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길  (눅 16:19-25)

이 세상에는 두 길이 있습니다. 넓은 길이 있고 좁은 길이 있습니다. 가기가 편한 길이 있고 가기가 어려운 길이 있습니다. 밝은 길이 있고 어두운 길이 있습니다. 또 의의 길이 있고 불의의 길이 있고 생명으로 가는 길이 있고 멸망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 없이 가는 길이 있고 생각해야 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경건한 길이 있고 쾌락의 길이 있고 높은 길이 있고 낮은 길이 있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왜 고민이 있고 갈등이 있는가 하면 우리 앞에 이렇게 길이 두 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데 길이 하나 밖에 없다면 고민도 없고 갈등도 없을 것입니다. 길과 방법이 하나밖에 없는데 무슨 고민이 있고 갈등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언제나 이 두 길이 있어서 고민이 주어지고 갈등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려는데 두 직장이 나타났습니다. 한 직장은 대기업으로 취직을 하기만 하면 미래나 현재나 장래가 보장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려해서 좋습니다. 그런데 일이 너무 많아서 주일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매력은 있는데 결정적으로 신앙생활 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들이 비 신앙인이라면 그런 경우 하등의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또 한 직장은 중소기업인데 그곳으로 결정하면 주일생활은 마음껏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직장의 화려함이 별로 없습니다. 초라합니다. 그래서 결정하려고 하니까 자존심이 상합니다. 다른 친구들은 주저하지 않고 모두 대기업으로 가는데 나는 고민을 해야 합니다. 그 두 자리를 놓고 선택해야 한다면 여러분은 어디를 선택하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아들이 그런 고민을 한다면 어디를 선택하라고 권고하시겠습니까. 사람이 살아가면서 때로 경험해야 하는 고민과 갈등이 그렇게 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또 한 예가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괜찮은 두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한 남자는 우선 참 잘 생겼습니다. 매력적입니다. 마음에 끌립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가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환경이 그리 좋지 않은 편입니다. 그런데 또 한 남자는 생긴 것은 별로 입니다. 그런데 환경이 아주 좋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때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딸에게 누구를 택하라고 권고하겠습니까. 여기서 고민이 따르고 갈등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은 순전히 나 자신이 해결하고 결단해야 할 문제입니다. 책임도 내가져야 하고 손해도 내가 보아야 하고 성공도 내가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이 많고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 두 길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 두 길을 제시하고 보게 하고 알게 해서 스스로 길을 선택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두 길을 우리는 잘 선택하여야 합니다.  

가인과 아벨이 걸어간 길

아담에게 많은 아들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가인과 아벨 둘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중심으로 살아간 사람의 대표로 가인을 소개하였고 또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간 사람의 대표로 아벨을 소개한 것입니다. 이 두 아들이 서로 상반된 길을 걸어갑니다. 가인은 인간중심적으로 살아간 사람의 대표입니다. 가인은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갔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면 내 삶에 하나님에 대한 부분이 그만큼 축소됩니다. 가인의 인생을 보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이 결국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그 당시는 좋습니다, 화려하기도 합니다. 재미도 있고 편함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종말은 비극입니다. 우리는 가인의 인생을 보면서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아벨은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간 사람의 결과를 보여 주시려고 아벨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려면 우선 인내의 삶이 필요합니다. 경건과 절제와 좁은 길을 가야하는 수고가 따릅니다. 그래서 아벨의 삶의 모습은 인내와 경건과 수고와 아픔과 피 흘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계속해서 영적인 복을 받습니다. 그 두 사람의 삶의 형태를 보여주고 성경은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그 두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조합니다. 그 두 길 중 한 길을 선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몫입니다. 결단도 자신이 해야 하고 결과도 자신이 져야 합니다. 이것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입니다.  

