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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길은 앞에 있습니다 (사사기18:1-31)
창세기 13장에서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날 때부터 동행하던 조카 롯과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별을 하게 됩니다.
가축과 소유가 많아져 함께 있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조카 롯이 좋은 땅을 선택하여 떠난 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13:14-17)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믿음으로 밟는 땅을 그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눈에 보이는 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식과 명예, 사업의 터전과 사이버 공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땅들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마음에 품고 잃지 않는 사람은 약속대로 이루시는 축복을 얻을 것입니다.
또 한해가 다 저물었습니다. 올해가 시작될 때 사람들은 저마다 새해의 시작을 축하하면서 특별한 행복을 꿈꾸었습니다. 새롭게 시작되는 2006년은 꿈과 희망과 행복을 안겨다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적이 소식은 들을 길이 없습니다.
그렇게 절망적인 상태에서 또 한해를 맞이하는 시점에 서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을 면밀히 살펴보면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신앙의 자세를 새롭게 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기업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만 약속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순종 하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그 능력의 오른손으로 금을 그어 터전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건너 가나안 땅 남쪽 끝자락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각 지파에서 선출한 정탐꾼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정탐꾼들이 모두 장대한 원주민들을 보고 낙심하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 땅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들어가 얻기만 하면 되는 식은 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사람에게 축복의 약속을 주시면서 이 중에 갈렙에 대해서는 이렇게 약속합니다.
(신1:35-36)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36)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여러분, 가나안 땅을 분명하게 약속을 받고도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밟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그저 하나님께 순종만 하면 얻데 될 축복의 땅을 코앞에서 놓쳐버린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이런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이 겪었던 광야와 같은 어려운 우리의 현실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금도 분명한 약속을 주고 계십니다.
(신11:24-25)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하수라 하는 하수에서 서해까지라 (25)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 밟는 모든 땅 사람들로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시리니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
그런데 오늘 본문은 더 어리석은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약속만 받은 것이 아니라, 아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너희 땅이 이것이니라’고 금까지 그어 주셨음에도 자기 분깃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바로 단 지파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삿18:1)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이 때에 거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이때까지 기업의 땅 분배함을 얻지 못하였음이라 ”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지요?
분명히 여호수아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단 지파뿐만 아니라, 열두 지파 모두에게 기업의 땅을 분배해 주셨습니다.
여호수아 19장40-46절은 분명하게 단 지파가 기업의 땅을 이미 분배받은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수19:40-46) “일곱째로 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41) 그 기업의 지경은 소라와 에스다올과 이르세메스와 (42) 사알랍빈과 아얄론과 이들라와 (43) 엘론과 딤나와 에그론과 (44) 엘드게와 깁브돈과 바알랏과 (45) 여훗과 브네브락과 가드 림몬과 (46) 메얄곤과 락곤과 욥바 맞은편 경계까지라”
여러분, 단 지파가 분배받은 이 땅들은 가나안 땅 서부지역의 산간과 해변에 이르는 비옥한 땅입니다.
가나안 땅 중에서도 노른자위라고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땅을 기업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단 지파가 기업의 땅을 분배받지 못해 거할 땅을 구하고 있다’는 말씀은 대체 무슨 말입니까?
참고로 말씀드리면, 단 지파가 땅을 분배받은 여호수아 19장과 오늘 본문은 약300여년의 세월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300여 년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사기 1장34절을 참고해야 합니다.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 들이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고”
여기서 아모리 사람이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이전부터 그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을 말합니다. 원주민 중에서도 해안 평야지대에 거주하던 사람보다는 산간지방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아모리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단 지파는 분배받았던 좋은 땅을 아모리 족에게 빼앗기고 그 이후로 300년을 산 속으로 쫓겨 들어가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그나마 그 땅에서도 살 수가 없어서 기거할 땅을 구해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약속의 땅을 두고도 불신앙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땅을 완전히 분배받은 후에도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빼앗긴 연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있었습니다.
두 번씩이나 주신 기업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업은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키고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2, 단 지파의 신앙은 뒤를 보는 신앙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뒤따라야 하는 결단의 순간에 가족과의 작별을 걱정하는 제자에게 예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랍연합군과의 전쟁에서 불과 6일 만에 승리를 거둔 적이 있었습니다. (6일 전쟁).
전쟁이 끝이 난 후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승리했던 원인을 크게 세 가지로 꼽았습니다. ‘유일신 신앙과, 국론통일과, 제공권 장악’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스라엘은 ‘우리는 공개할 수 없는 최신 무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 무기 때문에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기염을 토했습니다.
