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24
어린 아이가 그들을 인도하게 하라 (사11:1-9)
여러분 각자에게 존경하는 인물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그 존경하는 인물이 실제 인물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공상세계의 인물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도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존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은 에이브라함 링컨입니다. 저는 번역된 그의 전기를 1956년 중학생 때에 산 것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미래에 평화를 위해 일할 한 인물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그 인물은 아주 특별한 가문에서 신비스럽게 태어나지 않고, 매우 보잘 것 없는 평범한 상황에서 태어날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특별한 인물이 태어날 때, 그것도 왕과 같은 지위에 앉을 인물은 평범한 가문이 아닌 특별한 가문의 혈통에서 태어나는 것이 알려진 상식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예언된 인물은 그렇지 못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거들떠 보지않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가문에서 태어납니다. 본문에 "이 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줄기'라는 말은 겉으로 보기에 거의 싹이 돋아날 가망이 없이 보이는 마른 나무 밑둥을 뜻합니다. 우리가 산이나 들을 거닐다가 거의 다 말라버린 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나무는 지나가는 등산객이나 행인들의 아무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본문에 예언된 한 인물이 태어나는 이새의 집안도 세인의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는 명문의 집안도 아닙니다. 너무 평범한 집안입니다. 그리고 역사적 시기도 이 이새의 집안에 대한 기억이 거의 다 잊혀지다시피 한 오랜 세월이 지난 후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시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한 인물이 태어나서 매우 중요한 일을 성취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중대한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매우 해독을 끼친 사람들입니다.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은 유익한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큰 해독을 끼친 사람들은 어린 유아시절부터 정신적 병리현상이 될만한 건전치 못한 가정이나 사회적 환경에서 원인 제공을 받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자신에 대한 경멸, 다른 사람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유익한 일을 한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그러한 부정적인 원인 제공 대신에 그들의 생애에 남다른 동기부여가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이새의 가문에서 태어난 인물은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습니다. 본문에 그에게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영적 은사가 임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 영적 은사가 세 가지 인데 다음과 같습니다.
○ 지혜와 총명의 영
○ 모략과 권능의 영
○ 지식과 주를 경외하는 영입니다.
이러한 영적 은사들은 이 세상 통치자들이 가지고 있는 기질들과는 전혀 다른 것들입니다. 이러한 영적 은사들은 사회적으로 어떤 지위를 감당할 수 있는 기술들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 이전에 참 인간이 되는데 있어야 할 영적 은사들입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참된 인간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가 진정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에게 온전히 복종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본문에 이새의 줄기에서 태어날 아니는 하나님께 대해 그러한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입니다.
○ 그의 즐거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 그는 왜곡되고, 거짓된 증거를 가지고 사람을 죽이고 살리지 않고,
○ 특별히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편에 서고,
○ 잔인하고 사악한 자들은 사회에서 뿌리를 박지 못하도록 하 고,
○ 정의와 성실로 그의 옷을 삼습니다.
어느 시대에서나 그러한 인물에 대해 목말라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인물이 나타나기를 고대합니다. 본문에 예언된 인물은 그 어느 한 시대에 태어나 역사 속에서 어느 한 일정한 기간에 그러한 통치를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인류가 소망하고 있는 그러한 평화가 이 세상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도록 성취시킵니다. 그래서 그의 통치는 영원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에 의해 이루어질 궁극적인 평화의 때를 본문에서는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 정경은 너무나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장면입니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땐 아이가 살모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6-8, 표준새번역)
결국 그 때에는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게 됩니다." 모든 적대적인 관계들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때에는 어린 아이가 자유롭게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며 모든 것들을 이끌고 다니게 됩니다.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해 가면서 번득 희망의 빛으로 떠오른 장면이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금년도에 상반기와 하반기에 화요 강좌에서 지속적으로 다루어온 문제가 이 부분과 관련된 것입니다. 화요 강좌를 이끌어 오면서 지극히 부분적이긴 하지만 인간과 자연의 파괴의 주된 원인이 우리 속에 내재해 있는 어린아이의 억압과 학대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잔인해져 가고, 포악해져 가며, 알코올이나 마약으로 파괴되어 갑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점점 살기 어려울 정도로 생존의 기반이 되는 자연환경이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버질 게오류기의 말대로 정상을 훨씬 벗어난 "25時"의 상황입니다. 그러한 원인들이 나와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들 각자의 자신 안에, 가정에 있습니다. 매우 가깝게 있습니다.
우리가 본래 하나님께로부터 창조의 선물로 받은 우리의 진정한 자아(Real self)는 "자발적이며, 포용력이 있고, 사랑하며, 나누어 주며, 의사소통을 잘하며,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을 용납합니다. 그리고 기쁨과 고통의 감정을 자유롭게 느끼며 자기의 감정을 잘 표현하며,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창조적입니다." "그러한 상태를 가장 높고, 성숙되고, 발전된 언어로 표현한다면 '어린이 같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어린 아이와 같은 속성들이 가정에서부터 제대로 잘 양육되어야 하는데 거의 그렇지 못합니다. 결핍되고 왜곡된 구속받지 못한 가정에서 이같은 어린 아이의 속성은 거의 억압되고 상처입게 됩니다. 그 대신 우리의 진정한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학대, 수치심, 굴욕감, 죄책감, 비판, 비웃음, 속임, 배반, 상처줌, 잔인함, 얕봄, 지나친 선심, 두려움, 완벽주의와 같은 정신적·정서적 상처들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한 것들을 경험하는 것으로 끝나면 다행인데, 그러한 내적 경험과 함께 우리의 행동 표현들은 우리의 진정한 내적 자아와는 너무 거리가 먼 꾸밈, 가면을 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한 유형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 공동체는 음모, 술수, 거짓, 불의, 해침, 파괴 뿐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고 한 말씀과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는 우리 속에 있는 어린 아이가 맘대로 자신을 표현하며 살 수 있는 세상이 못됩니다. 어린 아이는 억압되고, 상처받고, 아파하고, 고통합니다. 그 대신 거짓된 연기들만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일 큰 비극은 우리들에게 평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평안을 상실한 사람들이 이루어 가는 세상 역시 분열, 파괴 뿐입니다.
