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24
미완성의 이야기 (행 29장)
오늘 성경 말씀 사도행전 29장 1절부터 제가 읽겠습니다. 사도행전 29장. 지금 성경을 찾으시는 분들은 상당히 수상하신 분들입니다. 이제 사도행전을 여태까지 강해해 왔기 때문에, 아마 29장이 없는걸 웬만한 분들 다 아실 겁니다.
제가 오늘 사도행전 29장을 읽자고 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9장을 읽으려고 하면, 오늘 하루종일 읽어도 다 읽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사도행전 29장1절이라고 본문을 정한 이유는, 성경에서 유일하게 사도행전만이 미완성의 책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모든 책이 완성된 책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여전히 미완성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 '사도행전'이라고 하는 제목의 부적절성을 많이 주장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이라고 하면 문자적으로 해석할 때,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나 사실 여러분, 우리가 사도행전을 공부해 왔습니다마는, 이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의 행적이라고는 두 사람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요. 누굽니까? 베드로와 바울. 그것도 12사도의 얘기로 국한시킨다고 하면, 바울은 12사도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한사람만의 행적을 기록했는데 어떻게 이것을 사도행전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 제목을 바꾸기 위한 시도가 여러 차례 기독교 역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무 이유 없이 사도행전이라는 이름을 지었을까요? 아무 근거도 없이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오늘 이 '사도'라고 하는 말을 우리가 문자적인 의미로만 해석하지 아니한다면, 이 사도행전이라고 명명한 의미와 이 사도행전이 미완성된 것임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도'라고 하는 낱말은 "아폴로토스"라고 하는 헬라어인데 직역하면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대입해서, 우리가 적용해서 번역한다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행적'입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이에요.
여러분, 누가 보내심을 받았습니까? 베드로와 바울만 보냄을 받았나요? 아닙니다. 오늘 우리 모두 하나님을 향해, 대상을 향해, 우리 모두가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고 또한 계속되어져야 합니다. 아마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도행전 28장을 미완성으로 끝내신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사도행전 29장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마는, 이 사도행전 29장은 누가 기록해야 합니까? 바로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당신이, 오늘 저와 여러분이 29장을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간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곰곰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만일 지금까지의 내 삶을 간단히 요약해서, 사도행전 28장 이후에다가 29장이라고 제목을 정하고 갖다 붙인다면, 사도행전은 도대체 어떤 모습의 책이 될까? 저는 굉장히 오랫동안 이 생각을 했어요. 과연 28장까지의 이야기와 29장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 것인가? 이것을 읽는 사람마다 "굉장히 글이 멋있구나! 28장과 특히 29장의 얘기는 연결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멋있다!" 과연 이렇게 칭찬을 할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사도행전 나의 기록 29장을 읽는 사람들이 "이 책이 와 이러노? 28장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29장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이게 뭔가 잘못된 게 아니냐? 도대체 28장과 29장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지 않느냐?" 혹시 사람들의 반응이 이렇지는 않을까? 저는 지난 한 주간 내내 이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저의 얘기뿐만 아니라, 만약에 당신의 얘기로 오늘 사도행전 29장에 붙여 넣는다고 한다면 그것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겠습니까? 아니면, 28장과 29장 사이에는 도저히 넘지 못할 장벽과 담이 가로 막고있다고 한탄하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이것이 성령님께서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미완성으로 남겨두신 이유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각기 사도행전 29장을 써야 할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쓰기 싫다고 안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적지 않는다고 해도 사도행전 29장의 내용을 여러분의 삶을 토대로 적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행적, 기록!
도대체 우리가 써야할 사도행전 29장의 이야기는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어떤 내용을 여기에다가 덧붙여 써야 한단 말입니까? 여러분, 글이라고 하는 것의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성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론과 본론과 결론 사이에 어떤 흐름이 있어야 돼요. 서론이 다르고, 결론이 전혀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은 글이 아닙니다. 좋은 글은 더더욱 아니에요. 서론에서는 어떤 사람이 앞에서 동쪽 얘기를 실컷 하다가 결론에 가서는 '서쪽' 얘기로 결론을 맺는다고 하면 그것은 글이 아니에요.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도행전 1장부터 28장을 잘 연구해 보면 우리가 어떻게 29장을 써야 할 것인가, 내 인생을 통해서 기록해야 할 사도행전 29장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저는 사도행전에 이 60번째, 마지막 강해의 날, 사도행전 1장부터 28장까지의 내용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써야할 마지막 장 29장의 얘기가 어떠한 내용이어야 하는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29장에 어떤 얘기를 써야 합니까? 어떤 인생의 삶을 여기에 기록해야 우리의 후손들이 이것을 바라보며 과연, 우리의 아버지는, 우리의 할아버지는 훌륭한 사도와 같은 인생을 살았다고, 아니 하나님께서 이 사도행전 29장의 우리의 기록을 보시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할 것인가? 오늘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몇 가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1. 성령님의 이야기를 기록하라.
먼저 우리가 사도행전 29장에 기록해야 할 얘기는 성령님의 이야기입니다. 성령님의 이야기를 기록하라. 여러분 사도행전은 이 땅에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자세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이 땅에 어떻게 세워졌어요? 교회가 이제 뭔지는 다 알죠?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을 교회로 알고 있어요. 이것은 큰 잘못이에요. '예배당'이라는 말을 왜 없앴는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어요. '영안 예배당'입니다. 여기는 영안 예배실이예요. 교회는 뭡니까? 믿는 자의 무리예요. 저와 여러분, 사람이 교회입니다.
이 땅에 교회가 언제부터 있어왔는가? 과거 에덴동산에서부터 어떤 사람은 있어왔다고 주장하지마는, 그것은 교회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스데반이 광야 설교를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광야에도 교회가 있었습니다. 무슨 얘깁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떠돌아다닐 때 교회가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나오는 교회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교회와는 다른 의미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일 수 있는데 사람들의 모임, 데모를 하는 사람도 옛날에는 교회라고 불렀어요.
그러나 우리가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정의해 주신, 이 교회의 정의를 얘기할 때 교회가 언제 세워졌는가? 그것은 바로 사도행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교회는 누구에 의해서 세워졌습니까? 다름 아닌 성령님에 의해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세워진 모습을 우리는 이미 공부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120문도가 모여 기도합니다. 여러분, 그 시대로 돌아가 보세요. 이 120명의 사람들이 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실패자였고 겁쟁이들이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입으로는 큰소리를 쳤습니다. "주여! 내가 죽는데까지라도 같이 하겠습니다." 라고 큰소리 쳤지마는, 막상 로마 군병들이 와서 예수님을 체포할 때, 그들은 다 도망가버렸어요. 자기 목숨하나 부지하기 바빴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너무나 실망해서 자기 고향으로 또 다 돌아갔어요.
