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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자랑하는 자의 재물관 (마 6:19-24)
19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銅綠)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20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21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24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제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동안,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교회에서 돈 얘기하는 것을 꺼려 왔습니다. 그 이유는 영(靈)적인 모임인 교회에서 세속적인 돈 얘기를 하는 것이 은혜롭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세상에서 가장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책에는 돈에 대한 얘기가 구체적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예수님은 종종 제자들에게 돈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돈이 단순히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친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얼마나 구체적으로 돈에 대해서 가르치시는지 모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1절)
오늘 현대판 번역으로 말하면, '네 통장이 있는 그곳에, 네 돈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네 마음이 있는 곳에 돈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네 돈이 있는 그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돈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돈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가 여러분의 신앙을 결정지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자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자입니다. 영원을 향하여 길을 떠난 나그네요, 순례자입니다. 이것 모두 우리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돈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까? 영원을 향하는 자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재물관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시며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돈에 대한 태도를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생동안 우리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 돈의 문제, 재물관에 대해서 뚜렷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돌아가시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1. 올바른 저축을 하라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재물관을 가져야 합니까? 예수님은 먼저 우리에게 올바른 저축을 할 줄 알아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올바른 장소에 우리의 돈을 쌓을 줄 알아야 된다고 하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읽은 이 본문에는 두 가지 보물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땅에 있는 보물이요, 하나는 하늘에 있는 보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요점은 이 두 가지 보물이 지니고 있는 상대적인 내구성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발견하시면 예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시고자하는 요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땅에 있는 보물은 부패하고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보물은 부패하지 않고 완전하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 보물의 내구성을 발견하고 알게 되면 자동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어느 곳에 저축해야 할까를 어렵지 않게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의 초점이에요. 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銅綠)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하늘에 있는 보물과 땅에 있는 보물의 내구성을 발견해야 합니다. 땅에 있는 돈은 어떤 것인가? 영원하지 않다는 거예요. 좀과 동록과 도적이 구멍을 뚫는 것, 이것은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1세기, 그 당시 문화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이 당시에는 은행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 가지 방법으로 자신들의 부(富)를 축적했습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의복을 쌓음으로 부를 축적했습니다. 이것은 한국 사람들도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옛날 사극(史劇)을 보면, 임금님께서 하사품을 내리는데 뭘 내리죠? 비단을 내립니다.
'오성과 한음' 얘기에 보면, 그 사람들이 일곱 살 때 임금님께 많은 비단을 받았어요. 임금님이 테스트하기 위해서 비단을 내렸죠. 그걸 어떻게 들고 가나 보려고요. 어떻게 들고 갔습니까? 그 비단을 통째로 들면 도저히 못 들잖아요. 일곱 살이니까! 가볍게 비단을 펴서 끌더니, 줄줄줄 끌고 가더랍니다. 조금만 잡아끄니까 쭈욱 따라오잖아요. 천재성이 있었던 것 같아요.
여러분, 성경에도 보면 아간이 외투 한 벌을 훔쳐서 결국 아골 골짜기에서 죽습니다. 생각해보면, 야, 추운 날 외투 한 벌 입겠다고 훔쳤는데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까지 죽이나!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이 아간은 자기의 옷이 필요해서 훔쳤던 것이 아니고,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금지하신 물건 가운데 하나를 훔쳐 자기의 부를 축적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잘못이었어요.
두 번째, 이 당시 사람들이 재산을 쌓은 방법은 창고에 곡식을 쌓는 것입니다. 곡간에 곡식을 가득 쌓아 두는 것! 그것이 부의 상징이었어요. 30년 전 농촌으로 돌아가 보면 가을철에 곡식이 몇 가마니나 창고에 쌓였느냐가 그 사람들의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만석지기라는 말도 있었지요. 여러분, 이 당시에는 댐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자동적으로 기근이 올 수밖에 없었고 가뭄이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가 그 당시에 사회적인 부를 걸머졌는가? 창고에 곡식을 많이 쌓아 두었던 사람이에요. 가뭄이 오면 그 곡식을 내어주고 수많은 사람을 사고, 다른 것과 물물교환을 해서 부를 축적했던 것입니다.
세 번째, 이 당시 사람들이 쌓은 부의 축적 방법은 재산을 금(金)으로 바꾸는 것이었어요. 그 금을 어디다 보관했는지 아십니까? 항아리에 보관해서 주로 밭에다가 묻어 두던가, 집안의 창고에 가만히 모셔놓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 당시 사람들의 부의 축적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죠? 의복은 좀이 먹는다는 거예요. 게걸스러운 좀에게는 의복같이 맛있는 음식이 없는 법입니다. 창고에, 곡간에 곡식을 가득 쌓아 두었습니다.
오늘 여기 '동록이 해하며'에서 '동록'은 어려운 단어죠. NIV 성경에는 러스트(rust), 즉 쇠붙이에 녹이 쓰는 것으로 번역했습니다마는, 헬라어 원어에 보면 이 '동록'이라는 단어가 '먹는다'는 뜻을 가졌어요. 그러니까 오히려 문맥 속에서 보면 '쇠가 부식한다'는 것보다는, 곡간에 쌓아둔 곡식을 쥐나 새들이 먹어치우는 것을 얘기합니다. 오늘날은 쇠로 창고를 짓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창고가 허술했어요. 흙으로 쌓고 나무로 짜서 그 안에 곡식을 넣어둡니다. 그래서 날카로운 이를 가진 쥐들이 그것을 뚫는 것은 너무나 쉬웠어요. 그 창고에 들어와서 그 곡식을 먹어치웁니다. 그런데 그 창고에 금을 쌓아 둡니다. 그래서 도적이 구멍을 뚫어 버립니다. 대개 구멍을 뚫어서 그 항아리 안에 있는 금을 가져간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이 재물 모으는 방법을 지적하시고 그것이 결코 안전한 투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안전하지 않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후 2000년이 흘렀습니다. 상황은 변했으나 현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입니다. 주식과 채권은 시장의 시세에 따라 좌우됩니다. 주식이 안전합디까? 아니요. 인플레는 쥐와 같이 통장의 돈을 조금씩 가치 없게 만들어 갑니다. 여러분이 은행에 넣어둔 돈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까? 아니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돈의 가치는 부지불식간에 조금씩 떨어져 갑니다. 물가가 5% 오르면 여러분의 돈은 5%의 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거예요. 똑같은 100만원이지만-올해 물가보다 내년 물가가 5% 오를 거라고 합니다-여러분이 은행에 넣어둔 100만원의 돈이 95만원의 가치밖에 되지 않는 겁니다.
요사이 한국의 어는 은행에 돈을 넣어 놓아도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1인당 최고 보장율이 5000만원밖에 되지 않아요. 어느 은행이 무너질지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안전한곳을 발견한다고 해도, 나라가 부도나 버리면 여러분이 가진 돈은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나라가 부도나면 나라가 어떻게 합니까? 환율을 바꿔 버립니다. 만 원짜리 지폐를 천 원짜리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이미 우리 나라에 이런 일이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 당시 부모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쌀 한 가마니를 사기 위해서 돈을 한 가마니나 짊어지고 가야 쌀을 바꿀 수 있었다고 합니다. 왜요? 돈 가치가 떨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부도를 내 버렸어요. 우리가 부를 어느 곳에 축적해 두던지 간에, 확실한 보장을 주는 곳은, 이 땅에 아무 곳도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너희의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여러분,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부를 땅에 쌓아두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에요.
