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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주신 찬송과 감사 (시23:1-6)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는 "모든 일" 즉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20절에서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했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위대한 신앙인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을 살펴보면 모두 범사에 감사하고 찬송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사야는 말하기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사43:21)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찬송하게 하기 위함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찬송과 감사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아는 자요 그리고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명한 다윗의 시편 23편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송과 감사는 무엇인지 살펴보고 싶습니다.
먼저, 다윗은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 찬송과 감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먼저 범사의 감사라는 말은 순경은 물론 역경에도, 건강할 때는 물론 병들었을 때에도, 성공했을 때는 물론 실패했을 때에도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을 마치 "역경 중에 감사하라"는 말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 목사님들이 범사의 감사를 설교하면서 늘 역경 중에 감사하는 경우를 많이 말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감사할 수 없는 때가 바로 역경 중이기 때문입니다. 역경 중에 감사하는 사람이라면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식이 교통사고를 당하고, 부도가 나고, 집에 붉은 딱지가 붙고, 불치병에 걸리고, 눈을 잃고, 귀를 잃고, 자식이 가출을 하고, 천재 지변이 일어나고, 심지어 전쟁이 잃어나는데 어떻게 감사를 하란 말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역경 중에도 감사하는 믿음을 가졌다면 그는 범사의 감사를 아는 자요 범사의 감사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라고 고백했습니다. 사실 다윗처럼 호화스럽고 위대하게 보이는 생애도 없지만 다윗처럼 환난 많은 생애를 산 사람이 없습니다. 그처럼 기구한 생애를 산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장인에게 쫓겨다녀야 했습니다. 그것도 10여년이나 말입니다. 그리고 노년에는 심지어 아들에게 쫓겨다녀야 했습니다. 그의 최대의 원수는 아버지요 아들이었습니다. 이겨도 내 가족을 이기는 것이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역경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녔다"고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할 만큼 어려운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도 다윗처럼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다닐 때 지은 찬송 중에 하나를 보면 이렇습니다. 그 가운에서 감사와 찬송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시편 63편 3-4절의 내용입니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3-4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아들에게 쫓기는 신세인데 그 입술로 찬송이 나오겠습니까?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손을 들고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입술로 찬송했습니다. 그리고 찬송의 손을 높이 들었습니다.
사실 순경 중에는 감사가 쉽고 역경 중에는 감사가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습니까? 진정한 감사를 배우고 진정한 감사를 하게되는 때는 순경 중에서가 아니라 역경 중에서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감사의 사람도 역사 속에 나오는 감사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밀턴>은 44세의 젊은 나이에 장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행한 가운데서도 유명한 시를 썼는데 다음과 같은 감사의 고백을 했습니다. "주께서 내 시선을 어둡게 하시고, 오직 주님만 볼 수 있도록 속눈을 열어 주셨다"고 말입니다. 발명왕 에디슨도 젊은 나이에 귀가 멀었습니다. 그런데 그 역시 원망하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말하기를 "참으로 내가 귀머거리가 됨을 감사하는 것은 연구에 몰두할 때 잡음이 들리지 않아서 많은 도움이 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재미 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초대교회시절에는 목회자도 성경도 귀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의 발길이 닿으면 교회가 새워졌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곽안전 선교사가 경동제일교회를 세우고 우리 교회를 세우고 또 광능내에도 광능내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런 때에 경상도 한 교회에서 간신히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실력을 가진 한 조사가 바로 오늘 본문을 희미한 남포등 아래서 읽었습니다. "여...호와는나...의... 목 자르시니...내가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겨우겨우 성경봉독을 마친 이 조사님은 자기가 잘못 잃어 놓고도 성경이 "여호와는 나의 목을 자르시니"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비장한 얼굴로 설교를 시작하기를 "여호와가 내 목 짜르셔도 내가 부족함이 없씀네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것은 그 설교를 듣던 교인들은 모두 "아멘 아멘" 그러며 들었다고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을 잘라도 감사합니까?
