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마음을 지키라   (잠언 4:20-27)


어느 날 갑자기 둘째 아들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스며들었습니다. '나는 행복치 않다. 나의 부모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가? 우리 가정은 나에게 참 행복을 줄만한 가정인가?'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먼 타국에 가면, 행복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타국으로 떠나자.' 그래서 이 아들은 타국으로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일부입니다. 어느 날 칼 마르크스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함께 더불어 생산하고, 그리고 균등 분배하는 사회, 이런 사회가 이루어져야 행복하지 않겠는가?' 그렇습니다. 함께 더불어 생산하고, 균등하게 나누어 갖는 사회, 이것이야말로 행복할 것같은 사회라고 생각되어지지 않습니까? 이 환상을 이루기 위해서 공산주의 이론을 내어놓았습니다. '공산주의 국가가 되면, 행복해 질 것이다.' 이 환상 때문에 비판이라는 이름하에 숱한 혁명의 피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인류 중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공산주의 국가, 북한입니다. 그 북한이 행복하게 산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우리 모두는 '먼 타국에 가면, 행복하리라.'하는 이런 생각을 가졌던 이 탕자 비유의 둘째 아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요? 칼 마르크스처럼 우리는 나름대로의 환상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는지요? 그리고 이 환상을 쫓는 일에 소중한 인생을 소모하고 있지는 아니한지요? 행복하자면, 행복의 조건이 모두 충족되어야 행복하다는 그러한 환상을 다 가지고 있지는 않는지요? '풍부한 경제력, 해박한 지식, 놀라운 지혜, 건강한 신체, 그리고 또한 큰 권력, 원만한 인간관계, 아름다운 사랑, 이 모든 것이 다 조성되고, 내가 이것을 갖게 되면, 행복하리라.' 혹시 이렇게 모든 것을 다 향유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성경에서 찾으면, 솔로몬일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인생을 다 산 연후에 자기의 삶을 평가하는 말씀을 한 마디로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전도서 1장 2, 3절 말씀에 보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다 헛되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행복의 조건을 모두 갖추기 위해서 수고하고, 땀흘리고, 노력하고, 고생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 나에게 유익하냐?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만족과 불만, 감사와 불평, 그리고 복과 저주, 이 모든 것은 실상 나의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것을 내가 어떤 마음을 먹고 있느냐? 여기에 따라서 똑같은 사건, 똑같은 사람, 똑같은 형편, 똑같은 상황이 다가와도 어떤 이는 행복감에 젖어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불행스럽다고 한탄하고, 어떤 이는 감사를 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음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은 이렇게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행복이란, 바로 마음이 누리는 것이다. 그런고로 마음을 지키는 것이 행복의 길이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지키는 일을 실패한 사람, 인류의 대표자는 아무래도 아담과 하와일 것입니다. 창세기 3장 4절에서 6절 말씀에 보면,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이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그랬습니다. 먹은지라. 무엇을 먹었습니까? 그 과일이름이 뭡니까? 바로 사단이 준 마음을 그가 받아들인 것입니다. 사단의 마음을 그 마음속에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 이후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대로 그들은 에덴에서 쫓김을 당했고, 결국은 멸망당하고 말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그 사람은 멸망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단이 사람의 마음을 침노하여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면, 그는 결국 범죄하고, 범죄한 영혼은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은 공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마음을 비워야 한다. 마음을 비우면, 행복해진다. 마음을 비우면, 마음에 그야말로 만족이 가득하게 찬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귀신이 들려서 불쌍해서 귀신을 내어 쫓아주었다. 그랬더니 귀신이 나갔다. 그 마음이 깨끗하게 지워졌다. 귀신이 나가서 여기 저기 다니면서 거할 곳을 찾는데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다. 역시 옛집이 좋구나. 다시 옛날에 자기가 거처하던 그 사람의 마음으로 돌아와보니 마음이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더라. "아! 이렇게 좋은 곳이 있는 걸 내가 왜 이곳을 두고 나갔던고?" 나가서 다른 귀신을 다 불러모아서 "얘들아, 여기에 깨끗하게 청소된 곳이 있다. 모여라." 이래서 많은 귀신이 들어와서 그 마음을 주관하니 그 사람이 처음 즉, 한 귀신들려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나빠졌더라.' 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은 공허로 남을 길이 없습니다. 하여간 어떤 영이든, 그 마음을 주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마음은 자동차와 같습니다. 운전자가 타고, 마음을 운전해 나감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행보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란 말은 매우 추상적인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지키는 일을 추상적으로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귀를 지키라>