예수님께서 "너희는 만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라!" 그렇게 명령하셨지마는, 이 사람들은 그 능력을 한마디도, 조금도 수행할 수 없었던 나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 실패자들, 이 연약한 자들을 새롭게 하십니다. 무엇으로 새롭게 하셨냐구요? 성령님으로요. 여러분 2장의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굉장히 겁쟁이들이었어요. 그런데 그중에 한두 사람이 "예수님이 우리보고 약속하지 않았니? 아!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니?" 그 말씀을 기억하고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웬일입니까? 거기에 강하고 급한 바람같은 것이 임했어요. 바람입니까? 아뇨. 바람 같은 것! 누가같이 정확한 사람도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었어요.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바람 같은 것이 "쏴악" 나오더란 말이에요. 뭔가 바람이 부는 것 같기는 한데 '불의 혀' 같은 것이! 여러분, 불에도 혓바닥이 있어요. 아시죠? 불꽃을 얘기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그날 불이 임했다고 해서 성령 찬송만 나오면 "불이야!" 하고 뜨겁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여러분. 전혀 아니에요.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임했어요. 그러니까 바람 같은 어떤 형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형체가 "솨악" 임하더니 불의 혀같이 쭉쭉쭉 갈라지면서 각 사람에게 임했어요.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거기 모인 사람들은 다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본 사람이었고, 어떤 사람은 미국 사람이었고, 어떤 사람은 러시아 사람, 어떤 사람은 중국 사람,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그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임하고 난 다음에 놀라운 일이 생겼어요. 내가 지금 한국말로 하는데 저기 미국 사람이 한국말을 알아듣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하는 그런 정도의 방언이 아니에요. 러시아 사람이 동시에 알아듣는 거예요. 통역관도 없는데 서로 얘기를 하면 다 알아듣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놀랐어요! 도대체 이런 일이 어찌 있을 수 있는가? 그 날 성령님이 이 땅에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셨어요. 어느 정도로 변화시켜주셨습니까? 겁쟁이가 담대한 사람이 되었어요. 실패자들이 성공자들이 되었어요. 낙심했고 좌절했던 사람들 마음속에 새로운 기쁨과 담대함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그들은 너무 기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굴빛이 달라졌어요. 그날 모였던 120명은 새로운 공동체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름은 같았습니다. 얼굴 모습은 같았습니다. 사람은 똑같은 사람이로되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교회의 모습이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결코 수양기관이 아닙니다. 교육기관도 아니에요. 구제 사업소도 아니고, 도덕을 가르치는 곳도 아니요, 의술을 행하는 곳은 더더욱 아니며 병 고치는 곳도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교회란 무엇인가? '성령님의 지배를 받아 변화된 사람들이 모인 곳'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교회는 바로 성령님에 의해 시작되었고 성령님에 의해 유지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문제점이에요. 이것을 알지 못하는 거예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압니다. 예수님의 분부도 알아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들을 제자로 삼아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 위대한 분부도 알고 위대한 계명도 압니다. 그런데 그 능력을 어떻게 수행하는지 아세요?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해요. 수양과 교육을 통해 그 계명을 이루려고 해요. 오늘날 교회 안에 하나님의 뜻을 내 힘으로 이루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들은 그래서 열심히 씁니다. 헌신합니다.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철야 기도,새벽기도 다 합니다. 헌금도 많이 바칩니다. 봉사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예요? 번번이 실패해요. 5년, 10년을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따라다녔는데 어느 날 보니 마음에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허전한 거예요. 껍데기만 있어요. 왜 그런지 아십니까? 성령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내 힘으로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여러분? 이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생활이라고 성경은 정의해 주십니다. 여러분 이것은 교인의 모습도 아니요, 교회의 모습은 더더욱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누군지 아세요? 내 힘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에요. 내 힘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하늘에서부터 온 성령 하나님에 의해 내가 변화되어 신앙생활 하는 기적을 체험하는 사람! 하나님의 능력을 날마다 맛보는 사람이 우리 교회의 모습이요,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얘기예요.
여러분, 다시 한번 사도행전 1장부터 쭈욱 훑어보십시오. 베드로가 나가서 한번 설교했더니 삼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베드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께서 체포되셨을 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저주하며 모른다고 부인했던 그 나약한 베드로가 사도행전에 보면, 한번 설교했더니 삼천 명이 돌아옵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사도행전 4장 8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할렐루야! 성령이 충만하여! 그 나약했던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가다가 앉은뱅이를 보았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 고 하자,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철저히 성령님의 지시에 의해 살아갔던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8장을 보십시오. 빌립집사 얘기 잘 알죠?
빌립집사가 어느 날 사막에 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너무 마음이 뜨거워서 교회를 개척했더니 교회가 너무 잘 되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오시더니, "일어나 광야로 가라!" 고 말씀하셨어요. 여러분 이것은 쉬운 명령이 아니잖아요? 도저히 이해가 안 갔어요. 지금 제가 이렇게 목회를 잘하고 있는데 "정근아 일어나 저 서울 강남으로 가라!" 그러면 "할렐루야!"하면서 갈지 모르겠어요. "내가 부산에서 썩기는 아까운 인잰가 보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말이죠. 그런데 하루는 성령님께서 오시더니 "정근아 저기 울릉도 골짜기로 가거라!"고 하신다면, 제가 순종할 수 있겠어요?
그러나 성령님은 지시했고 사도행전 8장은 무엇을 얘기합니까?
빌립 집사는 이의를 달지 않고 거기에 순종했어요. 광야로 갔습니다. "아! 하나님이 왜 나를 광야고 가라 하시나?" 거기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입니다. 두리번거리며 "무엇을 위해 나를 여기로 오게 했을까?" 생각하며,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저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옵니다. 에티오피아의 재무장관이었습니다. 혼자 왔겠습니까? 마차를 타고 수많은 수행원들을 거느리고는 오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재무장관이 성경을 읽는데 이사야 53장을 크게 소리내어 히브리 운율에 맞춰 읽고 있는 거예요. 아! 뭔가 감이 잡힙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놀라 "그러면 그렇지 성령님께서 실수하실까! 할렐루야!" 잠깐 기도를 하고 가까이 가서 여쭙습니다. 수행원이 있으니까, 감히 가까이 갈 수 없잖아요. 칼에 맞아 죽거든요. 옆에서 "당신이 읽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가르쳐주는 자가 없는데 내가 어찌 이해하겠는가? 올라오게!" 마차를 타고 가며 이사야 53장을 강해합니다. 이 재무장관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래서 물이 있는 곳에 가서 침례를 줍니다. 바로 이것이 에티오피아에 교회가 생기게 된 시작이었습니다. 이 날 빌립이 성령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에티오피아에 교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뿐인가요? 사도 바울은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썼습니다. "내가 아시아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 소련 근방 저쪽을 다 전도하려고 마음먹는데, 사도행전 13장은 뭐라고 얘기합니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는 도다!' 성령님께서 사도 바울의 발길을 막으시더니 그를 유럽으로 돌리십니다.
