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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계십니까? (롬 8:1~6)
신분을 말할 때에는 본적이 있고 현주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름 성별 이렇게 표기합니다. 본적은 충남도 ○○군 ○○면 ○○리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적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민등록증에 본적이 누락되었습니다. 이유가 그것만은 아닙니다. 특정지역에 대하여 나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적이 중요한 게 아니라 현주소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영적 현주소는 어디입니까? 영적인 주소는 두 군데 중 하나입니다. 예수 안인가?(주 안)이냐? 아니면 예수 밖에 사느냐?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기 전에는 살기도 힘들군 죽으면 망하리에서 살았습니다. 지금은 예수도 주안군 믿으면 잘살리에서 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얼마나 믿었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살고 있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였나? 이것이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어디에 속해 있느냐 이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게 무슨 은사가 있느냐? 받은 것이 얼마인가? 이보다 내가 어디에 살고 있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습관적인 신앙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여객기가 갑자기 고장이 났습니다. 기장이 방송으로 소리칩니다. 승객 여러분! 우리 비행기의 엔진 중에 두 개에 불이 붙었습니다. 게다가 그 연기 때문에 조종실에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승객들은 갑자기 흥분하기 시작하고 소란이 일어납니다. 승객 중에 한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여러분! 저는 목사입니다.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제 말을 들으세요. 지금부터 하나님께 고개 숙여 기도합시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우리를 위기에서 구해주실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고개 숙이고 있는데 유독 한 남자만은 모자를 쓴 체 그냥 서있습니다. 목사님이 말합니다. 당신은 왜 그냥 서 있소? 저는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 몰라요. 교회에 한 번도 안가 봤소? 가봤죠. 그러면 교회에서 본대로 하세요. 그러나 남자는 모자를 벗어 들고 통로로 나오더니 헌금을 걷기 시작하더랍니다. 본 것이 헌금 걷는 거였거든요.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 주소를 모르고 사는 이들이 얼마입니까? 형식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예수 믿었다면 분명히 달라져야 합니다. 먼저 주소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 사는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있습니까?
1. 정죄함이 없습니다.(롬 8:1)
사람들이 행복은 말하지만 행복해지는 방법은 모르고 있습니다. 왜 문제가 생기고 불행이 옵니까? 있는 것에 대하여 감사하기보다는 없는 것 때문에 불평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물질이나 부가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만족이 없고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행복해지는 것이 기술입니다. 집안을 깨끗하게 하려면 과감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가정에 꼭 필요한 것만 있는 게 아니라 필요하지 않는 것도 많습니다. 버리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쓰다가 못쓰게 된 전자제품을 버립니다. 그런데 정작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는 게 문제입니다. 이것을 버리세요. 불만 불평을 버리세요. 삶에 있어서 불만이나 불평은 행복의 장애일 뿐이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여인이 남편에 대하여 불만과 불평이 많은 중에 살아갑니다. 꿈속에서 시장에 갔더랍니다. 새로 문을 연 가게에 들어갔는데 그 가게주인은 다름 아닌 천사였습니다. 가게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여기에서 무엇을 팝니까? 주인 천사는 당신의 가슴에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팝니다. 그 말을 듣고 놀랍고 반가운 마음으로 한참 생각하다가 자기가 원하는 것 최고를 사고 싶어서 종목을 적었다가 말합니다. 이것 좀 주세요. 말해보세요. 마음의 평화와 사랑 지혜와 행복 그리고 두려움과 슬픔으로부터 자유를 주세요. 그 말을 듣던 천사가 미소를 지으면서 부인 미안하지만 가게를 잘못 찾아오셨군요. 이 가게는 그런 완제품은 팔지 안 구요. 재료만 팝니다. 하나님은 완제품 행복을 주시지 아니하십니다. 재료를 구입하고 행복의 완제품은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내하여야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입니다. 가장 좋고 중요한 게 있습니다. 상대방을 칭찬하세요. 높여주세요. 우리는 칭찬하는데 참으로 인색합니다. 웬만큼 잘하지 않으면 책망을 듣기 일 수 있습니다. 어느 부부가 결혼 전에는 사랑하고 좋다고 부모님들이 반대하려고 하면 좋은 점만 부모에게 말하였습니다. 부모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도 저들이 좋다는데 어떻게 반대할 수 있습니까? 결혼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갈데 까지 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누가 권하기를 부부 세미나 다녀왔다가 이혼하라고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기대를 갖고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부부세미나에 왔는데 아내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른 부부는 용서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말을 서로 주고 받으면서 소위 클리닉이 잘되고 있습니다. 그 부부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남편도 여자는 고집과 생각을 초장에 꺾어놔야 한다는 생각은 변치 않았습니다. 여자는 여자대로 남편의 버릇을 고쳐준다는 생각이 변치 않았습니다. 같이 다투고 고집하고 서로간에 달라지지 않습니다. 당신은 저 말을 못 들었어. 반성해야 돼. 당신이나 잘해. 나중에는 서로 큰소리로 상대방을 비난하면서 당신 같은 인간은 세미나도 소용없고 하나님도 고칠 수 없는 구제불능의 인간이야. 이 말을 듣고 아내가 가만히 있을 리 없지요.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울고불고 야단입니다. 