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형님으로부터 ‘작은 어머니께서 양주에 있는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는데 치매 증상이 생겨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니 사람 못 알아보기 전에 한번 찾아 뵙는게 어떠냐’며 연락이 왔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내가 집안 최초로 교회를 다녔고 얼마 후 부턴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여 황씨 집안의 복음화를 위해서 늘 기도하셨던 믿음의 어머니셨다.

나를 황씨 집안의 믿음의 씨앗이라며 특별히 아껴주시고 예뻐하셨는데 내가 청년 시절에 교회를 떠나자 그렇게 마음 아파하시면서 기도해 주셨던 작은 어머니셨다.

그 후,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다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목회자가 되자 누구보다도 많이 기뻐하셨던 분이시라 나는 그 은혜가 고마워서 시간 나는대로 온 집안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특히 작은 어머니에게 각별한 맘을 갖고 있었다.

작은 아버지를 젊은 시절 잃고난 후 온갖 고생하며 두 아들을 믿음으로 키워 둘째를 감리교 목사가 되게 하고 큰 아들은 우리 장로교의 안수집사와 같은 권사가 되게 하여 믿음의 가문을 이뤘다.

그러나 워낙 착한 동생 목사는 누가 끌어주는 사람이 없어 부교역자 생활을 하다가 결국 무슨 작은 선교 단체에서 힘겨운 사역을 하고 있고 첫째는 명예퇴직 후 소설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데 그 길이 그리 쉽지않은지 오십 중반을 넘겼음에도 계속 문학계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다행히 제수씨가 금융 회사에 오래 다녀 생활엔 염려가 없어서 그 동안 작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그만 치매 증상을 보이셔서 어쩔 수 없이 요양 병원에 입원을 시켜 드린 것이었다.

네비게이션을 의지하여 송추계곡 안에 있는 병원을 찾아 입원실에 들어서니 금방 나를 알아보시곤 큰 눈을 번쩍 뜨시며 “어? 우리 황목사님 아녀?” 하시는 것이었다. “네, 작은 어머니...” 나는 여윈 손을 꼬옥 잡고 용서를 빌었다.

“작은 어머니, 미안해요. 목회를 한다는 핑계로 너무 제가 무심했어요.” 하지만 내 말엔 아랑곳없이 “어이쿠, 난 어디서 저렇게 멋진 사람이 오는가 했더니 우리 황목사이셨군” 하시더니 이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무슨 말을 하시는 것이었다.

몇 년 전인가, 집안을 통해 우리 수양관에서 지내시면 어떻겠느냐는 제의가 있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모시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도 하고 죄송스런 마음이 들었다.

용돈을 조금 준비했으나 이곳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기에 드리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오는데 입원실 문을 나서려다 다시 돌아보니 그때까지 내 등을 향해 손을 흔들고 계셨다.

오! 주여

그저 죄송할 뿐입니다.

우리 작은 어머니 권사님에게 평안을 주시옵소서.

(주후 이천십이년 유월 첫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