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하면 좋은 날을 봅니다  (야고보서 1장 2-4절)

<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 >

성도에게는 두 종류의 시험이 있습니다. 하나는 마귀가 주는 시험입니다. 마귀의 시험은 주로 돈, 이성, 명예욕의 3가지를 통해서 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잘하려면 이 3가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1. 돈을 주의하십시오

사람의 욕심 중에 가장 통제가 힘든 욕심이 돈 욕심입니다. 식욕이나 성욕은 채워지면 한계가 있는데 돈은 다른 욕구를 채울 수 있는 큰 힘이 있기 때문에 통제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돈은 우리의 영혼과 신앙을 가장 잘 망칠 수 있기 때문에 바치고, 드리고, 나누고, 베풀 줄 아는 부단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왜 제가 선교와 구제를 더욱 많이 하자고 귀가 따갑도록 얘기합니까? 첫째 이유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둘째 이유는 복된 영혼이 되려면 물질을 나누는 훈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년 표어도 “더욱 많이 선교합시다!”로 정했고, 설교할 때마다 가급적이면 선교사를 돕자는 얘기를 많이 하려고 합니다.

오늘도 광고시간에 몽골의 김재호 선교사님 얘기를 했습니다. 2001년에 우리 선교회가 몽골의 김재호 선교사님 차량 마련에 상당한 도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새 차를 구입하고 운송하고 관세를 무는 것까지 2500만 원 이상이 들어서 결국 비용이 모자라 약간 쓴 중고차를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몽고 지역이 너무 날씨가 춥고 카센터도 많지 않고 부품 구하기도 힘들어서 지금 그 차를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차가 없이 사역을 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기동성이 떨어져서 도저히 차가 없으면 안 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벌써 엄청난 추위가 닥쳐왔다고 합니다. 몽골은 10월부터 겨울이 시작되는데 영하 30도 이하로 내려가는 상황에서 차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합니다.

지난주에는 우리 교회는 물론 인터넷을 통해 은혜 받는 분들 중에서도 아무도 이 기도제목에 반응한 사람이 없었고, 이번에 미션퍼블릭 팀에서 저의 책을 출판하면서 이익금으로 김재호 선교사님을 도우려고 했지만 아직은 도울 만큼의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지금 우리가 도와야 할 선교사가 많아서 끊임없이 선교 기도제목이 생기지만 우리는 감동이 되는 대로 우리 호주머니를 기쁘게 비우는 훈련을 잘해야 합니다.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돈을 잘 관리하고 잘 쓸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교회에서는 돈 거래가 없어야 합니다. 이 근처의 어떤 교회에서는 한 여자가 열심히 봉사해서 얻은 신임을 바탕으로 교인들에게 3천만 원을 꿔서 달아나 난리가 났습니다. 그처럼 수많은 교회들이 돈 문제로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돈 관리를 잘해야 하고, 교회에서는 돈 거래를 삼가고, 계도 하지 말고, 꾸는 일이나 꿔주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2. 이성을 주의하십시오

요새 세상은 무서운 세상입니다. 얼마 전 신문기사를 보니까 요새는 평범한 주부들에게까지 ‘애인 만들기’가 급속히 번진다고 합니다. 그런 시대에 아내가 교회 다니는 것이 남편에게 얼마나 축복인지 모릅니다. 물론 가끔 교회에서도 잘못된 만남이 생기기는 하지만 그래도 세상의 불륜과 비교하면 그 비율은 100분의 1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내의 교회생활을 막는 남편들을 보면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가끔 보면 자기는 교회에 다니지 않지만 아내만이라도 꼭 교회에 다니게 하는 남편이 있는데, 얼마나 지혜로운 모습인지 모릅니다. 아내가 이단이 아닌 건강한 교회에 다니면 얼마나 안심이 됩니까? 교회에 다니는 여성이 ‘애인 만들기’를 꿈에나 꾸겠습니까? 설교에서 수시로 “남편을 귀히 여기라!”고 하며 그 영혼을 붙잡아주고, 주변의 권사님, 집사님, 그리고 구역식구들이 영혼을 붙잡아주니 남편의 마음고생이 훨씬 덜어질 것입니다.

남편과 갈등이 있으면 세상 친구들은 뭐라고 합니까? “어떻게 참고 살아?”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대개 가정이 더 깨집니다. 반면에 구역 식구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래도 참아야지요. 내일 새벽부터 그 문제를 놓고 교회에 나와 기도해보세요.”라고 해줍니다. 그러면 곧 그 관계는 회복됩니다. 그러므로 구역예배에서 여자들끼리 모여 노닥거리는 것 같지만 그것이 남편에게는 보통 축복된 일이 아닙니다.

