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24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무엘하 2장 1-11절, 3장 1절)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습니다.
'쓴맛이 사라지고 단맛을 보게 되었다.' 즉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뜻입니다.
같은 단맛이라 해도 쓴맛 후에 보게 될 때 훨씬 더 달게 느껴지기 마련이며, 인생에 있어서 참된 행복이라는 것도 오랜 고생을 잘 참고 이겨냄으로써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에게 꼭 그대로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 꽃다운 청소년 때부터 황금 같은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정말 천신난고를 통과하면서 살다가, 드디어 그의 인생이 활짝 펴지기 시작하는 감격스러운 축복 시대가 왔습니다.
그를 그토록 괴롭히던 사울 왕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죽게 됨으로써, 한갓 베들레헴 촌구석의 목동에 불과했던 다윗이 드디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기다렸던 왕위는 아직까지는 그다지 화려한 것은 못 되었습니다.
바로 본문에서 '다윗이 유다 족속의 왕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다윗은 처음에는 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겨우 한 지파에 불과한 "유다 족속의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정말 '왕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실제적으로는 그저 '족장' 수준에 지나지 않는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왕위는 그런 긴 고생 끝에 누리게 된 것이었으니만큼 다윗에게는 실로 달콤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다윗의 미래에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축복이 기다리고 있었으며, 다윗 역시 조금도 조급하게 굴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다윗이 점점 강하여 가는' 과정을 통하여, 그처럼 하나님께서 점진적으로 내려 주시는 축복,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최고로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는 축복이 과연 어떤 신자에게 베풀어지게 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자기가 어려울 때에도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 반드시 자신에게 축복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2장 1절부터 4상반절에 기록하기를 "1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 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다윗이 가로되 어디로 가리이까 가라사대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2다윗이 그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되었던 아비가일을 데리고 그리로 올라갈 때에 3또 자기와 함께 한 종자들과 그들의 권속들을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 성에 거하게 하니라 4a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더라"고 했습니다.
사울 왕과 요나단 왕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이스라엘에 정권 공백기를 가져오게 됩니다.
모든 신하들과 백성들 사이에는 큰 혼란이 왔을 것입니다.
왕과 왕세자를 한날한시에 잃어버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 다윗은 조용히 "여호와께 물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좀 의외의 행동입니다.
사울의 죽음은 누가 보아도 이제 곧 다윗의 시대가 시작된 것을 선포하는 명백한 징조로 보였을 것인데도, 그는 성급한 속단을 내리지 않고 어디까지나 먼저 하나님의 뜻을 여쭈어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갑자기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즉위하는 대신에 일단 유다 지파로 가서 단계적으로 신중하게 일을 시작할 것을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로는 기름부음 받았다 해도 대부분의 백성들은 모르는 일이었고, 더구나 아직 사울 왕가에 다른 왕자들이 어엿이 생존해 있는 상황에서 왕족이 아닌 다윗이 갑자기 등장한다는 것은 오히려 반발과 더 큰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단 "헤브론"으로 가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헤브론은 당시 유다 지파 중에서 가장 큰 성읍으로서, 유다 지파의 교통, 통상 등의 중심지였으므로 유다의 수도로 삼기에는 적절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헤브론으로 갔는데, 가자말자 즉시 "유다 사람들이 와서 다윗에게 기름을 붓고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다"고 했습니다.
기름부음은 왕으로 즉위식을 거행했다는 뜻인데, 물론 이미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었지만 그것은 은밀한 의식이었고, 이제는 공식적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었습니다.
당시 다윗은 30세로서 골리앗 사건 이후 약 10여 년이 경과했던 때였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정치적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왜 유독 유다 족속이 선뜻 다윗을 왕으로 옹위했겠습니까?
물론 거기에는 다윗이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 출신이라는 사실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사무엘상 30장 26절 이하 30절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거기에 보면, 다윗이 아말렉 족속을 쳐서 많은 재물을 탈취했을 때 그 중에 일부를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게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는 다윗이 아직도 도망 다니던 시절이었고 600명의 식솔을 먹여 살려야 했던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스스로도 '일전 한 닢이 아쉬운' 시절이었는데도 다윗은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을 그때부터 벌써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 와서는 다윗에게 축복으로 돌아왔습니다.
유다 족속은 다윗이 그렇게 개인적으로 어려울 때에도 백성을 먼저 생각할 줄 알고 힘써 도와주었던 사실을 잊지 않고서, '이처럼 백성을 생각할 줄 사람이라면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왕이 되겠다.'라는 마음으로 그를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사울 왕이 죽게 되고 다윗이 헤브론으로 돌아오게 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다윗을 일단 자기네 지파만이라도 왕으로 옹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전도서 11장 1절에서도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자기부터 먹을 떡 하나 아쉬운 시절에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마치 음식물을 물에 갖다 던져 버리는 행위처럼 보일 것입니다.