여러분, 어떻게 세계가 복음화 되었나요? 유럽이 복음화 되었고, 그 결과 로마가 복음화 되었고, 300년도 채 가지 않아 이 기독교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지시하셨어요.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성령님은 그것만 행하신 게 아니에요. 스스로 교회를 깨끗케 하셨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하다가 하나님 앞에 죽었어요. 헌금을 적게 바쳐 죽었나요? 아닙니다. 자기 재산을 바쳤어요.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자기네 집을 다 팔았습니다. 집을 1000만원에 팔고선 500만원은 감춰두고 500만원을 바치면서 "이것이 내 집 판돈 전부요" 라고 해서, 사람들에게 마구 박수를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얘기합니다. "네가 어찌 하나님의 성령을 속이느냐?" 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를 깨끗케 하십니다. 저는 어떤 사람이 어떻게 교회를 가르는지 보았습니다. 교회를 나눌 때에 제가 말리려고 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성령님이 하실 것을 믿기 때문이었어요. 반드시 성령님께서 교회를 깨끗케 하십디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떤 사람이 사도행전에 별명을 붙였습니다. '성령행전'이라고...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사도가 아니에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성령님께서 교회를 유지하시고, 성령님께서 교회를 깨끗케 하시고, 성령님께서 교회를 부흥시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봉사하다가 낙심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없이 혼자 봉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서 1Km도 떨어지지 않은 교회가 신문에 났습니다. 제가 그 신문을 읽어보고 기가 막혔어요. 기사 내용은, 교인들이 예배드리러 갈려고 하는데, 어떤 교인들과 장로님이 와서 예배당 문에다가 X자로 못을 쳤어요. "이거는 내가 지었어! 내 교회야!" 그래서 싸웠어요. 그런데 해결이 안되니까, 세상 재판에다가 회부해서 판사가 결정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일을 했다구요? 장로님이요. 여러분 적어도 장로 정도 되면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겠습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 신앙생활을 오래한 사람들 가운데, 교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낙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껍데기만 남은 사람들이 많아요. 교사 노릇도 열심히 했습니다. 성가대도 열심히 했습니다.모태신앙부터 열심히, 열심히 자라서 교회를 다녔습니다마는 나중에 20년, 30년 결산하고 나니 마음에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게 없어요. 여러분 이유가 뭔지 아세요? 그 모든 일을 자기 자신의 힘으로 했기 때문이에요.
사도행전 29장에 기록할 내용 가운데 내 얘기를 빼면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내가 헌신했고, 내가 헌금했고, 내가 이 교회 세웠고, 내가 전도했고, "나"밖에 없는 사람들.... 여러분, 그것은 내가 기록해야할 사도행전 29장의 내용이 아닌 줄 믿습니다. 성령님의 이야기를 쓰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나의 얘기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신 일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요사이 가끔 어떤 분들이 전화를 해서 저를 인터뷰하려고 합니다. "목사님의 목회 성공의 비결은 뭡니까?"라고 질문하면- 제가 우리 집사람에게 늘 얘기하는 것이지요- "여보 정말 하나님 은혜야! 내가 한 게 뭐 있어야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지나가는 말로 여겨요. "에이 모든 목사님들이 다 그렇게 입으로는 대답합디다. 정말 그것 말고 진짜 성공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제가 한참 있다가 "하나님 은혜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정말 제 진심이에요.
사랑하는 영안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사도행전 29장을 쓰기 위해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 앞에 가서, 우리의 삶을 통해 쓴 29장을 우리의 목소리로 읽을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 "내가! 내가! 내가!" 이런 얘기가 아니고, "하나님이! 성령님께서! 성령님께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성령님의 이야기가 우리의 사도행전 29장에 가득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어떤 얘기를 써야 합니까? 성령님의 이야기를 써야 합니다.
2. 증인의 얘기를 쓰라
두 번째 우리가 써야할 얘기를 사도행전은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증인의 얘기를 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1장 8절을 혹시 암송하시나요. 우리 다같이 암송하시고 못 외우시는 분들은 회개하는 마음으로 읽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 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복잡한 것 같지만 두 가지만 외우면 됩니다. 나는 도저히 암송에 자신이 없다고 하시면 두 가지만 외우세요. '너희가 성령을 받으면' 어떤 사람이 될 것이다? '증인이 될 것이다' 이 두가지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주제예요. 이미 제가 말씀드렸죠? 사도행전의 요절이 1장 8절이라고요. 1장 8절의 순서대로 사도행전이 기록되었어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1장부터 7장은 예루살렘의 복음이요, 8장부터 12장까지는 유대와 사마리아요, 13장부터는 땅 끝이에요. 이 사도행전의 주제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모든 사람의 삶을 보세요. 그들은 한가지 통일점이 있는데 증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했던 사도행전 28장에 기록된 때를 보통 학자들은 AD 60년경으로 추정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증인이 되라는 이 명령을 주신 것이 사도행전 1장의 AD 33년입니다. 28장까지 몇 년이 지났습니까? 27년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27년이 지난 후 사도행전 28장을 보세요.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거기에 성도들이 얼마나 많이 생겼습니까? 예루살렘 교회만 해도 10만이 넘었다고 학자들은 얘기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뿐입니까? 안디옥 교회는 어떡구요? 데살로니가 교회는 또 어떠합니까? 로마 교회, 고린도 교회, 빌립보 교회 등등 유럽에 수많은 교회들이 생겼습니다. 아마 줄잡아 몇 백만의 그리스도인은 생긴 것 같습니다.
우리 영안 교회는 창립된 지 37년이 지났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이제 1000명을 곧 돌파할거라고 사람들이 흥분합니다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37년이 지났는데 이제 1000명이라뇨? 그것도 다른 교회에서 넘어 오신 분들을 제외하고 나면 몇 명이나 새로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까?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것이 목사의 책임입니까? 예배당이 허술해서 그렇습니까? 누구의 책임입니까? 우리 모두의 책임인 줄로 믿습니다. 내가 증인 노릇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에 나타난 기록을 보세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 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 46,47)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내가 예수 믿었더니 믿지 않는 우리 집안이 예수 믿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 집에 시집와서 예수를 믿었더니, 믿지 않는 우리 친정이 다 예수 믿게 되는 것! 내가 직장에 취직해서 우리 사장, 내 부하가 예수 믿지 않았는데 4년,5년이 지나서 예수 믿게 되는 삶! 그것이 바로 우리가 써야 할 사도행전 29장의 내용인줄 믿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29장을 기록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을 통해 예수 믿게 된 사람의 이름을 몇 명이나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대답해 보십시오. 한 페이지를 채울 수 있겠나요? 이것이 우리가 써야 할 사도행전 29장의 내용입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9장에 누군가의 이름을 적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문단나누기를 나중에 해주실 것 같아요. "29장을 써라고 하니까 너희가 글을 잘 못쓰는구나 너무 어렵니? 내가 문단나누기 제목을 달아주마. 첫 번째, 성령님이 너에게 역사한 얘기를 좀 쓰고 두 번째로, 증인된 삶의 얘기를 좀 써봐라."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거기에는 무엇를 써야 돼요? 사람 이름을 써야 돼요. "생각이 안 나네요, 예수님! 성(姓) 밖에 생각이 안나요!" "그러면 성(姓)이라도 써봐라!" 수십 년동안 교회 나오고도 전도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사람들! 그들에겐 사도행전 29장이 없는 겁니다. 우리 모두 앞으로 남은 세월 늦지 않았습니다. 증인의 기록을 사도행전 29장에 가득가득 기록하는 축복된 영안 성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어떤 얘기를 기록해야 하나요? 사도행전 29장 우리의 얘기엔 성령님의 얘기, 증인된 삶의 얘기를 기록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이 가르쳐주는 우리가 써야 할 29장의 얘기는 헌신과 맡김의 얘깁니다.