룻과 롯이 걸어간 길


이 두 사람이 걸어간 길도 아주 대조적입니다. 성경은 이 두 사람이 걸어간 길을 보여주면서 그 두 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룻이 걸어간 길입니다. 룻은 이방 여인입니다. 룻은 오늘 며느리들과 가치관이 다르고 생각이 너무 다른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룻은 큰 기대를 가지고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일찍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아무 소망 없는 시어머니를 떠맡았습니다. 그리고 룻은 그 시어머니를 위해서 자신의 모습을 모두 내어 버립니다. 홀로된 시어머니를 위해서 자신의 고향도 버리고 민족도 버리고 종교도 버리고 자신의 행복한 인생도 모두 포기하고 과감하게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합니다. 그리고 그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서 시어머니의 나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는 동안 룻은 모진 고난과 역정과 가난과 숫한 문제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룻은 그 길을 마다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굳게 걸어갑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룻의 인생의 길에는 많은 고뇌와 인내와 배고픔과 초라함이 뒤 따릅니다. 그렇지만 룻의 삶에는 화려함이나 풍성함이나 편안함이 없는 대신 하나님이 깊이 자리 잡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간 룻의 말년에 마침내 심은 자가 기쁨으로 거두듯이 엄청난 복을 받습니다. 참고 인내하고 하나님의 길을 걸어간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성경이 자세하게 증언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름이 비슷한 롯이라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이 롯은 상대적으로 현실의 삶에 목적을 두고 살아갔던 사람의 모형입니다. 롯은 물질과 번영과 화려함과 편리함을 추구했습니다. 그래서 재물도 화려함도 도시에서의 삶도 재미도 보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 롯은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람이 도시의 삶, 화려함 추구, 편안함을 동경하게 되면 그만큼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관심에서 멀어지고 마음에서 멀어지고 생활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롯은 자신의 현재만 생각하다가 인생의 벼랑길로 떨어지고 맙니다. 마침내 롯이 살던 소돔성이 심판을 받을 때 자멸하게 됩니다.

그때 롯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겼던 물질도, 그동안 땀 흘려 이룩해 놓은 터전도, 가족들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알몸으로 그 도시를 탈출해 옵니다. 그때 탈출해 오는 과정을 통해서 롯은 그동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눈을 뜨고 깨닫게 되었을 때는 이미 롯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후였습니다. 여기서 성경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경고합니다. “너희는 이 두 길 중에 어떤 길을 가려고 하는가, 이 두길 중에서 한 길을 선택하라”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이렇게 메시지로 말씀하십니다.  


부자와 나사로가 걸어간 길


이 두 사람도 대조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한사람은 일생을 풍부하게, 부자로, 날마다 잔치를 베풀며 배불리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생각과 삶에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전무했습니다.  있다면 오직 오늘과 현실뿐입니다. 내일을 위한 준비나 개념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자는 죽어서 마침내 지옥에 갑니다.

그런데 또 한사람은 거지 나사로입니다. 이 사람은 언제나 배고픔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몸에 병까지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의 일생은 참으로 초라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는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동경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마침내 나사로는 그가 그토록 소망했던 것처럼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이 두 사람이 죽어서 다시 만납니다. 부자는 지옥에서 천국에 앉아있는 나사로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 부자는 참으로 비참하고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옥에 있던 부자가 천국에 있는 나사로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내 집에 있는 형제들에게 이 사실을 전해 달라, 가서 제발 내 친족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지옥에 가지 말고 천국에 가도록 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얼마나 심각한 요구입니까. 그때 곁에 있던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나사로가 가지 않아도 세상에는 목사도 있고 전도자도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그랬더니 부자가 더 심각하게 애원합니다. “내 자식들이 그 사람들의 말은 듣지 않을 것이니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나 직접 가서 말하면 내 자식들이 믿을 것입니다, 제발 나사로를 보내주십시오.” 지금도 지옥에서 그런 심정으로 안타까워하는 먼저 간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모습을 성경을 통해서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죄를 지으면 금방 벼락도 내렸고 땅이 갈라지기도 하였고 하늘에서 불이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일이 없습니다. 오늘은 죄를 지어도 아무 영향이 없습니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맑고 따뜻하게 태양이 빛납니다. 여러분이 오늘 죄를 지었다고 하나님이 금방 벼락을 내리시겠습니까. 내가 오늘 주일 한번 빠졌다고 하나님이 오늘 밤 꿈에 나타나 눈을 부릅뜨고 야단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지금도 여전히 벼락이 내리고 기적일 일어나고 하나님의 무서운 책망도 있습니다. 어디에 있느냐 하면 이 성경 안에 있습니다. 옛날에는 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일일이 보여 주시려고 기적을 나타내셨지만 오늘은 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노여움과 탄식과 경고와 메시지를 보내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언제나 두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알고 살아야 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헌신이 필요하고 수고가 필요한 길입니다. 거기에는 무서운 절제가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하고 경건이 필요한 길입니다. 그래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길을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길을 좁은 길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너희는 좁은 길을 가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전도자가 되기 전에 얼마나 화려했습니까. 그는 좋은 가문과 혈통과 학문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다 누구도 비교될 수 없는 열정이 있는 바리새인 사회에서 알아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너는 나의 종이 되라”는 주문을 받게 됩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그동안 소중하게 쌓아올린 세속적인 기반을 모두 버려야 하고 포기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고 배고프고 초라하고 조소받는 전도자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니 쉽게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습니까. 그때 바울이 얼마나 고민을 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그 길로 아라비아 사막으로 들어가 3년 동안 칩거하면서 고민을 합니다. 예수를 따르자니 그동안 이루어놓은 터전을 다 포기해야 하고 거부하자니 밀려오는 영적 압력이 너무나 거세었습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앞에 주어진 두 길 사이에서 고민합니다, 갈등합니다.

