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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라! (마5:13-16)
옛날 세 딸을 둔 임금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임금이 세 딸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큰딸은 금이라고 했고, 둘째딸은 보석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셋째 딸은 금이나 보석이 아니고 소금이라고 합니다. 임금은 매우 의아해 하면서 아니 "소금이 무엇이 귀하단 말이냐? 구하기 쉽고 값 산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그 때는 셋째 딸은 아무 대답도 없이 묵묵히 있었습니다. 저녁 식사 때가 되었습니다. 셋째 딸은 주방으로 가서 임금님의 음식에 일체 소금을 넣지 못하게 했습니다. 임금이 식사를 하는데 음식을 도저히 먹을 수가 없습니다. 왜? 음식이 간이 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화가 난 임금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니 이것을 음식이라고 만들어 왔느냐?"
이 때 셋째 딸이 달려와 하는 말이 "아바마마! 어떻게 임금님이 잡수실 수라 상에 값싸고 보잘것없는 것을 넣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소금을 넣지 않았습니다"
임금님은 그 때서야 "과연 그렇구나! 금은 없어도 살고, 보석 없이는 살지만 소금 없이는 정말 못살겠구나!" 깨닫고, 셋째 딸을 크게 칭찬하고 후한 상급을 주었답니다.
소금에 귀중함을 알게 하는 예화입니다.
▶마5,6,7장을 예수님의 산상수훈이라고 말합니다. 이 산상수훈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나라 백성들의 삶의 내용입니다. 또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지켜야 할 윤리강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이 산상보훈을 '그리스도의 전 교훈의 대 요약', '수백 개의 보석으로 꾸며진 왕관', '하나님 나라의 대헌장'이라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민족지도자 '간디'는 비록 그리스챤은 아니었지만 그의 평생에 산상보훈을 애독하였고 생활철학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또한 역사를 움직인 많은 사상가들이나 지도자들이 이 산상보훈의 교훈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이 산상수훈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그대로 지키며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삶의 내용으로 삼아야 하는 목표입니다. 그래서 천국 가는 그 날 까지 산상수훈의 내용을 내 삶에 담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 '성화'라고 합니다.
즉, 신자들은 반드시 경건과 거룩을 완성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지만 우리가 경건해지고 거룩해지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성화는 하나님 말씀대로 차근차근 훈련하고 그렇게 살아서 내 속에 그리스도의 성품과 향기가 배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미적 감수성이 뛰어난 어느 화가가 이 산상수훈의 내용을 깊이 읽고 깨달은 후 세 개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합니다.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입니다.
우리가 산상수훈을 읽고 또 읽고 묵상해 가면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산상보훈을 복음서 중에 작은 복음서라고 합니다. 이 작은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진실되게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이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초상화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참된 교회 상에 대해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인정받고,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는 그와 같은 희망적인 교회를 산상보훈을 통해서 지어져가야 합니다.
■다음으로 화가는 이 산상수훈에서 이상적인 예수의 제자 상을 그려낼 수 있습니다.
이 작은 복음서에 담겨진 예수의 제자 상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되어가고 싶어하는 그러한 제자 상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모습을 닮아 가는 존재입니다.
히12: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빌2:5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본문은 그 유명한 팔복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복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쳐주는 교훈입니다.
오늘 저는 ◀너희는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교훈을 주듯, 예수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몇 가지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상징적인 몇 가지 용어를 발견하게 됩니다.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에 빛이다! 너희는 산 위에 동네이다!"
이런 말씀들을 한마디로 묶어서 해석한다면, '책임 있는 인생을 살라'는 말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제구실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희는'이란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너희는'이란 말을 이해 할 때 언제나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소금이 아니어도 좋고, 빛이 아니어도 좋고, 산 위에 동네가 아니어도 좋지만, 너는 소금이 되어야 하고 빛이 되어야 하고 산 위에 동네가 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늘 주님이 주신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해하고 나의 신앙의 모습으로 바꿔 나아가야 합니다.
●나는 소금입니다. 소금이기에 맛을 내야 합니다. 맛을 잃어버리면 밖에 버리워 밟힐 뿐입니다.
●나는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빛은 옳은 행실을 의미합니다. 나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야 할 터인데 내 속에 등불이 가물거리니 어찌해야 할까?
●나는 산 위에 드러난 동네입니다. 그래서 산아래 동네 사람들에게 좋은 본을 보이고, 좋은 소식을 전해야 될 터인데 그 구실을 제대로 못했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깨닫고 고백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는'이라는 말의 뜻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나 자신의 얼굴과 양심을 향하여 외쳐야 할 경고이며 자책이어야 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자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그대가 먼저 건전한 인격자가 되라! 백성의 질병을 알거든 그대가 먼저 의사가 되라! 의사까지는 못되더라도 그대의 병부터 고쳐서 건전한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민족 개조론의 정신'입니다. 나부터 고치고, 나부터 바른 인격자가 되면, 민족이 치유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먼저 소금이 되고, 빛이 되고, 산 위에 동네로 살면 이 세상은 썩지도 않을 것이요, 어둡지도 않을 것이요, 남들이 손가락질도 안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네 가지의 진리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 너희는 소금이 되라!(13절 상)
소금인데 그냥 소금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교회의 소금이니" 하지 않고 세상의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만나보면, 모두 다 선남 선녀입니다. 훌륭하게 기도도 잘하고, 말씀도 잘 듣고 아멘도 잘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나가면 어떻습니까? 신앙인의 모습이 사라지고 맙니다. 누구나 교회 안에서는 신앙인 처럼 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우리들이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주소는 '이 세상 속'입니다. 즉 소금과 빛과 같이 이 세상 속에서 책임적인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우리는 예수 믿는 순간부터 소금이 되었습니다. 지금 주님은 그 당시 제자들에게, 오늘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소금처럼 살라고 교육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교육과 훈련입니다. 그것도 한번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배우고 훈련받아야 합니다.
●교육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즉 보는 교육, 느끼는 교육, 배우는 교육입니다.