물에 빠진 음식이 어떻게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처럼 자기가 어려울 때 남에게 베풀어 준 식물은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약간의 '식물'과 '재물'로 베풀어 주었지만 그것이 그에게 돌아오게 되었을 때에는 '왕위'로 바뀌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부자가 되고 높은 사람이 되어야만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아직 가난하고 약할 때부터 다른 사람을 돕고 밖으로 베풀 줄 아는 것이 실제로는 더 큰 부와 더 높은 명예의 축복을 더 빨리 얻게 되는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은밀하게 성도를 구제하고 교회의 선한 사업들을 위하여 헌금하는 것은 불신자들에게나 기복주의 신자들에게는 돈을 갖다 내버리는 바보 같은 짓처럼 보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여러 날 후에 도로 찾게 하실 것'을 믿고 밖으로 베풀 줄 아는 성도에게 있어서는 그런 선행이야말로 미래의 축복을 위한 더 없이 확실한 투자가 되는 것을 꼭 깨닫고 힘써 행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도에 대한 신의를 존중하고 의리를 지키는 것이 장래 받을 축복의 확고한 보장이 됩니다.
4하반절부터 7절에 "4b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 5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가로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6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7이제 너희는 손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지어다 너희 주 사울이 죽었고 또 유다 족속이 내게 기름을 부어 저희의 왕을 삼았음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 제일 처음 시행한 공무는 바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 대한 처분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전장에서 죽게 되었을 때, 야베스 족속은 이전에 그들이 바로 사울 덕택에 암몬의 침략으로부터 구원 받은 은혜를 기억해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시 블레셋 적군에게 능욕을 당하고 성벽에 걸려 있던 사울의 시체를 야간행군을 감행하여 되찾아 와서 후히 장례를 치러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때 사울 왕을 장사지내 준 것 때문에 이제 와서는 불안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울에게 그토록 미움 당하고 괴로움 받던 다윗이 왕이 되었으니, 그 다윗이 자기네들을 어떻게 대하고 나올 것인지 두려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 야베스 사람들은 다윗이 틀림없이 자기네들을 반역자로 취급하고 죽여 버릴 것이라고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정반대로 오히려 그들을 크게 축복했습니다.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푼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라고 오히려 크게 칭찬했습니다.
지금이야 자신이 왕이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어디까지나 사울이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왕이었으며, 다윗은 그 점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 왕을 '자기들의 주,' 즉 자기네들을 보호해 주었던 주권자로서 존중하고 그처럼 은혜를 갚은 일을 두고 다윗은 그것이 자신에 대한 반대나 반항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아니했으며, 오히려 그들의 행위를 충성스러운 신민의 자세라고 극찬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다윗은 그 야베스 사람들의 의리 있는 행동에 대해서 여호와께서도 "은혜와 진리"로 그들에게 베푸시기를 바란다고까지 했습니다.
여기서 '진리'라는 약속한 것을 이루는 '진실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너희들이 사울 왕에 대하여 그처럼 신의를 지키고 은혜를 갚은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신실하게 너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라고 칭찬하고 축복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덧붙여 말하기를 "이제 너희는 손을 강하고 담대히 하라"고 했는데, 이것은 유다 지파와 행보를 같이 하여 자기를 왕으로 인정해 주고 도와달라는 뜻이었습니다.
다윗은 아직까지는 유다 족속의 왕이었고 여전히 통일 왕국의 과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길르앗 족속에게 그들이 사울에 대하여 의리를 지킨 것을 칭찬하면서 사울에게 행한 것처럼 자기에게도 그렇게 해 줄 것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자기네들에게 그렇게 나오는 다윗 왕을 보고 그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어찌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그때부터는 오직 다윗을 전적으로 추종하고 전심으로 받들게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가장 충성스러웠던 족속을 그들의 신의를 존중해 주는 자세 하나만으로 당장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으며, 그 결과 장차 유다 족속의 왕에서 더 나아가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는 초석을 또 하나 든든히 닦았던 것이었습니다.
잠언 11장 4절에서도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의리는 죽음을 면케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부자가 자기 대신에 사람을 죽여 줄 청부살인업자는 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이 죽음에 직면하게 될 때에 대신 죽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제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의리 있는 친구 사이에서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사형을 당한 친구로 하여금 죽기 전에 자기 홀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만나게 해 주기 위해서 만약 그 친구가 돌아오지 아니하면 자기가 죽을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고 대신 감옥에 들어가는 친구의 이야기라든지, 동료 전우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몸을 수류탄 위에 덮치는 군인의 실화도 있는 것입니다.
