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이 곳까지 심방을 와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 동안 하도 많이 심방을 받아서 염치가 없지만 그래도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드리고 싶어서 부탁을 또 드렸습니다.”- 권사님은 그 동안 내가 심방했던 여러 장소를 말씀하시면서 미안해하는데, 나는 늘 처음 심방을 하는 듯 새로웠다.

“권사님! 이게 제가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도 힘이 안 들고요, 저는 성도들이 잘되는 일이라면 전국 아니라 다른 나라라도 심방을 할 수 있거든요”- 이것은 솔직한 나의 심정으로서 성도들이 복을 받아서 사업이 번창하거나 또는 집을 늘려 서 이사하여 예배를 드려 달라고 요청하면 나는 기쁜 맘으로 심방을 하게 된다.

특히 새로 사업을 시작하며 예배를 드릴 때면 간절한 마음을 담아 축복하게 된다. 사실 전 재산을 투자해서 사업을 시작하는 성도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운지를 익히 알기에 나는 목회자로서 또 아비의 심정으로 성도들의 성공과 복된 삶을 위해 진심으로 축복하게 되는 것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점점 형통해지면 내가 잘되는 것 이상으로 기쁘고 감사하기 한량없다. 그러나 반대로 사업에 어려움을 겪거나 힘들어 하는 성도들을 보면 마치 목회자인 내가 잘못한 것 같은 생각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래서 혹시라도 위축될까봐 일부러 모르는 척 하기도 하고 전혀 내색을 하지 않지만 내 속마음은 그렇지가 않다. 나는 성도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아니 수지산성목장에 사는 동안 정말 잘되고 형통하길 소원하고 있다.

몸에 병이 들어 아픈 성도는 속히 건강을 회복하기 원하고 물질로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들은 하루 속히 그 고통에서 벗어나 형통한 삶을 살길 원하고 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기복신앙이다.’ 이렇게 말하면 혹 경건(?)한 성도들이 조롱하고 세속적이라고 말할지 모르나 그것은 기복주의신앙과의 혼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복신앙과 기복주의신앙은 엄연히 다르다. 기복주의신앙은 개인 이기주의로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덮어놓고 복만 받기 위한 신앙이요 기복신앙은 하나님에게 복을 구하고 복을 받는 신앙으로서 그 목적이 자신을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한 신앙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제일 처음에 주신 것이 복(福)이었다(창1:26-28).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받아야 하며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 동안 여러 곳에 심방을 했던 권사님은 그 동안 사업과 연관된 많은 사람들을 구원했었다. 물론 지금은 같은 사업을 하고 있진 않지만 그때 구원했던 그 성도들이 예쁘게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이 권사님에게 많은 복을 주셔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진실한 마음으로 축복하고 싶다.

오! 주여

성도들을 축복하시고 형통케 하셔서

하나님 앞에 귀하고 복되게 쓰임 받게 하소서.

(주후 이천십이년 시월 셋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