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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념하라 (고린도전서 11: 23~16)
어떤 불량배가 있었습니다. 거의 매일 술을 먹고 밤늦게 돌아 왔습니다.
홀어머니가 병을 앓다가 돌아가셨는데 이 사람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시간에도 친구들과 어울려 나쁜 짓을 하느라고 그 자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임종하신 다음에야 그 사실을 연락 받고 허겁지겁 달려왔습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룬 다음에 이 불량배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 주로 건전하지 못한 친구들과 관계를 끊었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힘써 그렇게 했습니다.
정당한 직업을 구해 땀 흘리며 일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변할 수 있나?’하였습니다.
놀라면서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충격으로 일시적으로 그러는 것이겠지. 얼마 가지 않으면 다시 예전 생활로 돌아갈 거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계속해서 선한 생활을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 사람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 왔을 때 어머니의 시신 옆에는 어머니가 늘 읽으시던 성경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 위에 봉투 하나가 있었습니다. 열어보니 연필로 쓴 어머니의 유서였습니다.
내 아들아, 나는 병이 점점 악화되어 언제 세상을 떠날 지 알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혹시 이 말을 할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이렇게 미리 써 둔다. 나는 네가 좋은 사람, 바른 생활을 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세 번씩 기도했단다. 늘 밤늦게 술에 취해서 들어오는 네가 실족하지 않도록 많은 비용을 들여 집 앞에 개인 가로등을 설치하고 매일 내가 스위치를 올렸단다. 너는 부디 착한 사람이 되어라. 무엇보다도 세상의 빛이신 예수를 꼭 믿고 따르기 바란다. 이 에미의 마지막 소원이다. 꼭 그렇게 해서 이 다음에 천국에서 너를 다시 만날 수 있기 바란다.
서툰 글씨로, 있는 힘을 다 짜내서 쓴 유서였습니다.
곳곳에 어머니의 눈물 자국이 배어있었습니다. 구구절절이 가슴을 찔렀습니다.
그때서야 이 불량배는 골목 안, 자기 집 앞에 가로등이 하나 있고 자기가 들어올 때는 언제나 환하게 불이 켜져 있고 자기가 들어온 다음에는 불이 꺼지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어머니의 이 마지막 부탁 때문에 이 사람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결심이 흔들릴 때, 유혹을 받을 때, 힘든 일을 만났을 때는 어머니의 유서를 보면서 마음을 바로 잡았습니다.
유언, 마지막 말, 마지막 명령은 이와 같이 힘을 갖습니다.
어머니 개구리의 말을 그렇게 듣지 않던 청개구리도 어머니의 마지막 말, ‘내가 죽으면 나를 냇가에 묻어다오.’ 하는 것을 지켰습니다.
링컨이 인류를 위해 그와 같이 훌륭한 일을 한 것에는 그의 생모가 남긴 유언이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어머니 낸시 여사는 링컨이 열 살 때 말라리아에 걸려 세상을 떠났는데, 세상을 떠날 때 병으로 여읜 손으로 링컨의 손을 꼭 잡고 하나님을 잘 믿고, 정직하게 살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 “나를 기념하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 말이 바울의 편지를 빌어 간접적인 형태로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는데 누가복음 22장 19절에는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이렇게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 뒤에도 여러 말씀을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말씀이 있고 부활하셔서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그렇기는 해도 성격으로 볼 때 예수님이 잡히시기 직전에 하신 이 말씀은 예수님의 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념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기념하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기념이라는 말은 기억이라는 말과 거의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기억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그의 삶, 그의 가르침 모두를 기억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몸 전체를 내 주셨다, 자기의 피를 흘리셨다,’ 예수님의 구원 사건, 이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것들은 좀 희미하게 기억하더라도 이것은 분명하게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성찬식에서 떡과 잔을 나눌 때 찬양대가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찬송가 185장을 불렀습니다.
이 찬송은 프랜시스 리들리 해버갈(Frances Ridly Havergal)이라는 영국의 여류 신앙인이 작사를 했습니다. 이 분은 재능이 많은 분인데 몸이 약했습니다.
한 동안 독일에서 정양생활을 했는데 그 때 어느 목사님이 서재를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서재에는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린 성화가 걸려 있었고 그 성화의 밑에는 그 그림의 제목 ‘이 사람을 보라’ 이렇게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목 밑에 목사님이 적은 메모가 있었는데
나는 너를 위해 이같이 했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 그림과 그 메모에서 충격과 도전을 받고, 또 영감을 얻어서 만든 것이 이 찬송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찬송가의 가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 찬송가의 가사를 기억하라는 것은 이 찬송의 가사를 암기해서 보지 않고 부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찬송가 가사의 뜻을 이해하고 내 것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수험생들이 공부를 하는데 그 내용을 이해하고 암기하면 암기하기가 쉽습니다.
