니다. 지식을 많이 먹는 겁니다. 그런데 아는 것만큼 실천이 없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얼마나 신앙이 큽니까? 성경공부도 우리만큼 많이 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말씀을 많이 먹습니다. 그런데 믿는 것만큼 실천이 없습니다.
  도덕성이란 아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믿은 대로 사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삶이란 무엇입니까? 지식과 신앙이 실천으로 옮겨질 때에 도덕적 삶이 됩니다. 실천이 없는 삶은 도덕적 삶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지도자의 상을 보세요. 모세는 광야에서 중간 지도자들을 지명합니다. 지도자의 자격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출 18:21). 사도들은 초대교회에서 구제를 담당할 일곱 사람을 선택하게 합니다. 그들의 자격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입니다(행 6:3).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영성적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것도 영성적인 것입니다.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것은 도덕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칭찬 듣는 사람이란 도덕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구약과 신약은 한결같이 영성과 도덕성을 지도자의 자격이라고 합니다.
  공직자는 능력보다 도덕성이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어느 조사에 의하면 79%가 지도자는 도덕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답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누구나 리더입니다. 사회와 민족의 지도자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도덕성을 갖춘 인물이어야 합니다.
  간디는 “권력을 손에 넣고 무력을 지배함으로써 리더십은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원칙과 봉사에 충실한 사람만이 진정한 리더십을 획득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도덕성은 리더십을 만듭니다. 리더십은 반드시 도덕성을 요청합니다.
  민족의 도덕성을 깨우기를 원하는 우리에게는 먼저 우리의 도덕성이 깨어나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도덕성이 깨어날 수 있을까요? 시편 51편은 다윗의 참회의 시입니다. 죄를 지은 다윗이 다시 도덕적으로 깨어나는 결단의 시입니다. 이 시 가운데는 인간의 도덕성이 깨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첫째, 정한 마음을 창조해야 합니다.

  시편 51:10에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라고 합니다. 정한 마음은 새로 탈바꿈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창조’란 말은 히브리어로 ‘바라’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락하고 오염된 마음이 새로 탄생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다 없이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전 것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옛것을 완전히 없이하고 새롭고 정한 마음이 창조됩니다.
  정한 마음이란 도덕적 마음입니다. 도덕적 마음이란 의에 대하여 살아 있는 마음입니다. 정의, 바름, 옳음에 대하여 살아 있는 마음입니다. 성자 어거스틴이 개심한 후에 옛날에 거닐던 골목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방탕하여 사생아까지 낳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전에 알던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은 어거스틴에게 “나예요. 나 모르시겠어요?”라고 했습니다. 그 때 어거스틴은 “내가 어거스틴이지만 그러나 이전의 내가 아닙니다”라고 하면서 그냥 지나쳤다고 합니다. 의에 살고 이전의 죄에 대하여 죽은 마음이 새로운 도덕적인 마음입니다.
  정한 마음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마음입니다. 베드로전서 2:24에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에 죽으셨나요?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시고, 정한 마음을 창조하고, 깨끗한 도덕률로 살게 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 무엇일까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것입니다. 마음을 위에 두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5에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고 합니다. 땅에 있는 지체대로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곧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부도덕입니다. 그러면 위에 있는 지체는 무엇입니까? 이것이 도덕성입니다.
  우리의 한 눈을 빼고 천국에 가는 것이 낫습니다. 우리의 한 손을 자르고 천국에 가는 것이 낫습니다. 우리 몸에 천국의 지체를 가져야 합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일 때에 천국에 있는 지체가 살아납니다. 성경에 보면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된 자도 있다고 합니다.
  천국 가기 위해서는 죽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이미 죽는 삶은 경건한 삶입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은 죽여야 합니다.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욕망과 시기를 버려야 합니다. 과욕을 버려야 합니다. 남을 딛고 내가 일어서겠다는 마음도 버려야 합니다. 이 땅의 욕심을 버려야 정한 마음이 됩니다.