깡패 세계도 소위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그 무엇보다도 같은 파끼리의 의리를 지키는 데에 목숨을 내걸고 동료 가운데 그 의리를 배반하는 자를 원수보다도 훨씬 더 미워합니다.
그런 불법적인 조직조차 그렇게 의리 하나로 유지되는 것이라면, 하물며 교회 안에서 예수 믿는 성도들 사이에서는 오죽하겠습니까?
목사와 장로가 하나님 앞에서 서로의 의리를 끝까지 지키고 교인과 교인 사이에 신자로서의 신의를 두텁게 쌓아 가는 교회 - 이런 교회를 흔들어 넘어뜨릴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신의가 있고 의리를 지킨다는 것은 이 세상 사회에서도 정말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질 중에 하나이지만, 특히 성도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저는 사람이 일단 예수 믿는 것 하나 확실하다면, 그 다음에 따라와야 할 신자로서의 제일의 자질이 바로 '신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능력은 있어도 의리를 지키지 않는 교인은 결국 교회의 시험거리요 때로는 배신자까지도 될 수 있지만, 능력은 부족해도 신의가 있는 교인은 그 어떤 시험을 당해서 끝까지 서로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끝까지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신앙의 친구가 됨으로써, 설사 죽음의 위험이 닥친다 해도 그것까지도 면케 되는 축복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잘 안 되는 일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는 것이 결국 최상의 축복을 받게 되는 비결입니다.
8절 이하 11절 말씀에 "8사울의 군장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서 9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을 삼았더라 10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비로소 이스라엘 왕이 될 때에 나이 사십세며 두해 동안 위에 있으니라 유다 족속은 다윗을 따르니 11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날 수는 일곱해 여섯달이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유다 지파의 왕으로 조용하게 살고 있을 동안,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들 안에서는 일종의 무혈 쿠데타가 일어나고 그에 이은 무신정치(武臣政治)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주동자는 "사울의 군장" 즉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이었습니다.
왕권의 공백기를 틈타서 이 사람이 유다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전 이스라엘 지파의 실권자가 된 것이었습니다.
여기 그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의 왕을 삼았다"고 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군사집권이 시작된 지 이미 오년이나 지난 후에 행했던 일이었습니다.
본문에 이스보셋은 겨우 "두 해 동안" 왕위에 있었다고 했고, 다윗은 유다 족속의 왕으로 "일곱 해 여섯 달"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스보셋이 하야(下野)하고 죽었을 때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으므로, 이스보셋은 그 첫 5년 반 동안의 기간에는 왕이 아니었으며 오직 아브넬이 실권을 완전장악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다가 아브넬은 여론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게 됩니다.
나중에 3장 17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다윗을 자기 임금으로 모시자고 아브넬에게 여러 차례 요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자 자기 권력에 무언가 정통성을 부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아브넬은 마지못해 이스보셋을 형식적으로나마 왕으로 옹위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 두 해 동안에도 이스보셋은 그저 허수아비 왕에 불과했고 아브넬이 일종의 섭정처럼 여전히 실권을 계속 장악하고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 7년 6개월 내내 헤브론에서 유다만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분명 열두 지파 전체의 왕권 약속받았는데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렇게 초라한 자리에 머물러 두신다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북쪽에서도 절대 다수의 지파들이 분명히 자기를 지지하고 있고 자기가 마땅히 완전히 장악해야 할 통일 왕권을 오직 아브넬이 불법적으로 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성급하게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그저 가만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렸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헤브론에 가 있으라고만 하셨으니까, 그저 그 말씀대로만 하고 나머지는 다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로 3장 1절에서 "1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고 증거하고 있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주장하고 섭리하셔서 모든 것이 다 다윗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절로 돌아가도록 만들고 계셨습니다.