3. 헌신과 맡김의 얘기를 기록하자
헌신과 맡김! 오늘 이것이 사도행전의 큰 주제들이에요.
한 철학자가 인생을 촛불에 비유했습니다. 저는 이 비유가 굉장히 적절한 것 같아요. 여기 에 계신 옛날 어르신들은, 어느 정도 양초를 써 보셨을 겁니다. 왜 인생을 촛불이라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한 가지인 것 같아요. 어떻게 하든 초는 타들어 가는 거예요.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60평 아파트에 살든, 단칸방에 살든, 타들어 가기는 마찬가지예요. 병이 들었던, 건강하든, 하루하루 사는 동안 내 인생은 그만큼 타 들어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내가 열심히 건강관리하면 수명이 연장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마는, 그것은 신앙인의 소리가 아니에요. 수명은 연장되지 않아요. 내가 건강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을지는 몰라도... 왜냐하면 하나님께선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실 때 수명을 정해 주셨기 때문이에요. 어떤 사람에게는 50센티 짜리의 초를 주셨고, 어떤 사람에게는 30센티 짜리의 초를 주셨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불이 켜져서 계속 해서 타들어 가는 거예요. 편하게 살든, 고생하며 살든, 아주 호의호식하며 살든, 아니면 거친 음식을 먹고 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타들어 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것들이 아니에요.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편안하게 사느냐, 고생하며 사느냐가 아니라, 과연 내가 무엇을 위해 내 인생을 밝히고 있는가! 내가 무엇을 위해 내 인생을 날마다 희생하고 있는가, 어디에 내 인생을 바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람들은 어디에 인생을 바쳤는지 아세요? 하나님의 나라에 바친 줄 믿습니다. 거기에 헌신했어요. 여러분, 오늘 스데반 집사를 보십니까? 그는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더 살 수 있었는데 돌에 맞아 죽었어요. 자다가 죽은 것도 아니고... 그런데 뭐라고 얘기합니까?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었다고 얘기합니다. 예수께서 서신 것을 그는 보았습니다.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고통스러움을 다 잊어버리고 얼굴이 환해 졌어요.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산 사람입니다.
베드로!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알렉산드리아에 클레멘트라고 하는 교부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주후 150년부터 215년까지 65세의 일기를 산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이 베드로에 대해서 기록을 남겼는데 아주 재미있는 기록이 있어요. 베드로가 사형 집행을 당하는 날, 그의 모습을 자세히 그려놓은 거예요. 그날 베드로가 사형 집행장으로 끌려가서 막 운동장에 나오는데, 공교롭게도 베드로의 아내도 사형장에 가기 위해 나왔습니다. 두 사람이 복도에서 마주쳤어요. 그런데 여러분,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내가 죽는 건 괜찮지만 내 사랑하는 아내가 나때문에 죽다니!' 그 아내를 보고 베드로가 조금도 위축되지 아니하고 "여보! 우리 주님을 기억합시다!"라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담대하게 나아가 로마 군병들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으려 했을 때 "내가 어떻게 주님과 똑같이 십자가에 못 박히겠는가! 나를 제발 거꾸로 못박아 주시오!" 하도 애타게 간청해서 로마 군병들이 그를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았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평생 복음을 위해 살았습니다. 여러분 바울 같이 고생 많이 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에게 재산이나 있었나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굶기를 정말 밥먹듯 했습니다. 돌에 몇 번이나 맞고, 또 매를 맞아서 평생 병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하나님 앞에 이병 고쳐달라고 기도했지마는 하나님은 고쳐주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것이 상관없었어요. 왜냐하면 어차피 태울 인생! 그는 이 땅의 명예를 위해 태우지 아니하고, 썩어질 인생을 위해 자기 인생을 태우지 아니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태운 줄 믿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헌신했으며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사도행전 29장에 기록해야할 내용입니다. 훗날 여러분의 자손들이 여러분의 삶을 평가할 때, 세상적인 눈으로 여러분을 평가할 것 같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럴지 모르겠어요. 우리 아버지는 재산을 얼마나 남겨 두고 돌아가셨는가? 여러분, 그런 것들이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과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얼마나 헌신하셨는가? 그것이 우리에게 귀한 축복이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땅은 잠시 지나갑니다. 촛불과 같은 인생입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가 가운데 한 목사님이 작사한 찬송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의 이름은 벤자민 슈몰크라고 합니다. 이 벤자민 슈몰크 목사님은 독일 종교 전쟁 당시에 신교를 목회 했던 목사님이에요. 여러분, 그 당시 독일은 종교 전쟁이 굉장히 심했어요. 그 전쟁으로 인해 인구 1600만 명 중 몇 명이 남았는지 아세요? 600만 명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몇 명이 죽었어요? 1000만 명이 죽었어요. 구교와 신교간의 갈등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이 벤자민 슈몰크 목사님은 목회하고 있었습니다. 구교의 핍박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 핍박에도 불구하고 목회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36개 교구를 돌아다니며 목회를 하고 있는데, 어느 날 36개 교구를 다 심방하고 너무나 지쳐서 집에 돌아와 보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누구의 소행인지 모르지만 자기집이 불탔는데, 그 불탄 자리를 들춰보니 자기의 사랑하는 두 아들이 서로 꼬옥 껴안고 죽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원망할 수 있는 상황입니까? "하나님! 이것이 양들을 돌아보고 목회한 나의 상급입니까!" 이렇게 원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고 하나님 앞에 불평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낙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슈몰크 목사님은 낙심하지 않고, 아들 둘을 나란히 그 집 앞에 장례식을 치러 놓고, 훗날 기도하는 가운데 이러한 찬송가 가사를 썼습니다.
내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 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저는 개인적으로 3절 가사를 잊을 수 없습니다.
저희 집사람이 암 수술 한지가 벌써 3년 반이 지나갑니다. 암 수술을 하고 집에 돌아와 있던 날 제 마음은 참 불안했어요. 여러분, 이미 2기를 넘어선 발달된 암이었기에 이것이 다른 곳으로 전이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의사는 저에게 많은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저는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하루하루 살아갔어요. 어느 날, 피아노 방에 제가 들어갔습니다. 아내의 일기장을 제가 살짝 보았어요. 요사이 심리 상태가 어떨까 궁금해서요. 거기에 이 가사가 적혀 있었습니다.
내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써야 할 사도행전 29장입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 내 모든 인생을 당신께 다 맡기겠습니다! 바치겠습니다! 어차피 없어질 인생, 어차피 타들어 갈 이 인생, 하늘 나라를 위해 내가 이 인생을 쓰겠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촛불의 일각까지 내가 당신의 복음을 위해,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이 몸을 태우겠습니다!
