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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딤전 4:7,8)
본문의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권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성도답게 경건한 생활을 하라“는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생활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7절 하반절에서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는 말씀은 “경건한 생활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훈련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경건을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건 생활 즉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건한 생활을 하도록 자신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전 9장 27절 상반절에서 “자기의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한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경건한 생활을 하였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건 생활을 자신을 훈련하였습니다.
경건한 생활이 생각하는 데로 거저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기에 부단한 노력과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노력과 연습이 없이 경건한 신앙생활을 기대한다는 것은 망령되고 허탄한 생각이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자는 겉만 그럴듯한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이주 분명한 어조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오늘 여러분들의 신앙의 삶을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얼마나 경건의 훈련에 힘을 쏟고 있습니까?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경건 생활을 위한 연습과 노력은 하지 않고 겉으로만 경건한 척 흉내만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 왔다 갔다하면 경건 생활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우리의 경건 생활, 신앙생활도 피나는 연습과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딤전 6:11에서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려면 경건의 이르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는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경건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경건하면 어떤 유익이 있으며, 우리가 경건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되는지 함께 생각해 보면서 우리의 삶을 점검해 보기를 원합니다.
1. 경건(敬虔)이란 무엇입니까?
유명한 경건주의자인 윌리암 로오(William Law, 1686-1761)는 그의 유명한 책 「경건한 삶을 위하여」(A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라고 하는 책에서 경건을 정의하기를 하나님께 드려지고 바쳐진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삶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면서 경건의 내용들에 대하여 시간 사용문제, 재물의 사용문제, 기도, 겸손, 순종 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경건(敬虔)을 무엇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경건”이란 말은 헬라어로 “유세베이아(ευσεβεια)”라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유(ευ,좋은)”+ 세베이아(σεβεια, 두려움)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경건(敬虔)에 대한 헬라어의 뜻은 “바람직한 두려움”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경건이란 결코 공포에 사로잡힌 상태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 있다는 의식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경건(敬虔)은 특별한 성도의 신앙생활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경건은 어떤 이상이나, 이념이나,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생활 태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과 만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모습을 뜻합니다.
진정한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은혜에 감사하는 모습입니다.
경건(敬虔)은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꼭 있어야 하는 덕목들입니다. 덕목은 흔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고정된 습관으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덕목은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는 내용으로서 인격과 거의 같은 말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만약 경건(敬虔)에 이르기를 연습하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딤후 3:1-5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말세의 사람들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말세를 당하면 사람들이 고통의 때에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自矜)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게” 됩니다.(19가지)
그런데 기억할 것은 만약 우리가 경건한 생활을 위해서 자신을 훈련하지 아니하면 우리들도 이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딤후 3:1-5에 나타난 말세에 나타나고 있는 19가지의 특징적인 모습은 바로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결코 경건한 생활을 위해서 자신을 훈련시키는 일을 결코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본문의 말씀은 청년 목회자 디모데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씀임을 깨닫고 이와 같은 자들의 모습에게 돌이키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경건(敬虔)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의 내용이 있게 하기 위해서는 경건을 몸에 배도록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만약 경건에 이르기를 게을리 한다면 솔로몬처럼 노년에 경건을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왕상 11:4에서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솔로몬은 노년에 경건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했던 아브라함은 노년에도 경건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었습니다.(창 17:1) 만약 우리가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지 아니하면 경건의 모양만 있게 되고 결국 바리새인처럼 외식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 23:15에서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결국 외식적인 사람들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① 우리가 경건하면 지혜의 근본을 얻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을 바로 경외하게 합니다. 지혜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의(義)를 지키게 합니다. 의를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의를 경험하며 세상에서 바른 길을 보게 합니다. 지혜는 항해하는 데 있어서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소유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도록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세상의 일을 하나씩하나씩 풀어갑니다.
② 우리가 경건하면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잠 14:27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라고 말씀하고 있고, 잠 19:23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처럼 우리가 경건하면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경건한 성도는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성도에게 생명에 이르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경건의 연습을 하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우리가 경건하면 복음 안에 감추어진 근본적인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딤전 3:16에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경건하면 복음 안에 감추어진 근본적인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④ 우리가 경건하면 범사에 유익하게 됩니다.
본문 8절에서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경건하면 범사에 유익하게 됩니다.
⑤ 우리가 경건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히 12:28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 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경건하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경건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주님을 바르게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섬기는 우리들로서는 더욱 더 경건해야 합니다.
