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타나져야 할 사람  (사43:25-26)


법정에 가보면 검사는 피고인의 죄를 낱낱히 파헤치고 드러내서 정확하게 법조문에 근거하여 구형을 내립니다. 죄가 나열됨은 형을내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의 범죄가 나열되다가 용서와 긍휼에 대한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죄의 지적이 있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용서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전체 스토리의 전개과정입니다. 간혹 징계가 있고 형벌이 선포되지만 그것은 회개에 대한 촉구요 긍휼과 용서를위한 과정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사람들 앞에서의 나를 보는 자들이 있고 하나님앞에서 나를 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먼저 '사람들앞에서의 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최대한 인정해 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부당하게 남을 학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이 내게 해를 끼친다 할 때에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그를 그 공동체에서 쫓아내든지 묶어두든지 적당한 벌을 가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본주의' 입니다.
굉장히 이상적이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거기엔 긍휼이나 사랑이 없습니다. 20세기 지구의 반을 지배했던 사회 공산주의 사상이 대표적인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앞에서의 나' 를 이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인본주의(人本主義)가 사람이 바탕에 있다면 신본주의는 하나님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앞에서 나를 바라보는 자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바라볼 뿐 아니라 하나님을 통하여 함께하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그것은 마치 가족 공동체처럼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하여 형제를 바라봄과 같아서 나은 형제는 못한 형제를 책임지고 허물있는 가족은 용서와 사랑을 받으며 뉘우치기도 하고 화해도 하는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즉 신본주의자는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 커다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란 인본주의도 아니고 신본주의도 아닙니다.
인본주의는 이기적으로 흐르기 쉽고 신본주의는 그래도 이타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저는 생각할때,
20세기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구별됨이었다면 21세기는 인본주의적 자본주의와 신본주의적 자본주의의 구별이 되지 않을까 느껴집니다. 나라마다 갖는 자본주의의 성격이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개개인의 삶이 확연하게 그 차이를 드러낼 것 같습니다.

