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감사하라  (엡 5:15~21)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엡 5:20)


전국의 경찰을 위하여 선교하는 목사님들과 함께 베트남의 하노이를 방문했는데, 그곳의 호지명 묘소를 방문하게 되었지만 그의 시신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그의 시신을 미이라로 만들어 보관했는데 다시 미이라 처리를 하기 위해서 러시아로 보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는 사람의 시체를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하여 처리하는 기술이 발달되었다고 합니다. 호지명이 미국과 전쟁을 하면서도 국민에게 존경을 받은 까닭 중의 하나는 늘 국민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가 생전에 살던 집에 가 보니 단칸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의 큰 지지를 받은 것입니다.

베트남에 가 보니 그곳의 사람들은 체구가 대체로 작았는데 아마 제대로 먹지 못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사실 1950년대의 베트남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였습니다. 쌀농사를 삼모작까지 지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쌀을 원조해 주기도 했습니다. 어렸을 때 거기서 보낸 안남미(安南米)를 먹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70년 동안 공산주의가 나라를 통치하면서 가난한 나라가 되게 했습니다. 이처럼 공산주의를 한 결과 국민을 잘 살게 한 것이 아니라 국민을 못 살게 하고 가난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여 문호를 개방하고 잘사는 나라를 만들려고 힘쓰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나라는 지하자원도 풍부한 나라입니다. 그 중에서도 기름은 전 세계적으로 두 번째로 매장량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기름을 가공처리 할만한 기술개발이 부족하여 한국의 기술진이 거기서 가르쳐 주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나라의 국민들은 한국 사람만 만나면,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하고 인사를 하는데 그 얼굴이 환하게 밝은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회주의 공화국이기 때문에 교회를 개방하여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없지만 다행히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나마도 예배드리는 교회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곳이 있는데, 한 교회는 하노이에 있고 하나는 호치민에 있습니다. 그런데 호치민에 가면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한국교회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선교사들이 그 나라의 사람들에게 봉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기술을 가르쳐 주는 것이 너무나 고마워서 비록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예수를 믿는 것을 묵인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에 거기서 다시 한 번 느낀 것은 감사의 위력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사랑을 나누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감사하는 믿음의 능력이 이 사회에 골고루 퍼져서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가 임하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는 서로를 가깝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원망은 가깝던 사람도 멀리 있는 것처럼 서운한 감정을 갖게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오늘 본문인 에베소서 5장 2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러면 이처럼 감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역사를 하십니까?


첫째, 감사하는 사람에게 지혜롭게 합니다.


오늘 본문인 에베소서 5장 15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지식은 책을 읽어서 얻는 것이라면 지혜는 하나님의 주시는 총명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지혜요 악을 이길 수 있는 지혜입니다. 사람이 미련하면 악에게 물립니다. 죄의 물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지혜가 있는 사람은 거기서 빠져 나갑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속에서도 살 사람은 산다”하는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살상하는 무기까지도 피해간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 다윗은 다음과 같이 증거 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있으면 사망의 골짜기에 있더라도 해를 받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년 열 두 달, 삼백 육십오일 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갖고서 살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증거 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

복 있는 사람에게 강조하신 교훈입니다.


둘째, 세월을 잘 선용하게 됩니다.


옛날에 우리나라 노래 중에 이런 노래가 있었습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으면 못 노나니/

이렇게 젊어서 놀고먹으면 늙어서는 무엇을 먹고 삽니까? 이것이 우리 조상이 살아온 생활태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나라에 들어오셔서 일해야 됨을 강조하였습니다.

찬송가에 있는 남궁 억 선생의 작사 가운데 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습니다.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곡식 익어 거둘 때니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 날에 일하러 가려고 누가 대답할까/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강산에 일하러 가세/

사도 바울도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손 하나도 까딱하지 않고 먹고 산다는 것은 도둑이 수고도 하지 않고 남의 것을 훔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에서 “세월을 아끼라”(엡 5:14)고 명령형을 써서 말했습니다. 세월을 잘 선용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1년 365일, 하루 24시간을 똑같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시간을 잘 선용하지만 어떤 사람은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삽니다. 학생이 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40분간의 수업을 받을 때 40분 동안 열심히 선생님의 가르침을 들은 학생이 있는가 하면 그 절반인 20분만 수업을 듣는 학생이 있습니다. 이처럼 수업시간에 20분만 공부한 학생은 집에 가서 아무리 열심히 복습을 하더라도 결코 그 나머지 시간에 배운 것을 보충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아껴서 잘 사용한 사람은 믿음의 부요한 자가 되지만, 시간을 아무렇게나 낭비하면서 산 사람은 나중에 궁한 시기가 올 때 우리에게 저축된 분량의 믿음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금번 베트남을 여행하면서 어느 공연을 하는 곳을 갔습니다. 거기서 무엇보다도 관심 있게 본 것은 줄 하나로 온갖 연주를 하는 것입니다. 줄 하나로 아리랑과 노들강변을 연주하는데 참으로 기가 막힌 소리가 나왔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생각한 것은 “우리는 과연 하나님과 맺어진 믿음의 줄로 얼마나 많은 소리를 내고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맺어진 이 믿음의 줄로 감사의 소리, 은혜의 소리, 사랑의 소리를 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번 베트남에 갈 때 휴대용 컴퓨터를 갖고 갔습니다. 지난 2년 동안 감독의 사명을 감당해 온 것을 백서로 쓰고 싶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고 있는 동안에도, 버스를 타기위해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글을 썼습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에 상당한 분량의 글을 썼습니다. 어떤 사람은 “뭐 여기까지 와서 그렇게 합니까?”하고 물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세월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 머리에 남아있는 것을 글로 남겨 놓으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베트남에 가면서 책을 세 권을 갖고 갔습니다. 시간을 아껴서 책을 읽으려고 했습니다. 만약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해서 책을 읽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무식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이 되고 우리가 먹은 밥은 육신의 양식이 되고 우리가 읽은 책은 지식의 양식이 됩니다.


셋째, 감사는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사는 남편이나 아내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관하여 간단하게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1)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2)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3)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은 기도하는데 있고 기뻐하는데 있으며 감사하는데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먼저 우리의 심령이 변화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넷째, 감사하는 마음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라고 말씀한 것은 술에 취하면 방탕하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옛날에 술을 많이 먹었는데 지금도 한국의 술 판매량이 세계적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술을 잔뜩 먹고 운전하다가 사고를 내서 식물인간이 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쩌자고 술을 잔뜩 마시고 운전을 합니까? 이것은 자기만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술 취하는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을 충만하게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충만함을 어떻게 받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감사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이 불평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이 원망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모든 책임을 자기가 질지언정 절대로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81편 10절과 누가복음 6장 38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

여러분의 마음 문을 활짝 열고 마지막 세대에 하나님께서 물같이 부어주시는 성령을 충만하게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섯째,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화가 난 사람은 노래도 찬송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은 흥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본문말씀인 에베소서 5장 19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이 말씀처럼 찬송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섯째, 감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게 됩니다.


에베소서 5장 21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도 있지만 복종해야 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복종은 피차가 서로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어느 특정한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믿고 따르는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어서 서로서로 복종하여 주님을 겸손히 경외하는 태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을 두렵게 생각하며 겸손히 감격에 넘쳐 주의 뜻을 이루어 나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