모든 백성의 여론의 흐름과 각 지파 장로들로부터의 지지도 상승, 그리고 아브넬의 군사적 세력의 약화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하나님 편에서 전적으로 섭리하심으로써 다윗에게 모든 정권이 절로 넘어가도록 인도해 주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7년 반 동안, 다윗은 결코 성급히 굴지 아니하고, '왜 아직도 응답 안하시나?'하고 원망하지도 아니하고, 그저 조용히 인내하면서 기다리기만 했습니다. 다윗이 만약 스스로 칼을 뽑아들고 설쳤더라면 통일왕국의 전권을 얻기는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며, 오히려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킨 장본인이 되어 백성들의 마음을 도로 빼앗길 위험도 다분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복잡한 일을 그저 하나님께 다 맡기고 기다리기만 하니까 하나님 편에서 다 알아서 너무나도 완벽하게 처리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37편 7절에서도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당장 자기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는' 신앙을 발휘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급하게 설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알아서 자기 백성을 위해 반드시 선하게 역사해 주실 것을 믿고 인내할 때 그 최종 결과는 기다린 만큼 더 좋은 것으로 반드시 베풀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교통사고가 났을 때 부상자를 직접 응급치료하는 것은 물론이고 화재의 위험이 없는 한 그 부상자를 차에서 끌어내는 것조차 현장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못하도록 합니다.
자기는 빨리 도와주고 싶은 마음 때문에 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그 부상자의 상태를 악화시키거나 더욱 위급하게 만들 위험이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그저 앰뷸런스가 와서 응급구조대원이 전문적인 기술로써 그 부상자를 직접 구조하고 치료하는 것이 최선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아무리 똑똑하고 능력 있다고 해도 어찌 하나님의 전지전능에 비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모세도 지금 자기네들을 급히 추격하고 있는 애굽 군대를 보면서 조바심에 사로잡혀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고 그들을 진정시켰던 것입니다.
자신의 조급한 마음과 성급한 행동으로써 일을 망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고야 마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 이것이 바로 최고최선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비결인 것을 꼭 기억하고 실제로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부분 다 가지고 있는 기질 중에 하나가 매사에 너무 급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이태리에 여행을 가서 식당에 들어가 음식 주문을 하면 식당주인이 "빨리빨리"라고 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고 합니다.
식사를 느긋이 하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는 이태리에서 유독 한국 여행자들만은 음식을 '빨리빨리' 내어달라고 재촉하니까, 이태리 식당 주인도 그 한국말만 절로 배우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매사에 급한 성격은 특히 무슨 복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납니다.
'벼락부자'라는 말도 영어로 하자면 'overnight millionaire'가 되는데, 그래도 미국의 벼락부자는 아무리 빨라도 그래도 '하룻밤은 걸려야' 되는 데에 비해서 우리나라의 벼락부자는 문자 그대로 '벼락 한 방 맞는 짧은 순간에 되는' 극초스피드의 부자입니다.
또 실제로 미국은 그런 벼락부자가 생기기도 힘들고 하루아침에 쫄딱 망하는 거지가 되기도 힘든 사회로서, 다들 그저 착실히 그리고 꾸준히 일하면 다 웬만큼 먹고 살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만족하는 사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대박이 터져야만 하는 한탕주의' 일색입니다.
땅 투기를 하든지 다른 사람의 가게를 말아먹든지 간에, 하여튼 단시일 내에 떼돈을 벌어야만 한다는 사고방식에 젖어 있습니다.
실로 '고진감래'라는 것은 그저 사자성어로만 알고 있지 실제로는 아무도 그런 식으로 복 받으려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그런 버릇이 교회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발휘됩니다.
그것이 바로 '기복신앙(祈福信仰)'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바로 그 순간에 불치병이 싹 없어지든지 자식이 서울대학교에 철썩 붙든지 주식이 왕창 올라가서 하루아침에 떼돈을 버는 일들이 벌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여, 믿습니다.'라고 하기만 하면 당장에 뭔가 하나 크게 펑 터져야 한다는 이런 식의 신앙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축복이란 것을 그처럼 무슨 도깨비 방망이 식으로 여겨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우리 기독신자들만은 '고진감래,' 즉 쓴맛 뒤의 단맛이 훨씬 더 달콤하다는 것을 알고 인내할 줄을 알아야 하며, '점점 강하여 가는 것'이 훨씬 더 안정된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평소에, 아니 가난하고 약할 때부터도 남에게 베풀 줄 알고 지금 당장은 그저 손해로만 보인다 해도 어찌하든지 밖으로 나누어주는 선한 일에 투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신앙의 형제자매들이나 동역자들과 신의를 지킴으로써, 미래의 큰 환난을 당할 때에 재물보다 훨씬 더 든든하게 서로 의지하고 도울 수 있는 영적 보험을 쌓아두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나의 형편을 잘 아시고 나에게 좋게 해 주려 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인내할 줄 알 때 최고최대최상의 축복은 요지부동으로 이미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다윗이 받았던 '점점 강하여 가는 축복,' 어제의 도망자가 오늘은 유다 지파의 왕이 되며 그리고 내일은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고야 마는 이 완전한 축복을 꼭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석기현 목사 설교 중에서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습니다.
