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24
형은 못 된 형인가? (눅 15;29-30)
몇 년 전입니다.
지방에서 우리 교회에 권사님 부부가 등록하였습니다. 떠난 지방 교회 목사님이 내게 전화가 왔습니다.
<강 목사! 조심해! 여차하면 목에 비수를 대는 사람이야!> 나는 섬짓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심하여야 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후 설에 고기를 사오면서 겉으로는 고맙다고 인사하면서도 속으로는 생각하였습니다.
<저러다가 수틀리면 비수를 대겠지.>
추석에 과일을 사옵니다. 그러면 역시 고맙다고 인사를 하지만 속으로는 말합니다.
<저러다가 수틀리면 비수를 대겠지.>
이렇게 3년을 지냈습니다. 대전으로 이사갔습니다. 그런데 그 곳으로 이사 간지 지금 10년인 데 지금까지 우리 집 고추장 덴장을 대고 있습니다.
참으로 좋은 분이었습니다. 대전으로 이사간 지 5년 후부터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저 분이 그런 분이 아니었구나. 목에 비수를 대는 분이 아니었구나!>
그래서 그 분에 대한 인상을 확 바꾸었습니다. 지금은 형제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탕자 비유가 그렇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도 다 알 정도로 멋진 이야기입니다. 주일학교 시절부터 선생님들이 자주 설교하는 내용입니다. 탕자는 탕자였으나 나중에 회개한 사람으로 봅니다. 그러나 형은 아주 나쁘게 봅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나쁜 형에게서 장점을 찾아 보려고 합니다. 단점만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장점만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장점이 있는 사람도 단점이 있고, 단점이 있는 사람에게도 장점이 있습니다. 나는 탕자 형이 잘 났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2000년 동안 해석외에 해석도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흘러 갑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눅 15;12)
아들은 유산을 미리 받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허랑방탕하며 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많은 돈을 다 허비하였습니다. 설상 가상으로 흉년이 들었습니다.
탕자는 할 수 없는 돼지르 치는 집에 가서 돼지를 치면서 먹고 살았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웠습니다.
견디가 못 한 탕자가 한탄하였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17-19)
탕자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로 돌아 갔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겼습니다. 아버지가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탕자가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21)
아버지가 종들에게 말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23-25)
잔치를 하는 데 맏아들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 왔습니다. 류와 춤추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형은 종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종들이 말했습니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27)
형은 화가 났습니다.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말렸더니 형이 말했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29-30)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1-32)
이상이 탕자의 비유의 스토리입니다.
큰 아들 이름을 어느 부흥강사는 탱자라고 유모러스하게 말했습니다. 어쨌던 지 대부분 이 말씀을 해석하면서 형을 집안에 있는 다른 탕자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안 좋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형을 평할 때 대개 이런 평이 나오고 있습니다.
1. 아버지 마음을 큰 아들로서 모르고 있다.
2. 동생을 용서하지 못 하고 있다.
아버지를 이해 못 하는 아들이요, 동생을 사랑하지 못 하는 형으로 평가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제부터 형의 좋은 점을 찾아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욕만 하는 사람에게도 큰 장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성실한 사람
탕자 형은 성실한 사람임이 발견됩니다. 아버지는 부자입니다. 탕자가 자기 집을 생각하며 품군도 많고 먹을 것도 많은 부자집임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이 집은 아들이 둘입니다. 유산법이 있습니다. 큰 아들에게 3분의 2, 차남에게 3분의 1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동생이 유산을 미리 받았습니다. 형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은 집에 남아 홀로인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이상하게 어머니 이야기가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홀로 사는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형은 성실한 사람임을 엿볼 수 있습니다.
2. 섬김의 사람
탕자 형은 아버지를 잘 섬긴 아들입니다. 형이 말한 것을 들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29)
탕자는 수년 동안 아버지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는 아들입니다. 어김이 없는 틀림없는 성격의 아들입니다.
그 동안 나쁘게만 이야기하였던 탕자 형에게도 장점이 확실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3. 검소의 사람
탕자 형은 검소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재산이 그리 적지 않은 이였습니다. 아들이 둘이였습니다. 그러나 한 명은 가출하였고 이제 외아들인 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염소 새끼 한 마리 잡아 먹은 적이 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29-30)
큰 아들은 열심히 일하면서도 친구들과 파티를 한 적이 없습니다. 아마 아버지로부터도 아들이라는 관계로 돈도 못 받고 일한 것같습니다. 검소한 사람임이 들어 나고 있습니다.
4. 일의 사람
탕자 형은 오직 일만 아는 아들이었습니다.
탕자 동생이 돌아 오는 순간에도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 왔습니다. 아버지는 이제 늙었습니다. 게다가 아들이 가출하였다고 밤낮 그 아들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집안 모든 일을 큰 아들 형이 하였을 것입니다.
그 집은 형이 직접 하지 않아도 되는 집입니다. 품군이 많은 집니다. 품군이 한 명만 있어도 그런 대로 부잣집입니다. 그런데 일군이 많은 집입니다. 그래도 어리광만 부리지 않고 자기도 일을 하였습니다.