①보는 교육이란, 글자 그대로 눈으로 보며 배우게 되는 교육을 말하는데, 제자들이 선생의 인격을 보고 배웁니다. 자식이 부모의 인격을 보고 배웁니다. 성도가 목사의 신앙과 인격을 보고 배웁니다.
평신도가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의 신앙과 인격을 보고 배웁니다. 그러니 먼저 된 자가 잘해야 합니다.
②느끼는 교육이란, 가슴으로 느끼며 배우는 교육을 말합니다. 가정의 분위기에서, 교회의 분위기에서 느끼는 교육입니다. 그럼으로 먼저 된 직분자는 먼저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야 하고, 인사도 잘하고 모든 성도에게 관심을 갖고, 또 어떠한 경우라도 교회와 목사님을 헐뜯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를 자랑하고 목사님을 자랑하고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을 자랑해야 합니다.
③배우는 교육입니다. 먼저 된 자의 입장에서 보면 가르치는 교육입니다. 바로 알아야 바로 믿을 수 있고 바로 행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배우는 교육, 즉 가르치는 교육보다 더 우선되고 중요한 것은 보는 교육이요, 느끼는 교육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야 하고 느끼게 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소금과 빛에 대하여 실물 교육을 시키고 계십니다.
●고대는 소금을 대단히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소금을 '신과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로마 속담에 '소금과 햇빛은 이 세상을 생기 있게 만들고, 향기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호머'라는 사람은 '소금은 신선하다'고 했고, '풀라톤'은 '신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보배'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본문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값진 존재이며,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가를 상기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소금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한번 알아봅시다.
첫째 존재론적으로, 아주 보편적인 진리인 녹아지기 위해 존재합니다. 소금이 녹기 싫다면 일고의 가치가 없습니다. 존재 의미가 없어요. 소금은 순전히 녹아 쓰여지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둘째 가치론적으로, 소금이 얼마나 요긴합니까. 하루 세끼 중 소금과 관계없이 식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동, 서양을 막론하고 음식에는 적당한 염분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소금은 우리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살 동안 소금 없이는 못 살아요.
셋째 역할론적으로, 소금의 역할은 모든 것을 맞춰 주거나 받쳐 줍니다. 음식과 음식 사이에 조화를 이루는 역할입니다. 거기엔 기가 막힌 결과가 나옵니다.
넷째 효과론적으로, 소금이 들어가면 100% 변화가 일어납니다. 맛의 변화입니다.
■소금의 특성 몇 가지만 알아봅시다!
①소금은 순결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소금을 순결의 상징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원시 종교에서 그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헌물을 할 때 소금을 뿌렸는데 이것은 그들의 순결을 의미하는 의식이라고 합니다.
구약 성경 레2:13절에 보면, 소제를 드릴 때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니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민18:19절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
겔43:24절 "흠 없는 제물을 드리되 여호와 앞에 드릴 것이며"
이렇게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때 소금을 곁들였는데 말하자면 순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드렸습니다.
그런 의미로 생각할 때 오늘의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순결의 표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순결의 삶의 비결을 골3:1절 이하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소금에 순결성을 우리 믿음의 생활에 적용해 봅시다.
언행심사가 깨끗해야 하고 흠이 없어야 합니다. 정직한 생활을 해야 하며 바른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도덕적인 순결을 지니고 있어 이 사회의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김대중 정부 때 '옷 로비 사건' 청문회를 보면서 신앙생활에 순결성을 잃어버린 증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세상사람들이 얼마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우습게 보았습니까?
우리는 사업을 하든, 직장 생활을 하든,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인들은 구별 되이 살아야 합니다. 원래 '성도'란 구별된 자 입니다.
약1:27절에서 야고보 장로님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속에 묻혀 살고 있으나 세속에 물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②소금은 썩는 것을 막는 방부제의 역할을 합니다.
소금은 음식물이 변질되거나 부패하지 않도록 하는데 사용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여러 가지로 변질되고 부패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세상으로 하여금 썩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요, 세상 사람들이 방향 감각을 잃었을 때 방향을 제시해 주는 자들입니다.
어떻게? 주님의 교훈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보는 교육, 느끼는 교육을 제대로 보여주면 됩니다.
사람들 중에는 남을 부패시키고 썩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썩어져 가는 것을 막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글로 막고, 행동으로 막고, 사상으로 막습니다.
한 때 영국이 사회 정치 종교가 위기를 맞아 부패하고 있을 때, 요한 웨슬러가 일어나 새 바람을 일으켰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는데 이것이 바로 성경 운동입니다.
잘못된 사상, 잘못된 학문이 대학에 들어가면 대학이 썩고, 지성인들의 머리에 들어가면 지성인들이 썩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는 곳에 너도 살고 나도 살고 우리 모두 살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할/
▶한 때, 역사를 낙관적으로 볼 때가 있었습니다.
'인간에게 교육을 시키면 인간이 변할 것이다. 제도를 바꾸고, 환경을 바꾸면 세상은 밝아질 것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도 필요 없고 인간 스스로 선한 노력을 가지고 애쓰면 낙원을 만들 수가 있다고 장담하든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환상은 무참하게 1차대전과 2차 대전으로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죄 성을 안은 인간들이 만든 역사는 항상 오류를 범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으로도 인간을 변화시킬 수 없고, 근본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거듭나야만 변화 받을 수 있습니다. 변화 받은 그리스도인들만이 세상의 방부제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③소금은 맛을 냅니다.
원래 소금은 아무 볼품이 없습니다. 아름다움도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모든 사람에게 절대 필요한 것은 그의 독특한 짠맛 때문입니다.
이 맛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맛 매운맛 짠맛을 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나 물질이나 이런 맛을 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인간의 삶 속에 맛을 잃을 때 큰 일입니다. 맛이란 딴말로 바꾸면 의미입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면 보람도 가치도 상실하고 맙니다.