그러나 오늘 예수님이 이 금지하신 명령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명령을 통해 금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어요. 어떤 극단적인 신앙가들은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 말씀이 금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만약을 위해 저축하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습니다. 미래를 위해, 내 미래의 생활을 위해, 오늘의 삶 속에서 마땅히 절약할 것을 절약해서 미래를 위해 저축하는 것을 성경은 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잠언 6장 6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무슨 지혜를 얻으라는 거예요? 개미가 겨울에 음식이 없을 때를 대비해서, 음식이 많을 때 다 먹어 치우지 아니하고 쌓아두는 겁니다. 저축하는 겁니다. 그것을 성경은 절대 반대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위한 마땅한 저축, 성경은 오히려 장려해 주십니다.
두 번째 땅에 보물을 쌓지 말라는 명령을 통해 예수님이 금하지 않은 것은 사유재산을 갖는 거예요. 여러분, 성경은 재산을 각자가 갖는 것을 금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사유재산을 금했다고 하면, 십계명 가운데 한 계명은 틀린 계명이에요. '도적질 하지 말라!'
사유재산이 없다면, 도적질도 없는 겁니다. 오히려 성경은 사유재산을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5장에 보면 뭐라고 말씀합니까? 아나니아가 범죄했을 때에 베드로가 하는 말 가운데, 놀라운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4절 上)
무슨 말씀이에요? 네 땅이 있고 그 땅을 팔아서 네 마음대로 팔 수 있는 사유재산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금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네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는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금하신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알기 쉽게 말하면 이기적인 재산의 축적입니다. 19절을 다시 한번 보세요. 누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예! '너희를 위하여' 이 단어가 중요해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용어를 통해 말한다면 유물주의 사상에 근거해서 저축하지 말라는 겁니다. 유물주의 사상이 뭔지 압니까? 돈이 나를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많이 가지는 것이 든든하기 때문에, 돈을 통해 든든함을 확보하려는 태도입니다. 돈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의 세상을 보세요. 믿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뭐니뭐니해도 머니(money)밖에 없어요. 그렇잖아요? 이것이 세상의 철학이에요. 그러나 그리스도인 만큼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오늘 교회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만큼은 그런 사상으로 저축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왜 저축하는가? 돈이 든든하기 때문에, 돈이 나를 지켜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돈을 가진 자(者)만이 대접받는 세상이기 때문에, 악착같이 써야 할 곳에 쓰지 않고 모으고 모으고 또 모으는 사람! 보물을 땅에 쌓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향해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다고 말씀합니다. 누구에게 말씀했습니까?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한 사람이 있었어요.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돈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금덩이도 모으고 통장을 수백 개 가졌습니다. 그 결과 100억 이상의 돈을 모았어요. 적금에 인생의 목표를 두었습니다. 내가 100억이 되는 날! 어느 날 그것이 달성이 된 거예요. 모든 적금이 다 달성되어 100억이 되었을 때, 이 사람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야~ 이제는 됐다! 이자만 가지고도 넉넉하게 살겠다! 내 영혼아 이제는 떳떳하게 어깨를 펴고 즐기자! 그랜저도 뽑고 골프도 치고 인생을 이제부터 즐기자!" 그런데, 그 날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신 말씀이 뭔 줄 압니까? "You are foolish!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밤 내가 네 영혼을 데려갈 터이니 너의 쌓은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여러분, 물질이 영원할 줄 아십니까? 물질이 여러분을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돈을 모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땅에 보물을 쌓는 자입니다. 돈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잠시 맡기신 위탁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그 돈을 애지중지 하는 거예요. 써야 할 곳에 쓰지 않는 거예요. 도와줘야 할 곳에 도와주지 않습니다. 모으고 모으고 또 모읍니다. 왜냐하면 돈이 나를 지켜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에요. 이것은 보물을 땅에 쌓는 거예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 얘기에 나오는 그 부자의 잘못이 이것이었습니다. 거지를 마땅히 도와주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돕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는 결국 저 지옥에 가서, 땅에 쌓은 보물 때문에, 영원토록 신음하며 지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위탁물에 불과합니다.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돈을 왜 주셨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을 좋은 일에 쓰라고 주신 거예요. 돈을 왜 주셨는가? 땅에 쌓으라고 준 것이 아니라고 명령하십니다. 땅에 쌓지 말라! 그리고 명령하시기를 너희의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어떻게 하늘에 쌓을 것인가? 예수님은 구체적인 방법을 말씀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 문맥을 통해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하늘에 쌓기 위해서는 오늘 돈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투자해야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교부라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도들의 그 다음 대(代), 사도들의 2세, 즉 사도들에게 배운 사람들을 교부라고 합니다. 교부 가운데 오리겐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에 대해 아주 재미있는 말을 했어요. '그리스도인은 환전상(換錢商)이다' 누구라고요? 환전상! 환전상 아시죠? 환전상은 돈을 바꿔주는 사람이에요. 달러를 한국 돈으로 바꿔주고 차익을 챙기는 사람이죠. 그리스도인을 환전상이라고 비유했어요. '그리스도인은 땅의 자본을 취하여 하늘의 통화로 바꾸는 환전상이다'
여러분, 어떻게 하늘에 투자할 수 있나요? 우리가 국민은행 통장을 하늘로 던질 수 있나요? 아닙니다. 이 땅에서 좋은 일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돈을 쓰는 그 자체가 하늘에 쌓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하늘에 쌓는 보물은 영원합니다. 거기에는 좀도 없고 동록도 없고 도적도 없습니다. 잠시 있을 보물이 아니요, 우리가 영원의 세계를 지내며, 우리가 영원히 갖고 갈 수 있는 나의 보물이 된다고 주님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18세기에 영어 사전 편집자 존슨이라는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아주 부잣집에 초대를 받았어요. 그 집이 으리으리했습니다. 파티를 다 마치고 나오면서 그가 그 부자에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당신은 죽기가 쉽지 않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부자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거든요. 자기의 걱정이 늘 죽는 거였어요. '심장마비가 오면 어떡하나? 강도를 만나면 어떡하나? ' 왜요? 이 땅에 많은 보물이 있으니까요.
여러분, 이 땅에 보물을 쌓으면 쌓을수록 한가지 뚜렷한 증상이 나타나는데, 죽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이 여러분의 영혼을 부르시면 기쁜 마음으로 툴툴 털고 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보물은 하늘에 있는 겁니다. 열심히 적금을 들어놓고 나서 기쁨이 은행에 가서 통장 찍어보는 거예요. 얼마나 쌓였나? 얼마나 기쁩디까? 여러분.
