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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를 구한 엘리야의 절망 이야기 (왕상19:1-8)
오늘 아침 색다른 광고 한 가지를 합니다. 지난 금요일 오후 저에게 이 메일 한 장이 날아왔습니다. 저를 아는 어느 장로님이 보낸 메일이었습니다. 그 메일의 내용은 폴 브래드쇼라는 사람이 릭 워렌 목사와 인터뷰한 내용이었습니다. 릭 워렌 목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 쌔들백 교회의 목사인데 최근에 한국에 와서 큰 열풍을 일으키고 간 분입니다. 그 인터뷰의 내용이 저의 마음에 꼭 들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기 전에 그 내용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 인터뷰의 내용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우리들이 세상을 사는 목적은 천국을 준비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이 세상에는 고난과 불행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삶의 목적은 부나 명예나 행복이 아니라 주님을 닮아가는 성결의 인격이고 나눔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 인터뷰의 내용을 요약해서 옮깁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저는 한 마디로 삶의 목적은 영원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Life is preparation for eternity. 우리는 영원히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어느 날 저의 심장은 멈출 것이고 저의 육체는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 자신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세상에 60년 또는 100년을 살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수 조년 또는 수 백만 조년을 영원 안에서 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영원을 위해 몸을 푸는 것이고 의상 입기를 연습하는 것입니다. This is the warm-up act - the dress rehearsal.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영원 안에서 영원히 계속할 일을 지금 세상에서 연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다음, 이 세상에서의 삶은 문제들의 연속입니다. Life is a series of problems. 우리는 지금 하나의 문제 안에 있든지, 하나의 문제로부터 벗어났든지, 또는 다른 하나의 문제 안으로 들어가든지 합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평안보다는 우리의 인격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보다는 우리의 성결한 삶에 더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God is more interested in your holy life than in your happy life.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 행복을 누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목적은 아닙니다. 삶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닮는 인격의 성장입니다. 지난 해는 저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해였지만 제 아내가 암에 걸리는 가장 힘든 해했습니다. 저는 인생이 기차 길의 두 철로와 같다고 봅니다. 우리의 삶에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언제나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제 아내를 치유하시거나 편안하게 해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그녀에게 아주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인격을 강하게 하셨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사역을 주셨고, 간증을 주셨고, 그 녀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지난 해 제 책이 1500만부나 팔려서 갑자기 부자가 되었고 갑자기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돈과 명예를 주시는 것이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편안한 삶을 위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많은 돈의 수입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활방식을 조금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새 것을 무얼 사드리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작년 중반부터 교회로부터 사례를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개척하고 지도자를 양성하고 가난한 자를 돕고 병자를 돌보고 차세대를 교육하기 위해서 ‘평화 기획’(Peace Plan) 이라는 재단을 설립하여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나는 소유를 위해 살려고 하는가?’ ‘인기를 위해서 살고 있는가?’ ‘압력에 이끌려서 살려고 하는가?’ ‘죄책감과 증오와 물질주의에 이끌려서 살려고 하는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이끌려서 살려고 하는가?’ 저는 아침에 일어날 때 제 침대 옆에 앉아 하나님께 아룁니다. ‘하나님 만일 제가 오늘 아무것도 한 일이 없더라도 당신을 더 알게 되기를 원하며 당신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이 땅에 두신 것은 단지 할 일들의 목록(to-do list)을 완수하라고 하심이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 보다는 나의 존재에 더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He is more interested in what I am than what I do. 그래서 우리를 가리켜 ‘인적 존재들’ (human beings) 이라고 부르지 ‘인적 행동들’ (human doings) 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아주, 아주 귀한 고백들입니다. 너무 긴 광고를 했지만 아주 유익한 광고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은 천국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고난과 불행이 있기 마련입니다. 삶의 목적은 부나 명예나 행복이 아니라 주님을 닮아가는 성결의 삶이고 나눔의 삶입니다. 어떻게 미국에서 살고 있는 미국 목사님이 이런 귀한 고백을 했는지 놀랍습니다. 이제 함께 기도하고, 성경 말씀 읽고, 성가대가 찬양을 한 후, 설교 말씀을 듣겠습니다. (목회 기도, 성경 봉독, 찬양)