부부가 세미나 장을 빠져 나오려는데 진정한 아내가 말합니다. 미안해요. 여보 이성을 잃어버린 순간에도 아내가 남편의 옷자락을 잡고 우리는 어떻게 해요. 이것이 마지막 기회인데 아내가 그러더랍니다. 내가 문제가 있다는 것 알아요. 잘못했어요. 당신은 훌륭해요. 부부는 밤새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었습니다. 다음부터는 행복해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데 능수입니다. 우리는 수없이 정죄를 받아 왔습니다. 우리의 양심이 너는 형편없는 인간이야?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살까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양심도 정죄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정죄합니다. 욥기를 보면 욥이 어려움을 당한 것도 문제이지만 친구들이 찾아와 너는 죄 값을 받는 거다라고 정죄합니다. 욥이 나는 죄가 없다고 말한 것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다른 이들 즉 이방인들과 비교할 때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욥이 무슨 잘못을 한 것은 아닙니다. 친구들이라도 남을 정죄하는데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매가 있었습니다. 오빠가 결핵으로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 가난한 누이가 몸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오빠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교인들이 알았습니다. 교인들은 얼마나 이야기하고 떠들었던지 오빠 되는 이가 자살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동생은 몸을 팔아서 살려놓은 오빠가 목숨을 끊어버리자 자신도 따라서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장례식에 임한 목사님이 울면서 설교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 날에 너 아무개 목사야 네가 네 양 떼를 얼마나 돌아보았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양이 한 마리도 없고 이리떼만 데리고 있다가 여기 왔습니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정죄합니다. 정당한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것보다는 이유 없이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이 더 나쁜 거라고 봅니다. 우리는 주님의 선한 양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정죄 하는 대신에 위로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나의 약점을 말하고 비난하고 정죄하려고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정죄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정죄한다고 시험에 들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재판장 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죄 없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정죄합니다. 마귀가 우리를 정죄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마틴 루터(Martin Lutter)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수많은 사람들의 반대와 중상과 모략을 받으면서 종교개혁을 할 때였습니다. 자기 서재에서 준비하고 있는데 마귀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종이에 가득 쓴 것을 루터에게 보여 줍니다. 그것을 한참 들여다본 루터는 질렸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맥이 풀리고 힘이 쭉 빠집니다. 자기가 오래 전에 지은 죄들을 낱낱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마귀는 뒷면을 보여 줍니다. 자세히 보았더니 요사이 지은 죄를 다 기록해 놓았습니다. 마귀는 비웃은 얼굴로 루터를 향해 이것들이 사실이지 맞지 그러면서 네가 무슨 일을 해, 개혁을 해, 너나 개혁하라 그럽니다. 너나 바로 살아라. 너 이런 죄 값은 어떻게 할거냐 루터는 할 말이 없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힘없이 앉아 있는데 뒤에서 분명하게 들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루터야 네 모든 죄를 내 피로 이미 다 씻었다. 너를 정죄 할 자는 아무도 없다. 이 음성을 듣는 순간 그는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는 크게 외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책상에 놓여있는 잉크병을 벽에 던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마귀야 내 죄는 앞집의 지붕 위에 기왓장보다 더 검고 많다. 그러나 예수의 보혈로 나는 씻음을 받았다.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라고 크게 외칠 때 마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확신 중에 위대한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의 주소는 예수 안입니다. 예수 안에 사는 이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2.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진정한 자유가 주어집니다.
왜 자유가 없습니까? 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매인다는 게 감옥에 갇혀있는 것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에 매여 있으면 자유가 없습니다. 항상 하는 소리가 시간 없다. 바쁘다. 그러면서 사람도 만나지를 못합니다. 가야 할 곳도 가지 못합니다. 감옥입니다. 영국의 여류작가 엘리옷은 사람들이 다섯 가지 감옥에서 살고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1) 자기 사랑의 감옥입니다. 이기주의가 감옥이라는 말입니다. 2) 근심의 감옥이 있습니다. 3) 향수의 감옥 4) 선망의 감옥 그리고 증오의 감옥이라 하였습니다. 자유 하려면 감옥에서 나와야 합니다.
예전에 우리 조상들은 법에 매여 있었습니다. 상전이 자기 집에 있는 하인을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는 표현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양반이 어떻게 상것들과 함께 사랑의 관계를 맺습니까? 이는 죽음을 의미하는 거였습니다. 법에 매여 있으면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국가안전보장법도 폐지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속박입니다.
우리에게는 자유가 필요합니다. 신체적인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이는 건강입니다. 질병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가고 싶은 곳을 가고 하고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건강의 자유 신체적인 자유가 요청됩니다.
