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영성을 깨우자 (겔37:13~14, 행2:37~38)

우리는 지금 지식, 정보, 과학, 기술로 대변되는 정보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정보사회의 또 다른 특징적 표현은 영성사회라고 합니다. 이 시대는 영성이 최고조로 발달하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를 깊이 들여다보면 온통 영으로 가득한 시대입니다. 과학이 발달하는 시대에 왜 영성시대가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과학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초과학적인 신비에 관심을 가지게끔 되어 있습니다.
  레너드 스윗이란 신학자는 “영성은 전례 없이 붐을 이루고 있다. 신세대들은 신중독자들(godaholics)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온 천지가 신중독에 걸려 있는 것 같습니다.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각자의 이념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영적 전쟁의 시대입니다. 참 영과 거짓 영이 서로 싸우는 시대입니다. 우리 시대의 보수와 진보도 자세히 보면 영적인 싸움입니다. 서로가 자신의 이념으로 투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앙드레 말로는 “21세기는 종교적일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영적인 관심이 극대화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누구나 생명 얻는 영성이든 아니면 생명 파괴적 영성이든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에 보면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의 수는 급격하게 줄고 있지만 반면에 영성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숫자는 비율로 볼 때에 늘어나고 있습니다.
  영성은 그리스도와 일체된 삶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 즉 그분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는 달콤한 멍에가 영성입니다. 일전 TV에 보니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와서 어디에선가 손을 비비며 빌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외양간의 소를 보고 그렇게 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소가 쌍둥이만 낳았다고 소가 영험이 있다고 그 소한테 빌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니 그 소가 영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소가 환경변화로 쌍둥이를 낳는 것 같습니다. 사람도 인공수정하면 쌍태가 많아진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원래 종교심이 많아서 큰 나무나 큰 바위나 바다를 보면 빌고 싶어집니다.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기도를 하는 민족이기도 합니다. 쉴 새 없이 손을 부비며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입니다.
  사도행전 17:22에는 바울이 그리스의 아테네에 가서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헬라인은 범사에 종교심이 많은 백성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좋은 뜻이 아니라 늘 미신적이라는 말입니다. 너무 미신적이어서 하나님을 잘 믿지 못함을 책망한 말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샤머니즘이니 무속신앙이니 하는 것들이 다 우리의 문화나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사는 집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교회에 갔더니 교회 옆에 작은 땅이 있는데 도무지 주인이 팔지 않고 오히려 교회를 팔라고 그런답니다. 왜냐하면 그 주인이 그 땅을 사고 나서 자신이 산 주식 값이 많이 올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 국민들의 심성의 가장 저변에는 누구나 무속신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벗어나기 힘든 종교적 심성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굉장히 영성적인 것 같지만 성경이 말하는 영성과는 다릅니다.
  영성이란 삶의 방법과 생각을 승화시키고 거룩하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샤머니즘이나 무속신앙이 얼마나 삶의 방법과 생각을 승화했습니까? 거룩하게 하였습니까? 이런 것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영적 깨어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깨어나야 새롭게 되고 거룩하게 됩니다. 스위스의 철학자 겸 작가인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은 “영적 생활이 없는 사람은 환경의 노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영적 생활을 해야 환경을 지배하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에스겔의 환상 이야기입니다. 골짜기에 널려 있던 마른 뼈들이 서로 맞아 몸을 이루지만 영이 들어가지 않으면 군대가 되지 못합니다. 육체는 영이 있어야 살아있는 육체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영이 없으면 아무 힘이 없습니다. 뼈와 근육과 피부가 있지만 영이 없으면 군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들어가 힘 있는 군대 같은 우리 민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성으로 깨어나는 우리 민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영성이 깨어납니까?

첫째, 무덤을 열고 나와야 합니다.

