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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 (마28:16-20)(왕하 2:19-22)
통계청에서 발표한 평균연령을 보면 여자들이 7년 5개월 더 많이 산답니다. 평균연령이 7년 5개월이라는 것은 어마어마한 차이입니다. 남자들은 71.9세를 살고 여자는 79.2세를 산다는 것입니다. 평균연령이 팔십이 가까웠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여든이라는 나이를 새로운 인생살이의 기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는 도전 가운데 가장 불가항력적이면서도 심각한 도전은 환경의 도전입니다. 사람들이 점점 오래 사는 것이 우리 사회의 환경에 막대한 지장과 변화를 주는 것입니다. 노인들이 이렇게 많아지는 추세는 국가환경의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경을 세 가지로 보는 것입니다.
세 가지 환경
첫째가 육체적 환경입니다. 경제가 안정되고 발전을 해야 됩니다. 우리가 경제 안정을 바라는 것은 육신적으로 편하게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조건입니다. 정치가 안정이 되는 것도 우리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고 교육이 안정되기를 바라는 것 모두가 육체적 조건에 해당됩니다.
두번째는 영혼의 환경입니다. 영적인 환경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말합니다. 아무리 경제나 정치가 안정되고 우리 사회의 복지시설이 잘 이루어져도 교회가 타락을 하고 우리의 영적 상태가 망가지면 위기가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의 환경을 항상 중요시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번째가 자연환경입니다. 소나기가 돌발적으로 오는데 기상청에서 예측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난화 현상이 점점 심각해지고 잠자던 화산이 폭발하고 태풍이 계절에 관계없이 오는 현상이 있고 상상도 못하는 홍수가 나고 지금 지구촌이 환경변화에 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자연환경이 안정이 되어야 하는데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 가지 면으로 육체적 환경, 영적인 환경, 자연적 환경이 연관이 있고 무시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또 사람의 평균수명이 늘어가고 우리가 이 땅에서 점점 더 장수하게 되는 것도 자연환경에 큰 몫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 힘으로 평균연령을 조정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는 현상이기 때문에 자연현상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만민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모든 말씀을 잘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 그리고 제자를 삼아라."고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토도 없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일입니다.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믿고 세례를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지상교회가 결코 잊어서는 안되고 계속 해야 되는 일입니다.
그런가 하면 열왕기하 2장 19절 이하에 나오는 본문은 철저히 이 땅위의 이야기입니다. 엘리사의 이야기로 여기 나오는 성은 여리고 성입니다. 그 여리고 성을 보고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우리 현실에 적용해보면 참 흥미있는 의미가 나옵니다. 여러분, 물이 나쁜 땅은 사람 살 곳이 못됩니다. 물이 나쁘면 땅도 나빠지는 것입니다. 물이 없는 땅은 묶은 땅입니다. 물 관리를 잘못하면 그 땅은 다 버립니다. 스위스의 융 플라워가 우리나라의 설악산만도 못합니다. 설악산이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우리 금강산은 미국의 그랜드 캐넌 못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금강산 같은 산들은 참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자연환경이 망가져 가는 일에 대해서 대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연이 너무 망가져 가는데 우리 스스로가 지금 보전을 해야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산천이 좋고 아무리 산세가 아름다운 자연을 갖고 있을지라도 물이 썩으면 수질이 나빠 소용이 없습니다. 그 땅은 다 버리는 것입니다. 그만큼 수질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28장 16절에 "열 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고 했습니다. 이 대목을 잘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갈릴리에 가서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경배를 드리면서도 오히려 의심하는 사람도 있더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의심합니까? 이 분이 정말 죽었다가 살아나신 메시야이신가 의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이 좋지 못하니
저는 신약과 구약을 연결해보면서 이렇게 적용을 해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경배하는 예배환경보다 더 감동적인 환경이 있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예배하는데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예배를 드리는 자리에서도 마음으로 의심하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해석해야 됩니까? 그 사람은 구약에 나오는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를 만나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그 의심하는 그 사람의 마음이 지금 물이 나쁜 땅과 같다는 것입니다. 물이 나쁜 상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의심을 하면 그 사람의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터가 아름다워도 물이 좋지 못하면 그 터는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3절에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진리만 들으면 변화가 옵니다. 진리를 듣는 귀가 열리면 하나님의 진리를 듣게 되고 그 진리를 듣는 자는 변화를 받습니다.