덴마크, 스웨덴과 같이 사회 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는 나라에서는 경제적으로 아무 어려움이 없이 일생을 안심하고 살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라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왜 자살합니까? 한마디로 삶의 맛과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참 의미는 '내가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고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를 바로 알아야 인생의 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만이 사명감으로 살고 맛을 내며 보람을 갖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삶의 의미를 부여잡은 자입니다. 하나님께로 왔다가 하나님을 위하여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가야 합니다. 이런 삶의 의미를 세상 사람들에게 심어 주어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소금이 맛을 내려면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셔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서지고 가루가 되어야 맛을 낼 수 있습니다. 고추가 매운 맛을 내려면 부서지고 가루가 되어야 합니다.
참깨도 고소한 맛을 내기 위해서는 부서지고 가루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 맛이 나오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참 맛을 내려면 희생이 전제되어야 맛이 나오고 값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 되라"고 한 것은, "너희는 깨어져라! 희생하라! 맛을 내라! 좀 더 수고하라!"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소금의 교훈에서 세 가지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
①썩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입니다.
세상에 썩는 것을 우리 기독교인이 막아야 합니다. 사단의 역사를 막아야 하고, 세상에 만연하고 있는 죄악의 번식을 막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악을 지적하고 제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침묵해서는 안됩니다.
②맛을 내는 역할입니다.
이것은 희생이 동반됩니다. 내가 죽는 것이 맛을 내는 길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세상에서 내가 죽어질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맛을 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부활의 새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③화목하게 하는 역할입니다.
막9:50절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고 하셨습니다. 싸우는 가정! 싸우는 교회! 싸우는 단체나 사회에서는 살맛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싸우는 세상에 소금이 되어 화목동이가 되어 평화롭고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어야 됩니다.
골4:6절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이 정이 떨어지고 재미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화를 일으키게 하고 남을 격노케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싫어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말로도, 행동으로도 재미있게 기쁘게 기분 좋은 분위기를 만들고 변화시켜야 합니다.
■소금의 역할을 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녹아져야 합니다. 소금이 덩어리로 있으면 모양은 소금이나 맛이 없습니다. 만일 소금이 자기 모습을 그대로 가지면 자기 구실을 못합니다. 아주 녹아 없어져야 소금이 소금 노릇을 하게 됩니다.
소금이 녹는다는 것은 자기 존재를 희생시킨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죽이고, 포기하고, 다른 존재 속에 스며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죽고, 내 고집이 죽고, 내 교만이 죽고, 내 자존심이 죽고 자기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살고, 내 고집이 살고, 내 교만이 살고, 내 자존심이 살고, 내 명예를 살리고 있는 한 소금 맛을 내지 못합니다. 녹아지는 봉사, 희생,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맛 잃은 소금이 되지 맙시다.
13절에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무서운 말입니다. 이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소금이 제 역할을 못하면 무시를 당하고 버림을 당하고 쓸모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옛날 유대교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습관이 있었습니다.
신앙을 버리고 타락했던 사람이 다시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로 하여금 회당문 앞에 엎드리게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위를 밟고 지나가게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 이 사람은 큰 소리로 이렇게 소리쳐야 합니다.
"나는 맛 잃은 소금이니 나를 밟고 지나가시오!"
■본문기서 예수께서 '밖에 버리신다는 밖은 어디입니까?' 예수님의 밖입니다. 하늘 나라의 밖입니다. 한마디로 지옥입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꼭 있어야 할 사람이 있고,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 있고,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금이 맛을 잃고 제 역할을 못하면 쓸모가 없어집니다.
■어떤 사람이 교인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①'달구지 같은 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밀어야만 가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②'연(鳶)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끈을 붙들고 있지 않으면 언제 어디로 날아갔는지 날아가 버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③'고양이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이는 '줄곧 토닥거려줘야 만족하는 교인'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④'럭비공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이는 '다음 순간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알 수 없는 변화가 무상하고, 변죽이 죽 끌 듯 하는 예측불허의 교인'을 말합니다.
⑤'풍선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잔뜩 부풀어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혈기 방자한 교인'을 말합니다.
⑥'전구(電球)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이는 '쉴새없이 켜졌다 꺼졌다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⑦'금반지에 다이아몬드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언제나 변함이 없고 고귀한 신앙인격으로 환란 시험을 이기는 교인, 그리고 언제나 불평 한마디 없이 주안에서 묵묵히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우리 성림의 모든 성도들이 금반지와 다이아몬드 같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인의 맛을 잃어버리면,
▶기도가 게을러집니다.
▶교회 출석이 게을러집니다.
▶말씀 읽는 것이 게을러집니다.
▶맡은바 책임이 게을러집니다.
▶세상과 가까워지고, 교회와는 멀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히듯이, 신앙의 맛을 잃어버리면 마귀의 밥이 되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영적 고아가 되고 맙니다.
■우리 모두 맛을 내는 소금과 같은 신앙인 들이 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응답이 옵니다. 세상 살 맛이 납니다.
▶열심히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은혜도 축복도 응답도 예배를 통하여 주십니다. /믿/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으십시오! 읽다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맡은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십시오! "믿는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세상과 짝하지 말고 교회와 가까이 지내십시오! 성전 중심, 예배 중심의 삶이 여러분을 복된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믿어지면 아멘!/
2. 너희는 빛이 되어라!(14절)
빛의 사명에는 여러 가지기 있습니다. 열을 내는 역할도 있지만 어두움을 밝혀주는 역할도 있습니다. 어둠을 물리치고 밝게 해주는 것이 빛의 역할입니다.
여러분! 캄캄한 밤에 성냥불 하나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합니까? 빛은 이렇게 어둠 속에서 빛을 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정말 영광스러운 말씀입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이방인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유명한 랍비들을 가르쳐 흔히 '이스라엘의 등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류에게 크게 공헌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인류의 등불'이라고 합니다. 민족에게 공헌한 사람을 '민족의 등불'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무엇인가 독특하게 훌륭한 일을 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빛을 남긴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성도를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으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우리 모두 감사, 감격하시기 바랍니다.
●빛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①하나님이 만드신 태양 빛이 있고,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촛불, 전기 불이 있습니다.
②성경은 하나님의 속성을 빛으로 묘사했습니다.
시27:1절에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요한1서 1:5절에 "하나님은 빛이시니라!" 계22:5절에 "천국에는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하나님을 빛으로 묘사했습니다.