하늘의 보물을 확인해 보고 싶지 않으세요? 땅에 보물을 쌓아두면 둘수록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죽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언젠가 우리가 하늘 나라에 이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질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질문은 얼마나 모았느냐가 절대 아닙니다. 땅에서 얼마나 쌓아 놓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어떤 일에 얼마나 썼느냐를 물으실 줄로 믿습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여러분은 어디에 보물을 쌓고 계십니까? 국민은행이십니까? 외환은행인가요? 그 쌓은 그 곳에 여러분의 마음이 있습니다. 변명할 필요 없어요. 예수님께서 가르친 이 가르침이 얼마나 단순하고 얼마나 뚜렷합니까? 오해할 수가 없잖아요? 비록 이 땅에 많은 통장이 있지 않아도 하나님을 위해 바치고, 주님을 위해 쓰고, 불쌍한 자를 도와 줬을 때, 우리의 보물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질문해 보십시오. 어디에 당신의 돈이 있으십니까? 오늘 주님은 뚜렷하게 명령하셨습니다.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첫 번째 재물관은, 물질관은 올바른 저축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늘에 쌓는 올바른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2. 올바른 시각을 가지라
두 번째로 우리가 올바른 재물관을 갖기 위해서는 올바른 시각(視覺), 눈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22절, 23절 다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예수님이 조금 전에 두 가지 보물을 얘기하시고, 이제는 두 가지 눈을 말씀하십니다. 밝은 눈과 어두운 눈입니다. 이 비유는 너무 단순해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이 비유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돼요. 여러분, 이런 얘기예요. 예수님이 지금 하시는 말씀은 여러분이 눈을 감고 있으면 깜깜해지잖아요. 더듬더듬 거리며 찾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눈을 딱 뜨면 환해지잖아요. 바로 이런 뜻입니다. 눈이 밝으면 온몸이 밝아지고, 눈이 어두우면 우리가 다 어두워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말한 이 눈이 어떤 눈일까요? 단수로 표현했어요. 두 개의 눈을 얘기한 게 아니고 하나의 눈을 얘기한 것으로 봐서 우리가 가진 눈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마음의 눈이에요. 영적인 눈이에요. 시력이 좋으면 우리 안이 밝게 되고, 시력이 나쁘면 우리의 모든 것이 흐려지듯이, 눈이 몸의 등불이듯이, 예수님은 인생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눈을 사용해서 설명하셨습니다. 인생을 올바로 바라보는 자가 올바른 재물관을 가질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올바로 바라보는 눈이 있으신가요?
이 땅에는 두 가지의 눈을 가진 사람만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영원한 시각을 가진 자요, 하나는 일시적인 시각을 가진 자입니다. 영원한 시각을 가진 자는 빛 가운데 사는 자요, 일시적인 시각을 가진 자는 깜깜한 데서 사는 자예요. 여러분 눈이 밝다고, 똑똑하다고, 박사학위를 가졌다고, 많은 돈과 지위를 누렸다고 자랑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그 사람은 장님인 거예요. 일시적인 이러한 시각을 가진 자들은 늘 넘어집니다. 자그마한 장애물에도 넘어지고, 사소한 유혹에도 넘어집니다. 저들은 나쁜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삶의 가치를 올바로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작은 병이 와도 시험에 빠지고, 조금만 사업이 흔들려도 낙심하고, 늘 넘어져요. 눈감은 자가 더듬거리며 이 땅을 살 듯이, 그들은 그렇게 삽니다. 똑똑한 것 같아도 그들은 영적인 세계에서 보면 장님인 겁니다. 교회 안에도 이러한 눈을 가진 자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눈이 잘못된 자들이 있어요. 인생을 바라보는 가치관과 시야가 잘못되어 있어요. 예배는 드리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밝은 눈을 가진 자가 아니요, 장님인 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저 욕심에 취해 삽니다. 이기심에 가득 차서 살아갑니다. 좋지 못한 눈을 가진 사람이에요.
프랑스 소설 중에 아주 재미있는 소설이 하나 있습니다. 도둑에 관한 얘긴데 좋은 내용은 아니죠. 그러나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아주 좋은 소설이에요. 어느 날, 도둑이 양복점에 들어갔어요. 바지를 입어보는 척 하고는 돈도 내지 않고 바지를 입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칩니다. 아주 비싸고 멋있는 바지를 훔쳤어요. 주인이 그 뒤를 쫓아갑니다. "바지 내 놔라!" 다 떨어진 바지를 벗어놓고 갔으니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쫓아가면서 보니까 경관이 있는 거예요. 경관에게 "저 놈이 내 바지 입고 튄다"고 얘기했어요. 경관이 따라갑니다. ( 외국에서는 "서라!"고 세 번 반복해서 말하고, 그런데도 안 서면 그냥 총을 쏴요. 혹시 미국 가서 바지 훔치더라도 경찰이 서라고 하면 서셔야 됩니다. 안 그러면 구멍나요. 한국에는 "서라!" 고 했는데도 계속 도망가도 안 쏘잖아요. 그런데 계속 경관이 쫓아가도 서지 않고, 겨우 잡히면 경관하고 멱살잡고 싸우고... 이런 나라는 한국밖에 없어요. 미국에 가면 절대 안 됩니다. 딱지를 떼어도 옆 사람이 약간만 거들고 방해하면 그 자리에서 수갑채워서 경찰서로 데려가요. 총을 쏘는 거예요) 진짜 세 번째 얘기를 했어요. 그래도 이 경관이 차마 바지 하나 가지고 사람을 죽일 수 없잖아요. 도망 못하게 하려고 다리를 쏘려고 다리를 겨눕니다. 그때 주인이 "안됩니다. 위를 쏘세요! 위를!" 왜 그랬겠어요? 바지에 구멍나면 안 되니까! 아무튼 재미있는 소설이에요.
오늘날 현대인들이 얼마나 잘못된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가를 보여주는 소설이에요. 이런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돈이면 부부간의 관계도 끊어버립니다. 소용없어요. 자기 통장 때문에 자식도 소용없어요. 아니, 하나님도 소용없어요. 목회자도 소용없어요. 어디까지만 한계를 긋습니다. 와서 충고하는 것, 어느 정도는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 넘어오면 모든 관계를 끊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눈이 나쁜 사람이에요. 장님인 겁니다. 예수님은 상당히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저는 나이가 어리지만 임종을 많이 지켜본 사람입니다. 가끔 임종할 때 저의 손을 붙잡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몇 분 계셨어요. "목사님, 이런 때가 올 줄 알았다면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듯이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텐데요" 제 손을 잡고 우시는 분을 저는 몇 분이나 떠나 보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할 때면 저는 잠이 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럴 때가 올 줄 알았다니요? 우리 모두에게는 그 때가 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진 것 다 두고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계산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여러분의 남겨진 통장이 부끄러움이 되실 것을 아십니까? "너는 내가 그렇게 가르쳤건만 네 보물을 땅에 쌓아 두고 왔구나. 이 어리석은 자야!"
당신은 어떻습니까? 정말 천국이 있음을 믿으십니까? 영원한 세계를 정말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진정 구원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눈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밝은 눈을 갖고 계시나요? 아니면, 당신은 장님이신가요? 우리가 올바른 재물관을 갖기 위해 올바른 저축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올바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3. 올바른 주인을 섬기라
마지막, 예수님이 가르쳐주는 진리는 다름 아닌 올바른 주인을 섬겨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24절을 다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도 우리 현대인들이 종종 오해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예요. 왜요? 부업을 하잖아요? 어떤 회사에 내가 취직을 했습니다. 하루 8시간 일하고 돌아와서 남는 시간은 내 것이에요. 그래서 집에 와서 인형을 만들어 팔든, 무엇을 하든 부업을 가질 수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 구절을 "하나님 섬기는 것 좋지, 그러나 돈도 필요하지, 돈도 섬겨야지, 하나님은 주업으로 섬기고 부업으로 돈을 섬기는 건데 어떨라구!"라고 해석해요.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께서 주신 이 말씀은 직장인을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에요. 노예를 두고 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노예는 어떻습니까? 그 당시의 노예는 하루에 8시간정도 주인을 위해 일하는 자가 아니요, 24시간 자신의 주인을 위해 일할 의무를 가진 자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어떤 노예가 이 주인을 섬기면서, 다른 주인을 밤에 가서 섬길 수 있겠느냐, 절대 아니다라는 말씀이에요. 그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노예는 한 주인만 섬겨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는 자는 돈을 섬길 수 없다는 겁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자는 돈에 대한 태도가 올바로 되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제가 거꾸로 말해 볼까요? 돈에 대한 태도가 잘못되어 있으면 하나님을 섬긴다는 그의 말은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헌금 생활이 중요한 이유예요.