여러분, 어린 아이들은 잘 가르치고 잘 보여주면 변하기 마련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육체도 자라고 생각도 변합니다. 아이들은 도화지와 같습니다. 보는대로 변합니다. 여러분, 청년들이 말 안듣는 것 같아도 청년들이 자기들 생각에 맞는 '이거다'라는 어떤 신념을 가지게 되면 그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청년입니다. 청년도 변합니다. 우리가 흔히 세속적으로 이런 말을 씁니다. '내가 사람을 꽉 잡고 있다'는 말은 어린 학생들이나 청년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어른의 말 한마디에 복종을 합니다. 나쁜 것도 따라 합니다. 청년들은 어떤 이데올로기나 신념에 빠지면 거기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장년 되시는 분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청년들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서로를 변화시키려고 강압적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도 성경공부를 가르쳐 보지만 어른들은 성경공부를 통해서 변하는 게 아닙니다. 어른들은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안 변합니다. 그것을 전제를 하고 성경공부를 합니다. 그래서 어른들끼리 혹은 부부관계 혹은 직장 상관과 부하 관계든지 어떤 경우에도 상대방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상대방을 꽉 잡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어른들은 잡히는 척하지 안 잡힙니다. '나는 누구를 꽉 잡고 있다'는 그 자체가 벌써 속고 있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두고 보시기 바랍니다.
생각을 바꾸자
상담사례를 하나 소개하면 삼십 중반의 부부인데 신앙문제로 그 가정에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남편 쪽에서 끼리끼리 모여서 공부하는데 가서는 좀 이상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오래 다니던 교회는 순종 안하고 거기만 순종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헌금도 그쪽에 하고 부인이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말리는 그 가운데 가정불화가 되고만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점점 발전을 해서 단순한 신앙문제로 시작된 싸움이 전면전으로 발전이 됐습니다. 그 분이 "목사님, 나는 그 이에게 참 기대를 많이 했고 그렇게 내 기대에 응해줄 남자로 의지하고 살았는데 이렇게 나를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태산처럼 믿은 남편이 이렇게 영적으로 망가지고 이제는 가정도 풍비박산이 나버려 심각한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재물도 제법 있었는데 부인 모르게 이단단체에 돈도 많이 빼돌렸고 억울해서 도저히 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무슨 위로를 주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말을 한 마디 해드렸습니다. "여성도님, 생각을 조금 바꿔 보십시오. 남편을 그렇게 기대하고 이 남자가 내 인생에 어떤 큰 기대를 만족시켜줄 대상으로 생각하고 의지했다는 것은 나쁜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좀 생각을 바꿔야 됩니다. 사실 처음부터 그 남자는 당신이 기도해주고 붙잡아주고 용서해줘야 될 남자이지 당신 인생을 만족시켜줄 대상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당신은 그 남자를 잘못 봤습니다. 지금부터 그 생각을 버리세요. 이제는 남편을 위해서 기도할 대상으로, 내가 용서해줘야 될 대상으로 불쌍히 여기십시오. 억울한 마음을 푸십시오."라고 그 분의 생각을 제가 좀 흔들어 주기 위해서 그런 논리로 접근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대감이 무너지면 원망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합니다. 왜 기대합니까? 기대할 대상이 안되는데 그걸 모르고 산 것이 잘못입니다. 사람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기도해줄 대상밖에 안됩니다. 내가 붙잡아줘야 될 대상이지 그가 내 인생의 행복을 보장해줄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새 그릇에 소금을 담으라
우리는 영적인 문제와 육신적인 문제, 환경적인 문제가 함께 얽혀 있는 것을 잘 이해해야 됩니다. 선교는 복음만 전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환경을 고치는 것도 연관됩니다. 환경을 고친다는 것이 성경에 있는 아이디어입니다. 엘리사가 이 성에 물이 좋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새 그릇에다 소금을 가져오라고 해서 소금을 뿌려 그 썩은 물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열왕기하 2장에 나옵니다. 선지자가 소금으로 여리고의 그 나쁜 물을 고쳐준 사건이 환경운동 사역이 아닙니다. 물을 고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도 고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엘리사가 물을 고치는 기적을 통해서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그들의 영혼이 고침을 받고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하나님이 엘리사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새 그릇에 소금을 가지고 와서 쳐야 됩니다. 지금 우리 마음에 물이 썩은 것 같은 생각들을 소금을 쳐서 깨끗하게 해야 됩니다. 이 소금이 뭡니까? 복음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른들은 어린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처럼 그렇게 감정과 지성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어른은 아무리 변하려 해도 내 감정이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감정을 자꾸 변화시키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모습 그대로 가되 다만 한 가지 길이 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젊은이든 장년이든 노인이든 모든 인생이 다 해당되는 것인데 그것은 귀가 열려서 진리가 내 안에 들어옴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사자가 담판하여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가 교인을 변화시키려고 한다고 교인이 변합니까? 안 그렇습니다. 교인들이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서 진리가 그 교인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하여 귀를 닫아버리고 있는 현대인들이 귀가 열려서 진리가 들려지면 그 사람은 진리 안에서 자유합니다. 변화를 받습니다. 여러분이 사람의 힘과 재주로 변화시키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사업을 하다가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그 남편의 슬럼프는 아무리 위로해줘도 안됩니다. 그 남자를 치유하는 길은 사업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될 때 치유됩니다. 사업은 지금 계속 내리막길인데 옆에서 아무리 위로해주고 격려해줘도 그것은 부수적인 것 밖에 안됩니다. 환자도 그렇습니다. 좋은 말로 위로하고 기도해 주는 것도 필요합니다만 정말 그 환자가 슬럼프에서 헤어나올 수 있으려면 몸이 좋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건강상태가 호전될 때 그 사람은 저절로 회복이 됩니다.