마음을 지키는 일, 첫 번째 '귀를 지키라.' 그랬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 말씀에 보면, '복음을 들으므로 말미암아 믿음이 난다.' 그랬습니다. 즉, 우리는 귀를 통해서 복음을 듣습니다. 복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 나의 죄를 대속하신 그 모든 일들, 그리고 예수님이 3일만에 부활하신 것,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약속, 이 모든 내용이 복음 안에 들어있습니다. 이 복음은 우리의 귀로 듣습니다. 귀로 들으면, 바로 듣는 즉시 성령이 우리의 심령 속에 들어오고, 그리고 마음으로 그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모셔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는 영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아담과 하와는 그 귀를 사단에게 열어주었다가 사단의 유혹하는 말이 그의 영안에 들어와서 그 마음속에 들어와서 결국은 범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귀는 과연 누구의 말에 기울어지고 있는가? 어떤 마음을 가진 자의 말을 여러분은 듣고 있는가? 말하는 자의 마음이 말 듣는 자의 귀를 통해서 말 듣는 자의 마음속에 옮겨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므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에 그 주관하는 주장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 18절 말씀에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그랬습니다. 말하는 사람의 말은 주사기와 같습니다. 그리고 말하는 사람의 마음은 주사액과 같습니다. 말듣는 사람의 귀는 주사를 맞는 사람의 혈관과 같습니다.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은 결국 그 마음이라고 하는, 귀라고 하는 혈관으로 들어오는 말하는 자의 마음에 의해서 좌지우지 영향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4절 말씀에 보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나의 심령의 상태, 나의 심령에 주관하는 영, 나의 심령에 역사하는 영의 그 역사를 통해 내가 말을 하게 되고, 그 말이 사람들의 귀를 통하여 점점 퍼져나가고, 전염되어 가고, 오염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악한 사람의 말을 기울이면, 악한 사람으로 나의 자신이 점점 변화하고, 성령의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내가 점점 성령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시험에 든 신자들에게 신앙의 고향을 위해서 몇 분에게 심방을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항상 시험든 자의 말을 들어주다 보니까 결국 점점 심방자들이 점점 그 영성이 시들시들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어디에 귀를 빌려주느냐, 여기에 따라서 바로 내 마음, 이것이 결정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귀를 지키는 것은 곧 마음을 지키는 것이다. 그랬습니다. 나의 귀에 대고 말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러분, 누구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오늘 주일을 통하여 여러분의 삶중에 과연 나와 함께 대화하는 사람이 누구며, 그 사람들의 통해서 마음에 어떤 영향력을 받았고, 그리고 그 마음의 영향력을 받아서 나의 삶이 어떻게 변화했는 가를 일일이 여러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가스는 점검 잘하면서 왜 마음은 점검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출애굽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의 오직 목표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불행스럽게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 외에는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왜! 너무 오랫동안 사막을 걸어가서 죽었습니까? 사막이라 먹을 물이 없어 모두 목말라 죽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식량을 공급치 않아서 굶어죽었습니까? 아니면, 날씨가 너무 덥고 추워서 건강이 해를 받아 죽었습니까? 아니올시다. 성령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불평하는 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줬다가 결국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원망한 것 때문에 모두 광야에서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성전의 크기입니까? 성도의 숫자입니까? 재정의 액수입니까? 아니면, 교회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의 사회적인 역할입니까? 교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말의 문제에요. 불평하는 자가 있으면, 그 교회는 성장하거나 건강할 수가 없습니다.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결국은 그 성도를 통해서 교회는 무너지고, 폐허가 되고, 결국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들일 수가 없습니다. 불평, 불만하는 자의 말을 들어주면, 여러분의 신앙이 점점 약화되어 갑니다. 마지막에는 교회와 관계가 끊어질 수도 있습니다.