전 세계 군사전문가들과 미국의 정보당국은 극비리에 그 무기의 정체를 밝혀내려고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보기관도 그 최신 병기의 실체를 밝혀내지를 못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이스라엘은 그 최신예 무기는 바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라고 밝혔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칠 때 가지고 나갔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현대전에서도 그 어떤 무기보다도 강한 살아있는 능력을 나타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단 지파의 신앙은 이러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이 어떠했는지를 본문은 여러 부분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단 지파의 신앙은 연약했습니다. 분배받은 땅에 정착하게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모리 족속을 멸절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쫓겨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야 하는 초라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이 연약하다는 것은 뒤집어보면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액면 그대로 믿지 못하기에 연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연약한 신앙은 목적과 의욕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어려운 현실을 믿음으로 싸워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기기보다는 다른 쉬운 길로 사람의 방법을 찾아 나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히브리서 10장 35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그리고 단 지파의 신앙은 우상숭배였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기가 막힐 정도로 우스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거할 땅을 얻기 위해서 우상의 힘을 빌려오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우상을 섬기는 ‘미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단 지파는 이 사람의 우상을 빼앗아서 하나님으로 삼고는 그것도 모자라 그 우상을 섬기던 제사장을 데려와 자기 지파의 제사장을 삼습니다(17-20).
시기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품었을 때는 그렇게도 연약하던 이 사람들이 우상을 의지하고는 아주 용맹스러워졌다는 것입니다.
아모리 족속을 상대해서는 변변한 전쟁한번 치르지 못했던 사람들이 ‘라이스’ 사람들을 상대해서는 우상을 의지하고 나가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27).
그렇게 해서 새로운 땅을 얻기는 했으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승리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리키시는 앞은 보지 아니하고 여차하면 피할 길과 편법을 찾기 위해 뒤를 바라보는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올바른 신앙을 위해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지, 세상을 얻기 위해 신앙의 편법을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살기가 어렵다보면 뒤를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단의 역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의 약속이 있음을 믿고, 생명을 드리는 진실한 믿음으로 앞만 보고 행진해나가십시오,
그러면 실패나 패배와 상관없는 어디서나 젖과 꿀이 흐르는 복된 삶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멘-
출처/유풍덕 목사 설교 중에서
창세기 13장에서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날 때부터 동행하던 조카 롯과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별을 하게 됩니다.
가축과 소유가 많아져 함께 있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조카 롯이 좋은 땅을 선택하여 떠난 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13:14-17)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믿음으로 밟는 땅을 그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눈에 보이는 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식과 명예, 사업의 터전과 사이버 공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땅들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마음에 품고 잃지 않는 사람은 약속대로 이루시는 축복을 얻을 것입니다.
또 한해가 다 저물었습니다. 올해가 시작될 때 사람들은 저마다 새해의 시작을 축하하면서 특별한 행복을 꿈꾸었습니다. 새롭게 시작되는 2006년은 꿈과 희망과 행복을 안겨다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적이 소식은 들을 길이 없습니다.
그렇게 절망적인 상태에서 또 한해를 맞이하는 시점에 서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을 면밀히 살펴보면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신앙의 자세를 새롭게 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기업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만 약속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순종 하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그 능력의 오른손으로 금을 그어 터전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건너 가나안 땅 남쪽 끝자락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각 지파에서 선출한 정탐꾼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정탐꾼들이 모두 장대한 원주민들을 보고 낙심하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 땅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들어가 얻기만 하면 되는 식은 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사람에게 축복의 약속을 주시면서 이 중에 갈렙에 대해서는 이렇게 약속합니다.
(신1:35-36)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36)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여러분, 가나안 땅을 분명하게 약속을 받고도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밟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그저 하나님께 순종만 하면 얻데 될 축복의 땅을 코앞에서 놓쳐버린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이런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이 겪었던 광야와 같은 어려운 우리의 현실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금도 분명한 약속을 주고 계십니다.
(신11:24-25)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하수라 하는 하수에서 서해까지라 (25)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 밟는 모든 땅 사람들로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시리니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
그런데 오늘 본문은 더 어리석은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약속만 받은 것이 아니라, 아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너희 땅이 이것이니라’고 금까지 그어 주셨음에도 자기 분깃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바로 단 지파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삿18:1)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이 때에 거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이때까지 기업의 땅 분배함을 얻지 못하였음이라 ”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지요?
분명히 여호수아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단 지파뿐만 아니라, 열두 지파 모두에게 기업의 땅을 분배해 주셨습니다.