훗날 주님 앞에 만났을 때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님께서 우리의 사도행전 29장 가운데 이러한 기록들을 발견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출처/박정근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오늘 성경 말씀 사도행전 29장 1절부터 제가 읽겠습니다. 사도행전 29장. 지금 성경을 찾으시는 분들은 상당히 수상하신 분들입니다. 이제 사도행전을 여태까지 강해해 왔기 때문에, 아마 29장이 없는걸 웬만한 분들 다 아실 겁니다.
제가 오늘 사도행전 29장을 읽자고 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9장을 읽으려고 하면, 오늘 하루종일 읽어도 다 읽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사도행전 29장1절이라고 본문을 정한 이유는, 성경에서 유일하게 사도행전만이 미완성의 책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모든 책이 완성된 책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여전히 미완성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 '사도행전'이라고 하는 제목의 부적절성을 많이 주장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이라고 하면 문자적으로 해석할 때,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나 사실 여러분, 우리가 사도행전을 공부해 왔습니다마는, 이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의 행적이라고는 두 사람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요. 누굽니까? 베드로와 바울. 그것도 12사도의 얘기로 국한시킨다고 하면, 바울은 12사도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한사람만의 행적을 기록했는데 어떻게 이것을 사도행전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 제목을 바꾸기 위한 시도가 여러 차례 기독교 역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무 이유 없이 사도행전이라는 이름을 지었을까요? 아무 근거도 없이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오늘 이 '사도'라고 하는 말을 우리가 문자적인 의미로만 해석하지 아니한다면, 이 사도행전이라고 명명한 의미와 이 사도행전이 미완성된 것임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도'라고 하는 낱말은 "아폴로토스"라고 하는 헬라어인데 직역하면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대입해서, 우리가 적용해서 번역한다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행적'입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이에요.
여러분, 누가 보내심을 받았습니까? 베드로와 바울만 보냄을 받았나요? 아닙니다. 오늘 우리 모두 하나님을 향해, 대상을 향해, 우리 모두가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고 또한 계속되어져야 합니다. 아마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도행전 28장을 미완성으로 끝내신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사도행전 29장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마는, 이 사도행전 29장은 누가 기록해야 합니까? 바로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당신이, 오늘 저와 여러분이 29장을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간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곰곰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만일 지금까지의 내 삶을 간단히 요약해서, 사도행전 28장 이후에다가 29장이라고 제목을 정하고 갖다 붙인다면, 사도행전은 도대체 어떤 모습의 책이 될까? 저는 굉장히 오랫동안 이 생각을 했어요. 과연 28장까지의 이야기와 29장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 것인가? 이것을 읽는 사람마다 "굉장히 글이 멋있구나! 28장과 특히 29장의 얘기는 연결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멋있다!" 과연 이렇게 칭찬을 할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사도행전 나의 기록 29장을 읽는 사람들이 "이 책이 와 이러노? 28장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29장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이게 뭔가 잘못된 게 아니냐? 도대체 28장과 29장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지 않느냐?" 혹시 사람들의 반응이 이렇지는 않을까? 저는 지난 한 주간 내내 이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저의 얘기뿐만 아니라, 만약에 당신의 얘기로 오늘 사도행전 29장에 붙여 넣는다고 한다면 그것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겠습니까? 아니면, 28장과 29장 사이에는 도저히 넘지 못할 장벽과 담이 가로 막고있다고 한탄하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이것이 성령님께서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미완성으로 남겨두신 이유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각기 사도행전 29장을 써야 할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쓰기 싫다고 안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적지 않는다고 해도 사도행전 29장의 내용을 여러분의 삶을 토대로 적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행적, 기록!
도대체 우리가 써야할 사도행전 29장의 이야기는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어떤 내용을 여기에다가 덧붙여 써야 한단 말입니까? 여러분, 글이라고 하는 것의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성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론과 본론과 결론 사이에 어떤 흐름이 있어야 돼요. 서론이 다르고, 결론이 전혀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은 글이 아닙니다. 좋은 글은 더더욱 아니에요. 서론에서는 어떤 사람이 앞에서 동쪽 얘기를 실컷 하다가 결론에 가서는 '서쪽' 얘기로 결론을 맺는다고 하면 그것은 글이 아니에요.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도행전 1장부터 28장을 잘 연구해 보면 우리가 어떻게 29장을 써야 할 것인가, 내 인생을 통해서 기록해야 할 사도행전 29장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저는 사도행전에 이 60번째, 마지막 강해의 날, 사도행전 1장부터 28장까지의 내용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써야할 마지막 장 29장의 얘기가 어떠한 내용이어야 하는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29장에 어떤 얘기를 써야 합니까? 어떤 인생의 삶을 여기에 기록해야 우리의 후손들이 이것을 바라보며 과연, 우리의 아버지는, 우리의 할아버지는 훌륭한 사도와 같은 인생을 살았다고, 아니 하나님께서 이 사도행전 29장의 우리의 기록을 보시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할 것인가? 오늘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몇 가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1. 성령님의 이야기를 기록하라.
먼저 우리가 사도행전 29장에 기록해야 할 얘기는 성령님의 이야기입니다. 성령님의 이야기를 기록하라. 여러분 사도행전은 이 땅에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자세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이 땅에 어떻게 세워졌어요? 교회가 이제 뭔지는 다 알죠?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을 교회로 알고 있어요. 이것은 큰 잘못이에요. '예배당'이라는 말을 왜 없앴는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어요. '영안 예배당'입니다. 여기는 영안 예배실이예요. 교회는 뭡니까? 믿는 자의 무리예요. 저와 여러분, 사람이 교회입니다.
이 땅에 교회가 언제부터 있어왔는가? 과거 에덴동산에서부터 어떤 사람은 있어왔다고 주장하지마는, 그것은 교회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스데반이 광야 설교를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광야에도 교회가 있었습니다. 무슨 얘깁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떠돌아다닐 때 교회가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나오는 교회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교회와는 다른 의미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일 수 있는데 사람들의 모임, 데모를 하는 사람도 옛날에는 교회라고 불렀어요.
그러나 우리가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정의해 주신, 이 교회의 정의를 얘기할 때 교회가 언제 세워졌는가? 그것은 바로 사도행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교회는 누구에 의해서 세워졌습니까? 다름 아닌 성령님에 의해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세워진 모습을 우리는 이미 공부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120문도가 모여 기도합니다. 여러분, 그 시대로 돌아가 보세요. 이 120명의 사람들이 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실패자였고 겁쟁이들이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입으로는 큰소리를 쳤습니다. "주여! 내가 죽는데까지라도 같이 하겠습니다." 라고 큰소리 쳤지마는, 막상 로마 군병들이 와서 예수님을 체포할 때, 그들은 다 도망가버렸어요. 자기 목숨하나 부지하기 바빴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너무나 실망해서 자기 고향으로 또 다 돌아갔어요.