여러분! 정말로 순경 중에는 감사가 나오는데 역경 중에는 감사가 되지 않던가요? 정말로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감사를 많이 하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감사가 되지 않던가요? 아닙니다. 순경 중에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이나 역경 중에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순경 중에 감사하지 못하는 믿음이나 역경 중에 감사하지 못하는 믿음도 같은 것입니다. 순경 중이나 역경 중이나 감사할 이유도 감사하지 못할 이유도 같은 것입니다. 순경 중에 감사하는 사람이 역경 중에도 감사하고, 역경 중에 감사하는 사람이 순경 중에도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얼른 생각하기에 순경 중에는 감사할 수 있지만 역경 중에는 감사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순경 중에는 늘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는데 역경이 찾아오면 감사가 떠나던가요? 아닐 것입니다. 늘 감사하던 사람은 아무리 어려워도 감사할 것입니다. 오히려 더 깊은 감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순경 중에 배우기보다 역경 중에 배우게 되었을 것입니다.
평소에는 하나님 의지하지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던 사람은 아무리 많고 아무리 행복해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찾아오면 바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평소에 믿음으로 사는 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더 감사하고 더 찬송하게 됩니다. 고난 속에서도 배우지 못한 감사를 평범한 삶 속에서 하기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감사란 범사를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감사란 예배당에서는 물론 가정에서도, 궁궐에서는 물론 빈들에서도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감사입니다. 그래서 순경 중에도 역경 중에도 감사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의미는 평범한 생활에도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 삶을 통해서 찬송과 감사를 받으시기 원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감사는 환경과 조건이 아니라 깨달음이란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병원에 가서 병든 사람을 보고 그 때야 병들지 않은 것을 감사하게 됩니다. 보지 못 하는 사람을 보고 볼 수 있는 것을 감사하고, 위장병 환자를 보고 소화 잘 되는 것을 감사하고, 병에 시달리는 환자를 보고 건강한 것을 감사했습니다. 내가 병든 것도 아니고 내가 병 들었다가 나은 것도 아닌데 그저 감사합니다. 나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습니다. 어제와 똑같을 뿐입니다. 그런데 깨닫고 보니까 감사한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깨달음입니다. 돈 못 버는 남편 때문에 늘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원망하던 사람이 매일 구타하는 남자와 살아가는 친구를 보고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감사란 소유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깨달음에서 옵니다. 깨달은 아들은 가난한 부모에게도 감사하고 깨닫지 못한 자식은 유산을 산더미처럼 남겨준 부모라도 원망합니다.
그런 점에서 감사는 늘 우리의 삶 속에 있어야 합니다. 즉 평범한 것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수 없이 많은 은혜를 입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햇빛이 없는 인간의 삶이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매일 뜨는 그 태양 속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가 함께 쏟아져 내리는 것입니다. 또한 매일 먹고 마시는 공기와 물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처럼 큰 은혜가 어디에 있습니까? 병원에서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있는 환자들이 얼마나 비싼 돈을 지불하고 산소를 마시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공짜로 산소를 마음껏 마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평범한 삶 뒤에는 다 부모의 은혜, 스승의 은혜, 형제의 은혜, 이웃의 은혜, 그리고 국가의 은혜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매일 쓴 전기, 입고 있는 옷 다 누군가의 은혜입니다. 저는 컴퓨터를 사용할 때마다 컴퓨터를 만들어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저에게 컴퓨터가 없다면 제가 현재 하고 있는 일들을 도저히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 속에 이미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은혜가 들어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고마운 일은 우주에 찼고 고마운 사람들은 구름처럼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소는 두 군데라고 합니다. 하나는 하늘 나라에 있고 다른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 속에 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보호를 받고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원망하고 배반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일을 감사하고, 가정을 감사하고, 잠을 감사합시다.
