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화합 합시다  (요일3:18)

(요일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사랑을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외치는 사랑 속에는 뜨거운 가슴과 실천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호소합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자기 몸을 바쳐 죄인을 구원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으로 새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이 이웃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은 말과 행동이 항상 일치되어야 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말은 쉬우나 실행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탈리아의 항해사이며 아메리카의 발견자인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스페인에 귀환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어느 날 콜럼버스는 여러 귀족 부호들이 마련한 축하 잔치에 초대되어 참예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어느 한 귀족이 비꼬아 말하기를,  누구라도 배를 타고 끈기 있게 항해만 하면 어떤 육지에라도 닿을 것이 뻔한 일이 아니냐?  하고는 콜럼버스의 업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어 버렸다. 이 말에 콜럼버스는 몹시 기분이 상했지만 한참이나 조용히 앉아 있더니 식탁에 올라온 삶은 계란 하나를 들고는  누구둔지 이 계란을 바로 세워 보십시오. 하고 말했다. 식탁에 둘러앉았던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식탁에 놓여있는 삶은 계란을 세워 보려 하였으나 세우는 자가 없었다. 이때에 콜럼버스는 그러면 제가 해 보지요. 하더니 삶은 계란의 한쪽을 테이블에 쳐서 깨뜨린 후 부서진 쪽을 아래로 하여 계란을 세웠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렇게라면 못 세울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빈정거렸다. 그러자 콜럼버스는 다시 말했다.  이렇듯 쉬운 일도 지금까지 누구하나 하지를 못하지 않았습니까? 무엇이나 남이 해 논 다음에는 쉬운 것이랍니다. 라고 말하자 모두 시비를 그쳤다는 것이다.  (예화뱅크- 비방하지 말라)

   사랑의 실천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열두 사도 가운데 세 사람은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로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처절한  고뇌와, 산상변화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직접 보는  특권을 누렸습니다(마5:37;9:2;14:33). 그 중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자주 불리어집니다(요13:23;20:2;21:7). 또한 성경의 요한서신서들은 ‘사랑의 정수’라고 지칭됩니다. 전승에 따르면 사도 요한이  만년에 에베소 교회의 감독으로  있을 때, 비둘기를 키우는 취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장로가 사냥을  다녀오는 길에 사도 요한의 집을 지나가다가 그가  새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장로는 사도 요한에게 그런 하찮은 일로 시간을 보낸다며 불평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장로의 활을 보며 “장로님의 활줄이 늘어져 있군요.”라며  화제를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장로는 “사냥을 하지 않을 때는 활줄을 늘 이렇게 느슨하게 해 놓습니다. 만일 항상 팽팽한 채 두면 탄력성을 잃어 사냥할 때 실수를 하게 됩니다.”라고 해명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사도 요한은 “나도 지금  마음의 활을 느슨하게 해놓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의 화살을 더 잘 쏘아 맞추기 위해서지요.”라고 멋지게 답변했습니다.
사랑의 실천도 긴장을 푸고 여유를 가질 때 사랑을 베푸수 있는 길이 보이고 이루어집니다.

   오직 행하는 사랑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열심히 전도할 때에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곧 성령님은 종종 불행한 환경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적 필요성을 깊이 느끼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성령님은 그런 상황을 이용하시어 예수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작가 제니퍼 리즈 라콤은 이웃에 사는 다이아나에게 늘 전도할 책임을 느끼면서도 가까워 질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몇몇 친구들과 함께 다이아나를 위해 기도를 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다이아나의 남편으로 절망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얼마 전 다리와 발목이 부러져 앞으로 몇 개월을 걷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매일 아내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을 좀 구할 수 없을까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니퍼와 친구들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이러한 기회에 감사하며 다이아나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청소하고, 장을 보아주기 시작했습니다. 몇 달이 지나 제니퍼는 다이아나가 성경을 읽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이아나는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여러분 기독교인들은 그런 식으로 바쁘게 사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남편에게 성경책을 사다 달라고 했지요.” 그들 부부는 제니퍼가 다니는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주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전도해야겠다는 책임을 느끼시면 계속 기도하며 “행함과 진실함으로”(요일 3:18) 사랑하면 그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사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 할 것이며, 곧 그 이유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당신이 말로 가르쳐 준 것도 내게는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당신에겐 명백하여도 내겐 희미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을 때
당신은 주님이 누구인지 깊이 깨닫게 하였습니다.  
도움의 손길을 줄때 사람의 마음 문을 복음을 향해 열수 있습니다.  