사람들은 먹고 노는 것으로는 회복이 안됩니다. 남자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 어떤 소득이 있고 재미가 있을 때 회복이 됩니다. 건전한 남자가 됩니다. 남편이 자기가 하는 일에 발전이 있을 때에 그 남자는 모든 면에서 건전한 방향으로 발전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고 있는 그 일이 지금 잘 안되면 아무리 맛난 밥을 먹어도 그 슬럼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야구선수들이 슬럼프가 오면 심각하답니다. 어떤 이는 슬럼프가 오면 자살충동이 일어난답니다. 옆에 친구들은 펄펄 날고 있는데 자기는 안됩니다. 감독이 위로해주고 동료들이 위로해주고 가족이 위로를 하고 아무리 위로를 해줘도 슬럼프에 빠진 선수를 구할 길이 없답니다. 그 선수가 회복되는 길은 오직 운동장에서 성적이 조금 올라가는 것입니다. 타율이 올라가고 성적이 올라가는 것이 느껴질 때 슬럼프가 치료되는 것입니다. 운동장에서 성적이 올라가는 감각을 느낄 때 슬럼프가 치유되지 바깥에서 아무리 위로해줘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도들이 예수를 잘 믿자는 이런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 환경에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좋아져 가는 모습이 느껴져야 됩니다. 예수 믿고 감사하는 것이 느껴져야 합니다. '예수 믿고 사는 것이 참 행복이구나'라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삶 속에서 환경개선이 따라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릇이 문제이다
본문에 소금을 새 그릇에 담아오라고 했습니다. 새 그릇이라 하면 헌 그릇이 또 있습니다. 헌 그릇에 담은 소금, 엘리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새 그릇에 담아 오라고 했습니다.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아야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엘리사의 이야기는 같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방법 문제가 아닙니다. 전부 새 방법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가르쳐주는 아이디어를 빌려서 보니까 지금은 방법 문제가 아니구나, 소금 문제가 아니라 소금을 담는 그릇이 문제라고 느꼈습니다.
여러분, 그릇이 중요한 것을 성경에 말하고 있습니다.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오라."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하느니라." 예수님의 강조는 새 포도주가 아닙니다. 새 포도주는 우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새 포도주는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에 포도주가 불량 포도주가 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새 포도주를 담는 우리가 준비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새 그릇 문제입니다.
요즘 텔레비전에서 토론을 종종 보는데 그 사람들은 그 분야에 다 전공 전문자들인데 근간의 토론을 들어보면서 참 큰일났다 싶은 것은 그렇게 열변을 토하고 상대방을 공격하고 논리로 이기는 게 다 좋은데 그럼 내 그릇은 깨끗하냐는 것입니다. 모두 지금 헌 그릇에 소금을 담아서 자기 그릇은 감춰놓고 소금만 가지고 빛깔이 어떻다느니 맛이 어떻다느니 합니다.
여러분, 지금 그릇이 문제입니다. 정치 환경에 그릇이 문제입니다. 지역성이라는 그릇을 누가 개선할 것인가? 그것이 안 변하면 다른 해결이 안나옵니다. 인물이 어디 있습니까? 어느 지역에 누구 깃발에 따라가느냐에 따라서 국회의원이 되고 말고 합니다. 전부 그릇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그릇이 이 시대에 맞는 새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새 그릇이라는 개념이 살아나야 합니다. 망가지고 금이 간 그릇으로 거기에 무엇을 담은들 무슨 새로운 게 있느냐는 말입니다.
