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는 사람들  (요 15:5-8)


지난주간 노회 선교대회를 울진에서 가졌습니다.
목사님들과 장로님들 한 70여명이 참석하여 울진 원자력 발전소를 견학하는 프로그램도 가졌습니다.
지금껏 원자력 발전소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던 것들을 이번 기회를 통하여 좀 알게 되었다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만일 요즘 국제 유가가 70달러 이상인데도 과거처럼 절전하자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이유가 바로
원자력 발전 덕분이었음을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때, 외국 기술진들의 어깨 너머로 저들의 기술을 습득한 후 이제는 한국형 원자력
발전 기술을 수출하게 까지 되었으니 참으로 그동안 기술진의 노고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배울 수 있었던 교훈이 있었다면 무엇이었을까?
처음 원자력 발전소를 들여오면서 의견이 분분했다고 합니다.
<할 수 있다>는 사람과 <할 수 없다>는 사람으로 나뉘었다고 합니다.
만일 할 수 없다는 사람들의 의견대로 갔으면  결국 우리는 지금껏 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할 수 있다>는 것이 어쩌면 군대 용어인 것 같지만, 그것은 우리 신앙인의 확신이기도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사람들> 임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1. 이것은 무슨 일에든지 두 부류로 구분됩니다.  
어떤 경우에도‘할 수 있는 사람’과‘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 같은 환경에서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 같은 지식을 가지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 같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할 수 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말에‘할 수 없다’는 말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불가능’이란 뜻이 있습니다.
둘째,‘방관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셋째,‘포기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할 수 없는 사람들이란 ① 불가능한 사람, ② 방관하는 사람, ③ 또는 포기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우리 신앙의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남들이 다 할 수 없다고 하는 곳에서 가능을 보는 것이 신앙인이고, 남들이 다 포기하는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왜 우리에게 신앙생활이 필요하다고 합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면 포기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의 범위에서만 가능을 찾게 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범위를 넘어 설 수 없습니다.


왜 신앙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우리는 할 수 없는 사람들처럼
불안하고, 근심하고, 낙심하고, 좌절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똑 같은 환경에서 살면서도 우리는 항상 가능을 바라보고, 또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이 가르쳐 준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불가능을 가능케 만드는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동력은 에너지입니다.
동력이 있는 한 움직이게 됩니다.
그 동력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믿음에서 나오게 됩니다.


2.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나를 떠난다니 누구를 떠난다는 것입니까?
포도나무 비유에서 주님은 자신을 원줄기라고 했고, 우리들을 원 줄기에 붙어 있는 가지들이라고 했습니다.
가지가 원 줄기에 붙어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여기서 떠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① 관계를 끊는 것,
② 포기하는 것,
③ 잃어버린 것,
④ 무관심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관계를 끊거나, 예수님을 포기하거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잃어버리거나, 무관심한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떠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 방을 쓰면서도 마음과 관심이 없으면 함께 있으나 떠난 생활입니다.
마음과 관심이 떠난 증거로 나타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대화의 단절입니다.
마음과 마음의 대화가 단절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한 집에 사는 부부가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가 없다면 그 부부의 관계는 떠난 관계입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이런 관계가 되어 있다면 그것이 주님을 떠난 상태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교회의 직분을 가지고, 주일마다 예배는 참석해서도,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대화가 단절되었으면, 그것이 주님과 떠난 생활이란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원줄기에서 떠난 가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가지는 점점 더 말라져 결국 베어 버림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3-14) 고 했습니다.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함께 살면서도 대화가 단절된 부부 사이입니다.
성경에 주님은 우리의 신랑이요, 우리는 주의 신부들이라고 했습니다.
신랑 되신 주님과 마음을 이어가는 대화가 단절되었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요즘 이런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한 집에서 살지만, 누가 보더라도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부부 사이에 대화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주님과 대화 없이 산다는 것은 불행입니다.
제일 문제된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의 식구들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 예루살렘 성전에 갔다가 유월절을 지키고 내려오면서 예수님의 부모들이 예수를 잃어버린 채 내려왔습니다.
하룻길을 내려오는 동안 예수가 동행하는 줄만 알았습니다.
후에 당황해서 찾으니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물어물어 사흘 길을 다시 올라가면서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찾지 못하다가 결국 성전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도 이런 사람들 많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가장 예수님과 가까운 사람들이 도리어 예수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부모들은 성전에서 유월절에 있었던 행사들에 관하여 이야기 하느라 정신이 팔렸을지도 모릅니다.
교회의 행사들, 전도 회의 모임들, 구역의 친교 모임들, 이런 것에 더 정신이 팔려서 정작 동행해야 할 예수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가을이 되면 교회의 기관들이 단풍 구경에 나섭니다.
친교 모임이라고 하면서 운동회도 하고, 소풍도 나갑니다.
교회 행사들에 치중하면서 정작 예수님을 잃어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 모임과 행사들 속에 주님이 동행 하는 줄 알고 사람들 속에서 주님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은 성전에 계셨는데, 그 부모들은 사람들 속에서 주님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오늘도 교회들의 행사들 속에 주님은 함께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특히 세상의 온갖 것에 관심을 갖다 보니 예수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사에 관심을 가지고 살다보니 돈 버는 일에만 치심하고 예수님과는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다시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3.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를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절)
우리는 형식적으로는 주님 안에 거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일이면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술 담배도 안하고, 노름도 안하고, 세상 오락에도 빠져들지 않고, 교회 행사에 매번 다 참석하고 있으니, 나는 주님 안에 거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말씀을 정확하게 보면‘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 마음속에 거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리고‘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형식으로는 주님 안에 거한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참으로 내 마음에 주님의 말씀이 거한다고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내 마음속에 주님의 말씀이 거하여 나를 말씀이 이끌고, 그 말씀이 내 생각과 판단과 선택으로 영향을 끼쳐야 하겠는데, 일주일 동안 다 묻어두고 주님의 말씀과는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살다보니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고쳐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지금껏 되는 일이 없다고 느껴지는 분들은 오늘부터 이 관계를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이다’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복음 성가에도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의심 말라 하시고 물결 위 걸으라 하시네
할 수 있다 하신 주, 할 수 있다 하신 주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우리는 믿음의 원자력 발전소들을 이미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불이 점화만 되면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화되는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출처/김이봉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