예수님께서 "너희는 만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라!" 그렇게 명령하셨지마는, 이 사람들은 그 능력을 한마디도, 조금도 수행할 수 없었던 나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 실패자들, 이 연약한 자들을 새롭게 하십니다. 무엇으로 새롭게 하셨냐구요? 성령님으로요. 여러분 2장의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굉장히 겁쟁이들이었어요. 그런데 그중에 한두 사람이 "예수님이 우리보고 약속하지 않았니? 아!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니?" 그 말씀을 기억하고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웬일입니까? 거기에 강하고 급한 바람같은 것이 임했어요. 바람입니까? 아뇨. 바람 같은 것! 누가같이 정확한 사람도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었어요.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바람 같은 것이 "쏴악" 나오더란 말이에요. 뭔가 바람이 부는 것 같기는 한데 '불의 혀' 같은 것이! 여러분, 불에도 혓바닥이 있어요. 아시죠? 불꽃을 얘기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그날 불이 임했다고 해서 성령 찬송만 나오면 "불이야!" 하고 뜨겁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여러분. 전혀 아니에요.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임했어요. 그러니까 바람 같은 어떤 형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형체가 "솨악" 임하더니 불의 혀같이 쭉쭉쭉 갈라지면서 각 사람에게 임했어요.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거기 모인 사람들은 다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본 사람이었고, 어떤 사람은 미국 사람이었고, 어떤 사람은 러시아 사람, 어떤 사람은 중국 사람,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그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임하고 난 다음에 놀라운 일이 생겼어요. 내가 지금 한국말로 하는데 저기 미국 사람이 한국말을 알아듣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하는 그런 정도의 방언이 아니에요. 러시아 사람이 동시에 알아듣는 거예요. 통역관도 없는데 서로 얘기를 하면 다 알아듣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놀랐어요! 도대체 이런 일이 어찌 있을 수 있는가? 그 날 성령님이 이 땅에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셨어요. 어느 정도로 변화시켜주셨습니까? 겁쟁이가 담대한 사람이 되었어요. 실패자들이 성공자들이 되었어요. 낙심했고 좌절했던 사람들 마음속에 새로운 기쁨과 담대함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그들은 너무 기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굴빛이 달라졌어요. 그날 모였던 120명은 새로운 공동체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름은 같았습니다. 얼굴 모습은 같았습니다. 사람은 똑같은 사람이로되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교회의 모습이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결코 수양기관이 아닙니다. 교육기관도 아니에요. 구제 사업소도 아니고, 도덕을 가르치는 곳도 아니요, 의술을 행하는 곳은 더더욱 아니며 병 고치는 곳도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교회란 무엇인가? '성령님의 지배를 받아 변화된 사람들이 모인 곳'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교회는 바로 성령님에 의해 시작되었고 성령님에 의해 유지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문제점이에요. 이것을 알지 못하는 거예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압니다. 예수님의 분부도 알아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들을 제자로 삼아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 위대한 분부도 알고 위대한 계명도 압니다. 그런데 그 능력을 어떻게 수행하는지 아세요?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해요. 수양과 교육을 통해 그 계명을 이루려고 해요. 오늘날 교회 안에 하나님의 뜻을 내 힘으로 이루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들은 그래서 열심히 씁니다. 헌신합니다.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철야 기도,새벽기도 다 합니다. 헌금도 많이 바칩니다. 봉사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예요? 번번이 실패해요. 5년, 10년을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따라다녔는데 어느 날 보니 마음에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허전한 거예요. 껍데기만 있어요. 왜 그런지 아십니까? 성령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내 힘으로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여러분? 이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생활이라고 성경은 정의해 주십니다. 여러분 이것은 교인의 모습도 아니요, 교회의 모습은 더더욱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누군지 아세요? 내 힘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에요. 내 힘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하늘에서부터 온 성령 하나님에 의해 내가 변화되어 신앙생활 하는 기적을 체험하는 사람! 하나님의 능력을 날마다 맛보는 사람이 우리 교회의 모습이요,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얘기예요.
여러분, 다시 한번 사도행전 1장부터 쭈욱 훑어보십시오. 베드로가 나가서 한번 설교했더니 삼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베드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께서 체포되셨을 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저주하며 모른다고 부인했던 그 나약한 베드로가 사도행전에 보면, 한번 설교했더니 삼천 명이 돌아옵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사도행전 4장 8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할렐루야! 성령이 충만하여! 그 나약했던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가다가 앉은뱅이를 보았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 고 하자,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철저히 성령님의 지시에 의해 살아갔던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8장을 보십시오. 빌립집사 얘기 잘 알죠?
빌립집사가 어느 날 사막에 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너무 마음이 뜨거워서 교회를 개척했더니 교회가 너무 잘 되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오시더니, "일어나 광야로 가라!" 고 말씀하셨어요. 여러분 이것은 쉬운 명령이 아니잖아요? 도저히 이해가 안 갔어요. 지금 제가 이렇게 목회를 잘하고 있는데 "정근아 일어나 저 서울 강남으로 가라!" 그러면 "할렐루야!"하면서 갈지 모르겠어요. "내가 부산에서 썩기는 아까운 인잰가 보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말이죠. 그런데 하루는 성령님께서 오시더니 "정근아 저기 울릉도 골짜기로 가거라!"고 하신다면, 제가 순종할 수 있겠어요?
그러나 성령님은 지시했고 사도행전 8장은 무엇을 얘기합니까?
빌립 집사는 이의를 달지 않고 거기에 순종했어요. 광야로 갔습니다. "아! 하나님이 왜 나를 광야고 가라 하시나?" 거기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입니다. 두리번거리며 "무엇을 위해 나를 여기로 오게 했을까?" 생각하며,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저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옵니다. 에티오피아의 재무장관이었습니다. 혼자 왔겠습니까? 마차를 타고 수많은 수행원들을 거느리고는 오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재무장관이 성경을 읽는데 이사야 53장을 크게 소리내어 히브리 운율에 맞춰 읽고 있는 거예요. 아! 뭔가 감이 잡힙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놀라 "그러면 그렇지 성령님께서 실수하실까! 할렐루야!" 잠깐 기도를 하고 가까이 가서 여쭙습니다. 수행원이 있으니까, 감히 가까이 갈 수 없잖아요. 칼에 맞아 죽거든요. 옆에서 "당신이 읽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가르쳐주는 자가 없는데 내가 어찌 이해하겠는가? 올라오게!" 마차를 타고 가며 이사야 53장을 강해합니다. 이 재무장관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래서 물이 있는 곳에 가서 침례를 줍니다. 바로 이것이 에티오피아에 교회가 생기게 된 시작이었습니다. 이 날 빌립이 성령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에티오피아에 교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뿐인가요? 사도 바울은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썼습니다. "내가 아시아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 소련 근방 저쪽을 다 전도하려고 마음먹는데, 사도행전 13장은 뭐라고 얘기합니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는 도다!' 성령님께서 사도 바울의 발길을 막으시더니 그를 유럽으로 돌리십니다.
