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믿음을 더하소서  (누가복음 17:5-10)


미국 미조리주 헤밀톤에 사는 페니라는 소년이 있었는데, 집이 가난하여 잡화점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잡화점의 주인이 물건을 속여서 파는 모습을 자주 본 페니는 어느 날 저녁에 식사를 하면서 가족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그의 아버지는 당장 그 가게에서 나오라고 했습니다. 결국 페니는 다른 곳으로 직장을 옮겼고, 정직과 진실을 생활신조로 삼아 열심히 일했습니다. 후에 그는 사업가가 되어 그의 회사의 지점이 미국 전역에 2,000개나 되는 실업계의 저명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1920년, 세계 경제 대공황을 맞아 파산을 당한 그는 전 재산인 4,000만 달러를 모두 잃고, 무서운 질병까지 얻어 입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괴로움 속에서 절망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그때, 병원 복도에서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라는 찬송가가 들려왔습니다. 그 찬송가를 들은 페니는 병원 예배실에 가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제 능력으로 이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맡기고 기도한 그는 모든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서 짊어지시고, 자신의 몸과 마음은 가벼워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훗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그 이전에는 사실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고, 내가 피땀 흘려 번 돈이므로 내 마음대로 쓸 권리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나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어 내 모든 것을 주님 것으로 알고, 교회와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사업을 한 결과 다시 훌륭한 기업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최고의 품질, 친절한 서비스를 내세우며 기업을 경영함으로써 모범적인 기업인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예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 또한 세상을 변화시키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저 허다한 '무리'가 아닌,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 10:19)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권세와 영향력을 가진 제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 함께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1. 우리는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기를 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제자가 가져야할 자세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형제를 실족케 하지 말 것과, 죄를 경계할 것, 그리고 회개하는 형제를 끊임없이 용서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죄에 빠져들게 할 수 있음을 경고하시면서,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데 따른 책임을 무겁게 묻겠다고 하셨습니다.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눅 17:2).
이러한 예수님의 단호한 의지는 제자들을 바짝 긴장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그가 회개한다면, 끊임없이 그를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눅 17:4)
보통 사람으로써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이런 일을 하기에 자신들의 믿음은 너무나 모자라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께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눅 17:5). 지금 가지고 있는 믿음으로는 도저히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제자로 온전히 설 수 없으니, 믿음의 분량을 보충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답변은 뜻밖이었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6절) 지금 제자들은 '작은 믿음'을 아쉬워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이라도 있다면 분명한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제자들은 '믿음의 분량'에 초점을 맞춘 반면, 예수님께서는 믿음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임을 분명히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씨앗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땅에 심으면 일년생 식물인 겨자가 자라나게 됩니다. 핵심은 씨앗에 담겨있는 생명입니다. 아무리 큰 돌멩이를 땅에 심어도 거기서 나무가 자라고 열매가 맺히지는 않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더라도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믿음은 이와 같은 생명력입니다. 양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살아있는 씨앗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이 있다면 지금 비록 작아보여도, 더디게 보여도 반드시 큰 일을 이루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분을 왕으로 섬기는 믿음을 말합니다. 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역사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아직 자기가 주인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기가 왕입니다. 그래서 자기 뜻대로 합니다. 자기 주장대로 합니다. 자기 혈기대로 합니다. 자기 성격대로 합니다. 그것은 생명이 없는 믿음입니다. 돌멩이를 심으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것처럼 죽은 믿음으로는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노동자들이 터널공사를 하다가 그만 터널 입구가 무너져 완전히 갇혀버리고 말았습니다. 터널 밖에서는 야단이 났습니다. TV, 라디오 기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밖에 있는 노동자들은 침착하게 흙더미를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구조가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터널에 갇혀 있는 노동자들이 터널에 갇혀 있었으면서도 일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했다고 합니다. 기자들의 질문에 그들은 동료들이 자기들을 구출할 것을 믿었기 때문에 평소처럼 열심히 일했다고 대답했습니다.