올 연말에도 저는 어김없이 여러분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여러분이 1년 동안 하나님 앞에 바친 헌금의 총액을 여러분에게 나누어 드릴 겁니다. 두 가지 목표가 있어요. 하나는 세금 정산 때 쓰시라고 공적인 문서로 내드립니다. 그러나 제 목적은 거기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1년 동안 여러분의 주님 앞에 "드림"을 살펴보라는 거예요. 이 등식은 성립하지 않아요.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등식은 성립합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자는 헌금 생활이 올바로 되어 있어요. 아무리 봉사를 많이 하고, 아무리 성경 암송을 많이 하고, 아무리 성경 공부를 많이 해도 헌금 생활이, 돈에 대한 태도가 잘못되어 있으면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여러분이 누구를 섬기는가 알고 싶으신가요? 당신의 돈에 대한 태도를 알고 싶으면 오늘 제가 드리는 이 두 가지 질문에 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당신은 돈을 어떻게 벌고 계십니까? 이 질문에 대답해 보세요. 돈을 벌기 위해 영원한 것을 희생합니까? 예배도 희생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도 희생하고, 부부간의 대화도 희생하고, 아이들 돌보는 것도 희생하고, 부자와 거지 나사로처럼 주위에 가난하고 굶어 가는 사람이 있는데, 도와주지 아니하고 악착같이 돈을 벌고 계신가요? 그렇게 돈을 모으셨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돈을 섬기고 있는 겁니다. 또 한 가지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질문은, 당신의 돈을 무엇에 사용하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버신 돈으로 무엇을 하고 계신가요? 솔직하게 말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당신이 하나님의 돈궤를 맡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더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은 단지 당신의 남은 잔돈을 얻을 뿐인가요? 이 질문에 대답해 보세요. 돈을 어떻게 버는가? 부정한 방법으로, 속임수를 쓰면서 버는가? 그리고 그 번 돈을 어디에 쓰는가? 하나님이 당신에게 많은 것을 맡겼기 때문에, 그 맡긴 돈 때문에 이 땅의 가정에, 여러분 주위에 하나님이 전파되고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돈을 섬기고 있는 거예요.
한 소년이 있었어요. 주일학교에 예배드리러 간다고 그러기에 아버지가 동전 두 개를 주었습니다. "하나는 헌금을 하고 하나는 올 때 사탕을 사 먹어라" 그래서 이 소년은 너무너무 신났어요. 사탕 값까지 받았으니. 그래서 두 손에 하나씩을 쥐고 달려갑니다. 그러다 너무너무 기뻐하다가 교회 앞에 와서 탁 넘어 졌어요. 넘어지면서 돈을 떨어뜨렸는데 그만 동전 하나가 하수구로 빠져 버렸어요. 교회에 갔다 와서 아버지가 "사탕 사 먹었어? 헌금했어?" 물어도 말을 안 해요. "어떻게 됐니?" 그랬더니 얘기를 하는 거예요. "내가 뛰어 가다가 동전을 하수구에 빠뜨렸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 "사탕 사 먹었죠" "왜 헌금 안하고 사탕 사 먹었어?" 그랬더니 "하수구에 빠진 돈이 하나님 돈이었거든요" 머리 좋은 아이죠?
그러나 이런 머리 좋은 어른들이 오늘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것은 실제적인 질문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 당신은 돈을 섬기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섬기십니까? 주기도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지난 주간에 제가 주기도문을 짧게 강의했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어떤 뜻인지 압니까? '하나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내 주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 인생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기를 원합니다. 제가 당신만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이런 뜻이에요. '나라이 임하옵시며' 이 말씀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나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투자를 하겠다'고 약속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물질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그 일을 위해 쓰겠습니다. 가난한 자가 내 주위에서 손을 벌리면, 내가 그를 돕겠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주기도문의 기도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그 간구가 우리의 돈지갑까지 연결되어 있음을 말씀하는 겁니다.
돈에 대한 시험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중 하나를 저는 십일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교회 안에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은 참으로 적습니다. 여러분, 왜 성경은 그렇게 끈질기게 십일조를 자꾸 드리라고 말씀할까요? 하나님이 돈이 없어서일까요? 목사가 착복하기 위함입니까? 어떤 분은 헌금하면 제가 가져가는 줄 알아요.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헌금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에요. 저도 헌금해요. 저도 제 수입의 약 25%를 하나님 앞에 드려요. 1년에 1000만원 이상 제가 드립니다. 저도 헌금하고 여러분도 헌금하는 거예요. 이것은 누구를 위해서 헌금하는 것도 아니에요. 많은 교인들과 집사님들이 생각하기를 목사님 사례비를 자기들 헌금에서 드린다고 생각해요. 여러분,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 앞에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바로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리는 거예요. 저도 하나님께 드리는 거예요. 저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받아서 쓰는 거예요. 저는 그렇게 목회 합니다.
10분의 1을 드린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어요?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겠습니다. 10분의 10을 가지고 사는 사람보다 내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므로, 하나님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제가 돈을 섬기는 게 아니요,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는 고백이에요. 그것이 십일조예요.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십일조를 잔머리 굴리면서 하는지 모릅니다. 안심하십시오. 저는 여러분의 십일조 액수를 1년에 거의 보지 않습니다. 제가 그래서 여러분의 헌금 액수를 보지 않는 거예요. 1년 총액 나누어질 때, 가끔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볼 지 몰라도 저는 일일이 보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발설하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에게 보일 필요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 앞에 태도가 열려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섬기고 계신가요?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아라. 그것은 어리석은 자가 하는 짓이야! 이 땅에 내가 너희에게 허락한 그 돈을 가지고, 건강이 허락되고 기회가 있을 때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거라. 그것이 하늘에 투자하는 거야!"