여러분, 어떻게 세계가 복음화 되었나요? 유럽이 복음화 되었고, 그 결과 로마가 복음화 되었고, 300년도 채 가지 않아 이 기독교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지시하셨어요.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성령님은 그것만 행하신 게 아니에요. 스스로 교회를 깨끗케 하셨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하다가 하나님 앞에 죽었어요. 헌금을 적게 바쳐 죽었나요? 아닙니다. 자기 재산을 바쳤어요.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자기네 집을 다 팔았습니다. 집을 1000만원에 팔고선 500만원은 감춰두고 500만원을 바치면서 "이것이 내 집 판돈 전부요" 라고 해서, 사람들에게 마구 박수를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얘기합니다. "네가 어찌 하나님의 성령을 속이느냐?" 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를 깨끗케 하십니다. 저는 어떤 사람이 어떻게 교회를 가르는지 보았습니다. 교회를 나눌 때에 제가 말리려고 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성령님이 하실 것을 믿기 때문이었어요. 반드시 성령님께서 교회를 깨끗케 하십디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떤 사람이 사도행전에 별명을 붙였습니다. '성령행전'이라고...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사도가 아니에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성령님께서 교회를 유지하시고, 성령님께서 교회를 깨끗케 하시고, 성령님께서 교회를 부흥시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봉사하다가 낙심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없이 혼자 봉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서 1Km도 떨어지지 않은 교회가 신문에 났습니다. 제가 그 신문을 읽어보고 기가 막혔어요. 기사 내용은, 교인들이 예배드리러 갈려고 하는데, 어떤 교인들과 장로님이 와서 예배당 문에다가 X자로 못을 쳤어요. "이거는 내가 지었어! 내 교회야!" 그래서 싸웠어요. 그런데 해결이 안되니까, 세상 재판에다가 회부해서 판사가 결정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일을 했다구요? 장로님이요. 여러분 적어도 장로 정도 되면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겠습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 신앙생활을 오래한 사람들 가운데, 교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낙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껍데기만 남은 사람들이 많아요. 교사 노릇도 열심히 했습니다. 성가대도 열심히 했습니다.모태신앙부터 열심히, 열심히 자라서 교회를 다녔습니다마는 나중에 20년, 30년 결산하고 나니 마음에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게 없어요. 여러분 이유가 뭔지 아세요? 그 모든 일을 자기 자신의 힘으로 했기 때문이에요.
사도행전 29장에 기록할 내용 가운데 내 얘기를 빼면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내가 헌신했고, 내가 헌금했고, 내가 이 교회 세웠고, 내가 전도했고, "나"밖에 없는 사람들.... 여러분, 그것은 내가 기록해야할 사도행전 29장의 내용이 아닌 줄 믿습니다. 성령님의 이야기를 쓰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나의 얘기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신 일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요사이 가끔 어떤 분들이 전화를 해서 저를 인터뷰하려고 합니다. "목사님의 목회 성공의 비결은 뭡니까?"라고 질문하면- 제가 우리 집사람에게 늘 얘기하는 것이지요- "여보 정말 하나님 은혜야! 내가 한 게 뭐 있어야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지나가는 말로 여겨요. "에이 모든 목사님들이 다 그렇게 입으로는 대답합디다. 정말 그것 말고 진짜 성공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제가 한참 있다가 "하나님 은혜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정말 제 진심이에요.
사랑하는 영안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사도행전 29장을 쓰기 위해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 앞에 가서, 우리의 삶을 통해 쓴 29장을 우리의 목소리로 읽을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 "내가! 내가! 내가!" 이런 얘기가 아니고, "하나님이! 성령님께서! 성령님께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성령님의 이야기가 우리의 사도행전 29장에 가득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어떤 얘기를 써야 합니까? 성령님의 이야기를 써야 합니다.
2. 증인의 얘기를 쓰라
두 번째 우리가 써야할 얘기를 사도행전은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증인의 얘기를 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1장 8절을 혹시 암송하시나요. 우리 다같이 암송하시고 못 외우시는 분들은 회개하는 마음으로 읽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 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복잡한 것 같지만 두 가지만 외우면 됩니다. 나는 도저히 암송에 자신이 없다고 하시면 두 가지만 외우세요. '너희가 성령을 받으면' 어떤 사람이 될 것이다? '증인이 될 것이다' 이 두가지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주제예요. 이미 제가 말씀드렸죠? 사도행전의 요절이 1장 8절이라고요. 1장 8절의 순서대로 사도행전이 기록되었어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1장부터 7장은 예루살렘의 복음이요, 8장부터 12장까지는 유대와 사마리아요, 13장부터는 땅 끝이에요. 이 사도행전의 주제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모든 사람의 삶을 보세요. 그들은 한가지 통일점이 있는데 증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했던 사도행전 28장에 기록된 때를 보통 학자들은 AD 60년경으로 추정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증인이 되라는 이 명령을 주신 것이 사도행전 1장의 AD 33년입니다. 28장까지 몇 년이 지났습니까? 27년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27년이 지난 후 사도행전 28장을 보세요.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거기에 성도들이 얼마나 많이 생겼습니까? 예루살렘 교회만 해도 10만이 넘었다고 학자들은 얘기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뿐입니까? 안디옥 교회는 어떡구요? 데살로니가 교회는 또 어떠합니까? 로마 교회, 고린도 교회, 빌립보 교회 등등 유럽에 수많은 교회들이 생겼습니다. 아마 줄잡아 몇 백만의 그리스도인은 생긴 것 같습니다.
우리 영안 교회는 창립된 지 37년이 지났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이제 1000명을 곧 돌파할거라고 사람들이 흥분합니다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37년이 지났는데 이제 1000명이라뇨? 그것도 다른 교회에서 넘어 오신 분들을 제외하고 나면 몇 명이나 새로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까?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것이 목사의 책임입니까? 예배당이 허술해서 그렇습니까? 누구의 책임입니까? 우리 모두의 책임인 줄로 믿습니다. 내가 증인 노릇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에 나타난 기록을 보세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 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 46,47)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내가 예수 믿었더니 믿지 않는 우리 집안이 예수 믿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 집에 시집와서 예수를 믿었더니, 믿지 않는 우리 친정이 다 예수 믿게 되는 것! 내가 직장에 취직해서 우리 사장, 내 부하가 예수 믿지 않았는데 4년,5년이 지나서 예수 믿게 되는 삶! 그것이 바로 우리가 써야 할 사도행전 29장의 내용인줄 믿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29장을 기록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을 통해 예수 믿게 된 사람의 이름을 몇 명이나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대답해 보십시오. 한 페이지를 채울 수 있겠나요? 이것이 우리가 써야 할 사도행전 29장의 내용입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9장에 누군가의 이름을 적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문단나누기를 나중에 해주실 것 같아요. "29장을 써라고 하니까 너희가 글을 잘 못쓰는구나 너무 어렵니? 내가 문단나누기 제목을 달아주마. 첫 번째, 성령님이 너에게 역사한 얘기를 좀 쓰고 두 번째로, 증인된 삶의 얘기를 좀 써봐라."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거기에는 무엇를 써야 돼요? 사람 이름을 써야 돼요. "생각이 안 나네요, 예수님! 성(姓) 밖에 생각이 안나요!" "그러면 성(姓)이라도 써봐라!" 수십 년동안 교회 나오고도 전도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사람들! 그들에겐 사도행전 29장이 없는 겁니다. 우리 모두 앞으로 남은 세월 늦지 않았습니다. 증인의 기록을 사도행전 29장에 가득가득 기록하는 축복된 영안 성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어떤 얘기를 기록해야 하나요? 사도행전 29장 우리의 얘기엔 성령님의 얘기, 증인된 삶의 얘기를 기록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이 가르쳐주는 우리가 써야 할 29장의 얘기는 헌신과 맡김의 얘깁니다.