지금 수많은 가정들이 깨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 나온 얘기입니다. 김 모 주부는 3년 전만 해도 의사인 남편 덕에 여유 있게 잘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2년 전 여고동창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나 1년쯤 사귀다 외도 사실이 들통 났습니다.

요새는 동창회가 탈선의 새로운 온상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집 주변은 식당가이기 때문에 여자 동창들이 모여 삼겹살 뜯고 노래방 가는 장면을 수시로 봅니다. 그런 모임에서 무슨 말이 오고 가겠습니까? 그곳에서 몇 마디 말만 잘못 들으면 가정 팽개치고, 남편 팽개치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삶을 막는다고 요새 세상에 막아집니까? 그럴수록 아내들은 동창회나 다른 곳을 기웃거리기 때문에 남편은 아내가 건전한 모임에 가는 것을 오히려 적극 장려해주어야 합니다. 사실 동창회 모임보다는 구역모임이 훨씬 건전합니다. 그런데 동창 모임에 간다고 하면 관대하고 구역모임에 간다고 하면 반대하는 남편들을 보면 이해가 안 됩니다.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파는 것 같습니다.

결국 그녀는 간통죄 고소 취하 조건으로 이혼 당한 뒤 요즘은 헤어진 초등학교 3학년 딸 생각에 밤잠을 설치고 지금 노래방 도우미를 하면서 생계를 꾸린다고 합니다. 성도에게는 이런 일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이성문제는 순간적으로 눈이 맞아서 잘못될 수 있으니까 한 순간의 실수로 패가망신하는 일이 없도록 지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3. 명예욕을 주의하십시오

교회생활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명예욕입니다. 신약 교회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교회가 고린도교회였는데, 그 교회에도 여지없이 돈 문제, 이성 문제, 명예욕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한 여러 교훈이 담긴 서신이 바로 고린도전서인데, 돈 문제는 6장에서 잠깐 언급하고 있고, 이성 문제는 5-7장에서 꽤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거의 대부분 명예욕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까지는 파당 문제를 다루는데 왜 파당이 생깁니까? 자세히 보면 자신의 명예욕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8-11장까지는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는 문제를 가지고 “누구 신앙이 바르냐?”를 가지고 논쟁하는 문제를 다루는데 그 논쟁도 결국 명예욕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14장까지는 은사와 방언 문제를 다루는데 왜 고린도교회에 “어떤 은사가 높으냐?”는 논쟁이 있었습니까? 그것도 결국 명예욕 때문입니다.

결국 이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근본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6장은 문안을 하는 장이기 때문에 고린도전서의 결론은 15장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는 1장에서 강조하는 십자가로 시작되고, 13장에서 강조하는 사랑으로 클라이맥스를 이루고, 15장에서 강조하는 부활로 끝납니다. 결국 고린도교회의 근본 해결책은 ‘십자가의 사랑’에 있고, 그러면 부활의 영광을 맛보게 된다는 것이 고린도전서의 메시지입니다.

성도는 돈이나 이성도 주의해야 하지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명예욕입니다. 솔직히 교인들이 왜 시험에 듭니까? 대개 보면 명예욕 때문입니다. 명예욕만 줄이면 시험을 현저히 줄일 수 있고, 남을 비판하는 성품도 현저히 줄어들게 됩니다. 지금도 마귀는 돈, 이성, 명예욕으로 끊임없이 성도를 공격하는데 우리는 그 마귀의 시험을 잘 이겨내야 합니다.

< 시험을 축복으로 승화시키는 길 >

오늘 본문 2절 말씀을 보면 ‘시험’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시험은 ‘마귀의 시험’이 아니고 ‘하나님의 시험’ 즉 ‘연단’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를 성숙하게 만들고, 시험 후에 축복을 주시기 위한 시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험은 축복의 전주곡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시험을 축복으로 승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시험의 존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이 구절을 보면 야고보는 첫 인사를 마치자 첫 주제로 시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목사였습니다. 그는 목회하면서 ‘성도의 시험’이란 주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시험을 제일 먼저 언급하면서 가장 먼저 어떤 말을 합니까? “성도도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난다”고 말합니다.

성도의 시험은 목회자를 가장 마음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어느 때에는 성도의 기침 소리만 들어도 “몸이 불편한가?”하고 가슴이 덜컹 합니다. 때로는 새벽기도 안나오던 성도가 갑자기 새벽기도 나오면 가슴이 덜컹합니다. “무슨 문제가 생겼나?” 반대로 새벽기도 꾸준히 나오던 성도가 갑자기 안나오면 역시 가슴이 덜컹합니다. “무슨 문제가 생겼나?” 목회란 성도가 시험을 당할 때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기도 많이 하고 성령 충만하면 시험이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4장 1-2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서 40일 금식기도 한 후에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처럼 기도해도 시험은 있지만 기도하면 시험을 이기고 극복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시험을 당해도 시험에 들지 않는 경지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성도의 참된 능력입니다.

