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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로 들어가라 (창세기 6:16-22)
세상을 여러분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악이 관영하다고 보시는지요. 그래도 의로운 사람이 많다고 보시는지요. 엘리야 시대에 엘리야는 세상을 보았을 때, 의로운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에게 가서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직 그 영혼이 바알과 아세라에게 더럽히지 않는 하나님의 종이 칠 천이나 보였던 것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수의 의인을 보시면서 그 의인과 함께 언약을 맺으시고, 그 의인과 더불어서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의인 한 사람, 바로 그를 통해서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을 본문 말씀에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로마서 3장 말씀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 그랬습니다. 이 말씀은 로마서를 기록하던 당시 시대의 죄악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류 창조 이래에 주님이 오실 때까지 전 인간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직전에 하나님은 인류를 심판하시고자 하는 뜻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류를 보았을 때, 한 사람의 의인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하나님은 의인 예수와 함께 언약을 맺으십니다. '만약 예수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희생의 피를 흘린다면 내가 그를 믿는 자들에게 다 죄를 용서해 주겠다. 만약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3일만에 부활하니까 그 부활을 믿는 자들은 모두 부활케 하겠다.' 이렇게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 일로 인류가 구원함을 얻었고, 이 일로 우리 모두가 부활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노아 시대에도 의인은 노아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한 사람 의인' 하나님은 그 노아를 찾아가셔서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너와 네 가족을 방주로 이끌어서 생명을 구원하겠다.'하는 그러한 약속이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가정이라고 하는 어떤 노아의 혈육적 가정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의 가정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도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노아 시대의 문제는 가인의 후손들의 그 삶과 그리고 또한 셋의 후손의 삶이 함께 어울려지고, 서로 혼합되면서 가인의 후손의 문화를 셋의 후손들이 흠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래서 결국 셋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점점 타락하기를 시작했습니다. 타락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아름다움을 흠모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 2절 말씀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토보트' 이 말은 성적인 매력을 더욱더 하기 위해서 선정적이고, 감각적인 외모적인 사치를 하는 아름다움, 이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움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시느냐?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사랑을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정한 사랑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음란은 사랑을 변질시키는 아주 사악한 사단의 역사입니다. 다원적 성생활을 하는 사람은 사랑을 할 기능을 상실합니다. 또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에는 성적인 삶이 사랑인 줄로 착각을 합니다. 영혼의 사랑, 참 사랑인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그 사랑으로 내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을 할 수 없는 자들로 그 영성이 완전히 파괴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의 후손들은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감각적인 행위를 사랑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가인의 후손의 문화, 여기에 점점 셋의 후손들이 침륜되어 가고 잠식되어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보다 못한 하나님은 심판을 마음먹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심판하실 수밖에 없느냐? 택한 백성, 바로 의인을 위해서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의인을 구하기 위하여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셋의 후손 속에 마지막 한 사람, 노아 하나, 노아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심판을 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심판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멸하시기 위해서 심판하신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구원하셔서 방주로 불러 들여서 그 신령한 생명으로 새 역사를 만드시기 위한, 깨끗한 세대에 사는 자로 의인을 삼으시기 위해서 이미 영이 죽어서 하나님의 영이 떠난 육체된 존재들을 말끔히 셋의 후손들을 끝까지 침륜시키고, 부패시키는 요소를 모두 제거해주고, 바로 신령한 하나님의 사람, 노아를 구원하시려고, 홍수 심판을 준비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에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세상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오늘의 가인적 문화와 세속적인 가치관에 완전히 물들어져서 우리가 세속화되고 우리가 방탕해 버리면, 하나님은 이 인류를 이끌어 가실 하나님의 뜻을 포기하시고 마는 것입니다. 중보자가 만약 성결치 못하면, 이미 하나님을 향한 제사는 불가능해집니다. 제사 없이는 용서함이 없습니다. 결국 멸망밖에는 찾아오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인적 세상이 점점 부패해 가는 것에 하나님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교회, 택하신 사람들의 영성, 그 가정의 성결을 가장 관심을 두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참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하는 사람들인데, 세상의 선정적인 아름다움을 우리 스스로 좋아하고 있다는 이러한 문제를 스스로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감각적이고 현세적이며, 우리의 영혼을 매우 더럽히는 이러한 여러 상황을 우리는 결코 경계하며 바로 이 노아의 방주가 방수적 역할을 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을 세속적 물결이 들어오지 않도록 잘 보존하는 것, 이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 그 당시에 가인적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신의 숭상이었습니다. 창세기 6장 4절 말씀 보면, '당시에 그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그랬습니다. 힘이라고 했습니다. '자이언트' 네피림입니다. 이것은 금력, 폭력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오늘의 강대국이라는 정의는 이를테면 폭력, 그리고 또 하나는 금력, 자본, 둘을 가진 나라가 바로 강대국입니다. 오늘의 강대국, 그들이 하는 모든 가치는 어쩜, 로마의 것과 유사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로마 황제의 상징은 독수리입니다. 오늘의 미국의 백악관의 상징은 독수리입니다. 그리고 한사코 독수리의 발톱 아래에는 지구가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가인적인, 로마적인 것이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가져야 할 진정한 가치관은 무엇인가? 바로 영혼인 것입니다. 내가 금력을 갖는 것보다, 내가 어떤 폭력을 갖는 것보다 내가 분명 추구해야 되는 것은 내 영혼이 어떻게 하나님께 의지하며, 성령님의 지배하심에 그 능력에 어떻게 순종하느냐, 이것에 셋의 후손이요, 노아의 후손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의 추구해야 될 가치란 말이에요.