   한 남편이 이런 간증을 합니다.
루이스의 이야기 "이웃을 사랑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하면서 시간 낭비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순간 굉장한 비밀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을 할 때에 이윽고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를 들었을 때에 너무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곧 그가 말한 그대로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내 콜렛과 사소한 일로 다투었고, 진심으로 용서하지 못했다합니다. 남편에게 동네 가게에 가서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사오라는 아내의 부탁이 기분을 더욱 엉망으로 만들었다합니다. 짐작하지 못하겠지만 실제로 가게로 물건을 사러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합니다. '시장을 보는 일'은 남자의 몫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합니다. 마지못해 카트를 끌고 통로를 지나는데. 콜렛이 좋아하는 커피가 눈에 띄었다합니다. '만일 오늘 아내가 내게 친절하게 대했다면 저걸 사다주어서 놀래 줄텐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다른 한 편에서는 그녀에게 커피를 사다주기를 원했다합니다. 잠시 서로 상반되는 감정으로 갈등을 하다가 단지 가격만 알아보기 위해 그 커피 병을 끄집어내기로 했다합니다. 그 커피 병을 만지는 순간, 마음은 변했다합니다. 마음속의 서운함은 다 녹아 없어지고,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과 이 커피를 선물했을 때 기뻐할 아내의 모습이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 밀려들었다합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완전히 화해하게 되었다합니다. 사랑의 행동은 감정을 바꾸는 것 이상의 효과가 있다합니다. 사랑의 행동은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과 화해하고자 하는 의도를 실수 없이 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선교사가 자신의 집안일을 도와주며 그 지역 언어로 통역 일을 해 주고 자기 가족을 도와주던 여인에게 걱정거리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 선교사는 몇 가지를 물어본 끝에 그 가정부가 임신을 하였고 두 번째 아이를 키울 경제적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그녀와 남편은 아기를 지우기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는 재정적인 도움을 구하려고 즉시 미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였습니다. 그 다음 여 선교사는 가정부와 함께 나란히 앉아 그녀에게 적어도 앞으로 2년 동안은 아기를 돌볼 수 있는 돈이 올 것이 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 소식을 들었을 때 부부는 기뻐 뛸 듯 하였습니다. 경제적인 도움 때문에 그들이 아기를 양육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아이를 낳아 키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은 이 가족에게 주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일을 한 가지 하였다고 생각 했습니다 (요일 3:18). 사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쉬운 것은 압니다. 가난 구제는 나랏 님도 못한다는 속담이 전합니다. 말로만 전도한다면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것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겠지만,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을 한다면 그들은 우리의 전하는 말을 들을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 진정한 기쁜 소식에 대해 그들의 마음 문을 열어 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실제적인 방법을 사용하십시오.( 실제적인 방법으로 하십시오)
(약 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약 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진실한 사랑으로
  이십년 동안 매일 매일 안토니오는  그의 아내에게 사랑의 시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혼 공판정에서 그의 결혼의 즐거움을  축하하기 위하여 이런 시들을 지은 것이 아니고 그의 거센 아내를 달래기 위하여 지은 것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판사는 이혼을 허락했고 그 결혼이 외관상의  '사랑의 모습'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남편이나 아내는 자신이 멋있는 가식을 앞세우고 행동하는데 지쳤다고  말하며 수년간의 소위 말하는 '행복한 결혼'을 뒤로하고 떠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 간의 관계에서도 자주 그와 비슷한 깨짐이 생깁니다. 가식이 사라지면서 오래 숨겨져 있던 분노가 표면화됩니다.  아우 아벨에 대한 가인의  "사랑"은 결국 분노로 터져버리는 끓어오르는 시기심에 덮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이야기의 비극적인 종말을 알고 있습니다(창세기 4:8).
  결혼생활에서나 또는 동료 믿는 자들과의 관계에서나 사랑이 진실하지 않으면 당연히 분노와 분열이 표면화됩니다.
  그저 "사랑의 눈길"을 한번 주기보다는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롬12:9)라는 말씀에 진지하게 도전해 보아야 합니다. (진실한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 사랑의 눈길)