③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묘사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요8:12절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사9:2절에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시기 6백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을 빛으로 묘사했습니다.
④그리스도인에 대하여 본문에서 빛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고 했습니다.
왜 우리를 향하여 빛이라고 했습니까? 한마디로 어두움을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어두움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①자연적인 어두움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따라 해가 져서 캄캄한 어두움이 있습니다(창15:12).
②영적인 흑암(어두움)이 있습니다. ▶마22:12절 "지옥을 가리켜 바깔 어두운 곳"이고 했고, 골1:13절 "사단이 지배하는 곳을 가리켜 흑암의 권세가 있는 곳"이라고 했고, 엡6:12절 "악의 세력을 어두움의 권세, 혹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엡5:1절 "죄인의 길에 참여하는 자를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는 자"라고 했고, 고전4:5절 "영적인 무지를 어두움"이라고 했고, ▶고난, 고통, 환란과 역경을 어두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일제 36년을 민족의 암흑기라고 했고, 거기서 벗어난 것을 해방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롬13:12절 "도덕적인 부패도 어두움"이라고 했고, 요9:4절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세상을 어두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빛이라고 한 것은, 이런 '어두움의 세력'에서 이기고 승리하라는 명령입니다.
●빛은 어두움을 밝혀 줍니다. 빛은 정확한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주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엄청난 힘을 행사하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혼탁한 이 세상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삶의 모습은 이런 것이다'하는 것을 보여주며 살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역할을 요구하신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캄캄한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의 존재처럼 방향만 제시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빛 된 삶입니다.
●성도가 빛을 발할 때, ▶지옥과 같은 가정이나 사회나 세상이 천국으로 변합니다.
▶흑암의 권세가 물러가고, 악의 세력도 살아집니다.
▶죄악의 길에 헤매이든 자가 의에 길을 찾게 됩니다.
▶영적으로 무지한 자가 복음에 의하여 신령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 처한 자들이 위로와 소망과 용기를 갖게 됩니다.
▶도덕적으로 부패한 자들이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눅10:25-37절에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강도를 만나 다 빼앗기고 폭행을 당하여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산 속에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누구의 도움 없이는 이 사람은 살수가 없습니다. 마침 레위인이 지나갔지만 그를 보고도 못 본척하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또한 제사장이지 지나갔지만 그도 못 본척하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 사람은 이제 혼수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때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발견하고 그 사람의 상처를 싸매 주며, 그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주막으로 데려가서 치료를 해주었습니다.
누가 이 강도 만난 사람에게 빛의 사람이 되었습니까? 사마리아 사람이 바로 세상의 빛이 되는 사람입니다.
3. 너희는 나타내는 삶을 살라!(14-15)
여기 '산 위에 동네'란 말은 빛이란 말씀과 비슷한 뜻이지만 약간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외침이 무서워 산 속 높은 곳에 요새를 만들어 살았습니다.
●산 위에 어떤 동네 속에 어떤 집 한 채가 있었습니다.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불을 지피면 연기가 오르는 것이 보이고, 등불을 켜면 그 들불의 빛이 환하게 드러납니다. 마치 바다의 등대와 같습니다. 앞마당에서 멱살을 잡고 싸우면 그것도 보입니다. 뜰 앞에 울타리에 울긋불긋 꽃이 피어오르면 그것도 보입니다.
14절에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지 못할 것이요"란 말은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드러낸 존재라는 사실이요,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산 위에 동네입니다. 입만 벙긋해도 쳐다보고, 달음질만 해도 쳐다봅니다. 교회가 주목을 받고 비판을 받는 이유가 바로 산 위에 있는 동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멋진 동네를 만듭시다. 누구나 이사 오고 싶은 동네를 만듭시다. 복송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피어 있는 꽃동네 새 동네를 만듭시다.
우리의 가정을 산 위에 있는 아름다운 동네가 되게 합시다. 우리의 교회가 산 위에 있는 소문난 교회가 되게 합시다. 그 책임이 바로 나에게 있고, 또 여러분들에게 있습니다.
▶인도의 한 성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원칙적으로 이 세상에는 위대한 사람과 하찮은 사람이 없다. 있다면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과 하찮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 사람이 하는 일에 따라서 위대한 사람도 될 수 있고, 하찮은 사람도 될 수 있다' 얼마나 지당한 교훈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빛이고 소금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보는 교육, 느끼는 교육을 바로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넷째; 너희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6절)
▶16절이 결론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를 보면 여러 가지 문답이 나옵니다. 그 첫 번째 문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첫 번째 문답이 '우리 인간의 첫째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입니다. 우리 인간이 사는 가장 숭고한 첫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목적입니다.
바울은 고전10: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무엇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우리의 올바른 행실로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고 빛의 사명을 잘 감당하면, 그 행실로 인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오래 전에 신문을 보니 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분이 몇 명이 한 팀을 이루어 여행을 떠나는데 놀러 가는 것이 아니라 '한 손에는 망치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톱을 들고' 동남아 여러 나라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동남아 여러 나라 선교지를 돌면서 선교사 자녀들이 다니는 지역학교를 방문하여 학교 건물을 보수하고 책상을 고쳐주며, 선교사집을 찾아다니며 문을 달아 주고 수리를 하기 위해 뜻을 같이한 사람들의 단장 자격으로서 카터는 여행을 한다는 것입니다. 세계 최강국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톱과 망치를 들고 이렇게 휴가를 떠난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사람이니까? 우리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어느 은행 지점장은 토요일만 되면 일찍 퇴근하여 부부가 함께 전도지를 들고 길거리로 나가 전도함으로써 토요일을 보낸다고 합니다. 한 주일이라도 이것을 거르면 마음에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사람들은 '아! 세상에는 저런 삶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을 통해,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요 빛이다. 그럼으로 숨기지 말고 드러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라!"고 오늘 지금 나에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성도구실, 소금의 구실, 빛의 구실, 동네의 구실을 다 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할/
(2003년 11월 2일 대예배 설교)
송수천목사 설교자료 중에서(출처)
옛날 세 딸을 둔 임금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임금이 세 딸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큰딸은 금이라고 했고, 둘째딸은 보석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셋째 딸은 금이나 보석이 아니고 소금이라고 합니다. 임금은 매우 의아해 하면서 아니 "소금이 무엇이 귀하단 말이냐? 구하기 쉽고 값 산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그 때는 셋째 딸은 아무 대답도 없이 묵묵히 있었습니다. 저녁 식사 때가 되었습니다. 셋째 딸은 주방으로 가서 임금님의 음식에 일체 소금을 넣지 못하게 했습니다. 임금이 식사를 하는데 음식을 도저히 먹을 수가 없습니다. 왜? 음식이 간이 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화가 난 임금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니 이것을 음식이라고 만들어 왔느냐?"