'쓴맛이 사라지고 단맛을 보게 되었다.' 즉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뜻입니다.
같은 단맛이라 해도 쓴맛 후에 보게 될 때 훨씬 더 달게 느껴지기 마련이며, 인생에 있어서 참된 행복이라는 것도 오랜 고생을 잘 참고 이겨냄으로써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에게 꼭 그대로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 꽃다운 청소년 때부터 황금 같은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정말 천신난고를 통과하면서 살다가, 드디어 그의 인생이 활짝 펴지기 시작하는 감격스러운 축복 시대가 왔습니다.
그를 그토록 괴롭히던 사울 왕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죽게 됨으로써, 한갓 베들레헴 촌구석의 목동에 불과했던 다윗이 드디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기다렸던 왕위는 아직까지는 그다지 화려한 것은 못 되었습니다.
바로 본문에서 '다윗이 유다 족속의 왕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다윗은 처음에는 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겨우 한 지파에 불과한 "유다 족속의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정말 '왕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실제적으로는 그저 '족장' 수준에 지나지 않는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왕위는 그런 긴 고생 끝에 누리게 된 것이었으니만큼 다윗에게는 실로 달콤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다윗의 미래에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축복이 기다리고 있었으며, 다윗 역시 조금도 조급하게 굴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다윗이 점점 강하여 가는' 과정을 통하여, 그처럼 하나님께서 점진적으로 내려 주시는 축복,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최고로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는 축복이 과연 어떤 신자에게 베풀어지게 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자기가 어려울 때에도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 반드시 자신에게 축복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2장 1절부터 4상반절에 기록하기를 "1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 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다윗이 가로되 어디로 가리이까 가라사대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2다윗이 그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되었던 아비가일을 데리고 그리로 올라갈 때에 3또 자기와 함께 한 종자들과 그들의 권속들을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 성에 거하게 하니라 4a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더라"고 했습니다.
사울 왕과 요나단 왕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이스라엘에 정권 공백기를 가져오게 됩니다.
모든 신하들과 백성들 사이에는 큰 혼란이 왔을 것입니다.
왕과 왕세자를 한날한시에 잃어버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 다윗은 조용히 "여호와께 물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좀 의외의 행동입니다.
사울의 죽음은 누가 보아도 이제 곧 다윗의 시대가 시작된 것을 선포하는 명백한 징조로 보였을 것인데도, 그는 성급한 속단을 내리지 않고 어디까지나 먼저 하나님의 뜻을 여쭈어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갑자기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즉위하는 대신에 일단 유다 지파로 가서 단계적으로 신중하게 일을 시작할 것을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로는 기름부음 받았다 해도 대부분의 백성들은 모르는 일이었고, 더구나 아직 사울 왕가에 다른 왕자들이 어엿이 생존해 있는 상황에서 왕족이 아닌 다윗이 갑자기 등장한다는 것은 오히려 반발과 더 큰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단 "헤브론"으로 가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헤브론은 당시 유다 지파 중에서 가장 큰 성읍으로서, 유다 지파의 교통, 통상 등의 중심지였으므로 유다의 수도로 삼기에는 적절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헤브론으로 갔는데, 가자말자 즉시 "유다 사람들이 와서 다윗에게 기름을 붓고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다"고 했습니다.
기름부음은 왕으로 즉위식을 거행했다는 뜻인데, 물론 이미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었지만 그것은 은밀한 의식이었고, 이제는 공식적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었습니다.
당시 다윗은 30세로서 골리앗 사건 이후 약 10여 년이 경과했던 때였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정치적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왜 유독 유다 족속이 선뜻 다윗을 왕으로 옹위했겠습니까?
물론 거기에는 다윗이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 출신이라는 사실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사무엘상 30장 26절 이하 30절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거기에 보면, 다윗이 아말렉 족속을 쳐서 많은 재물을 탈취했을 때 그 중에 일부를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게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는 다윗이 아직도 도망 다니던 시절이었고 600명의 식솔을 먹여 살려야 했던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스스로도 '일전 한 닢이 아쉬운' 시절이었는데도 다윗은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을 그때부터 벌써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 와서는 다윗에게 축복으로 돌아왔습니다.
유다 족속은 다윗이 그렇게 개인적으로 어려울 때에도 백성을 먼저 생각할 줄 알고 힘써 도와주었던 사실을 잊지 않고서, '이처럼 백성을 생각할 줄 사람이라면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왕이 되겠다.'라는 마음으로 그를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사울 왕이 죽게 되고 다윗이 헤브론으로 돌아오게 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다윗을 일단 자기네 지파만이라도 왕으로 옹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전도서 11장 1절에서도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자기부터 먹을 떡 하나 아쉬운 시절에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마치 음식물을 물에 갖다 던져 버리는 행위처럼 보일 것입니다.