지난번 김창엽 목사님이 오셔서 부흥회 하시고 돌아가시면서 저에게 한 말씀 하셨어요. "역시 미국에는 신자들이 많아" 리버티 신학교에 한 사람이 왔어요. 그 날 얼마를 헌금하고 갔는지 아세요? 800억원을 헌금하고 갔다고 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작은 부자들이 300억원을 또 헌금했어요. 여러분, 놀라운 일이에요. 1000억이 순식간에 모금이 되었어요. 그래서 학생들을 위해 큰 교육관을 짓고 있습니다. 곧 공사가 시작될 거예요. 제가 봐도 미국에는 참 신자가 많아요. 하늘 나라 가기 전에 남김없이 좋은 일에 쓰고 갑니다. 그러나 한국은 어떻게 합니까? 자식에게 유산을 줘요. 여러분, 그것은 돈을 주는 게 아니라, 독(毒)을 주는 겁니다. 아십니까? 그의 자립성을 떨어뜨리는 거예요. 그러나 미국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내게 하나님이 맡기신 돈, 내 자식에게 왜 줍니까? 교육시켜 줬으면 됐다는 거예요. 그 이후에는 네가 하나님께 받아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도하죠, 그러니까 부지런하게 살죠.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재벌들이 3대,4대 계속 가요. 한국의 재벌은 2대,3대도 못 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보물을 땅에 쌓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늘에 쌓으십시오. 그리고 우리 모두 올바른 눈을 뜨십시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올바른 눈을 떠서 더듬거리며 사는 게 아니고, 넘어지며 사는 게 아니고, 환하게 밝은 눈을 가지고 사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돈의 얘기는 세속적인 얘기가 아니요, 참으로 영적인 얘기입니다. 이 돈에 대한 태도가 당신의 영적인 점수 표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축복의 말씀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출처/박정근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19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銅綠)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20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21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24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제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동안,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교회에서 돈 얘기하는 것을 꺼려 왔습니다. 그 이유는 영(靈)적인 모임인 교회에서 세속적인 돈 얘기를 하는 것이 은혜롭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세상에서 가장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책에는 돈에 대한 얘기가 구체적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예수님은 종종 제자들에게 돈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돈이 단순히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친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얼마나 구체적으로 돈에 대해서 가르치시는지 모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1절)
오늘 현대판 번역으로 말하면, '네 통장이 있는 그곳에, 네 돈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네 마음이 있는 곳에 돈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네 돈이 있는 그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돈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돈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가 여러분의 신앙을 결정지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자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자입니다. 영원을 향하여 길을 떠난 나그네요, 순례자입니다. 이것 모두 우리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돈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까? 영원을 향하는 자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재물관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시며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돈에 대한 태도를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생동안 우리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 돈의 문제, 재물관에 대해서 뚜렷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돌아가시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1. 올바른 저축을 하라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재물관을 가져야 합니까? 예수님은 먼저 우리에게 올바른 저축을 할 줄 알아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올바른 장소에 우리의 돈을 쌓을 줄 알아야 된다고 하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읽은 이 본문에는 두 가지 보물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땅에 있는 보물이요, 하나는 하늘에 있는 보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요점은 이 두 가지 보물이 지니고 있는 상대적인 내구성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발견하시면 예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시고자하는 요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땅에 있는 보물은 부패하고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보물은 부패하지 않고 완전하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 보물의 내구성을 발견하고 알게 되면 자동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어느 곳에 저축해야 할까를 어렵지 않게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의 초점이에요. 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銅綠)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하늘에 있는 보물과 땅에 있는 보물의 내구성을 발견해야 합니다. 땅에 있는 돈은 어떤 것인가? 영원하지 않다는 거예요. 좀과 동록과 도적이 구멍을 뚫는 것, 이것은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1세기, 그 당시 문화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이 당시에는 은행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 가지 방법으로 자신들의 부(富)를 축적했습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의복을 쌓음으로 부를 축적했습니다. 이것은 한국 사람들도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옛날 사극(史劇)을 보면, 임금님께서 하사품을 내리는데 뭘 내리죠? 비단을 내립니다.
'오성과 한음' 얘기에 보면, 그 사람들이 일곱 살 때 임금님께 많은 비단을 받았어요. 임금님이 테스트하기 위해서 비단을 내렸죠. 그걸 어떻게 들고 가나 보려고요. 어떻게 들고 갔습니까? 그 비단을 통째로 들면 도저히 못 들잖아요. 일곱 살이니까! 가볍게 비단을 펴서 끌더니, 줄줄줄 끌고 가더랍니다. 조금만 잡아끄니까 쭈욱 따라오잖아요. 천재성이 있었던 것 같아요.
여러분, 성경에도 보면 아간이 외투 한 벌을 훔쳐서 결국 아골 골짜기에서 죽습니다. 생각해보면, 야, 추운 날 외투 한 벌 입겠다고 훔쳤는데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까지 죽이나!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이 아간은 자기의 옷이 필요해서 훔쳤던 것이 아니고,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금지하신 물건 가운데 하나를 훔쳐 자기의 부를 축적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잘못이었어요.
두 번째, 이 당시 사람들이 재산을 쌓은 방법은 창고에 곡식을 쌓는 것입니다. 곡간에 곡식을 가득 쌓아 두는 것! 그것이 부의 상징이었어요. 30년 전 농촌으로 돌아가 보면 가을철에 곡식이 몇 가마니나 창고에 쌓였느냐가 그 사람들의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만석지기라는 말도 있었지요. 여러분, 이 당시에는 댐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자동적으로 기근이 올 수밖에 없었고 가뭄이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가 그 당시에 사회적인 부를 걸머졌는가? 창고에 곡식을 많이 쌓아 두었던 사람이에요. 가뭄이 오면 그 곡식을 내어주고 수많은 사람을 사고, 다른 것과 물물교환을 해서 부를 축적했던 것입니다.
세 번째, 이 당시 사람들이 쌓은 부의 축적 방법은 재산을 금(金)으로 바꾸는 것이었어요. 그 금을 어디다 보관했는지 아십니까? 항아리에 보관해서 주로 밭에다가 묻어 두던가, 집안의 창고에 가만히 모셔놓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 당시 사람들의 부의 축적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죠? 의복은 좀이 먹는다는 거예요. 게걸스러운 좀에게는 의복같이 맛있는 음식이 없는 법입니다. 창고에, 곡간에 곡식을 가득 쌓아 두었습니다.
오늘 여기 '동록이 해하며'에서 '동록'은 어려운 단어죠. NIV 성경에는 러스트(rust), 즉 쇠붙이에 녹이 쓰는 것으로 번역했습니다마는, 헬라어 원어에 보면 이 '동록'이라는 단어가 '먹는다'는 뜻을 가졌어요. 그러니까 오히려 문맥 속에서 보면 '쇠가 부식한다'는 것보다는, 곡간에 쌓아둔 곡식을 쥐나 새들이 먹어치우는 것을 얘기합니다. 오늘날은 쇠로 창고를 짓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창고가 허술했어요. 흙으로 쌓고 나무로 짜서 그 안에 곡식을 넣어둡니다. 그래서 날카로운 이를 가진 쥐들이 그것을 뚫는 것은 너무나 쉬웠어요. 그 창고에 들어와서 그 곡식을 먹어치웁니다. 그런데 그 창고에 금을 쌓아 둡니다. 그래서 도적이 구멍을 뚫어 버립니다. 대개 구멍을 뚫어서 그 항아리 안에 있는 금을 가져간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이 재물 모으는 방법을 지적하시고 그것이 결코 안전한 투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안전하지 않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후 2000년이 흘렀습니다. 상황은 변했으나 현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입니다. 주식과 채권은 시장의 시세에 따라 좌우됩니다. 주식이 안전합디까? 아니요. 인플레는 쥐와 같이 통장의 돈을 조금씩 가치 없게 만들어 갑니다. 여러분이 은행에 넣어둔 돈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까? 아니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돈의 가치는 부지불식간에 조금씩 떨어져 갑니다. 물가가 5% 오르면 여러분의 돈은 5%의 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거예요. 똑같은 100만원이지만-올해 물가보다 내년 물가가 5% 오를 거라고 합니다-여러분이 은행에 넣어둔 100만원의 돈이 95만원의 가치밖에 되지 않는 겁니다.
요사이 한국의 어는 은행에 돈을 넣어 놓아도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1인당 최고 보장율이 5000만원밖에 되지 않아요. 어느 은행이 무너질지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안전한곳을 발견한다고 해도, 나라가 부도나 버리면 여러분이 가진 돈은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나라가 부도나면 나라가 어떻게 합니까? 환율을 바꿔 버립니다. 만 원짜리 지폐를 천 원짜리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이미 우리 나라에 이런 일이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 당시 부모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쌀 한 가마니를 사기 위해서 돈을 한 가마니나 짊어지고 가야 쌀을 바꿀 수 있었다고 합니다. 왜요? 돈 가치가 떨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부도를 내 버렸어요. 우리가 부를 어느 곳에 축적해 두던지 간에, 확실한 보장을 주는 곳은, 이 땅에 아무 곳도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너희의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여러분,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부를 땅에 쌓아두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에요.