영국의 목사이며, 문학자인 킹즐리(Kingsley, Charles)는, 아침마다 일어나면 일 할 수 있는 것을 이렇게 감사했습니다. "그대는 매일을 싫든 좋든 해야할 일거리를 가지는 것을 매일 아침 일어나서 하나님께 감사하라. 어쩔 수 없어 일을 하거나, 어쩔 수 없이 그대의 최선을 다해야 할지라도 그대 속에서는 절제와 극기, 근면과 의지력, 유쾌와 만족, 그리고 게으름뱅이가 알지 못하는 백 가지의 미덕을 얻으리라"라고 말입니다. 스위스의 법학자이며, 철학자인 힐티(Hilty, Carl)는 이렇게 감사했습니다. "아침이면 아침마다, 눈을 뜨면 곧 하나님께 감사하라. 착한 일을 하는 기회가 날마다 그대에게 주어지기를! 그리고 진종일 그 기회를 위하여 눈을 뜨고 있자"라고 말입니다.
어느 미국 성도가 버스를 타고 가는데 버스가 만원이 되어 비좁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한 흑인 여자가 아이를 다섯을 데리고 버스를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을 밀로 떠들고 거기에다 목욕도 하지 않아 냄새마저 진동하였습니다. 그 때 이 성도는 화가 폭발하기 전에 스스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무엇을 감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런 여자가 내 마누라가 되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나아가 원수 앞에서도 찬송과 감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옛날에는 다윗의 글을 읽으면 다윗은 왜 이렇게 원수를 달고 사느냐 그런 생각이 늘 들었습니다. 그런데 깨닫고 보니까 다윗이 원수를 만든 것이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 편에 서서 살려고 하니까 하나님의 원수가 다윗의 원수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결국 다윗의 원수는 하나님의 원수요, 하나님의 원수는 다윗의 원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개인적인 맺은 원수를 많이 가지고 사는 것은 크게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도 불행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의의 사람이 불의한 사람의 원수가 되지 않을 것이며, 어떻게 진실한 사람이 거짓의 원수가 되지 않는 것이며, 어떻게 빛의 사람이 어둠 속에서 사랑을 받기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 그 말입니다.
그러나 내 원수가 하나님의 원수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수들의 목전에서 잔치상을 베풀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5절에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로 9절에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수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주님께서는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에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머리에 발라 우리의 잔이 넘치게 하실 것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예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주일 예배 시에 감사헌금을 드리신 성도들의 이름과 기록된 감사내용을 함께 불러드리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건강, 생일, 이사, 승진, 합격 등 소원을 포함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홍보의 효과가 컸습니다. "아무게 집에 경사가 났구나. 아무게 집사님 집에 아들을 낳았구나, 병원에 입원하였구나."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어떤 교회에서 어떤 성도가 "주님 무조건 감사합니다"라고 쓰여진 감사헌금 봉투가 올라와서 목사님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에는 "주님 거저 감사합니다"라는 봉투가 올라와 또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일에는 다른 집사님이 "주님 초초 감사합니다"라고 써서 감사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주일에 다른 분이 "주님 각각 감사합니다"라고 써서 헌금을 드렸다고 합니다. 그저 주님의 은혜가 일각일각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겠다는 말로 결론을 삼았습니다. 저는 본문을 읽을 때마다 이 말씀이 가장 은혜스럽습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우리 인생은 행인과 나그네의 길일뿐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는 하늘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성도에게는 여호와 집에 거하는 엄청난 소망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거기 눈물도 근심도 탄식도 죽음도 이별도 곡하는 것도 없는 그곳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추한 몸이 영화로운 몸으로, 약한 몸이 강한 몸으로, 육의 몸의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날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역경 중에서도, 순경 중에서도, 그리고 단조로운 평범한 삶 속에서도 감사하는 그야말로 범사에 감사하는 새 천년의 감사절이 되시지 않겠습니까?