물에 빠진 음식이 어떻게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처럼 자기가 어려울 때 남에게 베풀어 준 식물은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약간의 '식물'과 '재물'로 베풀어 주었지만 그것이 그에게 돌아오게 되었을 때에는 '왕위'로 바뀌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부자가 되고 높은 사람이 되어야만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아직 가난하고 약할 때부터 다른 사람을 돕고 밖으로 베풀 줄 아는 것이 실제로는 더 큰 부와 더 높은 명예의 축복을 더 빨리 얻게 되는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은밀하게 성도를 구제하고 교회의 선한 사업들을 위하여 헌금하는 것은 불신자들에게나 기복주의 신자들에게는 돈을 갖다 내버리는 바보 같은 짓처럼 보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여러 날 후에 도로 찾게 하실 것'을 믿고 밖으로 베풀 줄 아는 성도에게 있어서는 그런 선행이야말로 미래의 축복을 위한 더 없이 확실한 투자가 되는 것을 꼭 깨닫고 힘써 행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도에 대한 신의를 존중하고 의리를 지키는 것이 장래 받을 축복의 확고한 보장이 됩니다.
4하반절부터 7절에 "4b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 5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가로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6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7이제 너희는 손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지어다 너희 주 사울이 죽었고 또 유다 족속이 내게 기름을 부어 저희의 왕을 삼았음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 제일 처음 시행한 공무는 바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 대한 처분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전장에서 죽게 되었을 때, 야베스 족속은 이전에 그들이 바로 사울 덕택에 암몬의 침략으로부터 구원 받은 은혜를 기억해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시 블레셋 적군에게 능욕을 당하고 성벽에 걸려 있던 사울의 시체를 야간행군을 감행하여 되찾아 와서 후히 장례를 치러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때 사울 왕을 장사지내 준 것 때문에 이제 와서는 불안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울에게 그토록 미움 당하고 괴로움 받던 다윗이 왕이 되었으니, 그 다윗이 자기네들을 어떻게 대하고 나올 것인지 두려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 야베스 사람들은 다윗이 틀림없이 자기네들을 반역자로 취급하고 죽여 버릴 것이라고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정반대로 오히려 그들을 크게 축복했습니다.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푼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라고 오히려 크게 칭찬했습니다.
지금이야 자신이 왕이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어디까지나 사울이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왕이었으며, 다윗은 그 점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 왕을 '자기들의 주,' 즉 자기네들을 보호해 주었던 주권자로서 존중하고 그처럼 은혜를 갚은 일을 두고 다윗은 그것이 자신에 대한 반대나 반항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아니했으며, 오히려 그들의 행위를 충성스러운 신민의 자세라고 극찬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다윗은 그 야베스 사람들의 의리 있는 행동에 대해서 여호와께서도 "은혜와 진리"로 그들에게 베푸시기를 바란다고까지 했습니다.
여기서 '진리'라는 약속한 것을 이루는 '진실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너희들이 사울 왕에 대하여 그처럼 신의를 지키고 은혜를 갚은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신실하게 너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라고 칭찬하고 축복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덧붙여 말하기를 "이제 너희는 손을 강하고 담대히 하라"고 했는데, 이것은 유다 지파와 행보를 같이 하여 자기를 왕으로 인정해 주고 도와달라는 뜻이었습니다.
다윗은 아직까지는 유다 족속의 왕이었고 여전히 통일 왕국의 과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길르앗 족속에게 그들이 사울에 대하여 의리를 지킨 것을 칭찬하면서 사울에게 행한 것처럼 자기에게도 그렇게 해 줄 것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자기네들에게 그렇게 나오는 다윗 왕을 보고 그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어찌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그때부터는 오직 다윗을 전적으로 추종하고 전심으로 받들게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가장 충성스러웠던 족속을 그들의 신의를 존중해 주는 자세 하나만으로 당장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으며, 그 결과 장차 유다 족속의 왕에서 더 나아가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는 초석을 또 하나 든든히 닦았던 것이었습니다.
잠언 11장 4절에서도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의리는 죽음을 면케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부자가 자기 대신에 사람을 죽여 줄 청부살인업자는 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이 죽음에 직면하게 될 때에 대신 죽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제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의리 있는 친구 사이에서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사형을 당한 친구로 하여금 죽기 전에 자기 홀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만나게 해 주기 위해서 만약 그 친구가 돌아오지 아니하면 자기가 죽을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고 대신 감옥에 들어가는 친구의 이야기라든지, 동료 전우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몸을 수류탄 위에 덮치는 군인의 실화도 있는 것입니다.