그러나 오늘 예수님이 이 금지하신 명령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명령을 통해 금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어요. 어떤 극단적인 신앙가들은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 말씀이 금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만약을 위해 저축하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습니다. 미래를 위해, 내 미래의 생활을 위해, 오늘의 삶 속에서 마땅히 절약할 것을 절약해서 미래를 위해 저축하는 것을 성경은 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잠언 6장 6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무슨 지혜를 얻으라는 거예요? 개미가 겨울에 음식이 없을 때를 대비해서, 음식이 많을 때 다 먹어 치우지 아니하고 쌓아두는 겁니다. 저축하는 겁니다. 그것을 성경은 절대 반대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위한 마땅한 저축, 성경은 오히려 장려해 주십니다.
두 번째 땅에 보물을 쌓지 말라는 명령을 통해 예수님이 금하지 않은 것은 사유재산을 갖는 거예요. 여러분, 성경은 재산을 각자가 갖는 것을 금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사유재산을 금했다고 하면, 십계명 가운데 한 계명은 틀린 계명이에요. '도적질 하지 말라!'
사유재산이 없다면, 도적질도 없는 겁니다. 오히려 성경은 사유재산을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5장에 보면 뭐라고 말씀합니까? 아나니아가 범죄했을 때에 베드로가 하는 말 가운데, 놀라운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4절 上)
무슨 말씀이에요? 네 땅이 있고 그 땅을 팔아서 네 마음대로 팔 수 있는 사유재산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금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네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는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금하신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알기 쉽게 말하면 이기적인 재산의 축적입니다. 19절을 다시 한번 보세요. 누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예! '너희를 위하여' 이 단어가 중요해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용어를 통해 말한다면 유물주의 사상에 근거해서 저축하지 말라는 겁니다. 유물주의 사상이 뭔지 압니까? 돈이 나를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많이 가지는 것이 든든하기 때문에, 돈을 통해 든든함을 확보하려는 태도입니다. 돈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의 세상을 보세요. 믿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뭐니뭐니해도 머니(money)밖에 없어요. 그렇잖아요? 이것이 세상의 철학이에요. 그러나 그리스도인 만큼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오늘 교회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만큼은 그런 사상으로 저축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왜 저축하는가? 돈이 든든하기 때문에, 돈이 나를 지켜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돈을 가진 자(者)만이 대접받는 세상이기 때문에, 악착같이 써야 할 곳에 쓰지 않고 모으고 모으고 또 모으는 사람! 보물을 땅에 쌓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향해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다고 말씀합니다. 누구에게 말씀했습니까?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한 사람이 있었어요.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돈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금덩이도 모으고 통장을 수백 개 가졌습니다. 그 결과 100억 이상의 돈을 모았어요. 적금에 인생의 목표를 두었습니다. 내가 100억이 되는 날! 어느 날 그것이 달성이 된 거예요. 모든 적금이 다 달성되어 100억이 되었을 때, 이 사람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야~ 이제는 됐다! 이자만 가지고도 넉넉하게 살겠다! 내 영혼아 이제는 떳떳하게 어깨를 펴고 즐기자! 그랜저도 뽑고 골프도 치고 인생을 이제부터 즐기자!" 그런데, 그 날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신 말씀이 뭔 줄 압니까? "You are foolish!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밤 내가 네 영혼을 데려갈 터이니 너의 쌓은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여러분, 물질이 영원할 줄 아십니까? 물질이 여러분을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돈을 모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땅에 보물을 쌓는 자입니다. 돈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잠시 맡기신 위탁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그 돈을 애지중지 하는 거예요. 써야 할 곳에 쓰지 않는 거예요. 도와줘야 할 곳에 도와주지 않습니다. 모으고 모으고 또 모읍니다. 왜냐하면 돈이 나를 지켜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에요. 이것은 보물을 땅에 쌓는 거예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 얘기에 나오는 그 부자의 잘못이 이것이었습니다. 거지를 마땅히 도와주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돕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는 결국 저 지옥에 가서, 땅에 쌓은 보물 때문에, 영원토록 신음하며 지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위탁물에 불과합니다.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돈을 왜 주셨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을 좋은 일에 쓰라고 주신 거예요. 돈을 왜 주셨는가? 땅에 쌓으라고 준 것이 아니라고 명령하십니다. 땅에 쌓지 말라! 그리고 명령하시기를 너희의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어떻게 하늘에 쌓을 것인가? 예수님은 구체적인 방법을 말씀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 문맥을 통해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하늘에 쌓기 위해서는 오늘 돈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투자해야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교부라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도들의 그 다음 대(代), 사도들의 2세, 즉 사도들에게 배운 사람들을 교부라고 합니다. 교부 가운데 오리겐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에 대해 아주 재미있는 말을 했어요. '그리스도인은 환전상(換錢商)이다' 누구라고요? 환전상! 환전상 아시죠? 환전상은 돈을 바꿔주는 사람이에요. 달러를 한국 돈으로 바꿔주고 차익을 챙기는 사람이죠. 그리스도인을 환전상이라고 비유했어요. '그리스도인은 땅의 자본을 취하여 하늘의 통화로 바꾸는 환전상이다'
여러분, 어떻게 하늘에 투자할 수 있나요? 우리가 국민은행 통장을 하늘로 던질 수 있나요? 아닙니다. 이 땅에서 좋은 일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돈을 쓰는 그 자체가 하늘에 쌓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하늘에 쌓는 보물은 영원합니다. 거기에는 좀도 없고 동록도 없고 도적도 없습니다. 잠시 있을 보물이 아니요, 우리가 영원의 세계를 지내며, 우리가 영원히 갖고 갈 수 있는 나의 보물이 된다고 주님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18세기에 영어 사전 편집자 존슨이라는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아주 부잣집에 초대를 받았어요. 그 집이 으리으리했습니다. 파티를 다 마치고 나오면서 그가 그 부자에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당신은 죽기가 쉽지 않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부자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거든요. 자기의 걱정이 늘 죽는 거였어요. '심장마비가 오면 어떡하나? 강도를 만나면 어떡하나? ' 왜요? 이 땅에 많은 보물이 있으니까요.
여러분, 이 땅에 보물을 쌓으면 쌓을수록 한가지 뚜렷한 증상이 나타나는데, 죽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이 여러분의 영혼을 부르시면 기쁜 마음으로 툴툴 털고 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보물은 하늘에 있는 겁니다. 열심히 적금을 들어놓고 나서 기쁨이 은행에 가서 통장 찍어보는 거예요. 얼마나 쌓였나? 얼마나 기쁩디까? 여러분.
