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에 목숨 걸라!  (누가복음 15장 1~7절)

현대는 무관심의 시대 곧 사랑의 상실시대다. 관심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온 세상이 나를 향한 관심을 거두어도 변함없이 관심을 가지고 모든 사랑을 쏟아 부으시는 분이 계신다. 부모는 나를 잊어도 그 분은 나를 결코 잊지 않겠다고 하셨고, 결코 나를 떠나지도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와 양의 관계를 통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볼 수 있다. 그 사랑은 어떤 사랑?  

   1. 한 생명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랑.  

즉 양 한 마리에 최고의 가치를 둔 사랑이다. 현대는 첨단과학 문명을 자랑하지만 “인간성 상실”의 시대다. ‘나’라고 하는 인간이 소중한 한 개인으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한 개인의 존엄성이 무시당하는 시대다. 그런데 본문에 보시면 목자가 100마리의 양을 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 100마리 가운데 한 마리이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다. 그런데 목자의 마음은 그러지를 못한다. 온통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에게 마음이 쏠려 있다. 단지 마음이 가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한 마리에 목숨을 건다. 우리의 눈과 가치관으로 보면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다. 그러나 목자는 99마리를 두고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 이 목자의 사랑은 양 한 마리에 최고의 가치를 둔 사랑이고 행동하는 사랑이다. 이것이 바로 잃어버렸던 나를 찾기 위해 목숨 걸고 이 땅에 찾아오신 우리 주님의 모습이다.  


   성경에 예수님이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모습이 여러 번 나온다. 복음서에 보면 성과 촌을 두루 다니시면서 양을 찾으셨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 성 이라는 곳에서 한 여인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땅 사람들은 이방민족과 피가 섞인 혼혈족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경멸당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그 사마리아 땅에 가셨는가? 그 미천한 여인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다. 사마리아 사람들조차 경멸하던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다. 주님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멸시받던 죄 많은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비난을 무릅쓰고 그곳에 가셨다.  


   또한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어느 날 여리고 땅을 지나가셨다. 주님이 그 곳에 가신 이유도 바로 민족의 반역자요, 죄인의 대표자였던 세리장 삭게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예수님은 죄인들과 한 통속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생명을 살릴 수만 있다면 당신이 비난당하는 것 정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래서 우리에게 풍성한 삶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 왕의 왕이신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이렇게 개인적으로 만나주셨다. 나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계셨기 때문이다. 나 한 사람을 당신의 목숨보다도 귀하게 여기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여러분 각자에게 관심이 있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 신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에게 모든 사랑을 쏟아 부으신다. 그 주님은 여러분을 결코 떠나거나 버리지 않으신다. 젖먹이는 어미가 자식을 잊어버리는 일이 생길지는 몰라도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을 잊어버리지 않으신다. 부모형제는 여러분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그 사랑을 생활 속에서 순간순간 느끼시고 그 사랑에 감사하시기 바란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 나는 과연 한 영혼을 마음을 다해 깊이 사랑하는가? 그 영혼 살리기 위해 나는 얼마나 애타게 기도하고 찾아 나섰는가? 진정 사랑하신다면 이웃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다가가시기를 바란다. 추운겨울에 아파서 힘들어 하는 이웃에게는 따뜻한 국한 그릇 이라도 대접해 보라. 위로가 필요한 자에겐 진심어린 따뜻한 마음으로 위로의 말을 건네고 힘들고 어려운 자들에겐 작지만 도움의 손길을 뻗치시기 바란다. 그런 작은 관심과 사랑이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들고 결국 그 영혼을 살리게 된다. 그래서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을 찾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2.목자의 사랑은 한 마리 양에 인생 전체(목숨)를 건 사랑이다.  


   4절에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여기서 목자가 찾고 있는 양 앞에는 ‘그’라는 정관사가 붙어 있다. ‘그 잃어버린 양’이다. 그 양은 그 양 한 마리밖에 없다. 그래서 목자는 반드시 그 양을 찾아야 한다. 양을 찾아 헤매다가 목자는 들에서 비슷한 양을 만나서 데려올 수도 있다. 같은 한 마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양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양은 자기의 양도 아니고 자기가 찾고 있는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양은 다른 양으로 대치 될 수가 없다. 아무리 많은 수의 양이라도 다른 양 가지고는 안 된다. 목자에게는 지금 잃어버린 그 양 한 마리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여러 자식 중 하나를 잃어 버렸다고 가정해 보자. 그래서 고아원에 가서 나이가 같은 아이 하나를 대신 데려와서 키운다고 마음에 위로가 되고 만족이 되겠는가? 아니다. 내 자식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내 자식을 찾아야 비로소 먹을 수 있고 잠을 이룰 수 있다. 내 잃어버린 자식을 찾기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부모다. 잃어버린 자식을 찾기 전에는 낮에도 밤에도, 꿈속에서까지도, 그 자식의 환상이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 할 것이다. 그래서 찾을 때까지 찾는 것이다. 이것이 곧 모든 생애(목숨)를 건 사랑이다. 한 영혼에 대해서 바로 이런 마음, 이런 사랑을 가지시기를 축원한다.  