텔레비전에서 지도자들이 토론하는 게 전부 '몽둥이 가지고 청소하자'는 식입니다. 청소는 빗자루 가지고 해야 됩니다. 그런데 청소도 몽둥이 가지고 하자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때려 치는 몽둥입니다. 그런데 이게 모두 면역이 되어 몽둥이로 맞아도 깨지지도 않습니다. 회의를 해도 몽둥이질하는 회의가 많습니다.
여러분의 인격을 새 그릇으로 관리를 하셔야 됩니다. 그릇 문제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은사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차이가 납니까? 그 믿음을 담고있는 내 인격의 그릇이 문제입니다.
칼집이 있는 칼
제가 사단장 집에 갈 일이 있어 갔는데 사단장 되시는 장군께서 칼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때 그 사단장님이 자신의 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그 칼이 그렇게도 성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도 위압적인걸 처음 느꼈습니다. 그런데 칼도 좋은 칼이지만 그날 제가 유심히 본 것은 칼집이 보통 칼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칼을 꽂는 칼집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칼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칼집을 준비하고 칼이 있어야 됩니다. 만약에 칼집이 준비되지 않고 칼만 있다고 가정을 해보십시오. 무서운 칼입니다. 살벌한 칼입니다. 칼은 아무리 날쌔고 아무리 무서운 칼이라도 든든한 칼집에 보관이 될 때에는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칼이 아닙니다. 칼집이 준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에 칼집 이야기는 안나오지만 새 그릇 이야기가 칼집 이야기입니다.
칼은 실력을 말합니다. 우리의 건강, 우리가 갖고 있는 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전부 칼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내가 갖고 있는 실력이 바로 보존되고 관리되고 적재적소에 쓰여지려면 칼집이 준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칼집이 준비되지 않은 칼이 너무 많이 우리 사회를 휘젓고 다니고 있습니다. 칼집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의 손에 칼이 잡히면 큰일납니다. 칼집이 없는 칼이 골목마다 지금 번쩍이고 있습니다.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하나님 고치신 것입니다. "가서 제자 삼아라. 세례를 주라.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나님이 명하십니다. 이 일에 수종을 들려면 우리가 새 그릇을 가져야 됩니다. 복음은 불순한 복음이 없습니다. 복음을 담는 그릇이 불결하면 불결한 복음이 됩니다. 그릇의 환경에 따라서 복음이 변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선교는 인간의 육체적 환경과 영적인 환경과 자연 환경까지도 변화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풍자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이 오후예배를 마치고 볼일이 있어서 자동차를 타고 나갔는데 운전을 하면서 조금 다른 생각을 하다가 신호가 바뀌는 것을 모르고 깜박하고는 그만 지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그 횡단보도에는 예배 마치고 집에 가던 교인들이 많이 지나가게 된 것입니다. 목사님이 지금 신호위반을 하면서 거기에 어느 집사님이 서 있고 어느 교인이 서 있다는 것을 지나가면서 느꼈단 말입니다. '교인들이 이 광경을 다 봤구나'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집사님으로부터 '목사님, 식사를 한번 함께 합시다'라고 전화가 왔습니다. 공교롭게 그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집사님인 것입니다. '아마 그날 거기서 내 신호위반 하는 것을 본 여러 사람이 함께 나올 것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내가 오늘 가면 아무래도 청문회를 당할 것이다' 생각하고는 목에 거는 팻말을 두 개 준비했습니다. 목사님이 식당에 들어서는데 교인들이 몇 사람 와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나는 죄인으로소이다'라는 팻말을 목에 걸었습니다. 집사님들이 요절복통을 합니다. "목사님, 그날 우리도 목사님이 지나가는 것 봤습니다."하고는 한바탕 웃고 말았는데 이 목사님이 뒤를 돌면서 팻말을 또 하나 보이는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것이었습니다.
맺는 말
여러분, 우리도 신호등을 바로 지켜야 됩니다. 그래야 세상이 복음화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환경을 변화시키는데도 선교적 사명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나 때문에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스트레스를 준다면 은혜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조건, 영적인 조건, 우리가 교회를 아름답게 복음으로 장식하는 교회의 건설과 교회 바깥의 자연환경의 건설과 육신을 위한 사회적인 모든 일에 우리 성도는 함께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 영역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로 믿으려면 통장, 반장도 충실히 할 줄 알아야 됩니다. 교회에서는 내가 집사로서 충성해야 합니다. 교회 직분도 청지기직이지만 세상 속에서 맡은 통장, 반장도 청지기직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드러내야 됩니다. 그곳에서 세상을 변화시켜 가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법도 더 잘 지켜야 하고 환경 속에서 소금의 역할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출처/이용호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