요즘 교회가 사회로부터 이러한 비판을 받습니다. 아버지가 그 교회 목사님이면, 그 아들도 그 교회 목사가 되어야 하느냐? 소위 목사직의 세습을 가지고, 많은 저널리스트들이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그렇다 치고, 교회 안의 사람들까지 이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적어도 성경과 헌법은 그 교회, 하나님의 종은 그 교회가 청빙하도록 하나님이 위임하셨습니다. 만약 그 교회가 바르게 청빙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 잘못 청빙된 자의 인사문제를 꼭 심판을 하시고 맙니다. 서울의 큰 교회 C교회, 사랑하는 목사님의 아들을 목사님으로 청빙을 했지만, 그 목사님은 시무치 못하고 외국으로 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교회를 하나님이 통치하신 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왜 주의 종을 하나님이 꼭 주관하신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왜 이것을 모르고 자꾸만 교회 안에서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자꾸 비판함으로 말미암아 사회 모든 신문에 대고, 각 대중매체를 통해서 전달됨으로 말미암아 '그렇지 않아도 교회 오기 귀찮고, 싫은데 잘됐다. 저런 교회 뭐하러 나가냐?' 결국은 복음전파에 지장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 확장이 결국은 지장을 받으면, 기뻐하는 것은 사단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한국 교회의 숫자가 얼마입니까? 그 중에 이러한 일이 몇 개나 됩니까? 서너개 밖에 더 됩니까? 아무리 선한 말이라도 이 선한 말을 내가 꼭 관찰해야 되겠다. 이런 마음을 먹게 되고, 관찰이 안되면, 미워지고, 또한 분노가 생기는데, 내 영은 선하지만, 결국 그 사람은 사단에게 쓰임 받는 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선한 비판이라도 비판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행복한 말, 선한 말, 그리고 생산적인 말, 즐거운 말, 긍정적인 말, 칭찬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을 지켜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을 지키라>
두 번째, 마음을 지키는 구체적인 행동은 '눈을 지키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을 지키라 눈을 지키는 것이 나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어느 날, 옥상에 올라갔다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봅니다. 우리아의 아내를 봅니다. 봄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음란한 영이 역사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시각적인 사건은 하나의 빛이 그 시각을 알도록 들어오지만, 이 시신경을 통해서 그의 마음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즉, 음란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왜 숱하게 볼 것들 많은데, 하필이면 그 여인을 보았느냐고 하나님의 종, 나단이 말하고 있습니다.

소호에서 말하는 '현대 미술의 거장들'이라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내용은 미술 작품을 평가함에 있어 미술사적으로 보통 평가를 합니다. '어떤 영향을 받아서 이런 작품이 나왔느냐'하는 것을 주로 작품을 평가합니다. 이 사람은 좀 시각이 다릅니다. '모든 미술 작품은 그 작가의 생각과 사상, 그 작가의 삶의 경험이 표출된 결정체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미술품에는 작가의 인생관이 드러나 있고, 작가의 삶의 경험이 들어가 있고, 작가의 마음이 거기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런고로 어떤 작가의 미술품을 벽에 걸어놓고, 매일 보느냐에 따라서 그 작가의 마음이 보는 자에게 영향력을 준다는 것입니다. 실상 미술만 그렇습니까? 모든 예술품이 다 그러합니다.