우리는 ‘시험을 당한다’는 것과 ‘시험에 든다’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시험을 당합니다. 기도 많이 해도 시험을 당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시험에 들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험이 있어도 시험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에게 건강의 시험도 있고, 물질의 시험도 있고, 가정의 시험도 있고, 인간관계의 시험도 있지만 그때 시험에 들지 말고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2.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여기서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말의 뜻은 “시험을 기뻐하며 환영하라!”는 아주 능동적인 말입니다.

인생의 행복 유무는 “시험을 당할 때 그 시험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와 관련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시험을 당하면 불평하고, 원망하고, 남 탓을 하고, 교회 탓을 하고, 사명을 쉽게 포기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시험이 와도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난 중에 기뻐하는 신앙을 가진 성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고 “내 사랑하는 아들아! 대견하구나!”라고 기뻐하시며 받아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시험을 축복 받는 찬스로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몸살 나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키워주시고 축복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처럼 문제 속에서 의미를 찾고 선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사실 우리는 문제와 시험을 통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한계상황은 곧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우리는 문제 앞에서 슬퍼하면서 문제에 치이는 희생자가 되지 말고 문제가 있어도 기뻐하면서 문제를 조종하는 조종사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시련 중에 온전히 기뻐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시련을 통해서 얻는 것들이 많다는 이제까지의 삶의 경험을 생각하면서 기뻐하는 훈련을 부단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 중에 기뻐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우리의 시련을 급속히 잦아들게 하실 것입니다.

3.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이 구절을 보면 야고보는 시험을 ‘믿음의 시련’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시험은 우리의 믿음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때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인내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에 나오는 ‘안다’는 표현은 로마서 5장 3-4절 말씀에도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가 믿음을 잃지 않으면 문제와 시험과 환란은 가장 복된 소망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아버지가 이겼다고 하면 아들은 걱정하지 말고 그 아버지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욥기 23장 10절 말씀을 보면 욥은 시험당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은 자기의 가는 길을 하나님이 아신다고 했습니다. 또한 욥은 자기의 단련을 마귀가 단련하지 않고 주님이 단련하신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고, 시험을 당해도 하나님이 단련하시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시련을 만나도 마음을 푹 놓고,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정금 같이 될 축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시험과 환난이 닥칠 때 “왜 내게 이런 고난이 주어지나?”라고 묻지만 그때 우리는 “하나님! 이때 어떤 교훈을 배울까요? 어떻게 이 상황을 잘 극복할 수 있나요?”라고 자신의 사명을 더 생각하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더 큰 축복의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4.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합니다.

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에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말은 “인내를 포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인내는 헬라어로 ‘휘포메노’라고 하는데 ‘아래에 머문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내는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인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낮추고 인내하면 많은 것을 얻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인내하는 자는 그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인내하면 본문 4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전, 구비, 만족’ 라는 여러 가지 가치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인내훈련을 부단히 해야 합니다. 이제 한번의 체험으로 신앙의 거인이 될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신앙에는 왕도와 비방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은 특별히 먹는 보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먹는 밥에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한 감동이 없는 것 같아도 꾸준히 주일성수하고, 더 나아가 수요예배와 새벽예배에 꾸준히 참석하는 것이 영혼의 건강에 최고로 좋습니다.

작정기도를 할 때도 단기간에 무엇을 얻겠다는 생각으로는 작정기도를 하지 마십시오. 작정기도는 어떤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복원을 새롭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단기간에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기복주의는 사람을 허망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겸손한 모습으로 꾸준히 인내하며 자기의 일을 감당할 때 주어집니다.

인내는 성도의 인격을 아름답게 빚는 가장 가치 있는 영적 화장품입니다. 그 인내를 만들어내는 원료가 바로 믿음의 시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고난이 있어도 인내로 영적 화장을 잘 해서 더욱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을 갖추고 축복을 예비해야 합니다.

< 인내하면 좋은 날을 봅니다 >

지난 5월에 저의 둘째 딸 한나가 학교 수련회를 갔습니다. 갈 때는 신나게 갔습니다. 그런데 둘째 날 밤에 엉엉 울면서 전화했습니다. 깜짝 놀라 “한나야! 무슨 일이 있었어!”라고 하니까 그날 저녁 캠프파이어를 할 때 수련회 강사가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자!”고 분위기를 만들어주니까 감성이 풍부한 한나가 감동을 받아 울면서 전화한 것입니다. 그때 한나가 말했습니다. “아빠! 제가 이제까지 잘못한 것 많았지요. 엉엉. 아빠 이제 말 잘 들을게요. 엉엉.”