출처/최삼경목사 설교자료 중에서서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는 "모든 일" 즉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20절에서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했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위대한 신앙인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을 살펴보면 모두 범사에 감사하고 찬송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사야는 말하기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사43:21)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찬송하게 하기 위함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찬송과 감사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아는 자요 그리고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명한 다윗의 시편 23편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송과 감사는 무엇인지 살펴보고 싶습니다.
먼저, 다윗은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 찬송과 감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먼저 범사의 감사라는 말은 순경은 물론 역경에도, 건강할 때는 물론 병들었을 때에도, 성공했을 때는 물론 실패했을 때에도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을 마치 "역경 중에 감사하라"는 말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 목사님들이 범사의 감사를 설교하면서 늘 역경 중에 감사하는 경우를 많이 말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감사할 수 없는 때가 바로 역경 중이기 때문입니다. 역경 중에 감사하는 사람이라면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식이 교통사고를 당하고, 부도가 나고, 집에 붉은 딱지가 붙고, 불치병에 걸리고, 눈을 잃고, 귀를 잃고, 자식이 가출을 하고, 천재 지변이 일어나고, 심지어 전쟁이 잃어나는데 어떻게 감사를 하란 말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역경 중에도 감사하는 믿음을 가졌다면 그는 범사의 감사를 아는 자요 범사의 감사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라고 고백했습니다. 사실 다윗처럼 호화스럽고 위대하게 보이는 생애도 없지만 다윗처럼 환난 많은 생애를 산 사람이 없습니다. 그처럼 기구한 생애를 산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장인에게 쫓겨다녀야 했습니다. 그것도 10여년이나 말입니다. 그리고 노년에는 심지어 아들에게 쫓겨다녀야 했습니다. 그의 최대의 원수는 아버지요 아들이었습니다. 이겨도 내 가족을 이기는 것이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역경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녔다"고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할 만큼 어려운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도 다윗처럼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다닐 때 지은 찬송 중에 하나를 보면 이렇습니다. 그 가운에서 감사와 찬송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시편 63편 3-4절의 내용입니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3-4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아들에게 쫓기는 신세인데 그 입술로 찬송이 나오겠습니까?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손을 들고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입술로 찬송했습니다. 그리고 찬송의 손을 높이 들었습니다.
사실 순경 중에는 감사가 쉽고 역경 중에는 감사가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습니까? 진정한 감사를 배우고 진정한 감사를 하게되는 때는 순경 중에서가 아니라 역경 중에서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감사의 사람도 역사 속에 나오는 감사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밀턴>은 44세의 젊은 나이에 장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행한 가운데서도 유명한 시를 썼는데 다음과 같은 감사의 고백을 했습니다. "주께서 내 시선을 어둡게 하시고, 오직 주님만 볼 수 있도록 속눈을 열어 주셨다"고 말입니다. 발명왕 에디슨도 젊은 나이에 귀가 멀었습니다. 그런데 그 역시 원망하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말하기를 "참으로 내가 귀머거리가 됨을 감사하는 것은 연구에 몰두할 때 잡음이 들리지 않아서 많은 도움이 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재미 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초대교회시절에는 목회자도 성경도 귀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의 발길이 닿으면 교회가 새워졌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곽안전 선교사가 경동제일교회를 세우고 우리 교회를 세우고 또 광능내에도 광능내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런 때에 경상도 한 교회에서 간신히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실력을 가진 한 조사가 바로 오늘 본문을 희미한 남포등 아래서 읽었습니다. "여...호와는나...의... 목 자르시니...내가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겨우겨우 성경봉독을 마친 이 조사님은 자기가 잘못 잃어 놓고도 성경이 "여호와는 나의 목을 자르시니"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비장한 얼굴로 설교를 시작하기를 "여호와가 내 목 짜르셔도 내가 부족함이 없씀네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것은 그 설교를 듣던 교인들은 모두 "아멘 아멘" 그러며 들었다고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을 잘라도 감사합니까?
