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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없이는 (요한 1 : 1 ~ 5)
현대인의 문제점은 자기가 원하면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는 착각입니다. 그래서 시계가 경고합니다. “착각, 착각, 너의 생각은 다 착각, 착각”하면서. 그런데 이 착각이 오늘의 세상역사를 만들어갑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인 3절을 보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역사의 주인이 인간이 아니라 바로 주님이란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그가 없이는]이란 제목으로 함께 깨닫고, 은혜를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주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네 가지 축복의 선물은?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중에서 오늘은 본문에 나오는 4 가지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그가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과 함께] 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시고, 지혜이시고, 힘이시기 때문입니다.
2절에 보면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큰 축복입니다. 대통령과 함께 있으니까 사람들이 대하는 태도가 변해요.
저는 짧은 세월이었지만 대통령과 함께하면서 큰 소리 좀 쳐 봤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면 더 소리치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첫째는 우리들에게 영광이 됩니다.
둘째는 무엇이든지 안전합니다.
셋째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이룰 수가 있습니다.
넷째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마음이 편하고,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도 힘이 되고 기쁜데 하나님이 함께 한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쁘겠습니까?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사탄이 우리들을 유혹하여 불행의 구렁텅이로 끌고 갑니다. 마침내 지옥의 자식으로 만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내 구주로 영접하고, 그를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가 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행복해지고, 이 땅에서 승리하고, 영광을 얻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그가 없이는 아무 것도 [창조될 수가 없습니다].
새 마음을 가져야 행복해지는데 주님 없이는 절대로 새 마음이 창조될 수 없습니다. 행복도 문화도 모든 것이 다 주님이 함께 하실 때 창조됩니다.
3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으니라]”.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창조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창조는 계속됩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했을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때에는 외적인 창조를 중심으로 했지만 지금은 내적인 창조를 많이 하십니다.
지금 우리들은 환경을 창조하고, 문화를 창조하고, 학문을 창조하고, 과학을 창조하고, 수많은 것들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모방하는 것이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창조하고 만들기를 원한다면 능력의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을 따라 지금 폐허가 되어 가는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심령을 새롭게 해야 인간은 행복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3) 그가 없이는 [참 생명이 없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모양과 형태뿐입니다. 심지어 설교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말뿐입니다. 그 설교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없이는 참 생명이 없다고 했습니다.
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참 생명이란 영생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세상에 있는 생명은 다 잠정적인 것이고, 일시적인 것입니다.
모든 동물들의 생명이 다 이처럼 유한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육체적 생명도 다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생명은 영원히 살 수 있는 그런 생명이었습니다. 문제는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에게서 분리됨으로 인해서 그 참 생명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과 분리되었던 생명선을 연결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남북간에 철도를 연결하여 경의선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그것이 이루어지고 자유롭게 왕래함으로 인해서 통일이 되는 그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시급한 것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줄이 끊어진 것을 다시 연결하여 참 생명을 우리 모두가 다 얻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이제는 믿기만 하면 주님 안에서 참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생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바울은 구원이라고 불렀습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천국,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요한은 그것을 영생이라는 말과 생명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영생과 생명이 무엇이 다릅니까? 같은 것입니다. 다만 강조점이 다릅니다. 생명이라고 했을 때에는 현재적으로 소유하게 되는 영생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영생이란 죽은 뒤에 갖게 되는 것으로만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믿는 순간에 우리들은 영생의 소유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지금 이 시간에 영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4) 그가 없이는 [참 빛이 없습니다].
빛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됩니다. 그런데 이 빛이란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 빛이 있고, 다른 하나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불가시적 빛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창세기를 보면 첫날에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을 창조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되는 날에 해와 달과 별을 창조 했습니다. 아니 해가 없는데 어떻게 빛이 있는가?
도대체 첫날에 창조한 빛은 어떤 종류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첫날에 창조한 빛은 불가시적 빛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에너지를 창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빛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영적 의미와 도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빛이라고 했을 때 이 말은 첫째로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이 된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없이는 어두움뿐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있을 때 비로서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고, 밝아지고, 살아서 움직이고, 모든 불의가 떠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목적이고, 의미이고,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모셔야 모든 것이 환해집니다.
마음에 근심, 걱정, 염려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어두움의 영향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빛이 되신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속에 영접하여 참 행복을 누리고, 마음이 밝아지고, 얼굴이 밝아지기를 축원합니다.
2. 어떻게 우리가 이 네 가지 선물들을 받을 수 있습니까?
(1)첫째로 먼저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를 못합니다. 종교에 있어서 깨달음은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심지어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해탈이라고 하면서 종교의 모든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은 종교의 모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작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5절에 보니까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깨달음이 없으면 새로운 출발이 없고, 따라서 변화가 없습니다. 깨달음이 없으면 진리를 볼 수가 없습니다.
(2)둘째로 들은 것을 [믿어야] 합니다.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각 종교의 특징을 보면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 화)
강원도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신학교를 갓 졸업한 전도사가 시골 전도사로 왔습니다. 해산을 앞둔 가정에 심방을 갔습니다. 마침 해산 직전이라 들어갈 수 없어서 밖에서 집사님들과 찬송 부르며 기도하기로 하였습니다.
안에서 산모가 아파서 막 웁니다.
그래서 342장의 찬송 첫 절을 불렀습니다. 울어도 못하네. 그러자 해산을 돕던 권사님들이 소리를 지릅니다. 힘줘, 힘줘.
이번에는 전도사가 2절을 부릅니다. 힘써도 못하네. 그러자 안에서 조금만 참아, 조금만 참아 하고 소리 지릅니다.
그러자 전도사가 3절을 부릅니다. 참아도 못하네. 마침내 시간이 되었는지 임산부가 옥동자를 낳았습니다.
그러자 전도사님이 4절을 부릅니다.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믿는 대로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는 대로 될지어다 하고 믿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믿음이 무엇입니까?
네 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은 예수님을 꼭 붙잡는 것입니다.
둘째로 액면 그대로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셋째로 주님께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넷째로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3)셋째로 주시는 은혜를 [믿음으로 받으면] 됩니다.
16절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받지를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원하는 것을 다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있는 분도 주님이 주신다고 하면 더 받기를 바랍니다. 은혜위에 은혜를 부어주시는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편식의 경향이 있어서 주시는 것을 다 받지 않고 골라서 받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욕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헛 약은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때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둘째는 참으로 좋은 것, 귀한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셋째는 [그릇이 작기 때문]입니다. 많이 받으려면 그릇이 커야 합니다. 그릇이 크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겸손을 말합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필요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제일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다 받아 풍성한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맺는 말
세상에서 좋은 것은 다 예수님 없이는 받을 수도 없고, 소유할 수도 없기 때문에 되는 것이 없습니다. 천국에서 좋은 것도 주님이 없이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따라서 어떤 문제도 예수님만 있으면 다 해결되고, 세상의 모든 것이 예수님만 있으면 다 성취할 수가 있습니다.
그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가 없이는 행복도 없고, 그가 없이는 인생의 의미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신성종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