다음 날, 우리 부부는 한나가 씩씩하고 은혜가 충만한 모습으로 올 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한참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항상 밝고 쾌활한 모습을 하는 한나가 그런 모습을 하니까 이상하고 안쓰러웠습니다. 우리 부부는 걱정하며 서로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수련회 마지막 날에 무슨 일이 있었나? 심하게 야단맞았나?”

평소와 너무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밝은 모습이 없어지고, 가끔 “아빠! 두려워요!”라는 말을 하고, 작은 일에서도 잘 삐쳤습니다. 그런데 6월 16일 휴가 중에 콘도에서 저녁에 잠잘 때 별로 큰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한참 삐쳤습니다. 그때 제가 오랜만에 큰소리로 야단을 쳤습니다. 가뜩이나 풀이 죽은 상태에서 제가 야단을 치니까 한나는 울면서 잠들었습니다. 그 자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파서 저도 밤새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다음날부터 한나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하고, 다시 해맑은 웃음을 보이더니 수련회 갔다 온 후로 거의 한 달 만에 완전히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사랑의 질책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험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질책입니다. 그때 낙심하지 말고 잘 이겨내야 합니다.

그런 일이 첫째 딸 은혜에게도 있었습니다. 요새는 보통 6학년에 되면 여자는 사춘기가 온다는데 은혜는 너무 착하고 순진해서 사춘기가 오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약간씩 반항적인 어투도 나오고 한나와 사소한 일로 다투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그러다가 8월 말에 또 다시 사소한 일로 하나와 다투어서 마침내 내가 참지 못하고 “왜 서로 양보할 줄 모르느냐?”고 큰소리로 야단을 쳤습니다. 그때 이후로 신기하게 은혜가 조금씩 좋아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지난주에 이번에 제가 쓴 책을 은혜가 이틀 만에 다 읽었습니다. 내가 물었습니다. “은혜야! 책 내용이 이해가 되니?” 은혜가 거의 다 이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책을 읽은 후부터 무엇을 느꼈는지 잘 몰라도 은혜의 어투와 행동이 완전히 천사처럼 변했습니다. 이번에 책을 출간하고 가장 보람이 있었던 것이 은혜의 변화된 모습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남에게 사랑과 희망과 치유를 전하려던 책이 저의 자녀부터 살린 것입니다.

자녀를 키우면 자녀에게도 사춘기도 오고, 뭔가 부모에게 염려스러운 상황도 생깁니다. 그때 부모의 사랑의 격려는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부모의 엄한 사랑의 질책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물론 그 순간은 마음이 아프고 자녀들에게 인기 없는 부모가 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사랑의 질책을 하면 자녀가 스스로 끊을 수 없는 잘못된 습관들을 끊는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고, 자녀의 앞날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험이 다가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때로는 나쁜 것을 끊고, 더 성숙하게 되라고 시험을 허용하십니다. 그때 시험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시험 중에도 기쁨과 믿음과 감사를 잃지 말고 인내해야 합니다. 그처럼 사랑의 시험 기간에 믿음으로 참고 인내하면 반드시 좋은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떤 신앙 좋은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술 담배도 안하고, 잘 어울릴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자 직장 동료들이 자기를 따돌리는 것 같고 자기 때문에 사무실 분위기가 썰렁해지는 것 같아서 사표를 내려고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위로해주었습니다. “집사님! 그만두지 마세요. 그들은 집사님이 싫어서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집사님을 존경해서 거리를 두는 거예요.” 그 말에 용기를 얻고 자기 자리를 잘 지켜서 나중에 사장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디에 가든지 쉽게 사표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회사를 잘 다니다가 기분 나쁘다고 사표를 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남편이 맘대로 자기와 의논도 없이 사표 냈다고 달달 볶아 집에서도 사표 내고 쫓겨났다고 합니다. 하나에 사표를 내면 다른 것도 줄줄이 사표를 내는 상황이 생깁니다. 반면에 자기 자리를 붙잡고 인내하면 다른 모든 축복도 줄줄이 붙잡히는 은혜가 주어질 것입니다.

인내가 축복의 제일 비결입니다. 능력이나 아이큐보다 인내하는 성품이 사람을 더욱 성공시키고, 또한 인내를 통해 얻는 축복이 수명도 오래 갑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가정과 교회에서는 쉽게 사표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살다보면 먹구름도 끼지만 먹구름이 걷히면 곧 아침이 다가옵니다. 지나가지 않는 밤은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최선을 다했다면 쉽게 포기하지 말고 인내해야 합니다. 무엇이든 작품이 만들어지려면 반드시 인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제 시험이 있어도 믿음의 시련인 줄 알고 시험을 잘 극복해서 축복받는 복된 심령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