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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기록된 복된 이름 (눅 10: 17~20) (출애굽기 33:17~20 참조)
지난 목요일 김태훈 목사님을 모시고 실시한 제2회 광야 신학 강좌를 통해서 제가 가장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기대보다 훨씬 더 은혜로웠던 것 같습니다. 목회자가 외부 강사를 모실 때는 누구나 기도하면서 신중하게 모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회가 끝난 후 후유증이나 부작용에 시달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우리 교회는 참 좋은 강사님을 모시고 아주 은혜로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정말 많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우리는 이번 강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잘난 사람이나 많이 배운 사람 또는 많이 가진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청결한 양심을 가진 사람과 거짓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적으로 볼 때는 하찮은 여인들 같지만 거짓 없는 믿음을 디모데에게 가르쳐 준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같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특히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교회를 위해서 활동하던 지도자가 어디 바울 한 사람뿐이었겠습니까? 뛰어난 지도자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실 바울 사도는 지도자들 틈에 끼지도 못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따돌림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그를 배척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소위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를 따돌렸고 특히 그가 세운 교회들이 그를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다른 지도자들보다 그를 더 크게 쓰셨습니다. 왜 그를 더 크게 쓰셨겠습니까?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하나님께서 그의 청결한 양심을 귀하게 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그 당시 교회 안에 많은 여인들이 있었을 것이며 나름대로 잘난 여인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귀한 신분의 여인들도 있었을 것이며 또 부유한 여인들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잘 것 없는 디모데의 외조모와 어머니의 이름 로이스와 유니게를 유난히 강조하신 것은 무슨 까닭이었겠습니까? 오직 디모데에게 가르쳐 준 거짓 없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나 지금이나 깨끗한 마음과 진실한 믿음을 기뻐하시며 그 이름을 기억하신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큰 위로를 주는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칠십 인의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서 전도하도록 내보내셨습니다. 얼마 후 그들이 돌아와서 자신들이 겪은 놀라운 사건을 보고했습니다.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제자들이 의기양양하게 보고하는 것을 다 들으신 예수님께서 전혀 엉뚱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잘했다고 칭찬하셔도 좋을 것인데 칭찬은 전혀 하시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18~20)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다 까닭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그 당시 예수님 곁에 서 있던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는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까닭을 자세히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사단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악의 세력이 더 이상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단이 하나님의 자녀들 위에 더 이상 군림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패잔병처럼 달아나는 사단의 뒤통수를 공격한 것쯤 가지고 뭐 큰 일이라도 한 것처럼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친히 보셨다고 한 것은 우리 주님의 신적 권위를 잘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치 고성능 레이다 망에 걸려든 것처럼 사단은 우리 주님의 시야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때문에 이 말씀은 주님이 사단의 권세를 완전히 제압하셨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결과를 가지고 제자들이 자신들의 공으로 삼으려고 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을 비롯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단순히 사단을 제압하고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전부라면 사단과 우리가 다를 바 무엇입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명예나 얻고 권력이나 취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울러 오늘 우리는 하늘 즉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다고 할 때의 그 하늘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은 원래 하늘의 존재입니다. 비록 땅에서 살지만 그 본래 소속은 하늘입니다. 물론 여기서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공간적인 개념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으로 이 험한 세상에서의 모든 수고와 고생에 대한 참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다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세계를 위한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또한 뜻합니다. 오늘의 세계는 모든 것을 업적이나 실적으로 평가합니다. 능력이란 단지 그가 얼마나 실적을 올렸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되지 않습니까?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그 사회에서 도태되게 마련입니다. 직장뿐 아니고 가정에서도 실적이 변변치 못하면 무능한 인물로 취급됩니다.
그리고 좋은 직장에 취직한 것만으로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좋은 직장일수록 실적에 대한 평가가 아주 가혹합니다. 그래서 직장인들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아니 직장 생활을 시작하기 전부터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습니다. 엊그제 과로로 숨진 사법연수원생의 경우가 아주 좋은 실례가 아닙니까? 어디를 가든지 경쟁이 치열합니다.