한 여류작가는 항상 누드를 아름답게 그립니다. 그리고 꼭 누드 위에다가 뱀을 그려 놓습니다. 그 원인을 구명해 보았더니 그 여인은 젊은 시절에 사랑을 완전히 짓밟힘을 당해서 남성에 대한 증오심이 있어서 항상 그렇게 그림을 그린다고 합니다. 서양의 속담에 '눈은 마음의 창이다.' 그랬습니다. 창은 밖으로 보여주기도 하지만, 밖에 있는 것을 받아들이기도 하는 기구가 창입니다. 내 눈을 통하여 오늘날 나 자신을 둘러싼 많은 것들이, 나의 삶의 여러 상황의 것들이, 그리고 모든 여러가지 사물들이, 사건들이, 정보들이 나의 영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 16절 말씀에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그랬습니다. 안목의 정욕, 보고 싶은 욕망, 끊임없이 미를 추구하는 욕망, 지나친 미를 통하여 눈의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 이것은 결국 사치와 허영을 가져오게 되고, 사치와 허영을 추구하게 되면, 자기 생애를 거기 다 소모하는 그러한 잘못된 경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로마의 네로는 지나친 안목의 정욕을 가지고 있어서 로마 시내를 아름답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런고로 방화하게 되었고, 방화의 책임을 기독교인에게 물었던 참 불행스러운 역사의 주인이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창인 눈은 과연 어디로 계속 열려져 있습니까? 요즘은 시청각 정보가 그야말로 물결처럼 여러분의 주변을 휩쓸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소위 PC통신을 통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여러분은 사이버 세계를 통해서 많은 시청각 정보를 받습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선택하기 전에 여러분의 시각으로 분배하는 동안에 벌써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마음에 영향력을 받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보고 선택하지 않으면 되지, 아니올시다. 볼 때, 벌써 영향력을 받습니다. 물결처럼 쓸어오는 시청각적인 정보가 벌써 여러분의 마음을 신문지 화하고,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여러분의 마음을 노예화해버린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정보 사회가 영적 생활에 좋다고만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주 최고로 발전된 소위 시각적 정보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기술이 최고로 발전된 사회 속에 삽니다. 앞으로 눈으로 짓는 죄가 엄청 더 많아질 것입니다. 시네마를 보나 어떤 TV를 보나 마음대로 주인공과 더불어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들이 곧 도래합니다. 지금도 사이버세계는 자기를 마음대로 만들어서 등장시키고, 또 마음대로 사람을 조작해서 만나 교제할 수 있는 그러한 경지에 와 있는 것을 여러분은 다 알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고장에서는 '러브호텔을 짓지 말자.'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뭘 보느냐에 따라서 아이들의 교육은 결정됩니다. 교육은 학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역 사회 전체가 교육의 장입니다. 그런고로 '눈을 지키라.' 눈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그 인격을 지키게 되고, 그 마음을 지키게 된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입을 지키라>
세 번째, 지켜야 할 것은 바로 '입'입니다. 말입니다. 마음을 지키는 구체적인 행위, '입을 지키라. 말을 지키라'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선지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혀는 작지만 인생의 항로를 결정하는 키다.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은 살아가지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하는 말대로 나의 인생이 되어진다는 사실을 한번 정도는 생각해 보셨는지요? 악한 말을 하면, 내가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악한 말을 합니다. 나의 마음속에 작은 악이 말하므로 점점 나의 마음속에 뿌리를 깊이 내립니다. 그리고 악함을 점점 키워서 증폭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마음이 악한 말을 하면 더욱 나의 마음이 악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6절 말씀에 보면,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그랬습니다. '나는 경건하다. 나는 선하다. 나는 충성된 종이다. 나는 매사에 성경대로 산다. 나는 의로운 사람이다.'라고 아무리 자기 스스로 자기가 평가할 수 있다하더라도 만약 그 입술을 재갈 먹이지 아니하면 그는 헛된 경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 중에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사람 중에 자기는 아무리 자기를 봐도 '나는 어쩜 이렇게 제대로 신앙 생활을 할까?' 자평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뒷면에는 자꾸만 상대적으로 타인의 경건에 대해서, 타인의 의에 대해서, 그리고 교역자의 삶에 대해서, 그리고 오늘의 사회에 대해서, 타(他)를 모두 자꾸만 비평, 비난하는 이러한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답답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왜 나처럼 살지 않는가?' 