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인격적 인도  (갈 5:16-17)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유의 대 헌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자유가 어떤 자유입니까.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자유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죄와 율법에서 벗어난 삶이라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마음의 자유이지 밖의 자유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몸의 자유, 밖의 자유를 자꾸만 말합니다. 마음의 자유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집에 살게 해 주어도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죄와 율법에서 벗어난 삶을 진정한 자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4:은 율법주의에서 벗어난 것이 참 자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미 구원을 이룬 은혜시대였습니다. 그런데도 당시 유대주의자들과 이단들로부터 율법주의가 계속 선동되어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말하자면 옛날 법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자꾸만 다시 걸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5:-6: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잘못 이해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자유를 육체를 위한 기회로 삼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율법이나 방종이 주는 자유가 아니고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은 “서로 종노릇하는 것”(13:13)이고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14)이고 “잘못된 형제를 회복시키는 일”(6:1)이고 “형제의 무거운 짐을 져주는 것”(6:2)이고 “겸손”(3)하고 “믿음의 가정에 선을 행하는 일”(6:9,10)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자유의 개념이 다릅니다. 진정한 자유는 사랑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같은 사랑과 섬김을 가능하게 하는 연결 띠는 무엇인가 하면 그것이 바로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그 성령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게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라“

  이 세상은 언제나 인간주의가 팽배해 있습니다. 인간주의는 육신적인 생각과 욕망의 삶을 살게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이 육신적이고 욕망적인 모습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모습을 갈 5:19에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일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들이라.” 이것들이 인간적인 요소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런 요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때로 실패와 탄식과 갈등과 증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생활을 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런 성령의 생활의 열매를 갈 5:22에서 말씀하기를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했습니다. 모두 소망적인 것이고 너를 위한 영적 요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을 충만히 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내 안에 성령이 함께 하셔서 나로 하여금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길을 제시하시고 그 길로 나를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에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인도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성경적 인도

  성경적이라는 말은 지극히 옳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성경적인 길이 아니면 때로 기차가 궤도에서 이탈하듯이 이탈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자주 삶의 궤도에서 이탈합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다가가서 못 가게하고 길을 막습니다. 때로 울타리를 치는 것도 보호하고 안전하게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하나의 울타리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아가다 보면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며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살아가다 보면 이 길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가끔 발생합니다.

  그때가 언제인가 하면 신앙적인 열심히 적어질 때입니다. 신앙의 열심히 적어지면 나타나는 현상이 성경이 제시하는 길에서 대부분 이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내 인간적인 마음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갑자기 내 마음이 갈증이 일어나고 생각이 복잡하고 원망이 나타나고 인간적인 생각이 자꾸만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내 안에 성령에 의존하는 마음이 얇아지고 인간적인 내 마음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삶에서도 이탈하게 되고 인간적인 생각과 마음이 나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의존하는 삶이 얇아지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런가 하면 능력이 너무 넘치는 경우에도 이탈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에서 신앙이 너무 적은 것도 문제이지만 또 성령의 은혜가 넘쳐서 열심이 넘치다 보면 성경의 가르침 보다 더 지나쳐서 성경 밖으로 벗어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 때는 더 잘 믿으려고 뭔가 첨가하고 오버하다가 결국 성경을 왜곡하게 됩니다. 이단들이 그 단계에서 발생합니다. 이단들은 성경의 가르침만 따라도 넘칠 것인데 거기다 몇 가지를 더 첨가합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것을 요구하고 금욕까지 강조합니다. 그것이 열심이 지나쳐서 나오는 모습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열심이 너무 지나쳐서 성경이 말씀하는 법 보다 더 많게 만들어서 섬기고 지켰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더 만들었고 거기다 금욕과 절제를 첨가해서 지키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종교가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인위적인 종교로 전락하고 수양종교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지극히 성경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시고 격려하시고 안내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은 지극히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시고 움직이게 하십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동안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모든 문제들이 실타래 풀리듯 술술 풀리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아닌 길을 가려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내가 스스로 뚫어야 하고 빽을 동원해야 하고 무리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부작용이 나타나고 사고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삶에서 가장 좋은 길은 술술 풀리는 길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인도하시는 삶입니다.


도덕적 인도


때로 영성운동가들이 성령운동을 비도덕적으로 인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이상하게 비도덕적으로 일상의 삶을 무시하고 비질서적인 생활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은 지극히 도덕적이고 질서 있는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인간은 비도덕적인 성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타락한 본성 때문에 생기는 성향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지극히 도덕적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생활은 자기희생적이고 절제하고 정도를 걷게 하고 맑고 정직한 삶을 지향하게 합니다. 그 삶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자기 손해가 주어져도 기꺼이 그 삶을 따르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령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때로 양심을 속입니다. 남을 속일 때도 있습니다. 남에게 거짓을 말할 때도 있고 해를 끼칠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내게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인도하심은 그런 것들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극히 도덕적이신 성령의 생각과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를 도덕적으로 인도하십니다. 자기희생을 하게하고 절제하게 하고 헌신하게 합니다. 바른 길을 가게하고 무절제한 삶을 바로 잡아줍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이 잘 반영되도록 우리를 도덕적으로 인도하십니다.