3. 우리가 왜 경건해야 합니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불경건한 세상입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어느 때보다 경건하게 살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신약성경 속에서 부정적인 의미의 세상은 자신의 지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습니다(고전3:19). 세상은 썩어질 것들을 위해서 살아가게 합니다(벧후1:4). 세상은 거짓 선지자들이 믿는 자를 미혹하기 위하여 분투하고 있는 곳입니다(요일4:1).
세상의 특징은 정욕입니다. 요일 2:15-17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로 쫓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쫓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한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일 2:18에서 무서운 영적인 싸움을 말합니다. “아이들아 이것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경건을 상실케 함으로써 기도의 능력을 앗아가는 것이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니라”
그렇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경건을 상실케 함으로서 기도의 능력을 앗아가는 것이 적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싸움과 관계된 것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건한 삶을 통해서 기도의 능력을 유지하는 것은 영적인 싸움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① 우리가 경건하지 않으면 죽음에 떨어지게 됩니다.
유다서 1:4에서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경건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홀로 우리의 생명의 주님이심을 부인하는 죽음의 자리에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② 우리가 경건하지 않으면 악을 사랑하게 됩니다.
유다 1:4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경건하지 않는 사람은 모든 선(善)의 근원(根源)이신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자연히 악에게 접근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色慾)거리로 바꾸어 놓습니다(유 1 :4). 이러한 행위는 계속되어 더욱 악화되게됩니다.
잠 6:16-19에서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경건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만 골라서 합니다.
③ 우리가 경건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올 때 분명히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고 또 갈 때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 잊어버리고 오히려 많은 것을 더 가지려고, 그리고 더욱더 부해지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경건을 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경건을 하지 않을 경우 만족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경건을 하지 않는 자들이 만족을 헛된 데서 찾게 됩니다. 즉 그들은 사치와 방탕과 돈을 사랑함으로 미혹을 받아 시험과. 올무에 빠지며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들은 결국 스스로 근심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④ 우리가 경건하지 않으면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게 됩니다.
본문 8절 하 반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경건을 하지 않으면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게 됩니다. 즉 경건을 하지 않는 자들은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않으며 남을 비방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배반하며 조급하며 쾌락을 지나치게 사랑하게 됩니다. 믿는 자들은 믿음과 행위에서 남의 본이 되어야 할텐데 경건을 하지 않는 가운데서는 다른 사람에게 방해만 됩니다. 이러한 행위는 세상이 자기로 말미암아 악하게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행위는 말세에 고통하는 방향으로 인도합니다. 여기에는 소망이 없게 됩니다.
4. 우리가 경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① 우리가 경건하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왜 예배가 경건에 이르게 합니까? 예배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가 거룩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예배드리는 것을 그 무엇보다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먼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일에 특별한 일이 많아서 예배에 빠지게 됩니까? 오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경건된 예배를 드리려면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연습은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일 예배에 개근하시기 바랍니다.
② 우리가 경건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본문 5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또한 딤후 3:14-17에서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케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된 생활을 하도록 우리를 온전케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경건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확신하는 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하나님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매일 식사를 세 번 하는 것처럼 성경을 하루에 3장은 읽고 공부해야 한다. 매일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연습은 참 좋은 것이다. 요즘은 성경을 공부하는 좋은 책이 많이 나와 있어서 개인이나 그룹으로 성경을 공부하면 좋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거룩해지고 경건해 진다. 그래야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않으며 살수 있다. 직장에 나가서 제 정신으로 바르게 일하고 넘어지지 않고 살려면 다른 것 없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배워야 한다. 말씀을 읽고 공부하여 깨달은 것은 반드시 실천하고 지켜야 한다. 그래야 경건한 청년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고 했습니다. 헬렌 켈러는 "성경을 여는 한 하늘 문은 닫히지 않는다"고 하였고 "마귀는 먼지 덮힌 성경은 무서워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마귀가 무서워하는 성경은 헤어진 성경 일 것입니다. 성경이 많이 헤어질수록 내 영혼은 살찌게 될 것입니다.
