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속에서 어떻게 일합니까?  (벧전 3:18-22)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고난의 시대 속에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일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해석하던 어떤 성경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사도 베드로가 자기의 글이 이렇게 많은 신학자들과 주석자들에게 번민을 야기시킬 줄로 생각했다면 이 글을 아예 쓰지 않았을 텐데.” 그만큼 오늘 생각하게 되는 말씀에는 아주 해석하기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은 고난의 시대 속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할 일을 말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베드로전서 2장에서 이미 본 대로 고난의 모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맞이할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모본이 되셨을 뿐 아니라 고난 속에서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 하는 데 대해서도 모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고난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오늘 18-19절 이하의 말씀에서 예수님의 하신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

우리가 보통 어떤 사람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그들의 활동과 그들이 쌓은 공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접해 보면 다른 사람들의 자서전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한 가지 특색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많은 부분이 주님의 죽으심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복음서의 절반 이상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둘러싸고 있는 한 주간의 사역을 초점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는 주님이 그의 생애 속에서 하신 일을 부각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모든 행적이 십자가를 향하여 흘러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전 생애의 사역의 초점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죽음을 떠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예수님께서 친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세상에 왔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주님은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생애의 초점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의 많은 부분들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기사에 할애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한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이라든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 놀라운 기적들을 중요한 사건으로 부각시킬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부터 해방시키는 구속의 사건을 완성하셨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8절을 보세요.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보세요.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분명히 목적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자연사도, 사고사도 아닙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분명한 목적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 놓으신 것은 대속의 제물로서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의인’이라는 말은 단수로 되어 있고 ‘불의한 자’라는 말은 복수로, 그러니까 ‘불의한 자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의인은 단 한 분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오로지 의인이십니다. 그리고 그밖의 모든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10, 23)라고 말했습니다. 의인은 예수님밖에 없으십니다.


사도행전의 기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둘러싸고 그리스도를 변호하면서 외치는 음성을 들어보세요. 사도행전 3장 14-15절입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하고 의로운 자”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야말로 이렇게 말하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거룩하고 참으로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많은 불의한 자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불의한 자들을 그 불의로부터 해방하셔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의 고난과 죽음은 이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불의한 자를 대신하신 이유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다고 사도 베드로는 말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인도’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본래 헬라 시대의 왕의 비서의 역할을 강조하던 단어입니다. 옛날 헬라 시대의 왕들은 비서를 데리고 있었는데 그 비서 가운데도 수석 비서가 왕을 알현하러 오는 사람들을 왕 앞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왕을 만나 뵙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을 안내해 주는 역할을 비서가 했습니다. 그 비서의 역할이 바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를 만왕의 왕이신 그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 앞으로 전혀 인도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망의 어둠 속을 헤맬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음부에서의 하신 일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9절을 보세요.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이 말씀은 성경의 난해 구절에 속합니다. 이 말씀에서 사람이 죽은 후에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죽은 후에 사람들이 다시 복음 전파를 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의 어떤 한 구절이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성경 전체의 계시와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죽음 다음에 다시 구원받을 수 있는 제 2의 기회가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다른 명백한 구절을 성경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도 전혀 명백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리한 상상을 버려야 합니다.


누가복음 16장 26절 말씀을 보세요. 거지 나사로와 부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도 죽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 속에 있었고 부자는 뜨거운 불 속에서 괴로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위치가 정해진 다음에는 절대로 그 위치가 변경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 이후에 제 2의 기회가 있을 수 있다는 가설을 이 말씀이 분명하고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주신 말씀에서 “옥에 있는 영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무리한 해석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주신 말씀 20절에서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렇게 혹은 저렇게 말하고 있지만 19절에서의 “영들”이란 2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들”입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다시 말하면 “그들”은 노아가 방주를 짓고 있는 동안에, 그리고 노아가 복음을 전하고 있는 동안에 이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고 죽었던 사람들, 그들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는 영으로 다시 말하면 성령을 통하여 이 옥에 있는 영들에게, 불순종하고 죽은 그들에게 전파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전파”라고 하는 말이 문제입니다. 이 “전파”를 우리는 흔히 생각하는 ‘복음 전파’로 이해하기 쉬운데 그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복음 전파’를 의미하는 단어 ‘유앙겔리조’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전파’라는 말은 ‘선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전파는 전도를 해서 그들이 다시 구원받게 되었다는 뜻을 지닌 단어가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히 선포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끈질지게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면서 노아를 통해 120년 동안이나 복음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죽었던 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약속대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을 따라 죽으셨고 이제 승리자가 되셨음을 선포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선포인 것입니다. 그 이상의 의미를 시사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구원을 받고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이 전혀 아닙니다. 19절 말씀은 단순히 주님께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위대한 승리를 지옥을 향해서 선포하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신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다가 음부의 영혼들에게 승리를 선포하셨을 뿐 아니라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8절 말씀을 보세요.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 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영으로는”이라는 말이 이견이 많은 단어중 하나입니다. 많은 경건한 학자들은 이 구절을 그대로 ‘성령에 의해서’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성령에 의해서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하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해석은 성경의 다른 부분과도 맞는 것입니다. 가령 로마서 8장 11절을 보세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란 성령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셨다고 하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죽으셨을 뿐 아니라 자신의 위대한 승리를 선포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죽으셔서 승리를 선포하시고 그 승리를 입증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제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 부활이 예수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산 소망이 되었다는 이것이 바로 베드로전서의 주제입니다. 우리가 1장 3절에서 이미 생각했습니다만,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듭났으며 산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가 보여주는 이 중대한 주제인 ‘고난 속에서의 소망’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의 소망과 내세를 향한 놀라운 소망을 우리에게 안겨 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심으로 승리를 선포하셨고 그 승리를 입증하시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통해 하신 일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이 승리를 완전케 하시기 위해서 승천하셨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2절을 말씀을 보세요.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보좌를 향해서 다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주를 통치하시는 영광스러운 자리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천사들과 권세자들과 능력들, 모든 영들의 경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또 영혼을 구원받지 못하도록 대적하던 모든 무리들, 악한 영들까지도 그리스도 앞에 순복할 수밖에 없는 영광스러운 승리의 자리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하셔서 영화롭게 다시 높임을 받게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위치에 서게 되신 것은 고난을 받아들이시고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난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과 함께 소개되고 있는 것이 노아의 사역입니다. 왜 갑자기 여기 노아가 등장할까요? 그 당시 노아는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 이전의 족장들 중에 가장 존경스러운 족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던 고난이 마치 노아 시대의 고난과 비슷하게 인식이 되어서였습니다.