여러분! 정말로 순경 중에는 감사가 나오는데 역경 중에는 감사가 되지 않던가요? 정말로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감사를 많이 하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감사가 되지 않던가요? 아닙니다. 순경 중에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이나 역경 중에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순경 중에 감사하지 못하는 믿음이나 역경 중에 감사하지 못하는 믿음도 같은 것입니다. 순경 중이나 역경 중이나 감사할 이유도 감사하지 못할 이유도 같은 것입니다. 순경 중에 감사하는 사람이 역경 중에도 감사하고, 역경 중에 감사하는 사람이 순경 중에도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얼른 생각하기에 순경 중에는 감사할 수 있지만 역경 중에는 감사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순경 중에는 늘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는데 역경이 찾아오면 감사가 떠나던가요? 아닐 것입니다. 늘 감사하던 사람은 아무리 어려워도 감사할 것입니다. 오히려 더 깊은 감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순경 중에 배우기보다 역경 중에 배우게 되었을 것입니다.
평소에는 하나님 의지하지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던 사람은 아무리 많고 아무리 행복해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찾아오면 바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평소에 믿음으로 사는 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더 감사하고 더 찬송하게 됩니다. 고난 속에서도 배우지 못한 감사를 평범한 삶 속에서 하기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감사란 범사를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감사란 예배당에서는 물론 가정에서도, 궁궐에서는 물론 빈들에서도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감사입니다. 그래서 순경 중에도 역경 중에도 감사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의미는 평범한 생활에도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 삶을 통해서 찬송과 감사를 받으시기 원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감사는 환경과 조건이 아니라 깨달음이란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병원에 가서 병든 사람을 보고 그 때야 병들지 않은 것을 감사하게 됩니다. 보지 못 하는 사람을 보고 볼 수 있는 것을 감사하고, 위장병 환자를 보고 소화 잘 되는 것을 감사하고, 병에 시달리는 환자를 보고 건강한 것을 감사했습니다. 내가 병든 것도 아니고 내가 병 들었다가 나은 것도 아닌데 그저 감사합니다. 나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습니다. 어제와 똑같을 뿐입니다. 그런데 깨닫고 보니까 감사한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깨달음입니다. 돈 못 버는 남편 때문에 늘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원망하던 사람이 매일 구타하는 남자와 살아가는 친구를 보고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감사란 소유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깨달음에서 옵니다. 깨달은 아들은 가난한 부모에게도 감사하고 깨닫지 못한 자식은 유산을 산더미처럼 남겨준 부모라도 원망합니다.
그런 점에서 감사는 늘 우리의 삶 속에 있어야 합니다. 즉 평범한 것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수 없이 많은 은혜를 입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햇빛이 없는 인간의 삶이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매일 뜨는 그 태양 속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가 함께 쏟아져 내리는 것입니다. 또한 매일 먹고 마시는 공기와 물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처럼 큰 은혜가 어디에 있습니까? 병원에서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있는 환자들이 얼마나 비싼 돈을 지불하고 산소를 마시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공짜로 산소를 마음껏 마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평범한 삶 뒤에는 다 부모의 은혜, 스승의 은혜, 형제의 은혜, 이웃의 은혜, 그리고 국가의 은혜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매일 쓴 전기, 입고 있는 옷 다 누군가의 은혜입니다. 저는 컴퓨터를 사용할 때마다 컴퓨터를 만들어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저에게 컴퓨터가 없다면 제가 현재 하고 있는 일들을 도저히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 속에 이미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은혜가 들어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고마운 일은 우주에 찼고 고마운 사람들은 구름처럼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소는 두 군데라고 합니다. 하나는 하늘 나라에 있고 다른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 속에 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보호를 받고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원망하고 배반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일을 감사하고, 가정을 감사하고, 잠을 감사합시다.