하늘의 보물을 확인해 보고 싶지 않으세요? 땅에 보물을 쌓아두면 둘수록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죽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언젠가 우리가 하늘 나라에 이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질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질문은 얼마나 모았느냐가 절대 아닙니다. 땅에서 얼마나 쌓아 놓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어떤 일에 얼마나 썼느냐를 물으실 줄로 믿습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여러분은 어디에 보물을 쌓고 계십니까? 국민은행이십니까? 외환은행인가요? 그 쌓은 그 곳에 여러분의 마음이 있습니다. 변명할 필요 없어요. 예수님께서 가르친 이 가르침이 얼마나 단순하고 얼마나 뚜렷합니까? 오해할 수가 없잖아요? 비록 이 땅에 많은 통장이 있지 않아도 하나님을 위해 바치고, 주님을 위해 쓰고, 불쌍한 자를 도와 줬을 때, 우리의 보물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질문해 보십시오. 어디에 당신의 돈이 있으십니까? 오늘 주님은 뚜렷하게 명령하셨습니다.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첫 번째 재물관은, 물질관은 올바른 저축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늘에 쌓는 올바른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2. 올바른 시각을 가지라
두 번째로 우리가 올바른 재물관을 갖기 위해서는 올바른 시각(視覺), 눈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22절, 23절 다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예수님이 조금 전에 두 가지 보물을 얘기하시고, 이제는 두 가지 눈을 말씀하십니다. 밝은 눈과 어두운 눈입니다. 이 비유는 너무 단순해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이 비유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돼요. 여러분, 이런 얘기예요. 예수님이 지금 하시는 말씀은 여러분이 눈을 감고 있으면 깜깜해지잖아요. 더듬더듬 거리며 찾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눈을 딱 뜨면 환해지잖아요. 바로 이런 뜻입니다. 눈이 밝으면 온몸이 밝아지고, 눈이 어두우면 우리가 다 어두워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말한 이 눈이 어떤 눈일까요? 단수로 표현했어요. 두 개의 눈을 얘기한 게 아니고 하나의 눈을 얘기한 것으로 봐서 우리가 가진 눈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마음의 눈이에요. 영적인 눈이에요. 시력이 좋으면 우리 안이 밝게 되고, 시력이 나쁘면 우리의 모든 것이 흐려지듯이, 눈이 몸의 등불이듯이, 예수님은 인생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눈을 사용해서 설명하셨습니다. 인생을 올바로 바라보는 자가 올바른 재물관을 가질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올바로 바라보는 눈이 있으신가요?
이 땅에는 두 가지의 눈을 가진 사람만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영원한 시각을 가진 자요, 하나는 일시적인 시각을 가진 자입니다. 영원한 시각을 가진 자는 빛 가운데 사는 자요, 일시적인 시각을 가진 자는 깜깜한 데서 사는 자예요. 여러분 눈이 밝다고, 똑똑하다고, 박사학위를 가졌다고, 많은 돈과 지위를 누렸다고 자랑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그 사람은 장님인 거예요. 일시적인 이러한 시각을 가진 자들은 늘 넘어집니다. 자그마한 장애물에도 넘어지고, 사소한 유혹에도 넘어집니다. 저들은 나쁜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삶의 가치를 올바로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작은 병이 와도 시험에 빠지고, 조금만 사업이 흔들려도 낙심하고, 늘 넘어져요. 눈감은 자가 더듬거리며 이 땅을 살 듯이, 그들은 그렇게 삽니다. 똑똑한 것 같아도 그들은 영적인 세계에서 보면 장님인 겁니다. 교회 안에도 이러한 눈을 가진 자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눈이 잘못된 자들이 있어요. 인생을 바라보는 가치관과 시야가 잘못되어 있어요. 예배는 드리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밝은 눈을 가진 자가 아니요, 장님인 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저 욕심에 취해 삽니다. 이기심에 가득 차서 살아갑니다. 좋지 못한 눈을 가진 사람이에요.
프랑스 소설 중에 아주 재미있는 소설이 하나 있습니다. 도둑에 관한 얘긴데 좋은 내용은 아니죠. 그러나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아주 좋은 소설이에요. 어느 날, 도둑이 양복점에 들어갔어요. 바지를 입어보는 척 하고는 돈도 내지 않고 바지를 입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칩니다. 아주 비싸고 멋있는 바지를 훔쳤어요. 주인이 그 뒤를 쫓아갑니다. "바지 내 놔라!" 다 떨어진 바지를 벗어놓고 갔으니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쫓아가면서 보니까 경관이 있는 거예요. 경관에게 "저 놈이 내 바지 입고 튄다"고 얘기했어요. 경관이 따라갑니다. ( 외국에서는 "서라!"고 세 번 반복해서 말하고, 그런데도 안 서면 그냥 총을 쏴요. 혹시 미국 가서 바지 훔치더라도 경찰이 서라고 하면 서셔야 됩니다. 안 그러면 구멍나요. 한국에는 "서라!" 고 했는데도 계속 도망가도 안 쏘잖아요. 그런데 계속 경관이 쫓아가도 서지 않고, 겨우 잡히면 경관하고 멱살잡고 싸우고... 이런 나라는 한국밖에 없어요. 미국에 가면 절대 안 됩니다. 딱지를 떼어도 옆 사람이 약간만 거들고 방해하면 그 자리에서 수갑채워서 경찰서로 데려가요. 총을 쏘는 거예요) 진짜 세 번째 얘기를 했어요. 그래도 이 경관이 차마 바지 하나 가지고 사람을 죽일 수 없잖아요. 도망 못하게 하려고 다리를 쏘려고 다리를 겨눕니다. 그때 주인이 "안됩니다. 위를 쏘세요! 위를!" 왜 그랬겠어요? 바지에 구멍나면 안 되니까! 아무튼 재미있는 소설이에요.
오늘날 현대인들이 얼마나 잘못된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가를 보여주는 소설이에요. 이런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돈이면 부부간의 관계도 끊어버립니다. 소용없어요. 자기 통장 때문에 자식도 소용없어요. 아니, 하나님도 소용없어요. 목회자도 소용없어요. 어디까지만 한계를 긋습니다. 와서 충고하는 것, 어느 정도는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 넘어오면 모든 관계를 끊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눈이 나쁜 사람이에요. 장님인 겁니다. 예수님은 상당히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저는 나이가 어리지만 임종을 많이 지켜본 사람입니다. 가끔 임종할 때 저의 손을 붙잡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몇 분 계셨어요. "목사님, 이런 때가 올 줄 알았다면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듯이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텐데요" 제 손을 잡고 우시는 분을 저는 몇 분이나 떠나 보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할 때면 저는 잠이 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럴 때가 올 줄 알았다니요? 우리 모두에게는 그 때가 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진 것 다 두고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계산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여러분의 남겨진 통장이 부끄러움이 되실 것을 아십니까? "너는 내가 그렇게 가르쳤건만 네 보물을 땅에 쌓아 두고 왔구나. 이 어리석은 자야!"
당신은 어떻습니까? 정말 천국이 있음을 믿으십니까? 영원한 세계를 정말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진정 구원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눈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밝은 눈을 갖고 계시나요? 아니면, 당신은 장님이신가요? 우리가 올바른 재물관을 갖기 위해 올바른 저축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올바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3. 올바른 주인을 섬기라
마지막, 예수님이 가르쳐주는 진리는 다름 아닌 올바른 주인을 섬겨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24절을 다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도 우리 현대인들이 종종 오해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예요. 왜요? 부업을 하잖아요? 어떤 회사에 내가 취직을 했습니다. 하루 8시간 일하고 돌아와서 남는 시간은 내 것이에요. 그래서 집에 와서 인형을 만들어 팔든, 무엇을 하든 부업을 가질 수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 구절을 "하나님 섬기는 것 좋지, 그러나 돈도 필요하지, 돈도 섬겨야지, 하나님은 주업으로 섬기고 부업으로 돈을 섬기는 건데 어떨라구!"라고 해석해요.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께서 주신 이 말씀은 직장인을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에요. 노예를 두고 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노예는 어떻습니까? 그 당시의 노예는 하루에 8시간정도 주인을 위해 일하는 자가 아니요, 24시간 자신의 주인을 위해 일할 의무를 가진 자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어떤 노예가 이 주인을 섬기면서, 다른 주인을 밤에 가서 섬길 수 있겠느냐, 절대 아니다라는 말씀이에요. 그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노예는 한 주인만 섬겨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는 자는 돈을 섬길 수 없다는 겁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자는 돈에 대한 태도가 올바로 되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제가 거꾸로 말해 볼까요? 돈에 대한 태도가 잘못되어 있으면 하나님을 섬긴다는 그의 말은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헌금 생활이 중요한 이유예요.