노아 시대에 도덕적인 부패가 만연했던 것처럼 1세기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는 그때도 그랬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숱한 고난을 받았는데 그 고난이 노아 시대의 고난을 연상시켜 준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말씀을 기록하다가 노아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종말론적 부패와 배도 현상을 말할 때는 언제나 노아 시대를 떠올릴 정도로 노아는 어려운 시대에 살았습니다. 노아야말로 그 시대의 마지막에 살고 있었습니다. 노아는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의 인물이었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시대에 살면서 노아는 주님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고난 속에 살고 있는 성도들이 이 어려운 시대에 살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노아처럼 주님의 의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노아는 복음을 전파해서 겨우 여덟 명을 구원시켰습니다. 이것은 노아의 전도가 형편없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시대에 복음을 전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다는 말입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강퍅했으면 이렇게 복음 앞에 응답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한문자는 상형문자 아닙니까? 배선(船)자를 보세요. 배 ‘주(舟)’와 여덟 ‘팔(八)’ 그리고 입 ‘구(口)’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글자를 만들 때 중동 지방에서 큰 홍수가 났을 때 방주를 만들어 여덟 명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여기서 노아의 사역을 소개하면서 그가 어려운 때에 살면서 복음을 전하여 여덟 명의 영혼을 구원했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고난의 시대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사역은 장차 성취된 구원 사역의 예표가 된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21절을 보세요.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홍수 속에서 구원을 받은 사실에 관한 영광스러운 예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주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같은 의미로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구원의 방법을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 말씀에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했습니다. 방주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돈을 내야 했습니까? 착한 일을 해야 했습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방주를 준비하시고 이 방주를 통해서 구원을 허락해 주시는 것을 믿으며 감사함으로 방주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나 스스로 방주에 들어가야 합니다. 자기 발로 들어가야 합니다. 노아의 방주는 이 놀라운 구원 사건에 대한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예표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의 의미입니다. 세례의 정신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에 연합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다는 사실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3절 이하를 보세요. 여기에서 세례의 의의를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를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노아 시대에 물 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방주 속에 있던 노아와 그 가족은 살았습니다. 그는 마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것 같은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했습니다.

이 말은 의식(儀式) 자체가 죄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행하는 성례전은 우리 안에 이루어진 영광스러운 사실을 선포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의 선한 양심을 하나님 앞에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대에 살았던 노아. 그는 이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들을 구원했습니다. 그의 구원은 우리의 위대한 구원의 예표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몇 가지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고난에 대비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대선배 노아도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고난에 대비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그러므로 우리도 일생을 살아가면서 이 고난에서 결코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결과를 의식하지 말고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노아는 자기까지 포함해서 겨우 여덟 명을 구원했지만 그의 사역이 절대로 실패가 아닙니다. 노아는 하나나님께서 그에게 부탁하신 사역 앞에 성실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으셔서 장사지낸 바 되셨을 때 제자들은 주님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결과를 의식하지 말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겠습니다.


셋째로, 세상에서 성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 노아는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유일한 의인이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노아와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을 구원하는 거룩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고난이 가득 찬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에서 구별된 하나님의 의인들만이 이 세상을 향해서 그리스도의 위대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되어 이 시대를 향해서 복음을 선포하는 거룩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넷째로, 최후의 승리를 믿어야 합니다.

노아는 승리자입니다. 노아는 불순종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조롱과 비웃음의 대상이었습니까? 그러나 그는 마침내 승리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지만 마침내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영혼들이, 그리고 모든 권세들이 다 주님 앞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최후의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삶의 고난에 찬 상황과 역사가 아무리 깊고 어두움을 던진다고 할지라도 고난을 대비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삼아 무장해야 합니다. 각자가 당하는 고난의 색깔은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너무 두려워하거나 너무 의식하지 말고 대비해야 합니다.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이 복음을 붙들고 이 악한 세대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거룩한 특권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구별되어 이 세상을 행해서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최후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을 믿습니다.

출처/박조준목사 설교 중에서