그런데 교회 안에까지 소위 기복신앙, 기복을 신앙의 최고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현세적인 것들에 소망을 두고, 지나치게 육적인 것에 뜻을 두고, 지나치게 오늘 시대 풍조를 잡고, 이것이 가장 귀중한 줄로 아는 우리의 가치관 혼돈이 바로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성경이 말하는 대로 성경이 말하는 영적 삶을 추구하면 외로울 것입니다. 세상이 다 가인적으로 흘러가니까 홀로 서서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언약을 바라보며, 나간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약을 맺었습니다. 창세기 6장 18절 말씀에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라' 그랬습니다.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 내 언약이라.' 그리고 외로운 노아와 맺어지고, 노아는 그 언약을 신실히 시행해 갔던 것입니다.
의인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자리에도 좌우에는 강도였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심판을 받을 때도 위증하는 무리로 그 광장에 가득 찼습니다. 심지어는 열두 제자까지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참 외로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의로운 외로움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중의 한 사람 다니엘, 참 외로웠습니다. 그리고 또한 사자 굴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더욱 외로웠습니다. 그러나 사자굴 안에서 다니엘과 함께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외로운 골방에서 의의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그야말로 여름 산에 홀로 선 외솔처럼 서있는 것, 바로 여기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품위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과 낭만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늘 하나님께 소원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파해야 세계 선교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바울을 로마의 침침하고, 습기차고, 추운 감옥 밑바닥으로 안내하고 말았습니다. 홀로 감옥에 있는 바울, 저 로마의 시가를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파해야 되겠는데, 어찌하여 이 캄캄한 감옥, 여기서 주님의 복음을 세계로 전할 수 있을까? 그러나 시위대 감옥에는 그 당시 군사적으로 가장 실력 있고, 엘리트들이 바로 그 감옥을 지키는 간수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 간수들은 이후에 훌륭한 엘리트들 장교이기 때문에 세계 로마가 지배하는 곳으로 다 파견근무를 하게 됩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세계복음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을 바울은 보았습니다. 여러분, 의로운 사람이 홀로 이 세상에 어찌하든 나는 언약을 바라보며 나가는 것, 이것이 방주에로 들어가는 삶인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3.1절이 주일이었습니다. 3.1절은 국기를 다 준비해서 학교에 가서 기념식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저는 학교를 가지 않고, 교회학교를 갔습니다. 아이들이 다 기념식을 가고 텅빈 교회였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이튿날, 월요일날 갔더니 선생님은 홀로 교실 청소를 다 하라는 것입니다. 해가 빠지고, 캄캄한 교실, 저 화장실에서 귀신을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래도 홀로 청소할 때, 그 마음에 뿌듯한 자부심과 기쁨이 지금도 상기만 하면 그 때 감동으로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역사는 창조적 소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삽니다. 승리하게 사는 사람들,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 의롭게 사는 사람들, 외롭습니다. 그러나 좌우를 돌아봤자 예수님처럼 강도들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갈 길은 오직 방주에로 향하는 걸음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 이 본문 말씀에는 종말의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종말은 비단 노아 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 때에도 종말이 있었습니다. 종말에는 우주적 종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재림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또, 개인적 종말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관속에 들어가고 임종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급박한 종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니, 바로 나에게 주어진 순간 순간이 종말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이 말씀은 나의 개인적 종말까지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보내시는 시간부터 이 어간이, 시간 시간마다 매 순간이 종말이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순간을 내가 방주에로 나갈 것이냐? 