실적주의가 개인이나 집단의 능력을 극대화시키고 풍요로운 물질 세계를 만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실적주의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 위험이 다분히 있습니다. 또한 실적주의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무엇이 인간을 지배합니까? 보다 큰 실적이 작은 실적을 지배하지 않습니까? 실적이란 것이 우상처럼 군림합니다.
인간은 그 실적을 불변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상으로 만들려는 유혹을 받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 우상의 그늘에서 기득권을 누리려고 합니다. 최근 대형 교회들이 목회 세습을 강행하는 것도 알고 보면 그 배후에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무리들의 더럽고 추한 음모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름이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물론 여기서 이름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름이요 오고 오는 세대 속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이란 그 사람의 존재를 종합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임을 알아야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존재를 이름으로 나타내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백성들을 잘 인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요청을 들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19~20)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의 이름만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물론 죄 많은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보면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거나 가질 수 없게 하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왜 이것이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가짐으로써 세상을 지배하는 힘을 독점하려는 유혹을 종종 받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거의 추악한 역사를 들추어보면 신의 이름을 빙자한 절대 권력의 피비린내 나는 횡포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고 그 이름을 사랑하며 찬양하는 것 자체가 참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할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그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먹도록 행동하고 처신한다면 어떻게 그를 가리켜서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하는 가운데 이미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한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다만 앵무새처럼 소리내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 아래 온전히 복종하겠다는 것이요 세상의 어떤 권위로도 그 이름을 대치하지 않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서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여러분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이름을 남기겠습니까? 그리고 그 이름을 어디에 남기겠습니까?
여러분의 이름이 청결한 양심의 대명사로 기억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여러분의 이름이 거짓 없는 믿음을 굳게 지킨 인물로 기억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여러분의 이름이 어린양 보좌 앞에 놓인 생명책에 기록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믿고 맡기신 복음 전파 사역에 성령의 충만한 권능을 가지고 죽도록 충성함으로 말미암아 장차 그 주님의 보좌 앞에 섰을 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는 칭찬을 듣는 복된 이름을 가진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강석공목사 설교자료 중에서(출처)
지난 목요일 김태훈 목사님을 모시고 실시한 제2회 광야 신학 강좌를 통해서 제가 가장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기대보다 훨씬 더 은혜로웠던 것 같습니다. 목회자가 외부 강사를 모실 때는 누구나 기도하면서 신중하게 모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회가 끝난 후 후유증이나 부작용에 시달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우리 교회는 참 좋은 강사님을 모시고 아주 은혜로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정말 많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우리는 이번 강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잘난 사람이나 많이 배운 사람 또는 많이 가진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청결한 양심을 가진 사람과 거짓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적으로 볼 때는 하찮은 여인들 같지만 거짓 없는 믿음을 디모데에게 가르쳐 준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같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특히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교회를 위해서 활동하던 지도자가 어디 바울 한 사람뿐이었겠습니까? 뛰어난 지도자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실 바울 사도는 지도자들 틈에 끼지도 못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따돌림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그를 배척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소위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를 따돌렸고 특히 그가 세운 교회들이 그를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다른 지도자들보다 그를 더 크게 쓰셨습니다. 왜 그를 더 크게 쓰셨겠습니까?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하나님께서 그의 청결한 양심을 귀하게 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그 당시 교회 안에 많은 여인들이 있었을 것이며 나름대로 잘난 여인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귀한 신분의 여인들도 있었을 것이며 또 부유한 여인들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잘 것 없는 디모데의 외조모와 어머니의 이름 로이스와 유니게를 유난히 강조하신 것은 무슨 까닭이었겠습니까? 오직 디모데에게 가르쳐 준 거짓 없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나 지금이나 깨끗한 마음과 진실한 믿음을 기뻐하시며 그 이름을 기억하신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큰 위로를 주는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칠십 인의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서 전도하도록 내보내셨습니다. 얼마 후 그들이 돌아와서 자신들이 겪은 놀라운 사건을 보고했습니다.