3. 헌신과 맡김의 얘기를 기록하자
헌신과 맡김! 오늘 이것이 사도행전의 큰 주제들이에요.
한 철학자가 인생을 촛불에 비유했습니다. 저는 이 비유가 굉장히 적절한 것 같아요. 여기 에 계신 옛날 어르신들은, 어느 정도 양초를 써 보셨을 겁니다. 왜 인생을 촛불이라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한 가지인 것 같아요. 어떻게 하든 초는 타들어 가는 거예요.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60평 아파트에 살든, 단칸방에 살든, 타들어 가기는 마찬가지예요. 병이 들었던, 건강하든, 하루하루 사는 동안 내 인생은 그만큼 타 들어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내가 열심히 건강관리하면 수명이 연장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마는, 그것은 신앙인의 소리가 아니에요. 수명은 연장되지 않아요. 내가 건강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을지는 몰라도... 왜냐하면 하나님께선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실 때 수명을 정해 주셨기 때문이에요. 어떤 사람에게는 50센티 짜리의 초를 주셨고, 어떤 사람에게는 30센티 짜리의 초를 주셨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불이 켜져서 계속 해서 타들어 가는 거예요. 편하게 살든, 고생하며 살든, 아주 호의호식하며 살든, 아니면 거친 음식을 먹고 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타들어 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것들이 아니에요.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편안하게 사느냐, 고생하며 사느냐가 아니라, 과연 내가 무엇을 위해 내 인생을 밝히고 있는가! 내가 무엇을 위해 내 인생을 날마다 희생하고 있는가, 어디에 내 인생을 바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람들은 어디에 인생을 바쳤는지 아세요? 하나님의 나라에 바친 줄 믿습니다. 거기에 헌신했어요. 여러분, 오늘 스데반 집사를 보십니까? 그는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더 살 수 있었는데 돌에 맞아 죽었어요. 자다가 죽은 것도 아니고... 그런데 뭐라고 얘기합니까?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었다고 얘기합니다. 예수께서 서신 것을 그는 보았습니다.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고통스러움을 다 잊어버리고 얼굴이 환해 졌어요.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산 사람입니다.
베드로!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알렉산드리아에 클레멘트라고 하는 교부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주후 150년부터 215년까지 65세의 일기를 산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이 베드로에 대해서 기록을 남겼는데 아주 재미있는 기록이 있어요. 베드로가 사형 집행을 당하는 날, 그의 모습을 자세히 그려놓은 거예요. 그날 베드로가 사형 집행장으로 끌려가서 막 운동장에 나오는데, 공교롭게도 베드로의 아내도 사형장에 가기 위해 나왔습니다. 두 사람이 복도에서 마주쳤어요. 그런데 여러분,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내가 죽는 건 괜찮지만 내 사랑하는 아내가 나때문에 죽다니!' 그 아내를 보고 베드로가 조금도 위축되지 아니하고 "여보! 우리 주님을 기억합시다!"라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담대하게 나아가 로마 군병들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으려 했을 때 "내가 어떻게 주님과 똑같이 십자가에 못 박히겠는가! 나를 제발 거꾸로 못박아 주시오!" 하도 애타게 간청해서 로마 군병들이 그를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았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평생 복음을 위해 살았습니다. 여러분 바울 같이 고생 많이 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에게 재산이나 있었나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굶기를 정말 밥먹듯 했습니다. 돌에 몇 번이나 맞고, 또 매를 맞아서 평생 병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하나님 앞에 이병 고쳐달라고 기도했지마는 하나님은 고쳐주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것이 상관없었어요. 왜냐하면 어차피 태울 인생! 그는 이 땅의 명예를 위해 태우지 아니하고, 썩어질 인생을 위해 자기 인생을 태우지 아니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태운 줄 믿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헌신했으며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사도행전 29장에 기록해야할 내용입니다. 훗날 여러분의 자손들이 여러분의 삶을 평가할 때, 세상적인 눈으로 여러분을 평가할 것 같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럴지 모르겠어요. 우리 아버지는 재산을 얼마나 남겨 두고 돌아가셨는가? 여러분, 그런 것들이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과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얼마나 헌신하셨는가? 그것이 우리에게 귀한 축복이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땅은 잠시 지나갑니다. 촛불과 같은 인생입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가 가운데 한 목사님이 작사한 찬송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의 이름은 벤자민 슈몰크라고 합니다. 이 벤자민 슈몰크 목사님은 독일 종교 전쟁 당시에 신교를 목회 했던 목사님이에요. 여러분, 그 당시 독일은 종교 전쟁이 굉장히 심했어요. 그 전쟁으로 인해 인구 1600만 명 중 몇 명이 남았는지 아세요? 600만 명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몇 명이 죽었어요? 1000만 명이 죽었어요. 구교와 신교간의 갈등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이 벤자민 슈몰크 목사님은 목회하고 있었습니다. 구교의 핍박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 핍박에도 불구하고 목회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36개 교구를 돌아다니며 목회를 하고 있는데, 어느 날 36개 교구를 다 심방하고 너무나 지쳐서 집에 돌아와 보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누구의 소행인지 모르지만 자기집이 불탔는데, 그 불탄 자리를 들춰보니 자기의 사랑하는 두 아들이 서로 꼬옥 껴안고 죽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원망할 수 있는 상황입니까? "하나님! 이것이 양들을 돌아보고 목회한 나의 상급입니까!" 이렇게 원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고 하나님 앞에 불평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낙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슈몰크 목사님은 낙심하지 않고, 아들 둘을 나란히 그 집 앞에 장례식을 치러 놓고, 훗날 기도하는 가운데 이러한 찬송가 가사를 썼습니다.
내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 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저는 개인적으로 3절 가사를 잊을 수 없습니다.
저희 집사람이 암 수술 한지가 벌써 3년 반이 지나갑니다. 암 수술을 하고 집에 돌아와 있던 날 제 마음은 참 불안했어요. 여러분, 이미 2기를 넘어선 발달된 암이었기에 이것이 다른 곳으로 전이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의사는 저에게 많은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저는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하루하루 살아갔어요. 어느 날, 피아노 방에 제가 들어갔습니다. 아내의 일기장을 제가 살짝 보았어요. 요사이 심리 상태가 어떨까 궁금해서요. 거기에 이 가사가 적혀 있었습니다.
내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써야 할 사도행전 29장입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 내 모든 인생을 당신께 다 맡기겠습니다! 바치겠습니다! 어차피 없어질 인생, 어차피 타들어 갈 이 인생, 하늘 나라를 위해 내가 이 인생을 쓰겠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촛불의 일각까지 내가 당신의 복음을 위해,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이 몸을 태우겠습니다!
훗날 주님 앞에 만났을 때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님께서 우리의 사도행전 29장 가운데 이러한 기록들을 발견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출처/박정근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