그렇게 3년 동안 고민한 후에 나오면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하였노라, 나는 그동안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을 모두 미련 없이 다 버리노라, 이제부터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 그리고 그는 그때부터 초연하게 흔들리지 않고 전도자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가 걸어갔던 그 길이 말하자면 좁은 길입니다. 수고의 길, 인내의 길, 경건의 길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민이 깊고 컷던만큼 결단 후 바울이 걸어간 길에는 지체함이나 머뭇거림이 없었습니다. 결코 쉽게 내릴 수 없는 결단의 길입니다.

사람들은 이 길 가기를 꺼려합니다. 그 길이 좁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모두 넓은 길을 좋아합니다. 그 길은 신앙과 상관없는 넓고 걸어가기 쉬운 길입니다. 또 그 길은 아주 편하고 즐겁고 재미도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선호하고 그 길 가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 길이 가인이 걸어간 길입니다. 롯이 걸어간 길이고 부자가 걸어간 길입니다. 그 길은 편하기는 한데 그 길은 결국은 망하는 길이고 하나님을 떠난 길입니다.

오늘은 사람들이 미래를 위해서 수고하고 인내하고 땀을 흘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모두 편하고 즐거운 길을 선호합니다. 오늘은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모두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어느 교회학교 교사가 아이들에게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를 하다가 질문을 했습니다. “너희들은 살아가는 동안 거지로 살고 죽어서는 천국에 간 거지 나사로가 될래 아니면 살아있는 동안 잘 살고 죽어서는 지옥에 간 부자가 될래?” 그랬더니 아이들이 대답하기를 “살아서는 부자가 되고 죽어서는 나사로가 되고 싶어요.”하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아이들이 이렇게 영악합니다.

어느 처녀에게 애인 둘이 생겼습니다. 한 남자는 가난한 집 아들인데 참 잘 생겼습니다, 그런데 또 한 청년은 부잣집 아들인데 좀 못생겼습니다. 아버지가 “두 청년 중 누구한테 시집가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딸이 대답하기를 “낮에는 부잣집 아들과 살고 밤에는 가난한 집 아들과 살고 싶어요.”하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동가숙 서가식이라는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지난 추석 때 아들이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어머니, 추석에 내려가야 하는데 주일이라 내려갈 수가 없네요.” 그 말에 어머니는 매우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그러면 할 수 없지”하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말했습니다. “어머니, 그래서 용돈 좀 보내드렸어요.” 그랬더니 어머니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활짝 펴지면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됐지 바쁜데 무얼 하러 와”하고 대답하기더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언제나 이 두 길이 존재합니다. 가인과 아벨이 걸어간 길, 롯과 룻이 걸어간 길, 부자와 나사로가 걸어간 길입니다. 오늘 사람들도 대부분 이 두길 중에서 한길을 선택해서 걸어가야 합니다. 어느 길을 걸어가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나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길을 걸어가도 좋지만 그 길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이 심은 대로 그대로, 행한 그대로, 자신이 선택한 그대로 거두고 갚음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성경이 주시는 메시지이고 경고입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