경제적인 자유입니다. 적어도 먹고 살아가는데 자유로워야 합니다. 가난한 자는 자유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말입니다. 내가 아무리 자유인이 되고 싶지만 가난하면 소중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자유를 위하여 나라를 떠나옵니다. 탈북 하는 북한 사람들을 보세요. 먹을 것을 찾아옵니다. 자유를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진정한 자유를 원하신다면 예수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묶인 것을 풀어주십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셨습니다. 부활과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께서 무덤에 가셔서 나사로야 일어나라 부릅니다. 죽었던 나사로의 무덤이 터지고 그가 다시 살아 났습니다. 그때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우리는 묶여 있습니다. 욕망에 묶여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거룩한 욕망은 일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발전합니다. 그러나 욕망의 지배를 받으면 사람이 잘못됩니다. 비참하게 됩니다. 그 욕망이 나를 사로잡으면 자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기본적인 도덕을 파괴하는 요인으로 가장 강력한 욕망 중 하나를 쾌락으로 봅니다. 쾌락이 절제를 흐리게 하고 혼신을 빼앗아 가는 행위이기에 그 안에는 시간도 돈도 관계가 없습니다. 쾌락적인 욕망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 네 가지라고 말합니다. 여자와 술 마약과 도박이라고 합니다. 이 중에 도박이라는 것에 매이면 아무 것도 보이는 게 없습니다. 죽기 전에 못 고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면 메인 데서 자유롭습니다. 예수님만이 풀어 주실 수 있습니다. 죄에서 풀어주십니다. 잘못된 쾌락주의에서 자유를 주십니다. 예수 결박 푸셨도다. 모든 결박 푸셨도다. 나는 자유해 이렇게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려움에서도 자유입니다. 주 안에 있는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사람들이 불안합니다. 되는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내일에 대한 보장을 받지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심리를 이용하여서 나온 상품이 보험이라는 것입니다. 자동차 보험, 의료보험 생명보험입니다. 보험이 무엇입니까? 생명보험 들었으면 안 죽습니까? 죽은 다음에 돈주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보험입니까? 진정한 보험은 생명 보험에 들었으면 안 죽는 보험이 되어야 보험이 되는 거 아닙니까? 저는 이상한 여자와 함께 삽니다. 다른 여자들은 자기 남편이름으로 보험을 든답니다. 남편이 혹 세상을 떠나면 자기가 살아가는데 도움을 받기 위하여 보험금을 타려고 그런 답니다. 맞습니까? 그럼에도 안 들겠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아내의 이름으로 보험 들지 않았습니다. 보험 들고 죽기를 기다리는 것 같은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그럽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안전입니다. 완전한 보험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주안에 있다가 세상을 떠나면 직통 천국입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다면 그 이상 자유는 없습니다. 어디에 살고 계십니까? 주안에서 삽니다.(아멘) 따라서 합시다. 어디에서 삽니까? 주안에서 삽니다. 그러므로 나는 참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인 속박가운데 있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된 자유함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 안에 사는 이들에게는 생명과 평안입니다.(롬 8:6)
예수 안에 있으면 변화가 됩니다. 무엇이 변화됩니까? 생각이 달라집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영의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면 영생과 평안입니다. 왜 모든 것은 생각부터 시작되고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 안에 있는 이들입니다. 육신의 일이 무엇입니까? 현세적이고 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옛날 증자는 길을 가는데 가마솥에 끊는 물엿을 보고 부모님을 대접할 생각을 하였는데 도척이라는 사람은 남의 집에 침입하여 물엿을 문설주에 발라 남의 집에 잠입하여 도적질한 궁리를 했습니다. 결국은 도척 은 큰 도적이 되었고, 증자는 효자가 되었답니다. 그리스도인 중에 영의 일을 생각하는 이가 있구요, 육의 생각을 하는 이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면서 가룟 유다는 자신이 이익을 보리라 생각하였고, 베드로는 죽을 생각을 하였습니다. 거듭난다는 말을 합니다. 거듭남은 생각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어떤 분이 운전하시는데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 보니 집안이 캄캄합니다. 아이들보고 왜 집에 있으면서 불을 켜지 않느냐고 호통을 칩니다. 아이들이 아빠 불 켰는데요. 알고 보니 자기가 일하는 중에 선글라스를 쓰고 있더랍니다. 자기 생각이 문제입니다. 영의 일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생각을 바꾸세요.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중심 사고라는 게 있습니다. 한 번 만들어지면 없어지지 않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그런 일은 못해. 나는 무능한 사람이야. 이런 생각을 가진 이는 되는 것이 없습니다. 중심 사상이 그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중심 사상이 바꾸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생각이 바뀝니다. 이로 인하여 평안입니다. 안전입니다. 변화된 중심사고가 인생을 바꾸어 줍니다. 문제의 중심사고를 제거한 후 기존의 틀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이는 예수 안에서 살 때 가능한 것입니다. 중심 사고가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이는 하나님과 원수이고 결과는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중심사고가 예수인 사람은 예수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어디에 사십니까? 주안에 삽니다. 주안에서 정죄할 자 없게 되었습니다. 주 안에 사는 자는 딴 근심이 있을 리 없습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주안에서 살기에 정죄 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주 안에 살면 진정한 자유자가 됩니다. 주 안에 살기에 영의 일을 생각하고 참 평안 속에서 복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 아멘 ~
출처/백장흠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