이 때 셋째 딸이 달려와 하는 말이 "아바마마! 어떻게 임금님이 잡수실 수라 상에 값싸고 보잘것없는 것을 넣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소금을 넣지 않았습니다"
임금님은 그 때서야 "과연 그렇구나! 금은 없어도 살고, 보석 없이는 살지만 소금 없이는 정말 못살겠구나!" 깨닫고, 셋째 딸을 크게 칭찬하고 후한 상급을 주었답니다.
소금에 귀중함을 알게 하는 예화입니다.
▶마5,6,7장을 예수님의 산상수훈이라고 말합니다. 이 산상수훈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나라 백성들의 삶의 내용입니다. 또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지켜야 할 윤리강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이 산상보훈을 '그리스도의 전 교훈의 대 요약', '수백 개의 보석으로 꾸며진 왕관', '하나님 나라의 대헌장'이라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민족지도자 '간디'는 비록 그리스챤은 아니었지만 그의 평생에 산상보훈을 애독하였고 생활철학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또한 역사를 움직인 많은 사상가들이나 지도자들이 이 산상보훈의 교훈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이 산상수훈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그대로 지키며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삶의 내용으로 삼아야 하는 목표입니다. 그래서 천국 가는 그 날 까지 산상수훈의 내용을 내 삶에 담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 '성화'라고 합니다.
즉, 신자들은 반드시 경건과 거룩을 완성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지만 우리가 경건해지고 거룩해지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성화는 하나님 말씀대로 차근차근 훈련하고 그렇게 살아서 내 속에 그리스도의 성품과 향기가 배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미적 감수성이 뛰어난 어느 화가가 이 산상수훈의 내용을 깊이 읽고 깨달은 후 세 개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합니다.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입니다.
우리가 산상수훈을 읽고 또 읽고 묵상해 가면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산상보훈을 복음서 중에 작은 복음서라고 합니다. 이 작은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진실되게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이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초상화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참된 교회 상에 대해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인정받고,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는 그와 같은 희망적인 교회를 산상보훈을 통해서 지어져가야 합니다.
■다음으로 화가는 이 산상수훈에서 이상적인 예수의 제자 상을 그려낼 수 있습니다.
이 작은 복음서에 담겨진 예수의 제자 상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되어가고 싶어하는 그러한 제자 상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모습을 닮아 가는 존재입니다.
히12: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빌2:5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본문은 그 유명한 팔복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복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쳐주는 교훈입니다.
오늘 저는 ◀너희는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교훈을 주듯, 예수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몇 가지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상징적인 몇 가지 용어를 발견하게 됩니다.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에 빛이다! 너희는 산 위에 동네이다!"
이런 말씀들을 한마디로 묶어서 해석한다면, '책임 있는 인생을 살라'는 말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제구실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희는'이란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너희는'이란 말을 이해 할 때 언제나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소금이 아니어도 좋고, 빛이 아니어도 좋고, 산 위에 동네가 아니어도 좋지만, 너는 소금이 되어야 하고 빛이 되어야 하고 산 위에 동네가 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늘 주님이 주신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해하고 나의 신앙의 모습으로 바꿔 나아가야 합니다.
●나는 소금입니다. 소금이기에 맛을 내야 합니다. 맛을 잃어버리면 밖에 버리워 밟힐 뿐입니다.
●나는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빛은 옳은 행실을 의미합니다. 나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야 할 터인데 내 속에 등불이 가물거리니 어찌해야 할까?
●나는 산 위에 드러난 동네입니다. 그래서 산아래 동네 사람들에게 좋은 본을 보이고, 좋은 소식을 전해야 될 터인데 그 구실을 제대로 못했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깨닫고 고백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는'이라는 말의 뜻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나 자신의 얼굴과 양심을 향하여 외쳐야 할 경고이며 자책이어야 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자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그대가 먼저 건전한 인격자가 되라! 백성의 질병을 알거든 그대가 먼저 의사가 되라! 의사까지는 못되더라도 그대의 병부터 고쳐서 건전한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민족 개조론의 정신'입니다. 나부터 고치고, 나부터 바른 인격자가 되면, 민족이 치유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먼저 소금이 되고, 빛이 되고, 산 위에 동네로 살면 이 세상은 썩지도 않을 것이요, 어둡지도 않을 것이요, 남들이 손가락질도 안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네 가지의 진리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 너희는 소금이 되라!(13절 상)
소금인데 그냥 소금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교회의 소금이니" 하지 않고 세상의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만나보면, 모두 다 선남 선녀입니다. 훌륭하게 기도도 잘하고, 말씀도 잘 듣고 아멘도 잘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나가면 어떻습니까? 신앙인의 모습이 사라지고 맙니다. 누구나 교회 안에서는 신앙인 처럼 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우리들이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주소는 '이 세상 속'입니다. 즉 소금과 빛과 같이 이 세상 속에서 책임적인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우리는 예수 믿는 순간부터 소금이 되었습니다. 지금 주님은 그 당시 제자들에게, 오늘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소금처럼 살라고 교육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교육과 훈련입니다. 그것도 한번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배우고 훈련받아야 합니다.
●교육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즉 보는 교육, 느끼는 교육, 배우는 교육입니다.