<그를 위한 나의 존재>
지난주에 일본 사람들에 대한 예를 들어 말한적이 있습니다만 그들은 대단히 공중 도덕을 잘 지키고 그래서 선진국답게 윤리의식이 뛰어납니다. 다른 나라에 비하여 교도소 수용인원이 1/10밖에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죄인으로 인정된 자가 가족과 사회로부터 용서를 받고 완전한 긍휼과 사랑을 받기 힘든 문화라면 좋은것만은 아닌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은 참 허물이 많은 민족입니다.
굉장히 교만한 민족입니다. "목이 곧은 백성"이라 했습니다.
우리민족을 보면 경제적 수준에 비례하여 볼때 윤리적으로 대단히 문제가 많은나라입니다. 고소·고발 건수가 가까운 일본에 비해 수십배에 달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용서를 잘 해주는 나라가 얼마나 있을까요.
교도소 방이 부족해서 그냥 내주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3·1절, 8·15, 성탄절, 석탄일 등 기회만 되면 적지 않은 수가 가석방됩니다. 정직하지가 못해서 죄를 많이 짓고 범죄자가 되기도 하지만 시간만 조금 지나면 관용하고 용서해 주며 잊어버립니다. 죄는 나쁘지만 죄를 갖지 못하면 은혜도 없습니다.
'그래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다' 는 말씀이 있습니다.(롬5:20)
발달된 인본주의적 사회에 죄가 적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때문에 진정한 사랑과 용서 그리고 은혜가 죽어 없어진다면 결코 좋은 사회일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는 정직하고 깨끗해도 여전히 내안에 자리잡고 있는 죄성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의로운 자로 인정받을자라도 죄지은 자를 바라볼때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향하여 돌을 드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며 그 돌을 들어 자신을 바라보며 내려 놓을 수 있는 사람들로 채워지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점에서 저는 너무 깨끗해 보이고 너무 오래사는 일본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우리나라가 변화된 그리스도인들로 인하여 사랑과 긍휼과 용서의 사람들로 가득 채워지고 그래서 정직한 나라가 되고 가족같은 사랑으로 더불어 사는 행복한 나라가 될 것을 꿈꾸어 봅니다.
인본주의를 좋아하지 마십시요. 여러분은 고상한 휴머니스트가 되지 마십시요.
내 삶의 중심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안에서 형제들을 모든 이웃들을 품고 함께 살아가는 신본주의자들이 되셔야 합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앞에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과 상관없는 많은 사람들 속에 한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는 자요 하나님을 위해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전에 내가 연약한 자인것을 하나님이 먼저 아십니다.
내 안에 거부할 수 없는 죄성이 있음을 그분이 아십니다.
그래서 나의 허물을 지우는 일을 먼저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못하시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고 인정하지 못한 자에게는 주님도 못 지우십니다.
죄성이 드러나지 않고 덮어버리는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죄는 드러나야만 합니다. 벌거벗은것처럼 드러나야만 합니다.
고백하지 않은 용서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자기를 방어하고 남의 간섭을 일체 허용하지 않는 인본주의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상관될 공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의 능력입니다. 완전한 용서의 능력입니다.
작은 기억마저 지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에겐 없는 그분만의 능력입니다.
내가 그앞에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는, 그가 필요로 하는 존재일 수 있는것은 회개한 죄에 대하여 다시 기억지 아니하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내게 허물있는 사람이 회해하고 용서 되었다고 전혀 아무렇지 않은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면 속으로는 가소로운 느낌을 갖습니다. 표현은 안하면서도 속으로는 무시하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것이 완전한 용서의 힘입니다.
완전한 사랑을 주기 위하여 그 사랑의 걸림돌인 기억을 스스로 지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억되어야 할 나>
좋은 신앙인에겐 좋은 습관이 있습니다.
좋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이 좋아질수록 하나님을 닮아서 나쁜 기억을 잘 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기억은 잘 기억합니다.
세상에 가장 불쌍한 사람은 나쁜 추억과 기억에 지배되어 사는 사람입니다.
한에 서려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을 다 잊으시는 분이십니다. 잊어버린 그분이 부탁하는 것이 있습니다.
"너는 나로 기억나게 하라" 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좋은 기억을 의미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좋은 인상만큼 큰 재산은 없습니다.
한번 씩~^-^웃어주는데 신뢰감과 호감이 가서 내가 나서서 가까이 하고 싶어집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인상이 꼭 산적같아서 사람을 사귀는데 힘이 들다는 넉두리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저는 설교가로서 스스로 판단할대 발음이나 목소리가 시원찮고 언변력도 부족한데 꼭 어디가서 설교하고 나면 설교하시는 인상이 좋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냥 듣기 좋아라고 하는 소리만은 아닌것 같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겐 외모 하나에도 기억하게 하는 힘이 이렇게 다릅니다.
그러나 외모를 그리 중시하진 마십시요.
"사람은 외모를 보니거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했습니다. (삼상 16:7)
하나님이 기억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너는 나로 기억이 나게 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앞에 좋은 인상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서 무엇을 기억하시리라고 보십니까!
요셉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특징은 누구에게나 기억된바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육친의 아버지인 야곱에게 특별히 기억된바된 사랑받은 아들이었습니다.
형제들에겐 그것 때문에 시기를 받긴 했지만 종으로 팔려가서도 주인 보디발에게 기억된바 되었고 감옥에 있을때에는 전옥에게 기억된바 되었습니다.
술맡은 관원장을 도와주어 기억된 바 되더니 바로왕에게 기억된 바 됩니다.
뛰어나서만 하나님께 기억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함과 성실함 그리고 특별함이 기억되게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기억되기 위해선 특히 특별함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진실과 성실은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생각과 행동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의 말씀에 깊이 깨우친바 되지 못하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누가 주를 알아서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너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2:16)했습니다. 신의 성품을 가지고 그의 마음에 지배된 사람은 누구라도 특별한 영적 행동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기 원하신다면 특별한 사람이 되십시요.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자 앞에서 작은 것을 가지고 옹졸하게 서 있지 말고 배짱있는 믿음의 행동을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아가 "변론하자" 고 말씀합니다.
깊은 관계를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앞에 기억될 수 있는 사람으로만 만족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기억나는 사람과는 친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통로는 바로 "말씀과 기도" 입니다.
기도의 깊이 말씀의 깊이 속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게 하는 것은 '말씀' 입니다.
그러나 절대 말씀으로 신앙이 온전해지지는 않습니다.
기도의 사람은 하나님을 떠날 수 없지만 말씀의 사람은 떠날 수 있음을 봅니다.
기도의 사람은 능력을 소유하지만 말씀의 사람은 겨우 자신만을 지탱해주는 사변적 신앙에 머무름을 보게 됩니다.
먼저 말씀의 사람이 되십시요.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면 안됩니다.
지식의 말씀위에 선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는 늘 함께 가야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앞에 기억되고 부각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최소한 하루 30분정도 이상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말씀은 그를 아는 통로요 기도는 그를 만나는 시간임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나타내야 할 나> < 결론>
하나님앞에 부각된 인생에겐 남다른 간증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 일입니다.
"너는 네 일을 말하며 나타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함께 하시리라는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선 그 일을 나타냄으로 의를 드러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서도 이왕이면 이름이 드러나고 얼굴이 기억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출세요 복입니다.
신앙생활도 하나님 앞에서 기억되어 드러나고 그로 인하여 사람들 앞에서도 그가 하신 일을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서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이 신앙인으로 성공하는 사람입니다.

출처/임종학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