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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이름의 권세 (행3:1-10)
저가 아주 어렸을 적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제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밥을 빨리 해야 되는데 부엌을 비울 수 없으니 빨리 가서 두부 몇 모 하고 콩나물을 사오라는 겁니다. 당연히 저는 돈을 줄 것으로 생각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돈은 안 주고 빨리 갔다 오라는 겁니다. 어린 마음에 돈도 없이 어떻게 사오나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래서 돈을 달라고 했더니, 그냥 가서 어머니 이름만 대라는 겁니다. 이상했지만, 저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가게 주인아저씨에게 어머니 이름을 댔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두부와 콩나물을 한 아름 안겨 주셨습니다. 처음 그렇게 심부름을 했을 때 저는 너무 신기했습니다. 돈을 안 내도 이름만 대면 아저씨가 무엇이든 척척 주시니 어린 마음에 신기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 후 아주 편리해졌습니다. 심부름 갈 때도 돈 없이 갈 수 있었고, 군것질을 할 때도 어머니 이름만 대면 ‘만사 오케이’였습니다.
여러분,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냅니까? 이름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름은 그 주인을 대표합니다. 그 주인의 인격, 지위, 권세, 능력 등을 반영하고 대표합니다. 그 주인이 대단하면 그 이름도 대단합니다. 그 주인이 하찮으면 그 이름도 하찮은 겁니다. 주인의 능력이 그 이름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겁니다.
이조시대 암행어사 제도가 있었죠. 암행어사는 임금이 직접 임명하는 관리인데 지방을 다니면서 탐관오리를 색출합니다. 평소에는 잠행하다가 결정적인 순간 마패를 보이며 나타납니다. “암행어사 출두요!” 하고 외치면 누구나 벌벌 떱니다. “어명이요!” 하면 그 앞에 엎드리고 절대 복종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암행어사 본인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임금의 이름을 갖고 왔기 때문입니다. 이만큼 이름이 대단한 겁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이런 원리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활용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그 이름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그러면 손해를 많이 보는 겁니다. 너무 어리석은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보다 풍성한 신앙생활, 승리하는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1] 예수 이름의 권세 : 하나님 아들의 임재와 능력
본문은 1세기 초대교회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기록입니다. 선천적인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성전에 기도하러 가던 베드로와 요한이 ‘미문’이라 불리던
성전 문 앞에서 앉은뱅이 걸인과 마주치게 됩니다.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을 합니다. 마침 그들 수중에 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금보다 더 좋은 것을 주었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켜 준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그런 놀라운 기적이 나타날 수 있었습니까? 6절 말씀을 봅시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 ”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으켜 주었던 것입니다. 태어나서 40년 동안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던 앉은뱅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베드로가 일어나라고 명령하면서 오른손을 잡아 일으킬 때 그의 몸속에 이상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힘이 솟았고,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뛸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이러 저리 뛰어다닙니다. 그리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미합니다.(7절~8절)
그 앉은뱅이는 40년 동안 그저 남에게 의존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매일 구걸하러 나왔습니다. 육신적으로 불구요 물질적으로 궁핍한 인생입니다. 한 마디로 ‘죽지 못해 사는 불쌍한 인생’입니다. 더욱 비참한 것은 영적인 차원입니다. 그는 한번도 성전에 들어가 예배드리고 찬송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성전에는 장애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일어나 걷고 뜁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가 얼마나 감격했을까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일 겁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주위에서 구경하던 백성들도 엄청 놀랐습니다. 10절 보면 백성들이 기이히 여겼다고 했는데, 이 말은 충격을 받았음의 의미합니다. 그리고 놀랐다는 것은 엑스타시 상태, 즉 황홀경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충격을 받고 황홀경에 빠질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었습니까? 베드로 개인의 능력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름을 댔을 때 예수님의 능력이 역사하여 그렇게 큰일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이름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임재, 그리고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① 예수님의 이름은 예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 이름을 부르는 곳에 임재하십니다.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마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도 동일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출20:24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그 이름을 부르고 예배할 때 예수님은 바로 그곳에 임재하십니다.
누가복음 10장 보면, 예수님이 70인의 제자들을 두 명씩 짝지어 전도 여행을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이 여행에서 돌아와 자랑하며 보고하는 내용이 눅10:17 말씀입니다.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직접 동행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부를 때 영적으로 임재하셔서 친히 역사하심으로 귀신들이 쫓겨 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육신적으로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부활 후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보내신 성령을 통해 임재해 주십니다.
② 예수님의 이름은 예수님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주문처럼 그 이름 자체가 능력은 아닙니다. 그 이름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분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놀라운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그 주인인 예수님 자신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살아 역사하십니다. 승천 직전에 하신 말씀을 봅니다. 막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여러분, 이렇게 놀라운 일들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 이유가 다음 구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16:19~20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승천하셨지만 예수님이 계속 지휘하시고 임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권력이라도 살아 있어야 진짜 능력을 발휘하는 겁니다. 죽은 권력은 소용없고 ‘살아 있는 권력’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잘하든 못하든 현직 대통령에게 권세가 주어져 있습니다. 아무리 잘했어도 죽은 대통령, 전직 대통령에게는 권세가 없는 겁니다.