  진실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타락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죄악 된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반역했지만,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용납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가 훌륭하거나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순결한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갚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동일한 소원을 가지고 구원하시는 사랑으로 지금도 이 세상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통로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빚을 지고 있는데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전함으로써만 그 빚을 갚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 아가페 사랑은 그들의 행위나 태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던 죄인들에 대한 사랑, 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무가치한 자들에 대한 사랑을 뜻합니다.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골 1: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골 1: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골 1: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하나님과 구주 예수님, 그리고 우리의 상담자요 도우시는 분이신 성령을 사랑하기는 비교적 쉽습니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쏟아주신 그 위대한 사랑에 응답합니다. 또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기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란 사랑의 가족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해를 끼친 불신자를 사랑하려 할 때는 실천하기 어렵고, 많은 희생이 따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이야말로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나타내라고 부탁하신 아가페 사랑입니다.(아가페 사랑)

  세상 사람이나 교회를 다니나 십자가의 구원에 대한 은혜를 깨닫지 못한 심령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많이 노래하고 강조하지만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희생은 별로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몸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서 죽으심으로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닙니다. 이론적인 지식은 우리에게 확신을 덜 줍니다. 실제적으로 내가 직접 실천해 볼 때 확신이 생깁니다. 내가 나만을 중심으로 사는 이기심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되었는가를 알아보는 방법은  내가 다른 사람을 기억하고  그들의 고난에 대하여 생각하고 기도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서 새 생명을 가진 자는 자기에게 영생을 주신 주님을 사랑하고 그의 나라를 위하여 삽니다. 그  다음 하나님이 사랑하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살고 마지막으로 자기 유익을  생각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대한 확실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구원받은 자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합니다.
지옥과 천국의 이야기 가운데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는데 자기남 먹는 지옥은 아무 것도 못 먹고 마르며 다른 사람을 먹여 주려고 하는 천국은 풍성한 음식을 먹어 바른 얼굴들과 살진 모습으로 즐기는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민권운동이 크게 분열되었을 때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연설을 했습니다. “쌍방이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다시  만납시다. 분노를 버리고 대화를 해봅시다. 그리고 민권운동을 하는 여러분 전체의 큰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것을 마음에 둡시다.” 분노와 시기심을 가지고는 절대로  위대한 목적을 실현시킬 수 없다는 존슨 대통령의 연설은 큰 호소력을 발휘하여 당시의 분열을 잘 수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시기심과 증오에서 비롯된 분열과 다툼은 인간 역사에 뿌리 깊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허용될 수 없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마다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 서로의 이익 때문에 분노하고 증오하며, 심지어는 악한 행동까지 서슴지 않고 행하려는 마음자세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바로 성장해야 한다는 영원한 목적을 늘 마음에 두는 사람에게 시기심과 증오가 있을 수 없습니다. 분노와 증오와 갈등, 그 모든 것은 십자가 밑에 묻어야 합니다.(십가가 밑에 묻기)

사랑으로 화합하는 총회라는 주제로 총회가 모이게 됩니다.
총회만이 아니라 모두가 사랑으로 화합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을 말하는 심령이 아니라 오직 행함으로 사랑하며 진실함으로 사랑하며 화합하는 모두가 됩시다.


출처/강성찬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