깡패 세계도 소위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그 무엇보다도 같은 파끼리의 의리를 지키는 데에 목숨을 내걸고 동료 가운데 그 의리를 배반하는 자를 원수보다도 훨씬 더 미워합니다.
그런 불법적인 조직조차 그렇게 의리 하나로 유지되는 것이라면, 하물며 교회 안에서 예수 믿는 성도들 사이에서는 오죽하겠습니까?
목사와 장로가 하나님 앞에서 서로의 의리를 끝까지 지키고 교인과 교인 사이에 신자로서의 신의를 두텁게 쌓아 가는 교회 - 이런 교회를 흔들어 넘어뜨릴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신의가 있고 의리를 지킨다는 것은 이 세상 사회에서도 정말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질 중에 하나이지만, 특히 성도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저는 사람이 일단 예수 믿는 것 하나 확실하다면, 그 다음에 따라와야 할 신자로서의 제일의 자질이 바로 '신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능력은 있어도 의리를 지키지 않는 교인은 결국 교회의 시험거리요 때로는 배신자까지도 될 수 있지만, 능력은 부족해도 신의가 있는 교인은 그 어떤 시험을 당해서 끝까지 서로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끝까지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신앙의 친구가 됨으로써, 설사 죽음의 위험이 닥친다 해도 그것까지도 면케 되는 축복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잘 안 되는 일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는 것이 결국 최상의 축복을 받게 되는 비결입니다.
8절 이하 11절 말씀에 "8사울의 군장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서 9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을 삼았더라 10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비로소 이스라엘 왕이 될 때에 나이 사십세며 두해 동안 위에 있으니라 유다 족속은 다윗을 따르니 11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날 수는 일곱해 여섯달이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유다 지파의 왕으로 조용하게 살고 있을 동안,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들 안에서는 일종의 무혈 쿠데타가 일어나고 그에 이은 무신정치(武臣政治)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주동자는 "사울의 군장" 즉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이었습니다.
왕권의 공백기를 틈타서 이 사람이 유다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전 이스라엘 지파의 실권자가 된 것이었습니다.
여기 그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의 왕을 삼았다"고 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군사집권이 시작된 지 이미 오년이나 지난 후에 행했던 일이었습니다.
본문에 이스보셋은 겨우 "두 해 동안" 왕위에 있었다고 했고, 다윗은 유다 족속의 왕으로 "일곱 해 여섯 달"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스보셋이 하야(下野)하고 죽었을 때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으므로, 이스보셋은 그 첫 5년 반 동안의 기간에는 왕이 아니었으며 오직 아브넬이 실권을 완전장악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다가 아브넬은 여론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게 됩니다.
나중에 3장 17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다윗을 자기 임금으로 모시자고 아브넬에게 여러 차례 요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자 자기 권력에 무언가 정통성을 부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아브넬은 마지못해 이스보셋을 형식적으로나마 왕으로 옹위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 두 해 동안에도 이스보셋은 그저 허수아비 왕에 불과했고 아브넬이 일종의 섭정처럼 여전히 실권을 계속 장악하고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 7년 6개월 내내 헤브론에서 유다만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분명 열두 지파 전체의 왕권 약속받았는데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렇게 초라한 자리에 머물러 두신다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북쪽에서도 절대 다수의 지파들이 분명히 자기를 지지하고 있고 자기가 마땅히 완전히 장악해야 할 통일 왕권을 오직 아브넬이 불법적으로 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성급하게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그저 가만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렸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헤브론에 가 있으라고만 하셨으니까, 그저 그 말씀대로만 하고 나머지는 다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로 3장 1절에서 "1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고 증거하고 있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주장하고 섭리하셔서 모든 것이 다 다윗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절로 돌아가도록 만들고 계셨습니다.