죤 스타트, 마틴 로이드 존스, JI 팩커 등은 대학생 때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여 금세기 최고의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③ 우리가 경건하려면 기도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본문 5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경건하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권능을 받는 길이다. 차를 마실 때도 기도하고, 과일을 먹을 때도 기도하고, 밥을 먹을 때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계속할 때 성도는 경건해 집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사는 것입니다. 청년들도 새벽기도, 금요기도, 열심히 기도를 해야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딤전 1:11에서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은혜를 받는 방편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경건한 가운데 권능있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기도하는 일에 힘썼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기에 전혀 힘썼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경건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기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물어보면 '영적 호흡'이라고 잘 대답을 하면서 사실은 호흡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신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무릎 꿇은 사람이 넘어졌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무릎을 꿇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는 향기가 되고 사단에게는 독소가 됩니다. 기도하기 힘드십니까?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기도해야 할 때 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모든 사람이 적어도 하루에 반시간 정도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빠질 경우엔 한시간이 필요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여러분 중에 바빠지면서 기도시간을 줄이신 분이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잘못된 모습니다. 바쁠수록 기도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신자되기 원한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되 빠지지 말고 드리십시오. 또 성경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기도에 힘쓰십시오. 그러면 경건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③ 우리가 경건하려면 경건한 부모의 양육이 있어야 합니다.
삼상 1:11에서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무엘이 경건한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경건한 한나의 양육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 자녀를 경건한 자녀로 양육하려면 우리 자신이 먼저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경건한 자녀에게는 경건한 부모가 있습니다. 경건한 부모에게는 경건한 자녀가 있습니다.
④ 우리가 경건하려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딤전 1:9과 요9:31에서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경건하게 생활하려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결코 경건하게 살 수 없습니다.
⑤ 우리가 경건하려면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려야 합니다.
본문 7절에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좋은 말을 하는 것을 연습해야 합니다. 성도는 망령된 말 즉 들으면 실족될 말, 욕설, 독설, 거짓말, 남을 헐뜯는 말, 안 해도 될 말,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가벼운 농담 가운데 다른 지체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말보다 성도는 형제 자매를 축복하고 칭찬하는 말을 해야 한다. 형제 자매의 얼굴을 빛나게 해주고 신바람 나게 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성도는 불평의 말, 비난의 말, 경박한 말도 삼가 해야 합니다. 성도는 언제나 축복하고 칭찬하는 말만하도록 연습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딤후 2:16에서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경건하려면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려야 합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하면서 경건하게 생활한다고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입니다.
⑥ 우리가 경건하려면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해야 합니다.
딤전 61과 딛 21-2에서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경건하려면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해야 합니다. 경건의 교훈에 대해서 착념하는 일에 힘쓰다 보면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게 되고, 급기야는 경건의 능력을 소유하게 됩니다.
5. 우리에게 어떤 경건이 있어야 합니까?
① 생활의 경건이 있어야 합니다.
유대의 국경 밖에서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었으나 경건치 못한 부자들의 횡포와 반대로 성도들이 고통을 받고 사랑이 식어져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며 급기야 말과 행동의 경건을 상실하게 된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남긴 야고보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생활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7).
당시 외식하던 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경건과 구별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특징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시위적인 경건이 아니라 당시 가장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던 과부와 고아들을 구제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조차도 교회의 경건이 현실도피주의와 연결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이해입니다. 교회가 경건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의식하는 경건의 비밀을 알게 될 때 사회는 그 경건한 이들에게 의해 영향을 받게 됩니다.
18세기 영국에서 사회 문제가 되었던, 고아들을 돌보는 사업에 대해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깊은 관심과 헌신을 기울이게 된 것은 죤 웨슬리(J. Wesley)의 부흥운동을 통해 경건의 능력을 맛보았던 전도자들이었습니다. 깊고 비밀스러운 기도의 세계로 한 시대를 움직였던 죠지 뮬러 목사님가 고아들을 돌본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② 눈물을 씻겨주는 경건이 있어야 합니다.
고통 받는 이 시대의 백성들의 눈물은 정치인들이 씻어 주지 못할 것입니다. 소외 받고 억압받는 백성들의 눈물은 민중운동으로도 씻겨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 삶의 어느 현장에서든지 그분을 두려워 할 줄 아는 경건한 지도자, 경건한 지식인, 경건한 이웃들 경건의 비밀을 사모하는 교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백성들의 눈물을 씻기실 것입니다.
또한 경건한 생활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와 더불어 말하는 것은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경건하게 살아가는 삶은 결코 중세의 수도원처럼 사람들의 곁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세속의 이웃 속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여전히 타락해 가는 이 세상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웃이 어두움으로서 그리스도인은 비로소 빛임이 드러나게 되고 사회가 부패함으로서만이 교회가 소금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두워져 가는 세상 속에서 빛으로 남고 그리스도인이 부패해져 가는 세상 속에서 소금으로 남기 위해서는 타락되어 가는 세속의 물결로부터 자신을 지켜야만 합니다.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 이것은 결코 오랜 교회의 전통이나 인습을 고집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롬12: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의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몸을 버려 십자가를 지신 것 같이 우리도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참된 경건은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약1:27). 풍요의 시대 속에서 상대적 빈곤을 느끼며 사는 우리의 이웃이 있음을 알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하며 우리의 기도는 구제와 함께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행10:1-). 구제는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축복해 주시는 약속이 보장되어 있습니다(잠11:24-25 눅6:38). 경건한 신앙생활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슬픔에 동참해야 합니다(롬12:15엡 4:32). 사랑은 나눌수록 커지고 나눌수록 많아집니다. 주님이 실천하신 은밀한 구제가 있어야 합니다.