①보는 교육이란, 글자 그대로 눈으로 보며 배우게 되는 교육을 말하는데, 제자들이 선생의 인격을 보고 배웁니다. 자식이 부모의 인격을 보고 배웁니다. 성도가 목사의 신앙과 인격을 보고 배웁니다.
평신도가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의 신앙과 인격을 보고 배웁니다. 그러니 먼저 된 자가 잘해야 합니다.
②느끼는 교육이란, 가슴으로 느끼며 배우는 교육을 말합니다. 가정의 분위기에서, 교회의 분위기에서 느끼는 교육입니다. 그럼으로 먼저 된 직분자는 먼저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야 하고, 인사도 잘하고 모든 성도에게 관심을 갖고, 또 어떠한 경우라도 교회와 목사님을 헐뜯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를 자랑하고 목사님을 자랑하고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을 자랑해야 합니다.
③배우는 교육입니다. 먼저 된 자의 입장에서 보면 가르치는 교육입니다. 바로 알아야 바로 믿을 수 있고 바로 행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배우는 교육, 즉 가르치는 교육보다 더 우선되고 중요한 것은 보는 교육이요, 느끼는 교육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야 하고 느끼게 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소금과 빛에 대하여 실물 교육을 시키고 계십니다.
●고대는 소금을 대단히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소금을 '신과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로마 속담에 '소금과 햇빛은 이 세상을 생기 있게 만들고, 향기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호머'라는 사람은 '소금은 신선하다'고 했고, '풀라톤'은 '신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보배'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본문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값진 존재이며,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가를 상기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소금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한번 알아봅시다.
첫째 존재론적으로, 아주 보편적인 진리인 녹아지기 위해 존재합니다. 소금이 녹기 싫다면 일고의 가치가 없습니다. 존재 의미가 없어요. 소금은 순전히 녹아 쓰여지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둘째 가치론적으로, 소금이 얼마나 요긴합니까. 하루 세끼 중 소금과 관계없이 식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동, 서양을 막론하고 음식에는 적당한 염분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소금은 우리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살 동안 소금 없이는 못 살아요.
셋째 역할론적으로, 소금의 역할은 모든 것을 맞춰 주거나 받쳐 줍니다. 음식과 음식 사이에 조화를 이루는 역할입니다. 거기엔 기가 막힌 결과가 나옵니다.
넷째 효과론적으로, 소금이 들어가면 100% 변화가 일어납니다. 맛의 변화입니다.
■소금의 특성 몇 가지만 알아봅시다!
①소금은 순결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소금을 순결의 상징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원시 종교에서 그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헌물을 할 때 소금을 뿌렸는데 이것은 그들의 순결을 의미하는 의식이라고 합니다.
구약 성경 레2:13절에 보면, 소제를 드릴 때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니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민18:19절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
겔43:24절 "흠 없는 제물을 드리되 여호와 앞에 드릴 것이며"
이렇게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때 소금을 곁들였는데 말하자면 순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드렸습니다.
그런 의미로 생각할 때 오늘의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순결의 표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순결의 삶의 비결을 골3:1절 이하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소금에 순결성을 우리 믿음의 생활에 적용해 봅시다.
언행심사가 깨끗해야 하고 흠이 없어야 합니다. 정직한 생활을 해야 하며 바른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도덕적인 순결을 지니고 있어 이 사회의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김대중 정부 때 '옷 로비 사건' 청문회를 보면서 신앙생활에 순결성을 잃어버린 증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세상사람들이 얼마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우습게 보았습니까?
우리는 사업을 하든, 직장 생활을 하든,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인들은 구별 되이 살아야 합니다. 원래 '성도'란 구별된 자 입니다.
약1:27절에서 야고보 장로님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속에 묻혀 살고 있으나 세속에 물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②소금은 썩는 것을 막는 방부제의 역할을 합니다.
소금은 음식물이 변질되거나 부패하지 않도록 하는데 사용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여러 가지로 변질되고 부패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세상으로 하여금 썩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요, 세상 사람들이 방향 감각을 잃었을 때 방향을 제시해 주는 자들입니다.
어떻게? 주님의 교훈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보는 교육, 느끼는 교육을 제대로 보여주면 됩니다.
사람들 중에는 남을 부패시키고 썩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썩어져 가는 것을 막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글로 막고, 행동으로 막고, 사상으로 막습니다.
한 때 영국이 사회 정치 종교가 위기를 맞아 부패하고 있을 때, 요한 웨슬러가 일어나 새 바람을 일으켰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는데 이것이 바로 성경 운동입니다.
잘못된 사상, 잘못된 학문이 대학에 들어가면 대학이 썩고, 지성인들의 머리에 들어가면 지성인들이 썩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는 곳에 너도 살고 나도 살고 우리 모두 살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할/
▶한 때, 역사를 낙관적으로 볼 때가 있었습니다.
'인간에게 교육을 시키면 인간이 변할 것이다. 제도를 바꾸고, 환경을 바꾸면 세상은 밝아질 것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도 필요 없고 인간 스스로 선한 노력을 가지고 애쓰면 낙원을 만들 수가 있다고 장담하든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환상은 무참하게 1차대전과 2차 대전으로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죄 성을 안은 인간들이 만든 역사는 항상 오류를 범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으로도 인간을 변화시킬 수 없고, 근본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거듭나야만 변화 받을 수 있습니다. 변화 받은 그리스도인들만이 세상의 방부제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③소금은 맛을 냅니다.
원래 소금은 아무 볼품이 없습니다. 아름다움도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모든 사람에게 절대 필요한 것은 그의 독특한 짠맛 때문입니다.
이 맛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맛 매운맛 짠맛을 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나 물질이나 이런 맛을 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인간의 삶 속에 맛을 잃을 때 큰 일입니다. 맛이란 딴말로 바꾸면 의미입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면 보람도 가치도 상실하고 맙니다.