  제가 얼마 전 미국에 있을 때 뉴스에 “NASA Love Triangle”(나사의 사랑의 삼각관계)라는 제목으로 며칠을 떠들었습니다. 리사 마리 노웍 대령은 작년 디스커버리호의 우주인입니다. 세 아이의 어머니이며 우주를 다녀와서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연적을 살해하기 위하여 납치를 시도했습니다. 텍사스 휴스턴에서 플로리다 올랜도 공항까지 무려 1,440킬로를 10시간동안 운전하여 가서 가스 스프레이 등으로 연적을 납치하려다 실패하였습니다. 이 우주의 영웅은 하루아침에 살인미수로 구속되어 완전히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부도덕한 삶이 눈을 멀게 하였고, 그의 명성은 땅에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살려고 하니 살지 못하고 죽습니다. 자살도 그렇습니다. 예수를 어설프게 믿으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잘 죽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대하여 살고 세상에 대하여 죽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 아주 사소한 일인데도 세상에 대하여 살면 마치 이것이 전부인양 생각됩니다. 그래서 거기에 매달리고 결국 추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모든 중독이 그렇습니다. 여러분, 제일 끊기 힘든 세 가지가 있답니다. 셋째는 술입니다. 둘째는 담배입니다. 첫째는 무엇인지 아세요? 신문이랍니다. 술이나 담배의 중독은 결국 사람을 망치게 합니다. 하늘에 의지하여 과감하게 끊어야 합니다. 폭력이나 전쟁도 중독됩니다. 1970년의 영화 “패튼 대전차 군단”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패튼장군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전쟁터의 잔해에서 “하나님, 용서하소서. 저는 전쟁이 너무나 좋습니다”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죄인 된 사람들은 온갖 중독 속에 살아갑니다. 인터넷 중독, 포르노 중독, 그 외의 각종 중독은 결국 도덕성을 파괴해버리고 맙니다.
  요셉은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아내의 유인을 피합니다. 둘만이 집에 있을 때에 아내가 요셉을 꼬인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결코 하나님께나 자신의 주인에게 죄를 범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이는 말합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꼬인 첫 번째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를 거절한 첫 번째 사람일 것이다”. 주인인 보디발이 요셉에게 아내 외에 모든 것을 허락하였기에 요셉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정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요셉처럼 형통합니다. 도덕성을 갖춘 사람은 우선은 잘 안되는 것 같고, 고생도 하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되고 형통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정결하고 흠이 없는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빌립보서 2:5에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합니다. 정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정한 마음이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도덕적인 마음이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송이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주님의 마음, 본 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주님의 마음은 거룩함을 이룹니다. 정한 마음이 바른 도덕성을 세웁니다. 바른 마음은 그 자체가 도덕성입니다. 심성이 바른 사람이 도덕성을 갖춘 사람입니다.

둘째,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시편 51:10에는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정직한 영’은 히브리어로 ‘루아흐 나콘’입니다. 이 말은 확고한 영이라는 말입니다. ‘새롭게 하소서’란 말은 ‘하다뉘’라는 말인데 영어로는 ‘renew’라는 말입니다. 있던 것을 온전케 한다는 뜻입니다. 타락한 영을 다시 온전케 하라는 뜻입니다.
  정직이란 말은 구약에 아주 많이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여”,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여호와의 판단은 정직하시다”, “여호와의 정직하심” 등 정직은 아주 중요한 구약적 개념입니다. 정직은 여호와의 영입니다. 하나님은 악이나 거짓이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교훈이 정직입니다.
  열왕기와 역대기를 보세요. 선한 왕에 대해서는 성경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라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악한 왕에 대해서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라고 합니다. 정직은 선한 것입니다. 정직하지 못하는 것은 악입니다. 정직은 악의 반대로 사용됩니다. 정직은 곧 선한 것이라면 부정직은 악입니다. 정직한 영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거짓 영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거짓 영으로 가득합니다. 악한 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점점 도덕성이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토마스 제퍼슨은 “정직은 지혜의 책 제1장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직한 자는 결국 승리합니다. 정직한 자는 하나님을 봅니다. 시편 11:7에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라고 합니다. 정직한 사람을 하나님을 기뻐하시고 얼굴을 보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함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정직함을 원하십니다.