아니면, 저 가인적인 세상, 홍수 쪽을 갈 것이냐? 순간 나는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스스로 나의 판단을 나의 심판으로 내가 스스로 내려야 하는 것이 순간 순간이다. 종말이다라는 것입니다. 바로 순간 내가 내 자신을 심판하는 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의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방주에로 가라. 언약을 향하여 걸어가라. 순간 순간을 언약, 이 길로 걸어가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 말씀, 방주라 하는 말씀 안에는 우리는 이렇게 비유해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특별한 훈련을 받은 병사들이 특별한 작전을 위해서 적진 깊숙이, 이를테면 비행기로 투하를 하게 됩니다. 작전을 합니다. 작전이 다 끝나면, 기진맥진합니다. 이제 비행기가 다시 와서 밧줄을 내려서 그들을 다 불러 올려서 본 부대로 귀향을 시킵니다. 우리는 얼마 전부터 위대한 선교 정신인 하비 콕스가 말하는 모이는 교회보다 흩어지는 교회, 모이는 예배보다 흩어지는 예배, 모이는 예배는 흩어지는 예배의 수단, 모이는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의 수단, 이렇게 우리는 생각을 하고, 또 이 일을 적극적인 선교 신학으로 받아들이고 좋아했습니다. 사회 구원, 굉장히 외쳤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영성을 볼 때, 오늘의 교회 영성을 볼 때, 지금 적극적인 선교 신학을 채택해서 세상 구원, 세상으로 나가고, 교회 담을 헐고, 다 교회와 세속을 하나로 보기에는 너무나 위험수위로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썩어져 가는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소금이 다 소금기를 다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의 영성이 너무나 탈진상태에 가서 성령의 충만이 아니라, 성령님의 지배하심을 받는 것이 내가 성령을 좌지우지하는 이러한 상황에 와 있다는 거예요. 내가 나의 주인 되었다는 거예요. 이런고로 우리는 성결,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영적인 성결과 성령 충만, 여기에 집중적인 우리의 신앙생활의 경건의 연습을 기울여서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다워지는 이 일이 우선적이라는 것입니다. 개인의 영성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방주로 들어가라' 내 영혼을 성결케 하고, 내 가정을 성결케 하고, 방주를 짓는 것은 생명 구원, 방주 안에 들어가는 것은 성화의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되어 지기 위하여 우리 개개인이 지금 집중적으로 나의 영성 관리를 해야 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대형 부패, 부정 사건에는 틀림없이 크리스천들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다른 죄악을 첨가해서 짓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은 죄를 지었으면, '죄를 지었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죽어도 안 지었다. 교회 와서는 소위 그리스도인이라 해서 더 외식하고, 오히려 하나님 보시기에 가소로운 이러한 죄악을 더 지어가면서 거룩이라는 외형적인 것을 갖추기 위해서 거짓말하는 우리가 세상보다 더 죄를 짓는 이러한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죽 잘못되었으면, 사회 저널리스트들이 항상 하는 말이 '교회 문제 있다. 교회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교회도 교회 개혁을 우리가 해주어야 되겠다.'고 합니까? 이것이 얼마나 창피합니까? 교회마다 바로 저 노아 시대의 가인의 사람들이 네피림 즉, 힘을 숭상하듯 물질을 교회가 숭상하고, 뿐만 아니라 교회가 하나의 집단 이기주의가 되어서 사회 속에 정치 권력을 세력 같은 것을 규합하려는 이런 모습은 너무나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고 사회가 교회의 영성을 걱정할 정도가 되었으니 이것이 방주로 들어가지 않고 되겠느냐는 말이에요. 저는 능력 없는 목사로서 여러분에게 간절히 권면하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 영성은 나의 영성입니다. 나의 영성을 먼저, 영적 가치를 추구해야 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객체화하지 마시고, 교회를 나로 보시고 주체화해서 나의 죄를 회개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자로 다시 새로워지는 역사가 있어야 할, 바로 심판의 때를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방주로 들어가라' 이 말씀 기억하시면서 나의 영성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하는 거룩한 나의 영성을 만들어 가는 성화를 나의 신앙의 최고의 가치, 인생의 최고의 목표로 삼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윤대영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