  에스겔 37:13은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고 합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환상을 보세요. 마른 뼈들이 군대가 되는 하나님의 영적 기적이 나타납니다. 무덤에는 하얀 뼈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말라 다시 살 수 없는 이스라엘의 절망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무덤이 열립니다. 절망이 희망으로, 죽음이 삶으로 변합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깨어나는 것입니다.
  무덤은 죽음이 있는 곳입니다. 냄새가 나는 곳입니다. 절망이 있는 곳입니다. 무덤은 열려야 희망이 있습니다. 무덤이 열리면 희망이 열립니다. 위대한 소설 ‘벤허’의 작가 류 웰레스는 “전 세계 모든 민족들이 남긴 기념물은 사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견해에 강력히 항의한다. 그들이 만든 동상과 비문이 그러하고 역사가 그러하다”고 하였습니다. 고대 무덤의 부장품들은 인간의 영혼불멸을 믿고 있기 때문에 시체와 함께 묻었고 지금도 수 없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예루살렘 북방 60마일의 도단에서 발굴한 2세 아이의 유골에는 4,000년 전의 주전자와 그릇 등이 함께 묻혀 있었습니다. 피라미드와 같은 무덤은 인류문화가 인간은 영혼을 굳게 사모한다는 증거입니다.
  중국 서장 자치구는 티베트입니다. 티베트의 수도인 라싸에는 포달랍궁이라는 달라이라마의 무덤이 있습니다. 현재 달라이라마가 14대라고 합니다. 포달랍궁에는 5대에서 13대까지 달라이라마의 무덤이 있습니다. 7대 달라이라마의 무덤은 11미터 높이에 금만 500킬로그램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9대는 11세 때 죽어 무덤이 제일 작습니다. 5대 달라이라마는 가장 큰 무덤을 가지고 있는데 금만 3,721킬로그램이라고 합니다. 무덤은 하나같이 영혼의 소중함, 영혼불멸을 상징합니다. 영혼불멸을 무덤으로 믿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히려 무덤을 열고, 무덤을 벗어나야 진짜 영혼을 찾고 영이 살아납니다.
  누가복음 20:38에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무덤에 가서 주님을 찾겠다고 기웃거리는 현대 크리스천을 많이 봅니다. 영이 죽은 사람들입니다. 무덤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 당시에 무덤에 살던 귀신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왜 귀신들이 무덤에 살까요? 소망이 없음을 말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러움과 어두움을 상징합니다. 무덤에는 아무 소망도 의미도 없습니다. 그래서 귀신은 무덤에 살고 무덤을 즐기고 사람들은 무덤으로 만듭니다.
  무덤은 누가 열 수 있습니까? 성경은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라고 합니다. 하나님만이 무덤을 여십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무덤 앞에 가서 돌문을 바라보시면 예수님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부정과거 명령형입니다. 이 말씀은 권위적 명령입니다.
  영적 삶은 무엇보다 깨어 있음이 문제입니다. 무덤에서 깨어나 나와야 합니다. 무덤과 죽음과 더러움과 어두움을 좋아하는 일그러진 영을 깨고 밝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영이 삽니다.
  여러분,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죽었다 깨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죽었다 깨어나는 일도 주님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죽은 자여, 일어나라” 이 한 마디에 다 일어납니다. 죽은 영에게도 말씀합니다. “무덤에서 나와서 죽은 자여, 일어나라”. 이 한 마디에 죽은 영이 살고 힘 있는 군대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영이 죽은 상태에서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영이 무덤에서 나와 깨어나야 우리나라가 희망이 있고, 민족에게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폐허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입니다. 폭력, 대량학살, 인종차별, 에이즈 공포, 각종 범죄, 테러, 외설적 음악, 무방비로 노출된 안녕과 생명은 안정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권태기’란 권상우가 태진아로 보이는 시기랍니다. 그런데 지난 주간에 보니까 권상우가 태진아처럼 늙어 보이는 시기입니다. 정말 영적 폐허 가운데 우리가 삽니다. 영이 살아야 사회가 삽니다. 영성과 비 영성이 함께 싸웁니다. 영은 떠나가고 이름만 가진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영적 상태가 죽어 있는 무덤 같은 상태입니다.
  즐겨 부르는 찬송에 “이 세상에 죄악 된 일이 많고 참 죽을 일 쌓였구나, 내 주 예수 날 건져 주시오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죽을 일들이 쌓여 있습니다. 무덤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무덤을 여시는 주님의 영으로 깨어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영을 우리 속에 두어야 합니다.