   3.목자의 사랑은 끝없는 사랑이다.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겠다고 찾아 나선 목자는 결국 그 양을 찾고야 만다. 목숨 걸고 찾아 나선 끝없는 사랑의 결과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다. 5절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얼마나 좋았는지 찾아가지고는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 왔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찾을 만큼, 자기 인생을 걸고 찾을 만큼 소중히 여기던 그 양을 찾았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양을 찾아서 어깨에 메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돌아오는 목자의 모습을 한 번 머리에 그려보라. 너무나 좋아서 휘파람을 불고, 콧노래를 부르며, 춤추며 걸어간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아름다운 모습이 한 영혼을 찾아서 한 없이 기뻐하는 여러분의 모습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그리고는 6절에 보니까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너무나 좋아서 이제는 이웃을 초청해서 잔치까지 벌인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잃은 양 한 마리 찾아와서 동네잔치를 벌이면 남는 것이 없다. 손해 보는 장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네잔치를 벌인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는 한 생명을 찾았기 때문이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손익계산은 염두에도 없다. 사실 기쁨, 사랑, 생명! 인생에서 이것보다 더 크고 귀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성도여러분! 한 마리 잃은 양을 이토록 사랑하는 목자의 마음을 가지시기를 바란다. 그래서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춤추며 돌아오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예배의 한 모습을 본다. 예배는 축제다. 잃어버렸던 자식이 돌아와 아버지를 만나는 감격의 시간이다. 죽었던 생명이 살아나는 생명의 축제다. 그래서 예배는 늘 잔치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은 주의 자녀들이 아버지를 만났으니 기뻐 뛰며 찬송해야 되지 않겠는가? 잃었다가 다시 찾은 자식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아버지와 만나는 시간이 예배다. 그러니 한바탕 잔치를 벌여야 되지 않겠는가? 잃어버렸던 여러분의 자식이 돌아 왔다고 상상해 보라. 얼마나 기쁘겠는가? 그 마음 표현할 수 있겠는가? 너무나 흥분되고 감격이 되고 가슴이 벅차서 말이나 제대로 하겠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잃었던 자식이 돌아온 기쁨과 감격과 흥분의 마음이 예배시간마다 표현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배에는 노래가 있다. 춤이 있다. 예물이 있다. 그 마음이 예배라는 형식을 통하여 하나님께 표현되어야 한다. 그 감격을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어서 아버지께 올려드려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온갖 악기도 동원하고, 박수도 치고, 춤도 추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배다. 그게 경건한 예배고, 그게 거룩이다.(입 꾹~~다물고 끝까지 조용하게 앉아있는 것이 경건이 아니고) 교회는 언제나 잔치 분위기가 나야 한다. 그래서 성도의 얼굴엔 늘 웃음꽃이 피어야 한다. 그래서 성도의 눈엔 감격의 눈물이 마르지 않아야 한다. 또한 성도의 입술에선 언제나 감사의 찬송이 흘러나와야 한다. 신앙생활이 즐거워야 한다. 예배가 즐거워야 한다. 그래야 성도의 일상의 삶도 기쁨이 넘치는 것이다. 그게 기독교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예배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원한다. 예배를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어서 하나님께 올려드리시기를 축원한다. 날마다의 삶에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잃었던 한 영혼이 돌아오면 가장 기뻐하신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돌아온 한 영혼을 위해 기쁨의 잔치가 벌어진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은 한 영혼, 한 생명을 가장 귀하게 보시기 때문이다. 한 영혼에 대한 비전! 이것이 주님의 꿈이요, 주님의 사랑과 야망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이유다. 그래서 주님은 한 영혼을 다시 찾아서 주님 앞에 데리고 오는 예배를 가장 기쁘게 받으신다. 또한 그것이 가장 좋은 예물이다. 그리고 주님은 한 영혼에 목숨 거는 자를 형통케 하고 복 주신다. 그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한 영혼에 목숨 거시기 바란다. 그래서 천국 잔치의 주인공이 여러분이 되시고 천국의 기쁨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축원한다.  

출처/김종민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