영국의 목사이며, 문학자인 킹즐리(Kingsley, Charles)는, 아침마다 일어나면 일 할 수 있는 것을 이렇게 감사했습니다. "그대는 매일을 싫든 좋든 해야할 일거리를 가지는 것을 매일 아침 일어나서 하나님께 감사하라. 어쩔 수 없어 일을 하거나, 어쩔 수 없이 그대의 최선을 다해야 할지라도 그대 속에서는 절제와 극기, 근면과 의지력, 유쾌와 만족, 그리고 게으름뱅이가 알지 못하는 백 가지의 미덕을 얻으리라"라고 말입니다. 스위스의 법학자이며, 철학자인 힐티(Hilty, Carl)는 이렇게 감사했습니다. "아침이면 아침마다, 눈을 뜨면 곧 하나님께 감사하라. 착한 일을 하는 기회가 날마다 그대에게 주어지기를! 그리고 진종일 그 기회를 위하여 눈을 뜨고 있자"라고 말입니다.
어느 미국 성도가 버스를 타고 가는데 버스가 만원이 되어 비좁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한 흑인 여자가 아이를 다섯을 데리고 버스를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을 밀로 떠들고 거기에다 목욕도 하지 않아 냄새마저 진동하였습니다. 그 때 이 성도는 화가 폭발하기 전에 스스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무엇을 감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런 여자가 내 마누라가 되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나아가 원수 앞에서도 찬송과 감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옛날에는 다윗의 글을 읽으면 다윗은 왜 이렇게 원수를 달고 사느냐 그런 생각이 늘 들었습니다. 그런데 깨닫고 보니까 다윗이 원수를 만든 것이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 편에 서서 살려고 하니까 하나님의 원수가 다윗의 원수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결국 다윗의 원수는 하나님의 원수요, 하나님의 원수는 다윗의 원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개인적인 맺은 원수를 많이 가지고 사는 것은 크게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도 불행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의의 사람이 불의한 사람의 원수가 되지 않을 것이며, 어떻게 진실한 사람이 거짓의 원수가 되지 않는 것이며, 어떻게 빛의 사람이 어둠 속에서 사랑을 받기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 그 말입니다.
그러나 내 원수가 하나님의 원수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수들의 목전에서 잔치상을 베풀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5절에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로 9절에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수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주님께서는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에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머리에 발라 우리의 잔이 넘치게 하실 것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예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주일 예배 시에 감사헌금을 드리신 성도들의 이름과 기록된 감사내용을 함께 불러드리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건강, 생일, 이사, 승진, 합격 등 소원을 포함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홍보의 효과가 컸습니다. "아무게 집에 경사가 났구나. 아무게 집사님 집에 아들을 낳았구나, 병원에 입원하였구나."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어떤 교회에서 어떤 성도가 "주님 무조건 감사합니다"라고 쓰여진 감사헌금 봉투가 올라와서 목사님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에는 "주님 거저 감사합니다"라는 봉투가 올라와 또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일에는 다른 집사님이 "주님 초초 감사합니다"라고 써서 감사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주일에 다른 분이 "주님 각각 감사합니다"라고 써서 헌금을 드렸다고 합니다. 그저 주님의 은혜가 일각일각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겠다는 말로 결론을 삼았습니다. 저는 본문을 읽을 때마다 이 말씀이 가장 은혜스럽습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우리 인생은 행인과 나그네의 길일뿐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는 하늘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성도에게는 여호와 집에 거하는 엄청난 소망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거기 눈물도 근심도 탄식도 죽음도 이별도 곡하는 것도 없는 그곳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추한 몸이 영화로운 몸으로, 약한 몸이 강한 몸으로, 육의 몸의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날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역경 중에서도, 순경 중에서도, 그리고 단조로운 평범한 삶 속에서도 감사하는 그야말로 범사에 감사하는 새 천년의 감사절이 되시지 않겠습니까?
출처/최삼경목사 설교자료 중에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