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제자들이 의기양양하게 보고하는 것을 다 들으신 예수님께서 전혀 엉뚱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잘했다고 칭찬하셔도 좋을 것인데 칭찬은 전혀 하시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18~20)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다 까닭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그 당시 예수님 곁에 서 있던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는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까닭을 자세히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사단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악의 세력이 더 이상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단이 하나님의 자녀들 위에 더 이상 군림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패잔병처럼 달아나는 사단의 뒤통수를 공격한 것쯤 가지고 뭐 큰 일이라도 한 것처럼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친히 보셨다고 한 것은 우리 주님의 신적 권위를 잘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치 고성능 레이다 망에 걸려든 것처럼 사단은 우리 주님의 시야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때문에 이 말씀은 주님이 사단의 권세를 완전히 제압하셨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결과를 가지고 제자들이 자신들의 공으로 삼으려고 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을 비롯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단순히 사단을 제압하고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전부라면 사단과 우리가 다를 바 무엇입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명예나 얻고 권력이나 취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울러 오늘 우리는 하늘 즉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다고 할 때의 그 하늘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은 원래 하늘의 존재입니다. 비록 땅에서 살지만 그 본래 소속은 하늘입니다. 물론 여기서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공간적인 개념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으로 이 험한 세상에서의 모든 수고와 고생에 대한 참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다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세계를 위한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또한 뜻합니다. 오늘의 세계는 모든 것을 업적이나 실적으로 평가합니다. 능력이란 단지 그가 얼마나 실적을 올렸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되지 않습니까?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그 사회에서 도태되게 마련입니다. 직장뿐 아니고 가정에서도 실적이 변변치 못하면 무능한 인물로 취급됩니다.
그리고 좋은 직장에 취직한 것만으로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좋은 직장일수록 실적에 대한 평가가 아주 가혹합니다. 그래서 직장인들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아니 직장 생활을 시작하기 전부터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습니다. 엊그제 과로로 숨진 사법연수원생의 경우가 아주 좋은 실례가 아닙니까? 어디를 가든지 경쟁이 치열합니다.
실적주의가 개인이나 집단의 능력을 극대화시키고 풍요로운 물질 세계를 만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실적주의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 위험이 다분히 있습니다. 또한 실적주의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무엇이 인간을 지배합니까? 보다 큰 실적이 작은 실적을 지배하지 않습니까? 실적이란 것이 우상처럼 군림합니다.
인간은 그 실적을 불변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상으로 만들려는 유혹을 받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 우상의 그늘에서 기득권을 누리려고 합니다. 최근 대형 교회들이 목회 세습을 강행하는 것도 알고 보면 그 배후에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무리들의 더럽고 추한 음모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름이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물론 여기서 이름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름이요 오고 오는 세대 속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이란 그 사람의 존재를 종합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임을 알아야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존재를 이름으로 나타내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백성들을 잘 인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요청을 들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19~20)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의 이름만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물론 죄 많은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보면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거나 가질 수 없게 하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왜 이것이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가짐으로써 세상을 지배하는 힘을 독점하려는 유혹을 종종 받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거의 추악한 역사를 들추어보면 신의 이름을 빙자한 절대 권력의 피비린내 나는 횡포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고 그 이름을 사랑하며 찬양하는 것 자체가 참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할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그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먹도록 행동하고 처신한다면 어떻게 그를 가리켜서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하는 가운데 이미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한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다만 앵무새처럼 소리내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 아래 온전히 복종하겠다는 것이요 세상의 어떤 권위로도 그 이름을 대치하지 않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서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여러분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이름을 남기겠습니까? 그리고 그 이름을 어디에 남기겠습니까?
여러분의 이름이 청결한 양심의 대명사로 기억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여러분의 이름이 거짓 없는 믿음을 굳게 지킨 인물로 기억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여러분의 이름이 어린양 보좌 앞에 놓인 생명책에 기록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믿고 맡기신 복음 전파 사역에 성령의 충만한 권능을 가지고 죽도록 충성함으로 말미암아 장차 그 주님의 보좌 앞에 섰을 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는 칭찬을 듣는 복된 이름을 가진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강석공목사 설교자료 중에서(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