쉽게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응용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산 지식이 됩니다.
요즘에는 이런 것을 ‘육화(肉化)된다.’고 많이들 말하더군요.
이해하지 않고 그저 외우면, -수험생들은 이런 것을 깡으로 외운다고 하지요- 쉽게 잊어버립니다. 암기는 했는데 그것이 무슨 내용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몸 버려 피 흘려 내 죄를 속하여 주셨다는 말이, 살길을 주셨다는 말을 깡으로 기억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주님 정말 그렇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아멘’ 해야 합니다.
이 찬송이 그 독일 목사님과 이 찬송 작사자의 고백만이 아니라 나의 고백이 되어야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그의 몸을 희생한 것, 예수님이 한없는 용서와 참 사랑 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그것을 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말씀의 하나로 그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나를 기념하라”하셨습니다.
거창한 기념사업을 하라고 해도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인데 예수님은 그저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청개구리보다도 못한 신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부족해서 그 사실을 잊어버릴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잊지 않도록 떡과 잔을 가지고 인상적인 행동을 하셨습니다.
데몬스트레이션을 하셨습니다.
떡이나 잔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늘 대하는 것입니다.
떡을 가지고 감사 기도를 하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었습니다.
떡을 떼신 것은 자기 몸이 찢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잔을 가지고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말과 글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따라 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행한 성찬식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그 불량배가 어머니의 말씀을 그저 말로만 들었다면 그는 한동안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에 따라 착한 생활을 하다가 다시 예전 생활로 돌아갔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불량배에게는 어머니의 눈물 젖은 편지가 있었습니다.
그 편지와 같은 것입니다.
백 년 전쯤에 평양에 이기풍(李基豊)이라는 혈기가 넘치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 때 일본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가 우리나라를 넘보고 있는 것이 속이 상하는 판인데, 평양에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서툰 한국말로 ‘예수를 믿으시오.’ 하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서양 사람들을 양이(洋夷), 서양 오랑캐라고 불렀습니다.
이기풍은 어느 날 밤, 숨어서 기다리다가 그 서양 선교사를 실컷 때려 주었습니다.
큰 돌로 얼굴을 내리쳐서 피가 철철 나게 만들었습니다.
그 이기풍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서양 선교사를 찾아가서 진심으로 빌었습니다.
그 서양 선교사는 사무엘 마펫이라는 장로교 선교사였습니다.
이기풍은 그 선교사가 자기를 야단치면 야단맞고, 관가에 고발하면 잡혀갈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선교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해 이것과 비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기풍은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깨닫고 조사, 요즘 말로 전도사가 되었고 평양에 세워진 장로교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마펫 선교사가 그 신학교의 교장이었습니다. 이기풍 신학생, 이기풍 조사가 말을 안 들을 때면 마펫 선교사에게는 한 가지 묘약이 있었습니다.
어떤 묘약일까요?
안 그런 척 하면서 손으로 이기풍이 돌로 때려서 난 얼굴의 상처의 흉터를 한 번 쓱 쓰다듬기만 하면 만사 OK 였습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참여한 떡과 잔이 이 선교사의 얼굴에 난 흉터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기 바랍니다.
예수님에게서 좀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까?
이 성찬이 계기가 되어 다시 예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되기 바랍니다.
내 삶의 우선순위 1번에 예수님 말고 다른 것이 올라오려 하고 있습니까?
이 성찬이 계기가 되어 그것 물리치고 예수님을 우선순위 1번에 올려놓으시기 바랍니다.
1907년에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식이 있었고 이기풍을 비롯하여 일곱 명이 졸업을 했습니다. 이들은 바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장로교에서는 그 가운데 한 명을 제주도에 선교사로 보내려고 했습니다.
그 때 제주도는 가기 불편하고 생활습관이 아주 달라서 외국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제주도에 가는 목사는 공식으로 선교사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안수 받은 장로교 첫 목사 일곱 명이 있는 자리에서 누가 가겠느냐고 했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이기풍 목사님이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서 자원을 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막내 따님이 회고에 따르면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자 마펫 선교사님이 이기풍 목사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은 그 얼굴의 흉터를 보았겠지요.
그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리고 이기풍 목사님의 사모님이 권면을 해서 자원을 했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제주도 선교의 개척자가 되었습니다.