올 연말에도 저는 어김없이 여러분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여러분이 1년 동안 하나님 앞에 바친 헌금의 총액을 여러분에게 나누어 드릴 겁니다. 두 가지 목표가 있어요. 하나는 세금 정산 때 쓰시라고 공적인 문서로 내드립니다. 그러나 제 목적은 거기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1년 동안 여러분의 주님 앞에 "드림"을 살펴보라는 거예요. 이 등식은 성립하지 않아요.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등식은 성립합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자는 헌금 생활이 올바로 되어 있어요. 아무리 봉사를 많이 하고, 아무리 성경 암송을 많이 하고, 아무리 성경 공부를 많이 해도 헌금 생활이, 돈에 대한 태도가 잘못되어 있으면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여러분이 누구를 섬기는가 알고 싶으신가요? 당신의 돈에 대한 태도를 알고 싶으면 오늘 제가 드리는 이 두 가지 질문에 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당신은 돈을 어떻게 벌고 계십니까? 이 질문에 대답해 보세요. 돈을 벌기 위해 영원한 것을 희생합니까? 예배도 희생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도 희생하고, 부부간의 대화도 희생하고, 아이들 돌보는 것도 희생하고, 부자와 거지 나사로처럼 주위에 가난하고 굶어 가는 사람이 있는데, 도와주지 아니하고 악착같이 돈을 벌고 계신가요? 그렇게 돈을 모으셨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돈을 섬기고 있는 겁니다. 또 한 가지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질문은, 당신의 돈을 무엇에 사용하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버신 돈으로 무엇을 하고 계신가요? 솔직하게 말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당신이 하나님의 돈궤를 맡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더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은 단지 당신의 남은 잔돈을 얻을 뿐인가요? 이 질문에 대답해 보세요. 돈을 어떻게 버는가? 부정한 방법으로, 속임수를 쓰면서 버는가? 그리고 그 번 돈을 어디에 쓰는가? 하나님이 당신에게 많은 것을 맡겼기 때문에, 그 맡긴 돈 때문에 이 땅의 가정에, 여러분 주위에 하나님이 전파되고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돈을 섬기고 있는 거예요.
한 소년이 있었어요. 주일학교에 예배드리러 간다고 그러기에 아버지가 동전 두 개를 주었습니다. "하나는 헌금을 하고 하나는 올 때 사탕을 사 먹어라" 그래서 이 소년은 너무너무 신났어요. 사탕 값까지 받았으니. 그래서 두 손에 하나씩을 쥐고 달려갑니다. 그러다 너무너무 기뻐하다가 교회 앞에 와서 탁 넘어 졌어요. 넘어지면서 돈을 떨어뜨렸는데 그만 동전 하나가 하수구로 빠져 버렸어요. 교회에 갔다 와서 아버지가 "사탕 사 먹었어? 헌금했어?" 물어도 말을 안 해요. "어떻게 됐니?" 그랬더니 얘기를 하는 거예요. "내가 뛰어 가다가 동전을 하수구에 빠뜨렸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 "사탕 사 먹었죠" "왜 헌금 안하고 사탕 사 먹었어?" 그랬더니 "하수구에 빠진 돈이 하나님 돈이었거든요" 머리 좋은 아이죠?
그러나 이런 머리 좋은 어른들이 오늘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것은 실제적인 질문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 당신은 돈을 섬기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섬기십니까? 주기도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지난 주간에 제가 주기도문을 짧게 강의했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어떤 뜻인지 압니까? '하나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내 주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 인생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기를 원합니다. 제가 당신만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이런 뜻이에요. '나라이 임하옵시며' 이 말씀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나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투자를 하겠다'고 약속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물질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그 일을 위해 쓰겠습니다. 가난한 자가 내 주위에서 손을 벌리면, 내가 그를 돕겠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주기도문의 기도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그 간구가 우리의 돈지갑까지 연결되어 있음을 말씀하는 겁니다.
돈에 대한 시험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중 하나를 저는 십일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교회 안에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은 참으로 적습니다. 여러분, 왜 성경은 그렇게 끈질기게 십일조를 자꾸 드리라고 말씀할까요? 하나님이 돈이 없어서일까요? 목사가 착복하기 위함입니까? 어떤 분은 헌금하면 제가 가져가는 줄 알아요.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헌금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에요. 저도 헌금해요. 저도 제 수입의 약 25%를 하나님 앞에 드려요. 1년에 1000만원 이상 제가 드립니다. 저도 헌금하고 여러분도 헌금하는 거예요. 이것은 누구를 위해서 헌금하는 것도 아니에요. 많은 교인들과 집사님들이 생각하기를 목사님 사례비를 자기들 헌금에서 드린다고 생각해요. 여러분,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 앞에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바로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리는 거예요. 저도 하나님께 드리는 거예요. 저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받아서 쓰는 거예요. 저는 그렇게 목회 합니다.
10분의 1을 드린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어요?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겠습니다. 10분의 10을 가지고 사는 사람보다 내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므로, 하나님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제가 돈을 섬기는 게 아니요,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는 고백이에요. 그것이 십일조예요.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십일조를 잔머리 굴리면서 하는지 모릅니다. 안심하십시오. 저는 여러분의 십일조 액수를 1년에 거의 보지 않습니다. 제가 그래서 여러분의 헌금 액수를 보지 않는 거예요. 1년 총액 나누어질 때, 가끔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볼 지 몰라도 저는 일일이 보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발설하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에게 보일 필요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 앞에 태도가 열려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섬기고 계신가요?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아라. 그것은 어리석은 자가 하는 짓이야! 이 땅에 내가 너희에게 허락한 그 돈을 가지고, 건강이 허락되고 기회가 있을 때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거라. 그것이 하늘에 투자하는 거야!"
지난번 김창엽 목사님이 오셔서 부흥회 하시고 돌아가시면서 저에게 한 말씀 하셨어요. "역시 미국에는 신자들이 많아" 리버티 신학교에 한 사람이 왔어요. 그 날 얼마를 헌금하고 갔는지 아세요? 800억원을 헌금하고 갔다고 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작은 부자들이 300억원을 또 헌금했어요. 여러분, 놀라운 일이에요. 1000억이 순식간에 모금이 되었어요. 그래서 학생들을 위해 큰 교육관을 짓고 있습니다. 곧 공사가 시작될 거예요. 제가 봐도 미국에는 참 신자가 많아요. 하늘 나라 가기 전에 남김없이 좋은 일에 쓰고 갑니다. 그러나 한국은 어떻게 합니까? 자식에게 유산을 줘요. 여러분, 그것은 돈을 주는 게 아니라, 독(毒)을 주는 겁니다. 아십니까? 그의 자립성을 떨어뜨리는 거예요. 그러나 미국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내게 하나님이 맡기신 돈, 내 자식에게 왜 줍니까? 교육시켜 줬으면 됐다는 거예요. 그 이후에는 네가 하나님께 받아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도하죠, 그러니까 부지런하게 살죠.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재벌들이 3대,4대 계속 가요. 한국의 재벌은 2대,3대도 못 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보물을 땅에 쌓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늘에 쌓으십시오. 그리고 우리 모두 올바른 눈을 뜨십시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올바른 눈을 떠서 더듬거리며 사는 게 아니고, 넘어지며 사는 게 아니고, 환하게 밝은 눈을 가지고 사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돈의 얘기는 세속적인 얘기가 아니요, 참으로 영적인 얘기입니다. 이 돈에 대한 태도가 당신의 영적인 점수 표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축복의 말씀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출처/박정근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