밭에도 직접 나갔습니다. 형은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5. 침묵의 사람
이 이야기속에는 두 가지 침묵이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어머니의 침묵입니다. 어머니가 없습니다. 나갈 때에 어머니가 울고 불고 난리를 쳤다는 말이 없습니다. 침묵입니다.
탕자가 돌아 왔을 때 어머니가 기뻐 뛰었다는 말도 없이 침묵입니다. 잔치할 때 어머니가 좋아서 작은 아들이 좋아 하는 음식을 특별히 만들었다는 말도 없습니다.
어머니의 침묵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침묵이 있습니다. 형의 동생을 향한 침묵입니다. 동생이 재산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나갈 때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너 조심해! 세상이 얼마나 험한 지 알아? 네가 몸 조심해!> 이렇게 좋은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나쁜 놈아! 형도 유산을 안 받았는 데 너부터 받아? 네 성격을 보아 다 털어 먹고 거지가 되어 돌아 올 것같다. 돈 다 없애면 다시는 들어오지 말아. 네가 받을 것은 다 받았으니 남아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다. 네 것은 다 받았으니 얼씬도 하지 말아.>
탕자가 떠날 때 이런 말이 없습니다. 돌아 와서도 마찬가지 침묵이 있습니다.
돌아 와서 보니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형은 노하였습니다.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28-30)
형은 누구에게 노하고 있습니까?
형은 동생에게 노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노한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 자기를 몰라 주기에 아버지에게 노한 것입니다. 동생에게는 침묵입니다.
잘 왔다는 긍정적인 말을 하거나 왜 왔느냐는 부정적인 말이 없습니다. 형은 동생에게 침묵입니다.
부정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야! 임마! 너 돈다 버리고 무슨 낯으로 들어 왔어? 쪽제비도 낯짝이 있지. 창녀와 딩굴며 즐기다 죽어 버리지 왜 왔어? 꼴도 보기 싫어. 나가! 난 너 같은 것하고 오늘부터 한 지붕 밑에서 살 수 없어!>
이렇게 긍정적인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동생아! 잘 왔다. 아버지가 너 나간 날부터 잠도 못 주무시고 밥도 못 잡수셨다. 이제 아버지가 두 다리 피시고 주무실 수 있을 것같다. 잘 왔다. 이제 나가지 말아. 같이 살자!>
그러나 형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버지에게만 신경질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축복을 선언하였습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다>(31)
이 말은 마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최상의 축복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십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을 아들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동급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31-32)
여기에서 <우리>라는 말에 관심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아버지 입장에서 <우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나쁘게만 말하던 탕자 형에게도 좋은 점이 발견됩니다. 형은 성실하였습니다. 섬겼습니다. 검소하였습니다. 일만 하였습니다. 침묵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일방적으로 그 사람을 나쁘게만 보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종합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1942년 미국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를 아주 좋은 모험의 사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컬럼버스의 날이 있습니다. 그 날은 모두 쉬고 있습니다. 모두 모험가요 역사를 바꾼 사람이라고 칭찬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큰 단점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콜럼버스는 1506년 5월 20일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콜럼버스가 죽은 지 꼭 500년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스페인에서는 각종 행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7월 14일 콜럼버스에 대한 문서가 스페인 북부 발라돌리드 지역의 시만카스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되었습니다. 23가지 증언이 들어있는 문서입니다. 나는 그 보도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기사가 있습니다.
어떤 여자가 콜럼버스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하류 계급 아들이다.>
이 말 한 마디가 모욕스럽다고 그런 말을 하였다고 그 여자 혀를 잘랐습니다. 그리고 발가 발가벗겨서 당나귀에 태웠습니다. 그리고 길거리를 돌았습니다. 그리ㅣ고도 성이 차지 않아서 잔혹한 고문을 가하였습니다.
그리고 원주민들을 재판 없이 처벌하였습니다. 그리고 식민지 개척자들에게 물자를 공급하지도 않았습니다.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리려고 세례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산티아고 섬이라고 불렸던 지역은 콜럼버스 원정대의 본거지였습니다. 콜럼버스가 정복한 후 이 지역에서는 수십년간 1200만~2000만명에 이르는 원주민들이 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스페인 사람들이 전파한 질병에 희생되어 죽었습니다.
이같이 좋게만 이야기 하던 사람에게도 나쁜 점이 있습니다. 반대로 나쁘게만 이야기하던 사람에게도 좋은 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장단점이 있습니다. 별 차이가 없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많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오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몹시 아파서 병원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의사를 왕진하도록 하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수의사를 모시고 왔습니다.
아버지가 왜 수의사를 모시고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들이 말했습니다.
<수의사나 의사나 별 차이 없습니다.> 결국은 아버지가 병을 고치지 못 하고 죽었습니다. 조문객들이 와서 위로하였습니다. 그 때 아들이 말했습니다.
<죽으나 사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장점도 보고 단점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종합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출처/강문호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