모든 백성의 여론의 흐름과 각 지파 장로들로부터의 지지도 상승, 그리고 아브넬의 군사적 세력의 약화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하나님 편에서 전적으로 섭리하심으로써 다윗에게 모든 정권이 절로 넘어가도록 인도해 주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7년 반 동안, 다윗은 결코 성급히 굴지 아니하고, '왜 아직도 응답 안하시나?'하고 원망하지도 아니하고, 그저 조용히 인내하면서 기다리기만 했습니다. 다윗이 만약 스스로 칼을 뽑아들고 설쳤더라면 통일왕국의 전권을 얻기는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며, 오히려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킨 장본인이 되어 백성들의 마음을 도로 빼앗길 위험도 다분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복잡한 일을 그저 하나님께 다 맡기고 기다리기만 하니까 하나님 편에서 다 알아서 너무나도 완벽하게 처리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37편 7절에서도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당장 자기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는' 신앙을 발휘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급하게 설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알아서 자기 백성을 위해 반드시 선하게 역사해 주실 것을 믿고 인내할 때 그 최종 결과는 기다린 만큼 더 좋은 것으로 반드시 베풀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교통사고가 났을 때 부상자를 직접 응급치료하는 것은 물론이고 화재의 위험이 없는 한 그 부상자를 차에서 끌어내는 것조차 현장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못하도록 합니다.
자기는 빨리 도와주고 싶은 마음 때문에 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그 부상자의 상태를 악화시키거나 더욱 위급하게 만들 위험이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그저 앰뷸런스가 와서 응급구조대원이 전문적인 기술로써 그 부상자를 직접 구조하고 치료하는 것이 최선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아무리 똑똑하고 능력 있다고 해도 어찌 하나님의 전지전능에 비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모세도 지금 자기네들을 급히 추격하고 있는 애굽 군대를 보면서 조바심에 사로잡혀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고 그들을 진정시켰던 것입니다.
자신의 조급한 마음과 성급한 행동으로써 일을 망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고야 마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 이것이 바로 최고최선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비결인 것을 꼭 기억하고 실제로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부분 다 가지고 있는 기질 중에 하나가 매사에 너무 급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이태리에 여행을 가서 식당에 들어가 음식 주문을 하면 식당주인이 "빨리빨리"라고 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고 합니다.
식사를 느긋이 하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는 이태리에서 유독 한국 여행자들만은 음식을 '빨리빨리' 내어달라고 재촉하니까, 이태리 식당 주인도 그 한국말만 절로 배우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매사에 급한 성격은 특히 무슨 복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납니다.
'벼락부자'라는 말도 영어로 하자면 'overnight millionaire'가 되는데, 그래도 미국의 벼락부자는 아무리 빨라도 그래도 '하룻밤은 걸려야' 되는 데에 비해서 우리나라의 벼락부자는 문자 그대로 '벼락 한 방 맞는 짧은 순간에 되는' 극초스피드의 부자입니다.
또 실제로 미국은 그런 벼락부자가 생기기도 힘들고 하루아침에 쫄딱 망하는 거지가 되기도 힘든 사회로서, 다들 그저 착실히 그리고 꾸준히 일하면 다 웬만큼 먹고 살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만족하는 사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대박이 터져야만 하는 한탕주의' 일색입니다.
땅 투기를 하든지 다른 사람의 가게를 말아먹든지 간에, 하여튼 단시일 내에 떼돈을 벌어야만 한다는 사고방식에 젖어 있습니다.
실로 '고진감래'라는 것은 그저 사자성어로만 알고 있지 실제로는 아무도 그런 식으로 복 받으려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그런 버릇이 교회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발휘됩니다.
그것이 바로 '기복신앙(祈福信仰)'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바로 그 순간에 불치병이 싹 없어지든지 자식이 서울대학교에 철썩 붙든지 주식이 왕창 올라가서 하루아침에 떼돈을 버는 일들이 벌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여, 믿습니다.'라고 하기만 하면 당장에 뭔가 하나 크게 펑 터져야 한다는 이런 식의 신앙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축복이란 것을 그처럼 무슨 도깨비 방망이 식으로 여겨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우리 기독신자들만은 '고진감래,' 즉 쓴맛 뒤의 단맛이 훨씬 더 달콤하다는 것을 알고 인내할 줄을 알아야 하며, '점점 강하여 가는 것'이 훨씬 더 안정된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평소에, 아니 가난하고 약할 때부터도 남에게 베풀 줄 알고 지금 당장은 그저 손해로만 보인다 해도 어찌하든지 밖으로 나누어주는 선한 일에 투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신앙의 형제자매들이나 동역자들과 신의를 지킴으로써, 미래의 큰 환난을 당할 때에 재물보다 훨씬 더 든든하게 서로 의지하고 도울 수 있는 영적 보험을 쌓아두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나의 형편을 잘 아시고 나에게 좋게 해 주려 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인내할 줄 알 때 최고최대최상의 축복은 요지부동으로 이미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다윗이 받았던 '점점 강하여 가는 축복,' 어제의 도망자가 오늘은 유다 지파의 왕이 되며 그리고 내일은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고야 마는 이 완전한 축복을 꼭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석기현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