  에스겔 37:14에는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라고 하십니다. 내 영은 하나님의 성령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우리 속에 두어야 우리의 영이 살아나고 힘이 있는 군대가 됩니다. 세상을 변화하고 세상을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영은 살리는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살아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난 새 영이 되고 그들의 삶이 회복되고 포로에서 다시 고국에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에스겔의 환상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뜻입니다.
  우리가 다시 회복되고 민족과 국가가 제대로 되려면 하나님의 영을 우리 속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영이 살아납니다. 그래야 우리의 형편없이 파괴된 삶이 다시 회복됩니다. 그래야 우리 조국이, 민족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려면 하나님의 영을 우리 속에 초청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영적 수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이 있어야 우리 자신과 우리 민족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에 주신 하나님의 환상입니다.
  요한복음 6:63에는 “살리는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합니다. 우리는 육 때문에 사람이 아니라 영 때문에 사람입니다. 우리 속에 어떤 영이 있느냐 하는 것이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말합니다. 우리 속에 성령이 계시면 우리의 성령의 사람입니다. 우리 속에 세속적 영이 있으면 우리는 세속적 사람입니다. 우리 속에 악령이 있으면 우리는 마귀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 속의 영으로 말미암아 움직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무엇이 나를 움직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입니까? 세속적 영입니까? 악한 영입니까?
  흙으로 빚은 육체는 생기가 들어가기 전에는 사람이 아닙니다. 생기가 사람 되게 합니다. 생기가 영으로 살게 합니다. 영이 들어가기 전에는 뼈와 근육만 가지고는 사람 구실을 못합니다. 영이 들어가야 사람 구실을 합니다. 세상에 사람 구실을 못하는 사람은 한결같이 그 속에 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이 육체로만 살면 참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을 자기 속에 두어야 참 영의 사람인 것입니다.
  로랜스형제는 하나님의 임재를 철저하게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영적인 생활은 하나에서 열까지 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연습으로 이루어진다는 나의 믿음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가장 거룩하고 가장 필요한 연습은 곧 하나님의 임재 연습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삶은 하나님의 영을 내 속에 두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내 속에 임재하시면 내가 하나님처럼 살 것입니다.
  성공회 영성가 에블린 언더힐은 영성 생활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전인적 균형을 개발하는 기도와 학습과 노동의 삶과 일상생활에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룬 삶으로 정의하였습니다. 하나님 영이 내재하는 삶이 영성적 삶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내 속에 두는 삶입니다.
  역대상 10:13-14을 보세요.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주셨더라”고 합니다. 점쟁이를 찾고 무당을 부르는 일은 죽을 일입니다. 왠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악령을 자기 속에 두기 때문에 죽을 일입니다. 악령을 자기 속에 두는 자체가 이미 죽은 일입니다.
  고궁이나 파고다 공원의 담장에는 점쟁이들이 있습니다. 서울에도 20만 명 이상의 무당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난삼아 점을 봅니다. ‘오늘의 운세’ 사이트에 들어가서 보기도 합니다. 남녀가 같이 길을 가다가 “우리 저거 한번 볼까?” 하며 점쟁이에게 재미로 가서 봅니다. 장난이라도 절대로 점쟁이 찾아 가지 마세요. 순간마다 내 속에 하나님의 영을 초대해야 합니다. 내 속에 거룩한 영성이 있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장난이라도 교회 들어와 기도하는 사람 봤습니까? 남녀 친구들 같이 가다가 교회 보이거든 “우리 교회 가서 기도나 할까?” 그러고 교회에 들어와서 거룩한 영으로 자신을 자꾸 채워야 합니다. 점쟁이한테 가보세요. 거의 좋은 말 많이 합니다. 남녀 둘이 들어갔는데 결혼 못한다는 말 합니까? 안 하지요? 혹시 나쁜 말 들으면 아무리 장난이라지만 기분 안 좋아요. 왜 돈 주고 기분 안 좋은 일을 하겠습니까? 궁금하면 저한테 오세요. 제가 철학과 출신이니까 다 얘기해 드릴께요.
  이제 곧 설날이 다가옵니다. 연초가 되면 토정비결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재미로라도 이것도 절대 보지 마세요. 그거 볼 시간 있으면 성경보세요. 성경에는 우리가 궁금한 모든 것이 다 기록되어 있고, 해답이 다 나와 있습니다. 그 해답 못 찾겠거든 저에게 오세요. 제가 다 찾아 드릴께요.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우리가 성취하는 것(achieve)이 아니라 받는 것(receive)입니다. 거룩한 영성을 간절히 사모하세요. 하나님의 영을 내 속에 순간순간 채우세요. 반드시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속에 가득히 임재하실 것입니다.
  특히 영적 공동체의 지도자는 반드시 ‘영성과 도덕성’을 갖춘 자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적 가르침입니다. 저는 도덕성을 삶의 영성이라고 표현합니다. 도덕성은 인간 영성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도덕성을 잃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는 일입니다. 도덕성은 곧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지도자는 항상 하나님의 영을 자기 속에 모셔 들이는 일을 최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결론

  로널드 롤하이저는 영성이란 우리의 에로스를 어떻게 방출하느냐에 관한 것이라고 합니다. 영성은 우리 속에 있는 기운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영성이란 우리 속에 있는 불꽃을 처리하기 위해 우리가 취하는 행동이며 우리의 에로스를 어떻게 분출하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속에 수많은 영적 에너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에너지를 어디로 분출하고 있습니까? 밤새 춤을 추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신나게 드라이브하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힘이 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운동으로 에너지를 분출합니다. 어떤 분은 사람을 만나 수다 떨므로 에너지를 분출합니다. 어떤 분은 포만감이 오도록 먹으므로 에너지를 분출합니다.
  우리 속의 에너지를 하나님께 분출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에너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자신 속에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에너지를 분출합니다. 하나님을 전도하는데 에너지를 쏟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데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성적 삶입니다. 우리 모두의 영이 무덤에서 깨어나서 하나님의 영을 우리 속에 가득히 초대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민족의 영성이 깨어나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1907년을 회복하는 영성의 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이성희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