③ 말의 경건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도 가장 오랫동안 옛 습관을 벗어버리지 못한 채 우리의 경건 생활을 위협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언어생활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면 곧 온전한 자라”(약3:2)고 했습니다.
나아가서 이 언어를 만들어 내는 우리의 혀를 배의 방향타와 힘센 말의 재갈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의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3:5-6).
우리의 말이 경건을 잃어버릴 때 경건하게 살고자 결심하던 우리의 심령은 상처를 입고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성령은 근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며 자기의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1:26)고 말합니다. 끊임없이 여러분의 경건의 생활에 상처를 주는 거듭나지 못한 언어생활에서 돌이켜 서십시오.
방탕한 언어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지금 이 시간도 한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더러운 언어들을 마구 토해 내는 여러분의 무심한 혀가 여러분의 기도의 능력을 앗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별히 성경은 방탕한 언어생활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까지 상기시키면서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엡 2:3). 여러분의 입술 위에 무절제하고 더러운 말 대신에 절제 있는 성결한 언어가 시들게 하십시오. 왜냐하면 그 입술로 여러분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대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혀가 여러분의 심령과 육체를 방탕한 데로 이끌어 가지 못하도록 경계하십시오. 왜냐하면 그 불경건한 혀가 여러분 속에 깃들여 있는 기도의 능력의 밑동을 파헤치는 부삽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④ 마음의 경건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의 능력과 관련해서 경건에 대해 여러 모양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6:45).
기도의 능력이 우리의 마음에 담긴 것처럼 우리의 경건도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갑자기 비밀스러운 일들을 상실하게 되고 우리의 말은 절제를 잃어버림으로 자신을 기쁘게 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우리의 신앙적인 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의 소욕을 쫓아갑니다. 거기에는 심각한 영적인 전쟁도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을 뵈옵는 경건의 기쁨도 없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더러운 것들에게 빼앗기게 될 때 매일 아침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던 우리들의 경건의 지성소가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기도의 향불이 그치고 회개의 희생제자가 끊겨진 우리들의 심령의 성소는 더 이상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결함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은 결코 선하고 정결한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이 불의한 것을 탐하고 정욕을 사랑하며 고달픈 경건의 영적 훈련을 피하고자 하는 육체의 소욕이라는 사실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성품은 이러한 육체의 소욕을 거스려 살도록 도전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싸움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경건한 마음과 생각 속에서 살아가기를 간구하십시오. 불경건한 생각이 쌓이면 결국은 그 일을 행하게 되고 계속해서 불경건한 일에 익숙해 질 때 그것은 이제 여러분의 습관이 되어서 치명적인 위협을 여러분의 경건 생활에 가해 올 것입니다. 이렇게 불 경건한 습관이 쌓여 갈 때 그것은 결국 여러분의 인격의 특징이 되어 버려서 여러분들을 영원히 불 경건한 인격의 소유자로 낙인찍고 말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잘못된 경건은 경계해야 합니다. 히브리어 [하시딤]란 말은 주전 2세기 초 율법에 충실한 여러 무리의 유대인들이 한데 모여 이루어진 움직임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마카비 집안 편에 서서 신앙의 자유를 되찾으려고 싸웠지만 그 속에서 (바리새인들)이 나왔다. 경건이 외식이 된 예가 된다. 경건을 위한 경건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못된 경건을 경계하려면 경건을 연습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세를 살아가면서 경건의 능력을 소유한 자로 살아가려면 경건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서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경건을 연습하여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범사에 유익을 얻도록 해야 하며 또한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 핍박이 동반된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배우고 확신하는 데까지 이르러 온전케 되어 믿는 자들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하여 왕의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한 것처럼”(단 1:8) 우리들도 경건에 힘써야 합니다.
경건은 하나님에 의하여 지배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리스도에게 점령되고 그의 거룩한 성품에 의하여 지배된 심령이 경건한 삶의 원동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경건한 삶을 살기를 결단하고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그리함으로 범사에 유익한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