지난 주일 "욥의 인내와 결말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죽기를 구한 엘리야의 절망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주일 욥에 대한 설교를 축복해주셔서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깨달음과 감동을 받게 되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 전 주일 히스기야에 대한 설교도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셨습니다. 오늘 아침 설교도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셔서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깨달음과 감동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우리는 바로 생각할 수도 있고, 바로 느낄 수도 있고, 바로 설교할 수도 있고, 바로 설교를 들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죽기를 구한 엘리야의 절망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죽고 싶은 절망에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요사이 우리 나라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노인들 중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살고 싶은 소망이 끊어지고 죽고 싶은 절망에 빠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신자들뿐만은 아닙니다. 조용기 목사님도 오래 전에 여의도 교회당을 건축하면서 여러 가지 일로 너무 힘이 들어서 건물 꼭대기에서 떨어져서 죽고 싶은 충동을 느낀 때가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남포교회의 박영선 목사도 너무 힘이 들어서 죽고 싶어서 수면제를 많이 먹은 때가 있었다고 얼마 전에 고백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죽고 싶은 절망에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죽고 싶은 절망에 빠진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하나님께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왕상19:4). 사실 이 비슷한 말을 욥도 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을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이다.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요16:8,9). 이제 "죽기를 구한 엘리야의 절망 이야기"를 세 가지로 나누어 하려고 합니다.
첫째, 엘리야가 너무 큰 일을 한 것이 절망에 빠진 배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엘리야만큼 대단히 큰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번제물과 모든 것을 태워버렸습니다. 엘리야는 대단한 기도의 사람이었고 대단한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 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왕상18:36-40). 엘리야는 대단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대단한 인기를 얻었습니다. 엘리야를 거슬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엘리야가 또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기도했을 때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편을 바라보라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가로되 올라가 아합에게 고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 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왕상18:42-46). 엘리야는 대단한 기도의 사람이었고 대단한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대단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대단한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의 승리와 인기는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엘리야를 거슬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열왕기상 18장 마지막 부분이 기록한 엘리야의 승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19장 첫 부분은 갑자기 엘리야가 죽기를 구하는 극심한 절망에 빠진 모습을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이렇게 극히 대조적인 모습을 기록해서 우리들에게 보여 주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나 사도라도 너무 큰 일을 하고 너무 큰 승리를 거두었을 때 자만에 빠질 수도 있고 허탈감에 빠질 수도 있고 그리고 절망에 빠질 수도 있다는 중요한 진리를 보여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너무 큰 승리를 거두고 너무 큰 인기를 얻을 때 자만에 빠지게 되고 허탈감에 빠지게 되고 그리고 절망에 빠지게도 됩니다. 삼손이 그랬습니다. 솔로몬이 그랬습니다. 사울 왕이 그랬습니다. 지금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공할 때 너무 잘 될 때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극히 겸손해야 합니다. 릭 워렌 목사님처럼 소박하고 검소하고 겸손하여야 합니다.
둘째, 엘리야가 이세벨의 협박에 기가 질려서 절망에 빠졌다고 생각합니다.