제주도에는 이기풍 목사님의 선교기념관, 기념비 등 여러 가지 기념물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피 흘리신 것을 기억할 때, 깡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건성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진정으로 기억할 때, 우리는 감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값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쳤다. 다른 사람 아닌 예수님,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 이것을 알면 어떻게 나를 시시하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변화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변화된 삶이라는 것이 참 무섭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감리교 본부에 갖다가 그 앞에 있는 교보문고에 들려서 ‘어떤 책들이 새로 나왔나?’ 살피는데 누가 어깨를 툭툭 칩니다.
눈을 들어보니까 누군가 얼굴 전체로 환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학교 다닐 때 그 학교를 대표하던 유명한 주먹이었습니다. 같은 학년은 아니었지만 그런 학생이 있다는 것을 모두 부끄럽게 여기고 피하던 학생이었습니다.
그가 새로운 소명을 받아 목사가 된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도 ‘의외이다’ 싶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그동안 박사학위 과정을 공부해서 이제 논문을 쓰려고 하는데 자료를 구하기 위해 나왔다고 했습니다.
아, 정말 놀랐습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와는 철저하게 담을 쌓고 지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느냐고 했더니 ‘이런 주제입니다.’ 하는데 쉬운 것이 아닙니다. 공부하기 쉽지 않은 나이인데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변화시키는데 정말 철저하게 변화시키는구나!’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신 것을 기억할 때 나아가서 남을 위한 삶을 살게 됩니다.
아니, 그런 삶을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장기이식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할 때가 있습니다.
장기이식을 받은 사람들, 누군가가 자기 몸의 일부를 내주어서 살게 된 사람이 공동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고마운 분이 나를 위해 자기 몸의 장기를 주어 나를 살게 해 주셨으니 이제부터 나도 남을 위해 살기에 힘쓰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몸의 일부를 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전부를 내주셨습니다.
감격이 있는 삶, 나를 값있게 여기는 삶, 변화된 삶, 남을 위해 사는 삶, 고귀한 삶입니다.
이것이 삶으로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가장 잘 순종하는 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으로 예수님을 기념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가운데 하나, “나를 기념하라” 이 짧고, 강하고, 단정적이고, 그리고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이 담긴 이 말씀에 따라,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을 기념하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오늘 성찬예식을 통해 우선 올해의 남은 석 달은 정말 그런 삶을 살겠다고 예수님 앞에 약속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유관지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어떤 불량배가 있었습니다. 거의 매일 술을 먹고 밤늦게 돌아 왔습니다.
홀어머니가 병을 앓다가 돌아가셨는데 이 사람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시간에도 친구들과 어울려 나쁜 짓을 하느라고 그 자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임종하신 다음에야 그 사실을 연락 받고 허겁지겁 달려왔습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룬 다음에 이 불량배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 주로 건전하지 못한 친구들과 관계를 끊었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힘써 그렇게 했습니다.
정당한 직업을 구해 땀 흘리며 일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변할 수 있나?’하였습니다.
놀라면서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충격으로 일시적으로 그러는 것이겠지. 얼마 가지 않으면 다시 예전 생활로 돌아갈 거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계속해서 선한 생활을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 사람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 왔을 때 어머니의 시신 옆에는 어머니가 늘 읽으시던 성경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 위에 봉투 하나가 있었습니다. 열어보니 연필로 쓴 어머니의 유서였습니다.
내 아들아, 나는 병이 점점 악화되어 언제 세상을 떠날 지 알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혹시 이 말을 할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이렇게 미리 써 둔다. 나는 네가 좋은 사람, 바른 생활을 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세 번씩 기도했단다. 늘 밤늦게 술에 취해서 들어오는 네가 실족하지 않도록 많은 비용을 들여 집 앞에 개인 가로등을 설치하고 매일 내가 스위치를 올렸단다. 너는 부디 착한 사람이 되어라. 무엇보다도 세상의 빛이신 예수를 꼭 믿고 따르기 바란다. 이 에미의 마지막 소원이다. 꼭 그렇게 해서 이 다음에 천국에서 너를 다시 만날 수 있기 바란다.
서툰 글씨로, 있는 힘을 다 짜내서 쓴 유서였습니다.
곳곳에 어머니의 눈물 자국이 배어있었습니다. 구구절절이 가슴을 찔렀습니다.
그때서야 이 불량배는 골목 안, 자기 집 앞에 가로등이 하나 있고 자기가 들어올 때는 언제나 환하게 불이 켜져 있고 자기가 들어온 다음에는 불이 꺼지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어머니의 이 마지막 부탁 때문에 이 사람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결심이 흔들릴 때, 유혹을 받을 때, 힘든 일을 만났을 때는 어머니의 유서를 보면서 마음을 바로 잡았습니다.