인격적 인도

  성령은 또 우리를 성숙한 인격적인 신앙으로 인도하십니다. 성숙한 인격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존중하는 삶의 수준입니다. 선진국은 성숙한 인격적인 질서를 이루는 나라를 말합니다. 사람에 대해서 차별이 없고 억압이 없고 지극히 질서가 있는 사회를 선진국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선진국의 조건 중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장애인들에게 얼마나 편의를 제공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미개한 나라일수록 장애인들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고 배려하는 제도가 약합니다. 그래서 미개한 나라입니다. 또 하나는 여성에게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여성에게 차별이 없고 존중되는 사회가 선진국입니다. 여성이 운전하는 것이 가장 무서운 죄악으로 여기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누가 선진국이라고 말합니까. 투표권을 21세 이상 된 남자에게만 부여하는 쿠웨이트나 강간당한 여성이 고소하려면 목격자 4명의 회교도를 세워야 하는 파키스탄을 누가 선진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내를 구타하고 무시하는 남편이 신앙이 좋다고 해서 누가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하겠습니까. 성령이 내게 임하시고 내가 성령의 뜻을 좇아 행하는 사람이라면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지극히 존중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이 인격이 성숙해지는 삶입니다.

또 성령은 우리의 인격을 배제하고 황홀경으로 인도하지도 않으십니다. 간혹 영성운동가들이 황홀경을 자주 말하고 신앙의 삶을 황홀경에 빠지도록 인도하기도 하는데 성령의 삶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에는 때로 황홀경이 있기는 합니다. 예수님의 세 제자가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변모하실 때 황홀경에 빠진 적이 있기는 합니다. 다락방에서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여 방언하고 신비함에 빠진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는 몇 번 나오는 지극히 특별한 경우들이지 매번 그렇게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잘 반영되도록 인격적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신비적이고 영적인 존재지만 그렇다고 매사 신비로 우리를 이끌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불러서 사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먼저 삐뚤어지고 어긋난 점을 바로 잡으신 다음에 사용하십니다. 왜냐하면 삐뚤어지고 어긋난 상태를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부름 받게 되면 먼저 바로잡히는 과정을 거친 후에 사용 받습니다.

  디엘 무디가 기독교 역사에서 큰일을 했습니다. 무디가 어렸을 때 미국 시카고의 어느 한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의 모습은 불량기가 넘치는 모습이었고 얼굴에는 적의가 가득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불량학생이 들어오니까 누구도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파라”라는 교사가 다가가서 그 아이를 반갑게 맞아주면서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사랑해 주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후부터 그 아이의 얼굴에서 적의로 가득했던 표정이 사라지고 웃음이 깃든 얼굴로 바뀌었습니다. 그 말은 그의 마음이 변화되었다는 말이고 어깃장 난 심성이 바로잡혔다는 말이고 삐뚤어졌던 그의 인격이 바로 잡혔다는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셨는데 그가 후에 전무후무한 전도자로 활동하였던 무디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역사를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황홀경으로 인도하시고 기적으로 인도하시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렇게 황홀경으로 이끌지도 않으시고 아무 때나 음성을 들려주시는 분도 아니고 두 눈에 보이고 등이 뜨끔하도록 임하시는 분도 아니고 조용히 우리에게 주신 영적 감각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시고 느끼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도 깨닫지 못하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누구를 시켜서라도 듣게 하시고 어떤 사건을 통해서 깨닫게 하기도 하십니다. 생각 같아서는 마른 땅에서 물이 나게 하시고 일확천금을 내리시고 악인과 싸울 때는 악인에게 보기 좋게 벼락을 내리시고 대학입시 때는 기도만 많이 하면 실력과 상관없이 원하는 학교에 합격하게 하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비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노력하는 사람에게 다가가시고 땀을 흘리는 사람에게 땀의 열매를 따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무속에 나오는 그런 수준의 신도 아니시고 지극히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나라 동경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게 하십니다. 성경에서 제시한 천국을 무시하는 신앙이 있다면 그것은 비 성경적인 신앙이고 비성령적인 신앙입니다. 오늘은 천국 이야기만 하면 웃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오늘 세상에 무슨 유치하게 천국 이야기를 다 하냐고 비웃습니다. 그 마음이 사탄의 전략에 휘말린 마음입니다. 이 신앙처럼 물같은 신앙도 없습니다. 여러분, 천국 없는 기독교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천국 없는 신앙, 천국 없는 순교, 천국 없는 헌신생활, 그 신앙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러면 고작해서 우리의 인생이 이것으로 끝난다면 짐승과 차이가 무엇이니까.  

  우리는 솔직해야 합니다. 오늘 천국을 말하면 유치하게 생각된다면 그러면 “천국은 없다”하고 말해야 지성적이고 고상한 신앙입니까. 저는 첫째도 천국이고 둘째도 천국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천국이 없다면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이 세상에서 우리 신앙인들처럼 불행한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저도 천국이 없다면 굳이 이 신앙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렇게 수고의 삶을 살고 새벽기도 하느라 그 고생하고 아까운 돈을 헌금하느라 애쓸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들이 그토록 애쓰고 힘쓰고 헌금하는 것은 성경의 말씀 그대로 천국에 심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내가 오늘 아까운 마음이 없이 헌금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복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감사하고 헌금하고 헌신하고 때로는 고난도 감수하는 것입니다.

  천국 없는 신앙의 말로는 비극뿐입니다. 오늘 사탄이 현대의 신앙인들에게 자꾸만 천국과 부활과 심판에 대해서 희미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천국도 심판도 부활도 불신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이 부분들에게 아주 확신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에게 천국을 더 사모하게 하고 확실하게 믿게 하고 간절하게 사모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라“.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가장 잘 조화된 방법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인격적으로 도덕적으로 성경적으로 인도하시고 특히 천국을 소망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효과적으로 펼치며 살아가도록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경에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