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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잔치 (사 55:1~5 .눅 10:38~42)
사람들은 나이를 많이 먹게 되면 대체로 보수적인 성향으로 바뀌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나이 많은 사람들 중에는 급진적인 개혁을 부르짖는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노 대통령 때문에 사는 것이 힘들어졌다고 불평하곤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런 사람들 중에도 청와대에서 열리는 파티나 만찬에 초대를 받을 것 같으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전혀 없는 이야기를 꾸며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잘 아는 친구가 그렇게 하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봤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사실 청와대라고 해서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오늘 우리도 초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잔치로 초대하는 초청장을 선지자 이사야가 오늘 우리에게 주고 있지 않습니까? 인간은 본질적으로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비록 풍성한 잔치가 아닐찌라도... 인간은 먹지 못하면 죽게 된다는 말입니다. 밥이 없으면 인간은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때문에 배고픔과 목마름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목이 마른 사람에게는 물을 마시게 하고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먹게 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이런 기본적인 욕구조차 충족시킬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선지자는 목마르고 배고픈 사람들 모두를 잔치에 오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청장을 자세히 살펴 보면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잔치에 와서 먹고 마셔야 할 사람들이 엉뚱한 곳에서 헛수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 없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불할 가치가 없는 헛된 것들을 구입하려고 돈을 허비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가치없는 것들을 위해서 헛된 수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오늘 저는 그 대표적인 이유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교회에 대한 오해가 쓸데없는 것을 위해서 돈과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결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그 어떤 것이 아닙니다. 돈 없는 자들도 와서 먹고 마실 수 있는 구체적인 잔치입니다.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서 미리 경험할 수 있는 교회 공동체의 삶은 식탁을 통해서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밥상에서 만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봐도 초대교회 성도들이 함께 떡을 떼는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또한 초대교회는 사유 재산에 대한 권리 주장을 스스로 유보하는 모습을 통해서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미리부터 보여 주었습니다. 식탁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게 된 교회는 소유가 더 이상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그 돈을 이웃과의 거룩한 만남과 사귐의 터를 닦는 일에 기꺼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웃을 섬기는 일에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교회는 가난에 대해서 예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고,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일에 헌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같은 초대교회의 모습에 비추어 볼 때 오늘 우리가 굶주리고 있는 북의 동포들을 무조건적으로 돕는 것은 잘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쓸데없는 낭비라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경제 논리를 초월하는 거룩한 낭비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한 오늘 가난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서도 한국교회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넉넉한 가운데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가난하지만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서로의 형편을 헤아릴 때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구제를 위한 기관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드린 십일조 헌금과 구제 헌금은 지체없이 본래의 목적대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끼니를 이을 수 없어서 결국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이웃을 살리는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아낌없이 사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는 모든 것을 돈으로만 따지려고 하는 인간의 그릇된 욕망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자 완전한 극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우리의 욕구를 값없이 채워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 누구라도 돌아가서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푸짐하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놓쳐서는 아니 될 것은 이 잔치의 중심에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크고 놀라운 사랑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살과 피를 생명의 떡과 생명의 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풍성한 잔치의 주인이시라는 말입니다.
오늘 봉독한 누가복음의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는 이 잔치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영접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언니인 마르다는 예수님을 잘 대접하기 위해서 무척이나 분주했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예수님 발 곁에 앉아서 말씀만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에게 가서 마리아로 하여금 자기를 좀 거들도록 해 달라고 했습니다. 오죽하면 마르다가 그런 청을 했을까요? 모두들 분주한데 자기만 편하게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는 오늘 우리가 봐도 정말 얌체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마르다를 책망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기쁨을 마리아에게서 빼앗으려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리아는 자기 방식대로 예수님을 영접했고 그 방식을 예수님은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거룩한 만남과 사귐입니다. 교회가 거룩하다고 하는 이유는 세상의 그 어떤 다른 단체와는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별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거룩하다는 것입니까? 먼저, 거룩한 생명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체험한 사람들 가운데 일어나는 만남과 사귐이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향우회, 동창회 또는 무슨무슨 동호회 등과는 전혀 다른 근거 위에 서 있지 않습니까? 또한, 그 거룩한 생명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체험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그 만남과 사귐으로 초대하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그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체험이 증인을 만듭니다. 증인이 무엇입니까? 증인은 결코 뭔가를 감추는 사람이 아닙니다.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증거하는 사람이 증인입니다. 증인은 그 증언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세리와 죄인, 창녀 등 이 세상의 가장 비천한 자들에게도 와서 함께 먹자고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을 통해서 오늘 우리도 죄사함의 강력한 은총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기만 해도 우리가 씻김을 받고 사죄의 은총을 맛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거룩한 만남과 사귐은 항상 이와 같은 사랑과 기쁨의 능력으로 가득 차게 마련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고달픈 세상을 사는 누구든지 생명의 떡과 생명의 물을 풍성하게 먹고 마실 수 있는 잔치입니다! 그 풍성한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 누구든지 증인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출처/강석공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