이것은 헛된 경건이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우리는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정녕 내가 한 말에 올무가 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쉽사리 말을 하고, 그 말을 지키지 못하면, 또 그 말대로 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큰 심령적인 변고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즘 입술로 노래하기를 좋아하고, 듣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노래 중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노래를 함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에 평화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질서 있는 노래를 함으로 말미암아 특별히 고전적 음악을 즐김으로 말미암아 나의 인격이 아주 조화로운 인격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을 자극하고, 그리고 너무 지나친 어떤 한 주제로 우리의 인격을 불균형 화하는 음악을 하거나 들으면, 우리의 인격에 큰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대중가요 평론가가 이렇게 평한 글을 보았습니다. '대중가요 가수 중에 슬픈 노래를 많이 부른 사람들은 슬프게 인생을 살다가 끝이 나더라. 죽음의 노래를 항상 부르던 사람은 결국은 오래 못살고 죽더라. 외롭고, 고독한 노래, 이를테면 헤어진다. 나 혼자 살고 싶다. 이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그 말대로 혼자 살더라. 이러니까 엘비스 프레슬리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부르면, 금방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죽는다.' 이런 얘기입니다. 여러분, 그 평론가의 말을 그냥 듣고, 웃고 버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나도 모르게 왜 나의 입술로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노래가 왜 이런 노래이며, 왜 가사가 그런 가사인가를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까? 노래방 좋아하지 마세요. 노래방 가서 찬송만 한다는 거짓말 마세요. '목사님, 노래방도 좋은 노래 많습니다.' 웃기지 말아요. 갔다면 그저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는 노래를 한참하고 옵니다. 여러분, 한번 검색해 보십시오. 노래방 갔다와서 부부의 애정이 더 자랐느냐, 아니면 부부싸움 한 일이 있는지 한번 검색해 보십시오. 24절 말씀, '궤휼을 네 입에서 버리며 사곡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 그랬습니다. '궤휼, 교묘하고 간사한 말.' '사곡, 거짓된 말을 입술에서 버리라.' '입술을 지키라. 말을 지키라.'하는 것입니다.

<발을 지키라>
네 번째, 마음을 지키는 구체 적은 행동, '발을 지키라.' 그랬습니다. 사람은 상황적 존재입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하는냐에 따라서 나도 모르게 나의 마음이 점점 변해 가는 것입니다. 깨끗한 사람이 모인 곳에 가서 늘 그들과 접촉하고 지내면 깨끗한 사람으로 마음이 변합니다. 더러운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서 그들과 함께 교제하면서 지내면 나의 마음이 점점 더러워집니다. 음란한 영을 가진 사람과 자꾸 만나서 카페로 돌아다니다 보면, 나도 역시 음란해집니다. 인간은 상황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발을 왜 지켜야 합니까? 내가 어디에 자기를 갖다놓느냐 하는 책임이 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발을 어디에 갖다 놓습니까? 26절 말씀에 '네 발의 행할 첩경은 평탄케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곳, 그리스도인이 있어야 할 곳, 그리스도인이 머물러야 할 곳, 그리스도인이 뿌리를 내려야 할 곳은 분명히 구분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이런 주제의 글이 있었습니다. 바로 '한줌의 흙'이라 하는 글입니다. 한줌의 흙이 화분이 되었습니다. 그 화분 안에 아름다운 꽃이 심기워 졌습니다. 그리고 그 화분은 거룩한 성전에 성단에 올려져 놓아졌습니다. 한줌의 흙은 최고의 가치가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한 줌의 흙이지만, 성단 하나님 앞에 놓여졌을 때, 그야말로 가장 고상한 존재가 된 것처럼, 여러분이 성전 중심,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공동체 중심, 그리고 신령한 사람과 교제를 더욱 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영성과 여러분의 가치는 높아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임산부 교육이 있는데, 그 중에 태중교육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임산부는 훌륭한 자녀를 낳기 위해서 모서리난 곳에 앉지 마라. 울퉁불퉁한 곳에 앉지 마라. 마루 끝자락에 앉지 마라. 어두운 곳에 오래 머물지 마라. 방석을 놓더라도 자기 자신을 중심에 바로 세워 앉으라. 그러므로 말미암아 그 태안에 있는 아이가 영향력을 받는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신을 어디에 놓느냐? 나의 발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 나의 발이 어머니의 어디에 놓여 있느냐? 여러분, 한번 여러분 스스로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이러므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마음이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음속에 묵상하고, 마음속에 모셔들이고, 말씀이 나의 생명처럼 되게 하라. 그러므로 말미암아 너는 행복한 인생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재산을 지키는 일도 중요합니다. 건강을 지키는 일도 중요합니다. 명예를 지키는 것도 중요합니다만은 가장 중요한 일은 나의 마음을 지키는 일이에요. 이 가을에 마음을 지키셔서 '나는 진정 하나님의 축복이 충만한 사람이구나.'하는 느낌으로 이 가을을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윤대영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