아합 왕은 감히 엘리야에게 대항하지 못했는데 그의 아내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대항하며 협박까지 했습니다.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왕상19:1-2). 아합 왕은 기가 죽어서 엘리야에게는 한 마디도 못하고 집에 가서 그의 아내 이세벨에게 고해바쳤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발악을 하며 엘리야에게 대들었습니다.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했습니다.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여자는 약하기도 하지만 아주 강하고 독합니다. 아주 무섭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그만 이세벨의 독기에 질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너무 큰 승리에 도취되어 자만에 빠져 있었는데 이세벨의 독기에 기가 질려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엘리야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왕상19:3-4). 멀리멀리 광야에까지 도망을 쳤습니다. 여자의 독기가 무섭기는 무서운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무서워서 도망을 쳤으니 우리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하와를 꼬여서 아담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 먹게 했고, 기생 들릴라를 꼬여서 삼손으로 하여금 머리 털을 깎게 했고, 밧세바를 사용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간음죄를 짓게 했고, 엘리야로 하여금 광야로 도망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엘리야는 한 참 도망가다가 로뎀 나무 아래 앉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지금은 하늘의 소낙비는 고사하고 마실 물 한 모금도 없었습니다. 뜨거운 모래 바람만 불고 있었습니다. 지난날의 화려했던 모든 승리는 한갓 꿈에 불과했습니다. 모든 것이 캄캄하게 보였습니다. 앞으로 가면 사막이요 뒤로 돌아가면 이세벨의 군대가 자기를 잡으려고 달려올 것이었습니다. 결국 엘리야는 죽기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19:4). 사람은 지극히 초라하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계집 종 앞에 선 사도 베드로의 모습도 지극히 초라하고 연약했고 이세벨 앞에선 엘리야의 모습도 지극히 초라하고 연약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모습이었습니다. 왜 이와 같은 부끄러운 모습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 계십니까?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죽기를 구하는 절망에 빠진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이상하신 분입니다. 히스기야가 항복할 때, 욥이 항복할 때, 엘리야가 절망에 빠져서 죽겠다고 탄식할 때, 바로 그때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물론 갈멜산 위에서도 불로 그리고 비로 응답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절망에 빠졌을 때는 하나님께서 오셔서 엘리야를 어루만져주셨습니다. 엘리야를 찾아오신 천사와 하나님의 사자는 성자 예수님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승리할 때는 불로 비로 응답하셨지만 지금은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친절하게 어루만져주셨습니다. 손으로 어루만져주셨습니다. 그리고 떡과 물을 먹여주셨습니다. 마치 디베랴 바닷가에 찾아오신 예수님의 친절하신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숫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왕상19:5-6).
우리가 승리할 때 찾아오시는 하나님도 감사하지만 우리가 병들었을 때 우리가 쓸어져서 죽어갈 때 찾아오셔서 우리들의 병든 몸과 죽어가는 몸을 어루만져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은 너무너무 값지고 너무너무 눈물겹고 너무너무 감동적인 체험입니다. 병들고 상처 입은 몸과 마음을 가지고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갔을 때 자기를 안아주시고 자기의 입을 맞춰주시는 아버지를 만난 체험은 탕자에게 있어서는 가장 값지고 가장 눈물겹고 가장 감동적인 체험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15:20). 지금 엘리야는 그와 같은 체험을 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정신 없이 하나님의 사자가 어루만져주고 먹여주는 떡과 물을 받아 먹고 잠시 후 그대로 잠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심령이 너무 절망하고 마비되어서 주님께서 오신 것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잠만 잘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또 오셔서 또 어루만져주고 또 떡과 물을 먹여주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 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왕상19:7,8).
저는 로뎀 나무 아래서의 엘리야의 모습은 새로 태어나는 엘리야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멜산 위에서의 엘리야의 모습은 지극히 높아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모습이었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서의 엘리야의 모습은 지극히 낮아진 겸손의 사람 엘리야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멜산 위에서의 엘리야의 모습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체험한 모습이었지만 로뎀 나무 아래서의 엘리야의 모습은 하나님의 어루만짐의 손을 체험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낮추시고 겸손하게 하셔서 하늘로 데려가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낮추시고 겸손하게 만드셔서 하늘로 데려가셨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갈멜산 위에서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로뎀 나무 아래서의 절망도 필요합니다. 갈멜산 위에서 승리하여 바알의 선지들을 죽이는 것도 필요하지만 로뎀 나무 아래서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도 필요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들은 우리들에게 필요한 말씀이고 우리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난 세 주 동안 비슷한 말씀들을 들었습니다. 히스기야가 항복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욥이 항복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엘리야가 절망했을 때 하나님의 친밀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절망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면 됩니다. 떡을 먹여주시고 물을 먹여주시면 됩니다. 요사이 피곤하고 지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사는 세상이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죽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바로 그런 때가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들을 어루만져 주시는 때입니다. 저는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 강변의 모든 성도들을 어루만져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살을 먹여주시고 피를 먹여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남은 삶이 주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달려가도 피곤치 않기를 바랍니다. 엘리야에게 주셨던 친밀한 은혜, 어루만져주시는 은혜를 저와 여러분들에게 모두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엘리야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에게 오셔서 우리들도 어루만져 주시옵소서!”
출처/김명혁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