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을 기억하라!   신 32:7~12 (마가복음 8:6~10 참조)

전에는 운동 선수라고 하면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춥고 배고픈 직업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달라졌습니다. 박찬호 선수의 경우 내년도 연봉 협상에 있어서 적어도 이천만 불은 받아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천만 불이면 우리 돈으로 얼마입니까? 약 이백육십억 원입니다. 그리고 금년에 5승을 달성한 골프의 박세리 선수는 또 어떻습니까? 상금 액수만도 벌써 백만 불이 넘었습니다. 천문학적 숫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유명 선수들의 막대한 수입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그런 위치에 이르기까지 겪어야 했던 시련과 고통 그리고 피나는 훈련 과정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박찬호나 박세리 같이 뛰어난 선수들도 현재의 부와 명성에 도취해서 교만해지거나 훈련을 소홀히 할 것 같으면 그 즉시 곤두박질하더라는 것입니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잊으면 아니 된다는 말이 정말 맞는 말입니다. 잊어도 좋은 것이 있고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골프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중년 이상의 나이에 새롭게 운동을 시작하려면 골프 외에는 할 운동이 없다고 합니다. 제 견해가 아니고 많은 의사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까닭은 다른 격한 운동들은 오히려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치성 운동이라고 해서 공직자들 같은 경우 주위 사람들 눈치를 봐가면서 몰래 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많이 대중화된 것 같습니다. 물론 아직도 그림의 떡처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골프가 사치성 운동이냐 대중 스포츠냐 하는 것은 나중에 따질 문제입니다. 하여간 이왕에 골프를 치기로 했으면 마음껏 즐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몸에도 좋고 또 정신 건강에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참으로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골프라는 운동을 즐기기보다는 그 운동의 도구에 불과한 골프채를 사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이외로 많다는 말입니다. 때로는 병적 아니 광적이라고 할 정도로 새로 나온 골프채를 사는 일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좋은 골프채가 아니라 좋은 실력과 골프라는 운동에 임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바울 사도 일행이 이고니온 지방의 루스드라라고 하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희한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되었던 병자 한 사람을 고쳤습니다.(행 14:8 참고) 그러자 소문을 들은 주민들이 몰려와서 일행에게 소와 꽃다발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가리켜서 쓰스와 허메라고 하면서.....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오셨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정작 당황한 것은 바울과 바나바였습니다. 그들은 옷을 찢으면서 말했습니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행 14:15)

우리는 사람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당장 눈앞의 펼쳐진 모습에 따라서 판단하고 결정하기를 좋아합니다. 바울 사도가 활동하던 당시의 사람들도 새롭게 등장한 신들에 대해서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새로운 과학 기술, 새로운 투자 기법, 새로운 유행, 새로운 조류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까 요즘은 신지식인이라는 전에는 듣지 못하던 말까지 생겼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유행을 타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하는 목회자들은 신앙 생활의 새로운 유행을 주도하는 일종의 스타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탁월한 지도력과 근면성 그리고 통찰력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늘 새로운 것을 찾다 보면 옛것을 잃어버리기 쉽다는 점입니다. 옛것은 전통을 뜻하는 것이며 전통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시간과 시간의 역사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망각함으로써 결국 인간의 존재 의미 자체를 상실하게 됩니다. 때문에 시간과 시간의 역사를 잃어버린 인간은 다만 생물학적 욕구에 끌려다니는 비참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오늘 봉독한 신명기 본문 말씀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될 백성들을 위해서 부른 노래입니다. 가나안이 어떤 곳입니까? 풍요를 가져다 준다는 농업의 신 바알을 섬기는 곳입니다. 메마른 사막에서 항상 궁핍하게 지내던 백성들의 눈에 비친 바알 문화는 거의 환상적이라고 할 정도로 매력적인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바알은 날마다 기적을 일으키는 신인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눈앞에 두고서 모세는 이 노래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결코 옛날을 잊지 말라고.....

사람들에게는 대체로 지금 당장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대상을 향해서 맹종하려는 습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리석게 보이지만 많은 사람들의 생존 방식인 것도 사실입니다. 살려는 본능이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면 더 큰 힘을 의지해서라도 살려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일 것입니다. 때문에 기적에 대한 맹목적인 기대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기적이라고 생각하면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기대가 깨어지는 순간 너무나 쉽게 등을 돌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보고 몰려든 군중을 흩어 보내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마가복음의 이야기는 마태복음의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와 평행을 이루는 이야기입니다. 무려 사천 명이나 되는 큰 무리가 사흘 동안 먹지 못한 채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굶으면서까지 따라다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배불리 먹이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적만 바라는 사람들을 끝까지 이끌고 다니시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흩어 보내셨고 그들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진정으로 원하셨던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적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정립해야 합니다. 첫째, 생명 자체가 기적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우리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풀 수 없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적으로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 실제로 우리 주변은 기적으로 덮여 있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이 자연을 숭배하고 또 영적인 것을 무조건 숭배하는 것입니다. 소위 우상 수배가 일어나는 근본 원인이 바로 생명 자체가 기적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둘째, 기적 중에서 가장 큰 기적은 주님과 교제하는 기적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기를 주님은 또한 원하십니다. 이 기적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논리를 초월하는 신비인 것입니다. 이 기적이 우리로 하여금 역경과 시련 가운데서도 주님의 은총을 감사하며 늘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주님과의 사귐입니다. 사실 기적은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표지인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접할 때 우리가 주님과 사귈 수 있는 것이지 기적에만 주목하면 욕망의 노예가 되거나 기적을 매개로 한 헛되고 거짓된 우상의 노예가 되기 쉽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최근 첨단 과학 특히 분자물리학과 분자생물학의 눈부신 발전은 모든 생명체를 분자 구조에 의해서 이해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전에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세포의 결합체로 이해했지만 이제는 세포를 구성하는 단백질의 결합체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생명의 근원을 밝힐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은 물론이고 생명체의 변형과 새로운 창조까지 가능한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분자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은 단순한 단백질 덩어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 인간이 단순히 단백질 덩어리에 불과하다면 지금 당장 먹을 것을 공급해 주는 것들을 신으로 섬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기적을 따르는 것이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우리는 눈앞의 기적을 따르지 말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따라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결코 우상의 지배를 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기적을 따른다면 그것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헛된 욕망의 노예가 되어 날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헛되고 거짓된 우상에게 끌려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다보면 우리의 삶 속에서 진짜 소중한 기적이 일어날찌라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합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신 32:7) 지금 눈앞의 기적에 끌려서 시간의 역사를 잃어버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먹을 것, 입을 것 등 눈앞에 기적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불러야 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무엇을 받고 싶습니까? 화를 당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복을 받고 싶습니까? 물론 복을 받고 싶을 것입니다! 복을 받아도 크고 좋은 복을 많이 받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복이 가장 귀한 복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얻는 것이 가장 귀한 복입니다! 생명을 얻어야 하고 그 생명을 영원히 누려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복을 주시는 분, 즉 영생을 주시는 분과 더불어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헛된 우상을 다 버립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이천 년 전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읍시다! 그 주님을 뜨겁게 사랑합시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합시다! 주님이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던 것처럼..... 마침내 그 주님과 함께 영광의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는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