비록 작은 신앙이라도 진실한 신앙을 가진 이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가운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당황치 않고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을 수량적으로 더하려는 허욕과 조급을 품지 말고, 진실한 신앙의 위력을 믿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참 믿음을 더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제자는 곧 예수님의 종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제자도'는 곧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참 제자에 대해 가르치면서 그 당시 농경사회의 주종관계를 비유로 들었습니다. 그 당시의 '노예'는 요즘 회사의 종업원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지금은 아무리 회사의 종업원이라고 해도 직무상 상하관계이지, 신분상의 상하관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일과 후에는 자유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노예제도가 엄격한 고대 사회에 있어서 주종관계는 절대적인 상하관계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주인과 하인의 관계를 제자의 모습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하인은 주인의 밭을 갈거나 양을 맡아 온종일 수고한 후에도 주인이 집에 들어오면 쉴 사이도 없이 주인의 식사 준비를 하고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항상 주인의 명령을 들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개인의 삶은 언제나 뒷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했다고 주인으로부터 사례를 받는다거나 "잘했다"는 칭찬을 듣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눅 17:10)고 말하며, 오로지 주인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종살이를 하라고 하면 그 반발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의 모습은 바로 이러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종이라는 말은 구원론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는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고서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자가 된 것을 기뻐하고 찬송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18)
[웨슬리 후버]라는 사람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노예 표시가 붙은 인간이다. 그러나 의(義)의 노예이지 죄의 노예는 아니다. 또 순결의 노예이지 부도덕한 노예는 아니다. 나는 자유의 노예이지 방종의 노예는 아니다. 주님 나라의 노예이지 군중의 노예는 아니다. 신앙의 노예이지 공포의 노예는 아니다. 그리고 특별히 주님의 노예이지 부의 노예는 아니다. 이처럼 나는 주님의 쇠사슬에 묶인 노예이므로 주님 사업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처럼 주님의 종이 되어 주님이 뜻하시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3. 우리는 주님의 자발적인 종입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십니까? 아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직함 중에 가장 자부심을 나타낼 수 있을 만한 것으로 자신을 소개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롬 1:1)이라고 소개하곤 했습니다. 바울은 본래 베냐민 지파의 바리새인이요,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이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해 자랑스럽게 소개할 것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인정해줄만 것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소개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교회에서 '주의 종'이라는 말이 존경의 대상이 되는 말이지만, 2 천 년 전에 '누구의 종'이라는 말은 스스로를 한없이 비하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특권층임을 내세우지도 않았고,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웠다는 학벌을 내세우지도 않았고, 베냐민 지파 출신의 바리새인이라는 가문을 내세우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내세웠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억지로 누구의 종이 되는 것은 비참한 일이지만, 자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바울은 편지를 쓸 때마다 고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철저한 종의 모습을 보여주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영광과 존귀 대신, 죄인들을 대신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철저한 종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종됨은 누구의 강요도 아닌 인간사랑에 기인한 자발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종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마지막 유월절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만으로 굳어진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면서 종으로써의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왜 지존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종으로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셨겠습니까? 이는 예수님이 손수 발을 씻어 준 제자들 또한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는 종이 되어 섬기라는 의미였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바울은 이러한 섬김의 본을 따라 평생동안 섬기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기꺼이 종으로 섬기는 모습이야말로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마이클 그리피스의 책 "기억상실증에 걸린 교회"에서도 말한 것처럼, 오늘날 교회가 이러한 정체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어버리고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섬기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를 이 민족과 세상을 섬기는 교회로 세워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은 지금도 무릎을 꿇고 우리의 발을 씻고 계십니다.
특별히 저는 우리 교회에서 봉사하는 성도들에게 고마운 마음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교사, 찬양대원, 구역장, 전도대원, 차량안내 위원들 모두가 예수님의 섬김의 도를 따라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감사한 지 모릅니다.
16세기 문예부흥 시대에 독일은 국민 교육을 위해 두메산골에 많은 학교를 세우고 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한 남선생이 꿈을 가지고 시골 학교에 갔는데 더벅머리에 남루한 옷을 입은 소년 소녀들을 보고 실망하여, 아이들에게 "내일 학교 올 때는 머리 깎고 세수하고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 오너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머리 깎을 가위도, 세수할 비누도, 갈아입을 새 옷도 없는 아이들은 다음날 아무도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실망한 교사는 포기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 다른 교사도 마찬가지로 도저히 다룰 수 없는 아이들을 포기하고는 되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마침 자원하는 한 여선생이 있어 그녀를 파송하였습니다. 그녀는 두메산골의 지저분한 아이들을 보고는 "사흘 후에 다시 올 터이니 그때 종치면 모이라."고 말하고는 어디론가 가 버렸습니다. 학생들은 선생님이 또 도망갔다고 생각을 했지만 혹시나 하고 사흘 후에 학교에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미리 와 있던 여선생의 손에는 가위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그 여선생은 머리를 하나하나 깎아 주고는 비누로 얼굴을 닦아주고, 가지고 온 새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모두 예쁘고 단정한 아이들이 되어 기쁜 마음으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퍼져 나가자 전국에서 그와 같은 사랑의 봉사 운동이 일어나게 되니 독일에서 문맹이 퇴치되고 시골 구석구석에도 학문이 가능한 세계의 일등 국민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 여교사의 자발적인 헌신이 역사를 바꾸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강남교회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의 뜻대로 구원을 받았으니 주님의 몸된 교회에 충성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겨야 합니다. 그 일에 우리 모두 나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겨자씨만한 믿음을 더하여 주님의 종으로 헌신할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요, 주님의 제자로 세상에서 큰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