본문에 우리에게 희망으로 다가오는 빛은, 이새의 줄기에서 나오는 그 분으로 인해 상처입고, 억압된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한 어린 아이들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거짓, 가식, 꾸밈과 같은 허구적인 가치들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지 않고, 어린 아이-진정한 참 우리 자신-가 모든 것을 인도해 가는 때가 예언되어 있습니다.
대강절의 참된 의미는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새싹과 함께 우리 안에 있는 죽은 새싹이 다시 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때를 바라보며 우리 속에 있는 어린 아이와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한 번도 웃어보지 못하고, 기뻐해보지 못하고, 늘 음지에서 슬퍼하며, 고통하던 우리의 어린 아이가 그 분의 오심, 그 분의 약속을 바라보며 기뻐 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강절에 이제는 우리 속에 있는 어린 아이와 함께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데 우리의 희망과 기쁨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다 말라 버리고, 죽어버린 밑둥에서 새로운 싹이 돋아납니다. 그것은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를 경외하는 영이 우리에게로 내려 오시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돋아난 새싹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미 앞서 돋아난 새싹이 열매를 맺었기 때문에 그 분의 영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게 될 때 우리의 새싹도 열매를 맺습니다.
금번 대강절은 새롭게 시작되는 2000년의 첫 번째 대강절입니다. 이 뜻깊은 대강절에 임씨의 줄기에서, 김씨·박씨·이씨의 줄기에서 새싹이 돋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한 많은 이 한민족의 줄기에서 새싹이 돋아나 아름답게 열매 맺어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지금 나타나 있는 이러한 사회 현상으로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는 삶의 형태들은 생명의 뿌리가 없는, 그것과는 단절된 가운데서 만들어 낸 허구적인 행위들이기 때문에 희망이 없습니다. 오늘의 우리의 현실은 어린 아이의 속성들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시대가 아니라 거짓된 가치, 허구적인 충동들이 현실에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어린 아이의 속성들은 억압되고 수동적으로 꾸며가는 삶들이 난무하는 세상입니다. 그 결과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사람들은 자꾸 소외되어 가고, 그들은 적응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가고, 수동적이고 자기자신을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꾸며가는 사람들만이 살아가기 편한 세상이 되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 어느 부분을 드려다 보아도 실질적이고 영속적인 것들은 찾아보기 어렵고 거의가 다 순간적이고 피상적인 것들, 겉보기 번지르한 것들로 공간을 메우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모든 것을 인도해간다는 것은 우매하고 수동적이고, 출세지향적인 삶의 방식들이 그 시대를 이끌어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가 모든 것을 인도해 간다는 것은 꾸밈이 없는, 거짓으로 자신을 위장하지 않는, 어린 아이의 속성들이 사람들의 삶을 이끌어 가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순수하고 아름답게 표현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분위기를 의미합니다.
어느 시대이건 그 시대 어린 아이들이 억압되거나 상처입지 않고 그들의 속성을 그대로 실현해 갈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그 시대는 진정 평화로운 시대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그러한 시대는 거의 없었습니다. 거의가 다 그와는 반대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곳곳에서 어린이 학대들이 이루어지고 있고 우리의 가정 역시 어린이들이 꽃피어날 수 있는 곳이 못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내면에 있는 어린 아이의 속성이 얼마나 억압되고 학대되고 있는가를 객관적으로 잘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금번 대강절에 우리의 내면에 있는 어린 아이들이 다시 새롭게 치유되고 우리 각자의 삶들이 그들에 의해 인도되어 가게 된다면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와 우리는 좀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왜곡된 삶, 이그러진 삶, 병든 삶들이 치유되고 온전케되는 길은 먼저 우리의 내면에 있는 어린 아이들이 치유되어 가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금번 대강절에 우리의 마음에 새로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아이가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를 경외하는 영으로 자랄 수 있다면 우리의 미래는 매우 밝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새싹으로 성취된 평화의 그 나라로 다가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가 모든 것을 인도해 간다는 것은 영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삶이 거짓과 꾸밈으로 일관해 가는 것에서 벗어나 우리 속에 있는 신성한 어린 아이가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간다는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사는 환경이 그러한 평화의 분위기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새로운 천년을 기다리며 금번 대강절에 우리의 삶에 신성한 어린 아이의 영이 임하여 억압되고 상처 입은 우리 속에 있는 어린 아이가 희망과 기쁨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평강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기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외적으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주님의 평강은 우리의 내면에 있는 어린 아이가 기뻐 뛰며 춤추는 데서부터 이루어 집니다.
출처/임영수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