유언, 마지막 말, 마지막 명령은 이와 같이 힘을 갖습니다.
어머니 개구리의 말을 그렇게 듣지 않던 청개구리도 어머니의 마지막 말, ‘내가 죽으면 나를 냇가에 묻어다오.’ 하는 것을 지켰습니다.
링컨이 인류를 위해 그와 같이 훌륭한 일을 한 것에는 그의 생모가 남긴 유언이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어머니 낸시 여사는 링컨이 열 살 때 말라리아에 걸려 세상을 떠났는데, 세상을 떠날 때 병으로 여읜 손으로 링컨의 손을 꼭 잡고 하나님을 잘 믿고, 정직하게 살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 “나를 기념하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 말이 바울의 편지를 빌어 간접적인 형태로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는데 누가복음 22장 19절에는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이렇게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 뒤에도 여러 말씀을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말씀이 있고 부활하셔서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그렇기는 해도 성격으로 볼 때 예수님이 잡히시기 직전에 하신 이 말씀은 예수님의 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념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기념하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기념이라는 말은 기억이라는 말과 거의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기억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그의 삶, 그의 가르침 모두를 기억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몸 전체를 내 주셨다, 자기의 피를 흘리셨다,’ 예수님의 구원 사건, 이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것들은 좀 희미하게 기억하더라도 이것은 분명하게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성찬식에서 떡과 잔을 나눌 때 찬양대가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찬송가 185장을 불렀습니다.
이 찬송은 프랜시스 리들리 해버갈(Frances Ridly Havergal)이라는 영국의 여류 신앙인이 작사를 했습니다. 이 분은 재능이 많은 분인데 몸이 약했습니다.
한 동안 독일에서 정양생활을 했는데 그 때 어느 목사님이 서재를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서재에는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린 성화가 걸려 있었고 그 성화의 밑에는 그 그림의 제목 ‘이 사람을 보라’ 이렇게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목 밑에 목사님이 적은 메모가 있었는데
나는 너를 위해 이같이 했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 그림과 그 메모에서 충격과 도전을 받고, 또 영감을 얻어서 만든 것이 이 찬송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찬송가의 가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 찬송가의 가사를 기억하라는 것은 이 찬송의 가사를 암기해서 보지 않고 부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찬송가 가사의 뜻을 이해하고 내 것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수험생들이 공부를 하는데 그 내용을 이해하고 암기하면 암기하기가 쉽습니다.
쉽게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응용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산 지식이 됩니다.
요즘에는 이런 것을 ‘육화(肉化)된다.’고 많이들 말하더군요.
이해하지 않고 그저 외우면, -수험생들은 이런 것을 깡으로 외운다고 하지요- 쉽게 잊어버립니다. 암기는 했는데 그것이 무슨 내용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몸 버려 피 흘려 내 죄를 속하여 주셨다는 말이, 살길을 주셨다는 말을 깡으로 기억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주님 정말 그렇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아멘’ 해야 합니다.
이 찬송이 그 독일 목사님과 이 찬송 작사자의 고백만이 아니라 나의 고백이 되어야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그의 몸을 희생한 것, 예수님이 한없는 용서와 참 사랑 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그것을 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말씀의 하나로 그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나를 기념하라”하셨습니다.
거창한 기념사업을 하라고 해도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인데 예수님은 그저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청개구리보다도 못한 신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부족해서 그 사실을 잊어버릴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잊지 않도록 떡과 잔을 가지고 인상적인 행동을 하셨습니다.
데몬스트레이션을 하셨습니다.
떡이나 잔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늘 대하는 것입니다.
떡을 가지고 감사 기도를 하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었습니다.
떡을 떼신 것은 자기 몸이 찢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잔을 가지고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말과 글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따라 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행한 성찬식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그 불량배가 어머니의 말씀을 그저 말로만 들었다면 그는 한동안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에 따라 착한 생활을 하다가 다시 예전 생활로 돌아갔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불량배에게는 어머니의 눈물 젖은 편지가 있었습니다.
그 편지와 같은 것입니다.
백 년 전쯤에 평양에 이기풍(李基豊)이라는 혈기가 넘치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 때 일본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가 우리나라를 넘보고 있는 것이 속이 상하는 판인데, 평양에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서툰 한국말로 ‘예수를 믿으시오.’ 하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서양 사람들을 양이(洋夷), 서양 오랑캐라고 불렀습니다.
이기풍은 어느 날 밤, 숨어서 기다리다가 그 서양 선교사를 실컷 때려 주었습니다.