여호수아 19장40-46절은 분명하게 단 지파가 기업의 땅을 이미 분배받은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수19:40-46) “일곱째로 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41) 그 기업의 지경은 소라와 에스다올과 이르세메스와 (42) 사알랍빈과 아얄론과 이들라와 (43) 엘론과 딤나와 에그론과 (44) 엘드게와 깁브돈과 바알랏과 (45) 여훗과 브네브락과 가드 림몬과 (46) 메얄곤과 락곤과 욥바 맞은편 경계까지라”
여러분, 단 지파가 분배받은 이 땅들은 가나안 땅 서부지역의 산간과 해변에 이르는 비옥한 땅입니다.
가나안 땅 중에서도 노른자위라고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땅을 기업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단 지파가 기업의 땅을 분배받지 못해 거할 땅을 구하고 있다’는 말씀은 대체 무슨 말입니까?
참고로 말씀드리면, 단 지파가 땅을 분배받은 여호수아 19장과 오늘 본문은 약300여년의 세월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300여 년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사기 1장34절을 참고해야 합니다.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 들이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고”
여기서 아모리 사람이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이전부터 그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을 말합니다. 원주민 중에서도 해안 평야지대에 거주하던 사람보다는 산간지방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아모리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단 지파는 분배받았던 좋은 땅을 아모리 족에게 빼앗기고 그 이후로 300년을 산 속으로 쫓겨 들어가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그나마 그 땅에서도 살 수가 없어서 기거할 땅을 구해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약속의 땅을 두고도 불신앙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땅을 완전히 분배받은 후에도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빼앗긴 연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있었습니다.
두 번씩이나 주신 기업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업은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키고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2, 단 지파의 신앙은 뒤를 보는 신앙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뒤따라야 하는 결단의 순간에 가족과의 작별을 걱정하는 제자에게 예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랍연합군과의 전쟁에서 불과 6일 만에 승리를 거둔 적이 있었습니다. (6일 전쟁).
전쟁이 끝이 난 후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승리했던 원인을 크게 세 가지로 꼽았습니다. ‘유일신 신앙과, 국론통일과, 제공권 장악’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스라엘은 ‘우리는 공개할 수 없는 최신 무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 무기 때문에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기염을 토했습니다.
전 세계 군사전문가들과 미국의 정보당국은 극비리에 그 무기의 정체를 밝혀내려고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보기관도 그 최신 병기의 실체를 밝혀내지를 못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이스라엘은 그 최신예 무기는 바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라고 밝혔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칠 때 가지고 나갔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현대전에서도 그 어떤 무기보다도 강한 살아있는 능력을 나타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단 지파의 신앙은 이러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이 어떠했는지를 본문은 여러 부분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단 지파의 신앙은 연약했습니다. 분배받은 땅에 정착하게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모리 족속을 멸절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쫓겨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야 하는 초라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이 연약하다는 것은 뒤집어보면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액면 그대로 믿지 못하기에 연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연약한 신앙은 목적과 의욕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어려운 현실을 믿음으로 싸워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기기보다는 다른 쉬운 길로 사람의 방법을 찾아 나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히브리서 10장 35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그리고 단 지파의 신앙은 우상숭배였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기가 막힐 정도로 우스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거할 땅을 얻기 위해서 우상의 힘을 빌려오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우상을 섬기는 ‘미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단 지파는 이 사람의 우상을 빼앗아서 하나님으로 삼고는 그것도 모자라 그 우상을 섬기던 제사장을 데려와 자기 지파의 제사장을 삼습니다(17-20).
시기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품었을 때는 그렇게도 연약하던 이 사람들이 우상을 의지하고는 아주 용맹스러워졌다는 것입니다.
아모리 족속을 상대해서는 변변한 전쟁한번 치르지 못했던 사람들이 ‘라이스’ 사람들을 상대해서는 우상을 의지하고 나가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27).
그렇게 해서 새로운 땅을 얻기는 했으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승리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리키시는 앞은 보지 아니하고 여차하면 피할 길과 편법을 찾기 위해 뒤를 바라보는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올바른 신앙을 위해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지, 세상을 얻기 위해 신앙의 편법을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살기가 어렵다보면 뒤를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단의 역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의 약속이 있음을 믿고, 생명을 드리는 진실한 믿음으로 앞만 보고 행진해나가십시오,
그러면 실패나 패배와 상관없는 어디서나 젖과 꿀이 흐르는 복된 삶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멘-
출처/유풍덕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