옛날 못 살던 시절에 ‘재건대원’이 있었습니다. 부랑자들을 모아 재활하도록 한 것입니다. 재건대원은 망태기 하나씩 메고 다니며 휴지나 재활용품을 수집했습니다. 흔히 넝마주이라 불렀죠. 그런데 그들 중 어떤 분들은 행색이 초라한데다가 인상이 험하고 언행이 거칠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나타나면 동네 사람들이 경계를 했습니다. 아이들은 무서워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그것을 이용했습니다. 아이들이 울거나 지나치게 조를 때 망태기 아저씨 온다고 하면 울음을 뚝 그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망태기 아저씨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아이들도 귀가 있으니 당연히 들었을 겁니다. 그 후로는 어른들이 우는 아이에게 망태기 아저씨 온다고 해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망태기 아저씨 죽었는데 ... ?” 하면서 맞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은 자에게는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능력이 있는 것은 그가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은 ‘능력’입니다.
[2] 예수 이름의 권세로 얻는 것 : 구원, 기도 응답, 승리
① 구원 :
우리는 예수 이름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 즉 그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대속하심을 구주가 되셨음을 믿음으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사망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그래서 롬10:13 말씀도 이렇게 증거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반면 예수님의 이름을 믿지 않고 부르지 않으면 심판받고 영원히 멸망하게 됩니다. 요 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 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리고 구원의 방법은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밖에 전혀 없습니다. 행4:12 말씀이 그 사실을 증거합니다.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② 기도 응답 :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통해서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스스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힘입고 죄 사함을 받아야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겁니다. 그럴 때 분명히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이 친히 그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요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니 ...” 요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약5:14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치유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③ 승리의 삶 :
우리는 예수님으로 기도할 수 있지만 때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본문 6절을 다시 보십시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 ”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합니다. 그 때 곧 앉은뱅이 걸인의 몸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명령하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능력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물러갈 지어다!” 외치면 귀신이 떠나갈 줄로 믿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악한 질병아 물러갈 지어다!” 외치면 질병이 떠나갈 줄로 믿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문제야 물러갈 지어다!” 외치면 문제가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놀라운 승리의 역사입니다.
[3] 예수 이름의 권세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 : 하나님의 자녀, 경건한 성도
예수님의 이름에 아무리 놀라운 권세가 있다 해도 아무나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운전은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운전면허를 받은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아무나 하면 사고 납니다. 붙잡혀 갑니다. 여러분, 의료 행위는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아무나 합니까? 그게 바로 ‘돌팔이’입니다. 의사 면허를 가진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예수 이름 사용할 수 있는 면허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 이름을 믿으므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들입니다.
성경 보면 면허 없이, 다시 말해서 믿음 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도용하다 큰코다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행전 19장 보면 바울 사도의 에베소 선교 사역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그곳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기적을 많이 일으킵니다. 심지어 그가 지니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에게 얹으면 기적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행19:11~12) 그러자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 중에서 흉내 내는 자들이 생겼습니다. 마술사들 중에, 제사장의 아들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귀신들린 사람에게 혼쭐이 납니다. 행 19:14~16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예수님의 이름을 도용하다, 사칭하다 혼이 났던 겁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본 기사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이 청와대 직원을 사칭하며 시기를 치다 체포된 사건입니다. 카지노 사업 허가를 내준다며 카지노 기계 값 명목으로 무려 20억원이나 챙겼다가 들통이 난 겁니다. 남의 이름을 사칭하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는 또 한 가지를 꼭 명심해야 합니다. 같은 하나님 자녀라도 자신의 신앙 상태에 따라 예수 이름의 권세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크게 나타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미미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 걸인을 단번에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실력 때문이 아니고, 예수님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목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의 경건 생활이 능력의 역사에 기초가 된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다시 봅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 ” 베드로는 경건한 기도의 습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3시(지금의 오전 9시), 제6시(지금의 정오), 그리고 제9시(지금의 오후3시) 등 세 번입니다. 틀림없이 베드로도 그랬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날 이미 두 번의 기도 시간을 가졌고, 세 번째 기도를 드리러 가는 중이었을 겁니다. 여기서 ‘올라갈새’라는 단어가 미완료 시제입니다. 말하자면 ‘습관’을 표현합니다. 그는 항상 깨어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때 그렇게 담대하게 외칠 수 있었고,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는 베드로는 분명히 영혼이 맑고 성령으로 충만했을 겁니다.
기도하되 우리는 규칙적인, 지속적인 기도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이런 능력의 역사가 크게 나타납니다. 그렇지 않고 무슨 문제나 생겨야 겨우 기도하면 곤란합니다. 물론 안 하는 것보다 낫고, 그래도 응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능력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벼락치기 기도’가 아니라 꾸준한 기도 생활을 실천함으로 예수 이름의 권세를 잘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죄를 품고 기도하면 큰 능력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사59:1~3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그러므로 늘 말씀에 비추어 악한 것들은 다 회개하고 늘 정결한 마음을 갖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에게 지금 부족한 게 무엇입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돈이 없어서 문제입니까? 물론 금력(金力)의 힘이 대단합니다.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못하는 것도 많습니다. 세상 권세가 없어서 문제입니까? 권력(權力)의 힘 역시 대단합니다. 그래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권력을 잡는 게 아닙니까? 그러나 권력으로 할 수 없는 것도 많고, 오래 가지도 않습니다. 금력보다, 권력보다 더 큰 힘은 영력(靈力)입니다. 우리는 예수 이름의 권세로 영력을 크게 가질 수 있습니다. 부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이 기도하고 선포함으로 날마다 승리하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이토록 놀라운 예수님의 이름을 모르는 자들에게 그 이름의 권세를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의 권세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출처/홍문수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