덴마크, 스웨덴과 같이 사회 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는 나라에서는 경제적으로 아무 어려움이 없이 일생을 안심하고 살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라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왜 자살합니까? 한마디로 삶의 맛과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참 의미는 '내가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고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를 바로 알아야 인생의 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만이 사명감으로 살고 맛을 내며 보람을 갖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삶의 의미를 부여잡은 자입니다. 하나님께로 왔다가 하나님을 위하여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가야 합니다. 이런 삶의 의미를 세상 사람들에게 심어 주어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소금이 맛을 내려면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셔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서지고 가루가 되어야 맛을 낼 수 있습니다. 고추가 매운 맛을 내려면 부서지고 가루가 되어야 합니다.
참깨도 고소한 맛을 내기 위해서는 부서지고 가루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 맛이 나오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참 맛을 내려면 희생이 전제되어야 맛이 나오고 값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 되라"고 한 것은, "너희는 깨어져라! 희생하라! 맛을 내라! 좀 더 수고하라!"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소금의 교훈에서 세 가지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
①썩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입니다.
세상에 썩는 것을 우리 기독교인이 막아야 합니다. 사단의 역사를 막아야 하고, 세상에 만연하고 있는 죄악의 번식을 막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악을 지적하고 제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침묵해서는 안됩니다.
②맛을 내는 역할입니다.
이것은 희생이 동반됩니다. 내가 죽는 것이 맛을 내는 길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세상에서 내가 죽어질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맛을 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부활의 새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③화목하게 하는 역할입니다.
막9:50절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고 하셨습니다. 싸우는 가정! 싸우는 교회! 싸우는 단체나 사회에서는 살맛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싸우는 세상에 소금이 되어 화목동이가 되어 평화롭고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어야 됩니다.
골4:6절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이 정이 떨어지고 재미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화를 일으키게 하고 남을 격노케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싫어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말로도, 행동으로도 재미있게 기쁘게 기분 좋은 분위기를 만들고 변화시켜야 합니다.
■소금의 역할을 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녹아져야 합니다. 소금이 덩어리로 있으면 모양은 소금이나 맛이 없습니다. 만일 소금이 자기 모습을 그대로 가지면 자기 구실을 못합니다. 아주 녹아 없어져야 소금이 소금 노릇을 하게 됩니다.
소금이 녹는다는 것은 자기 존재를 희생시킨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죽이고, 포기하고, 다른 존재 속에 스며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죽고, 내 고집이 죽고, 내 교만이 죽고, 내 자존심이 죽고 자기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살고, 내 고집이 살고, 내 교만이 살고, 내 자존심이 살고, 내 명예를 살리고 있는 한 소금 맛을 내지 못합니다. 녹아지는 봉사, 희생,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맛 잃은 소금이 되지 맙시다.
13절에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무서운 말입니다. 이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소금이 제 역할을 못하면 무시를 당하고 버림을 당하고 쓸모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옛날 유대교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습관이 있었습니다.
신앙을 버리고 타락했던 사람이 다시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로 하여금 회당문 앞에 엎드리게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위를 밟고 지나가게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 이 사람은 큰 소리로 이렇게 소리쳐야 합니다.
"나는 맛 잃은 소금이니 나를 밟고 지나가시오!"
■본문기서 예수께서 '밖에 버리신다는 밖은 어디입니까?' 예수님의 밖입니다. 하늘 나라의 밖입니다. 한마디로 지옥입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꼭 있어야 할 사람이 있고,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 있고,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금이 맛을 잃고 제 역할을 못하면 쓸모가 없어집니다.
■어떤 사람이 교인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①'달구지 같은 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밀어야만 가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②'연(鳶)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끈을 붙들고 있지 않으면 언제 어디로 날아갔는지 날아가 버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③'고양이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이는 '줄곧 토닥거려줘야 만족하는 교인'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④'럭비공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이는 '다음 순간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알 수 없는 변화가 무상하고, 변죽이 죽 끌 듯 하는 예측불허의 교인'을 말합니다.
⑤'풍선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잔뜩 부풀어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혈기 방자한 교인'을 말합니다.
⑥'전구(電球)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이는 '쉴새없이 켜졌다 꺼졌다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⑦'금반지에 다이아몬드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언제나 변함이 없고 고귀한 신앙인격으로 환란 시험을 이기는 교인, 그리고 언제나 불평 한마디 없이 주안에서 묵묵히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우리 성림의 모든 성도들이 금반지와 다이아몬드 같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인의 맛을 잃어버리면,
▶기도가 게을러집니다.
▶교회 출석이 게을러집니다.
▶말씀 읽는 것이 게을러집니다.
▶맡은바 책임이 게을러집니다.
▶세상과 가까워지고, 교회와는 멀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히듯이, 신앙의 맛을 잃어버리면 마귀의 밥이 되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영적 고아가 되고 맙니다.
■우리 모두 맛을 내는 소금과 같은 신앙인 들이 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응답이 옵니다. 세상 살 맛이 납니다.
▶열심히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은혜도 축복도 응답도 예배를 통하여 주십니다. /믿/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으십시오! 읽다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맡은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십시오! "믿는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세상과 짝하지 말고 교회와 가까이 지내십시오! 성전 중심, 예배 중심의 삶이 여러분을 복된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믿어지면 아멘!/
2. 너희는 빛이 되어라!(14절)
빛의 사명에는 여러 가지기 있습니다. 열을 내는 역할도 있지만 어두움을 밝혀주는 역할도 있습니다. 어둠을 물리치고 밝게 해주는 것이 빛의 역할입니다.
여러분! 캄캄한 밤에 성냥불 하나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합니까? 빛은 이렇게 어둠 속에서 빛을 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정말 영광스러운 말씀입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이방인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유명한 랍비들을 가르쳐 흔히 '이스라엘의 등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류에게 크게 공헌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인류의 등불'이라고 합니다. 민족에게 공헌한 사람을 '민족의 등불'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무엇인가 독특하게 훌륭한 일을 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빛을 남긴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성도를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으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우리 모두 감사, 감격하시기 바랍니다.
●빛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①하나님이 만드신 태양 빛이 있고,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촛불, 전기 불이 있습니다.
②성경은 하나님의 속성을 빛으로 묘사했습니다.
시27:1절에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요한1서 1:5절에 "하나님은 빛이시니라!" 계22:5절에 "천국에는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하나님을 빛으로 묘사했습니다.