큰 돌로 얼굴을 내리쳐서 피가 철철 나게 만들었습니다.
그 이기풍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서양 선교사를 찾아가서 진심으로 빌었습니다.
그 서양 선교사는 사무엘 마펫이라는 장로교 선교사였습니다.
이기풍은 그 선교사가 자기를 야단치면 야단맞고, 관가에 고발하면 잡혀갈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선교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해 이것과 비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기풍은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깨닫고 조사, 요즘 말로 전도사가 되었고 평양에 세워진 장로교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마펫 선교사가 그 신학교의 교장이었습니다. 이기풍 신학생, 이기풍 조사가 말을 안 들을 때면 마펫 선교사에게는 한 가지 묘약이 있었습니다.
어떤 묘약일까요?
안 그런 척 하면서 손으로 이기풍이 돌로 때려서 난 얼굴의 상처의 흉터를 한 번 쓱 쓰다듬기만 하면 만사 OK 였습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참여한 떡과 잔이 이 선교사의 얼굴에 난 흉터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기 바랍니다.
예수님에게서 좀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까?
이 성찬이 계기가 되어 다시 예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되기 바랍니다.
내 삶의 우선순위 1번에 예수님 말고 다른 것이 올라오려 하고 있습니까?
이 성찬이 계기가 되어 그것 물리치고 예수님을 우선순위 1번에 올려놓으시기 바랍니다.
1907년에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식이 있었고 이기풍을 비롯하여 일곱 명이 졸업을 했습니다. 이들은 바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장로교에서는 그 가운데 한 명을 제주도에 선교사로 보내려고 했습니다.
그 때 제주도는 가기 불편하고 생활습관이 아주 달라서 외국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제주도에 가는 목사는 공식으로 선교사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안수 받은 장로교 첫 목사 일곱 명이 있는 자리에서 누가 가겠느냐고 했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이기풍 목사님이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서 자원을 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막내 따님이 회고에 따르면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자 마펫 선교사님이 이기풍 목사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은 그 얼굴의 흉터를 보았겠지요.
그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리고 이기풍 목사님의 사모님이 권면을 해서 자원을 했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제주도 선교의 개척자가 되었습니다.
제주도에는 이기풍 목사님의 선교기념관, 기념비 등 여러 가지 기념물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피 흘리신 것을 기억할 때, 깡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건성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진정으로 기억할 때, 우리는 감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값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쳤다. 다른 사람 아닌 예수님,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 이것을 알면 어떻게 나를 시시하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변화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변화된 삶이라는 것이 참 무섭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감리교 본부에 갖다가 그 앞에 있는 교보문고에 들려서 ‘어떤 책들이 새로 나왔나?’ 살피는데 누가 어깨를 툭툭 칩니다.
눈을 들어보니까 누군가 얼굴 전체로 환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학교 다닐 때 그 학교를 대표하던 유명한 주먹이었습니다. 같은 학년은 아니었지만 그런 학생이 있다는 것을 모두 부끄럽게 여기고 피하던 학생이었습니다.
그가 새로운 소명을 받아 목사가 된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도 ‘의외이다’ 싶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그동안 박사학위 과정을 공부해서 이제 논문을 쓰려고 하는데 자료를 구하기 위해 나왔다고 했습니다.
아, 정말 놀랐습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와는 철저하게 담을 쌓고 지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느냐고 했더니 ‘이런 주제입니다.’ 하는데 쉬운 것이 아닙니다. 공부하기 쉽지 않은 나이인데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변화시키는데 정말 철저하게 변화시키는구나!’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신 것을 기억할 때 나아가서 남을 위한 삶을 살게 됩니다.
아니, 그런 삶을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장기이식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할 때가 있습니다.
장기이식을 받은 사람들, 누군가가 자기 몸의 일부를 내주어서 살게 된 사람이 공동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고마운 분이 나를 위해 자기 몸의 장기를 주어 나를 살게 해 주셨으니 이제부터 나도 남을 위해 살기에 힘쓰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몸의 일부를 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전부를 내주셨습니다.
감격이 있는 삶, 나를 값있게 여기는 삶, 변화된 삶, 남을 위해 사는 삶, 고귀한 삶입니다.
이것이 삶으로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가장 잘 순종하는 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으로 예수님을 기념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가운데 하나, “나를 기념하라” 이 짧고, 강하고, 단정적이고, 그리고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이 담긴 이 말씀에 따라,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을 기념하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오늘 성찬예식을 통해 우선 올해의 남은 석 달은 정말 그런 삶을 살겠다고 예수님 앞에 약속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유관지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