  존 퀸시 아담스의 딸에게 보낸 편지라는 감동적인 글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내 딸아, 너는 남편감으로는 정직한 사람을 구하고, 그 정직함을 지켜가도록 그를 도와주어라. 그가 독립적인 사람이라면 부유한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른 어떤 여건보다도 그 사람의 명예와 도덕적 성품을 높이 사기를 바란다. 다른 어떤 위대함보다 영혼의 위대함을, 다른 어떤 부요함보다 마음의 부요를 숙고해라”. 정직함을 높이 사고 정직함을 지켜주는 것이야 말로 고귀한 영혼의 삶입니다. 이런 부모가 다 됩시다.
  미국에서 1,300명의 고위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16개 항목 중에서 리더십의 어떤 특성이 경영의 효과를 향상시키는데 가장 크게 기여했는지를 물었더니 71%가 정직을 꼽았습니다. 정직은 리더십입니다. 정직은 경영의 효과입니다. 정직은 리더십의 모퉁잇돌입니다. 야곱은 그의 자식들이 애굽에서 잘못 가져온 돈을 돌려주라고 했습니다. 욥의 정직은 부단히 시험을 당했고 그는 그것을 잘 견디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위대한 영웅들의 공통분모는 정직이었습니다. 정직은 우리에게 성별의 기초가 됩니다.
  데이비드 코트렐의 ‘성경에서 배우는 크리스천 리더십’에서 “어떻게 정직해질 수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제언합니다. 첫째는 약속을 반드시 지켜라. 둘째는 당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거리낌 없이 말하라. 셋째는 항상 공평하라. 넷째는 당신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라. 다섯째는 당신이 하겠다고 말한 것을 행하라. 항상 정직을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직을 실천한다면 도덕적 인물입니다. UFO와 정직한 정치가의 공통점이 뭔지 아세요? 아주 가끔 소문으로 듣기는 듣는데 실제로 본 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정직이 우리 사회에 가장 흔한 보편적 가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가 뛰어난 도덕성을 가진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잠을 자던 힐러리가 부스스 일어나 클린턴을 깨웁니다. 클린턴은 돌아누웠습니다. 힐러리가 다시 깨웁니다. “왜 그래?” “나 화장실 다녀올께요” “그 말 하려고 깨운거야?” “아뇨, 내 자리 좀 맡아 달라구요”. 아무리 위대한 정치가라도 도덕성이 무너지면 그의 정치력이 인정받지 못합니다. 아무리 어마어마한 거부라도 그의 도덕성이 흠이 있으면 그의 돈이 그를 영화롭게 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고명한 학자라도 그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으면 그의 학문이 인정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황우석 교수의 몰락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최근 논문 표절로 사임한 어느 총장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무너진 것은 도덕성입니다. 정직성의 결여가 파멸로 이끈 것입니다.
  조나단 글로버는 ‘인류: 20세기의 도덕사’라는 책에서 20세기의 역사는 현대악의 역사라고 평했습니다. 지금은 도덕성을 가장 요청하는 시대입니다. 우리의 도덕성이 깨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도덕성을 깨워야 합니다.
  도덕성은 인간 영성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도덕성을 잃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는 일입니다. 도덕성은 곧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도덕성은 삶의 영성입니다. 영성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 도덕성입니다.
  우리 민족과 사회의 도덕성을 깨우는 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민족과 사회를 깨우기 전에 먼저 우리의 도덕성이 깨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도덕성이 깨어나면 절로 민족도 사회도 도덕적으로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도덕성이 깨어나서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으로 무장한 흠이 없는 하나님의 사람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성희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