③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묘사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요8:12절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사9:2절에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시기 6백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을 빛으로 묘사했습니다.
④그리스도인에 대하여 본문에서 빛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고 했습니다.
왜 우리를 향하여 빛이라고 했습니까? 한마디로 어두움을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어두움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①자연적인 어두움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따라 해가 져서 캄캄한 어두움이 있습니다(창15:12).
②영적인 흑암(어두움)이 있습니다. ▶마22:12절 "지옥을 가리켜 바깔 어두운 곳"이고 했고, 골1:13절 "사단이 지배하는 곳을 가리켜 흑암의 권세가 있는 곳"이라고 했고, 엡6:12절 "악의 세력을 어두움의 권세, 혹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엡5:1절 "죄인의 길에 참여하는 자를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는 자"라고 했고, 고전4:5절 "영적인 무지를 어두움"이라고 했고, ▶고난, 고통, 환란과 역경을 어두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일제 36년을 민족의 암흑기라고 했고, 거기서 벗어난 것을 해방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롬13:12절 "도덕적인 부패도 어두움"이라고 했고, 요9:4절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세상을 어두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빛이라고 한 것은, 이런 '어두움의 세력'에서 이기고 승리하라는 명령입니다.
●빛은 어두움을 밝혀 줍니다. 빛은 정확한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주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엄청난 힘을 행사하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혼탁한 이 세상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삶의 모습은 이런 것이다'하는 것을 보여주며 살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역할을 요구하신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캄캄한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의 존재처럼 방향만 제시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빛 된 삶입니다.
●성도가 빛을 발할 때, ▶지옥과 같은 가정이나 사회나 세상이 천국으로 변합니다.
▶흑암의 권세가 물러가고, 악의 세력도 살아집니다.
▶죄악의 길에 헤매이든 자가 의에 길을 찾게 됩니다.
▶영적으로 무지한 자가 복음에 의하여 신령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 처한 자들이 위로와 소망과 용기를 갖게 됩니다.
▶도덕적으로 부패한 자들이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눅10:25-37절에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강도를 만나 다 빼앗기고 폭행을 당하여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산 속에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누구의 도움 없이는 이 사람은 살수가 없습니다. 마침 레위인이 지나갔지만 그를 보고도 못 본척하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또한 제사장이지 지나갔지만 그도 못 본척하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 사람은 이제 혼수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때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발견하고 그 사람의 상처를 싸매 주며, 그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주막으로 데려가서 치료를 해주었습니다.
누가 이 강도 만난 사람에게 빛의 사람이 되었습니까? 사마리아 사람이 바로 세상의 빛이 되는 사람입니다.
3. 너희는 나타내는 삶을 살라!(14-15)
여기 '산 위에 동네'란 말은 빛이란 말씀과 비슷한 뜻이지만 약간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외침이 무서워 산 속 높은 곳에 요새를 만들어 살았습니다.
●산 위에 어떤 동네 속에 어떤 집 한 채가 있었습니다.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불을 지피면 연기가 오르는 것이 보이고, 등불을 켜면 그 들불의 빛이 환하게 드러납니다. 마치 바다의 등대와 같습니다. 앞마당에서 멱살을 잡고 싸우면 그것도 보입니다. 뜰 앞에 울타리에 울긋불긋 꽃이 피어오르면 그것도 보입니다.
14절에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지 못할 것이요"란 말은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드러낸 존재라는 사실이요,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산 위에 동네입니다. 입만 벙긋해도 쳐다보고, 달음질만 해도 쳐다봅니다. 교회가 주목을 받고 비판을 받는 이유가 바로 산 위에 있는 동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멋진 동네를 만듭시다. 누구나 이사 오고 싶은 동네를 만듭시다. 복송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피어 있는 꽃동네 새 동네를 만듭시다.
우리의 가정을 산 위에 있는 아름다운 동네가 되게 합시다. 우리의 교회가 산 위에 있는 소문난 교회가 되게 합시다. 그 책임이 바로 나에게 있고, 또 여러분들에게 있습니다.
▶인도의 한 성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원칙적으로 이 세상에는 위대한 사람과 하찮은 사람이 없다. 있다면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과 하찮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 사람이 하는 일에 따라서 위대한 사람도 될 수 있고, 하찮은 사람도 될 수 있다' 얼마나 지당한 교훈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빛이고 소금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보는 교육, 느끼는 교육을 바로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넷째; 너희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6절)
▶16절이 결론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를 보면 여러 가지 문답이 나옵니다. 그 첫 번째 문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첫 번째 문답이 '우리 인간의 첫째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입니다. 우리 인간이 사는 가장 숭고한 첫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목적입니다.
바울은 고전10: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무엇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우리의 올바른 행실로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고 빛의 사명을 잘 감당하면, 그 행실로 인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오래 전에 신문을 보니 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분이 몇 명이 한 팀을 이루어 여행을 떠나는데 놀러 가는 것이 아니라 '한 손에는 망치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톱을 들고' 동남아 여러 나라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동남아 여러 나라 선교지를 돌면서 선교사 자녀들이 다니는 지역학교를 방문하여 학교 건물을 보수하고 책상을 고쳐주며, 선교사집을 찾아다니며 문을 달아 주고 수리를 하기 위해 뜻을 같이한 사람들의 단장 자격으로서 카터는 여행을 한다는 것입니다. 세계 최강국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톱과 망치를 들고 이렇게 휴가를 떠난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사람이니까? 우리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어느 은행 지점장은 토요일만 되면 일찍 퇴근하여 부부가 함께 전도지를 들고 길거리로 나가 전도함으로써 토요일을 보낸다고 합니다. 한 주일이라도 이것을 거르면 마음에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사람들은 '아! 세상에는 저런 삶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을 통해,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요 빛이다. 그럼으로 숨기지 말고 드러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라!"고 오늘 지금 나에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성도구실, 소금의 구실, 빛의 구실, 동네의 구실을 다 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할/
(2003년 11월 2일 대예배 설교)
송수천목사 설교자료 중에서(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